[오이스가] good-afternoon
2017. 5. 30. 23:28


"스가와라! 가게 잘 보고 있어! 늘어지지 말고!"
"네엡!"



늘어지지 말라고 해도 사람은 늘어진다. 할 일이 없으면. 특히 오후 3시라는 시간은 더더욱. 외출하는 어머니의 경고 서린 말에 대충 대답하며 스가와라는 익숙하게 카운터 너머 의자에 전용 방석을 깔았다. 할머니가 처음 가게를 열었을 때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낡고 낡은 걸 꿰매고 꿰매가며 어머니 그리고 자신까지 이어 쓰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보내주어도 호상일 정도지만, 뭐랄까. 그냥 귀찮아서라는 이유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특별한 일 하나 없는 흐름에 덩달아 익숙해져서, 그런 흐름의 모양과 비슷해서, 어쨌거나 그런 복합적인 이유와 기분으로 버리지 못하고 계속 쓰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런 물건은 쓰고 또 쓴 이 방석뿐만 아니라 이 가게에는 무척이나 많았다. 아니 가게 그 자체였다.



"요즘 시대에 문방구라니."



동네의 작은 문방구. 팔리는 것은 그저 학교 준비물 정도. 옆집에 사는 3학년 료지에게 받아내는 정보로 그날그날 준비되는 준비물이 주요 매출. 그 외에는 아이스크림이 있지만, 여름이 끝나면 그것도 썩 빛을 보지 못했다. 거기다 조금 더 가면 나오는 커다란 대형 마트 쪽이 아이스크림 종류도 더 많고. 재작년까지는 슬러시도 팔았지만, 끈적이는 걸 닦고 정리하는 게 귀찮아 멋대로 창고에 넣은 후에 휴업 중. 그 외에는 가게 앞에 놓인 2대의 낡은 게임기 정도일까. 한 마디로 장사 안되는 동네의 작은 문방구. 딱 낡아 빠진 방석과 같은 꼴이었다. 하지만 이래 보여도 스가와라에겐 중요한 일터이자 가업이었다.


서른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번번한 직장도 없고 수트도 서류가방도 구두 하나도 없는 자신이 갈 곳은 슬프게도 이 문방구밖에 없었다. 쓰디쓴 취업 준비 생활을 거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는 스스로가 패배견이 된 기분이라 우울하고 힘들었는데, 막상 와서 이 일을 하고 있으니 편했다. 한가롭고 늘어져서 그런 걸까. 아니면 주요 고객이 어린 아이들이라 그런 걸까. 현실에 담가져 맛보던 우중충함과 우울함은 이곳에선 팔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심도 지워버리고 지금, 늘어지게 빈 가게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키는 중이었다. 가끔 시간이 너무 많아 불쑥 불안함이 눈치 없이 방문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 기회에, 라는 글자들만 받아보던 하루들과 비교해보면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활인지라 불안감도 금세 꼬리를 빼고 도망쳤다.



"뭐라도 배우는 게 나으려나."



그래도 이런 한가함이 계속되면 또 찾아온단 말이지. 역시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취미라던가, 기술. 컴퓨터라던가. 어쨌든 뭐라도. 이 평화로움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니 스스로 대비는 해야 할 거 같은데



"귀찮네."



당장 내일 일어날 일은 아니니 또 이렇게 미루고 만다. 반복의 반복. 이게 엄청 문제라니까? 스스로 단점을 파악하면서도 고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스가와라는 쭈욱 팔을 위로 뻗었다. 곧 4시, 고학년 친구들의 하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해야지, 일."



부쩍 더워지면서 초여름 날씨에 가까워졌다. 딱지나 찐득이보다 아이스크림이 더 많이 팔리는 시즌이 시작되었단 소리였다. 엉덩이를 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스가와라는 기꺼이 아이들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대충 꿰어 입은 티셔츠의 소매를 대충 어깨까지 밀어 올린 후, 문방구 뒷편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열어 재끼자 집으로 올라가는 2층 계단 아래에 낡은 냉장고 하나가 위잉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할머니 때부터 써온 문방구 전용 냉장고였다. 문이 진즉 고장 나 덜컥거리고 있지만, 수리도 불가능한 수준이라 테이프로 대충 붙여 사용하는 아주 낡은 냉장고.



"방석 같은 게 또 있네."



별일도 아닌데 웃으며 스가와라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아 고정한 뒤, 서둘러 쌓아둔 아이스크림 박스 하나를 꺼냈다. 절로 터져 나오는 읏차, 소리를 뱉어내며 한 손으론 박스를 고정 한 손으로는 냉장고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처음엔 이것도 제대로 못 해서 어머니께 등짝을 맞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프로와 같았다.



"좀 멋있었어. 나."



칭찬해 줄 이가 없었기에 스스로 뿌듯하게 칭찬하며 서둘러 박스를 깠다. 과즙과 얼음 알갱이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이 꽝꽝 얼려진 채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간의 디자인은 다르지만 자신이 어렸을 때도 있었던 제품으로 어찌 보면 촌스러웠고 어찌 보면 클래식했다. 뭐, 이런 낡은 문방구에는 딱 이네. 그리 생각하며 스가와라는 주저 없이 가게 앞, 아이스크림 냉장고로 다가가 탈탈 털어 넣었다. 분명 이 꼴을 어머니가 봤으면 "다른 종류도 보이게 정리해서 넣어야지! 이놈아!"라고 잔소리할 게 뻔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스크림의 유통기한은 기니까.



"아, 잠깐. 길던가..? 언제까지지?"



이미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버린 냉장고를 내려보며 스가와라는 머리를 굴렸다. 냉장고에 넣었으니, 얼어 있으니 괜찮겠지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아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마구 싸웠다. 혹시 애들이 먹고 배가 아파서 항의가 들어오면 큰일인데. 아프면 다행이지 죽기라도 하면 어쩌지? 동네 장사라 나쁜 소문나면 장사 못 하는데? 죄다 빼야 하나? 하지만 60개나 털어 넣었는데.



"몰라, 먹고 죽기야 하겠어?"



살다 살다 아이스크림 먹고 죽었다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어딘가 존재할지도 몰랐지만, 자신이 알기로는 없었다. 잠깐 들이찬 불안함을 훌훌 털어버리며 스가와라는 방금 넣은 아이스크림 하나를 빼 들었다. 그리곤 막힘 없이 껍질을 까 입에 물었다. 어머니가 보면 "판매하는 걸 왜 먹어, 이놈아!"라 또 잔소리할 게 뻔했지만, 이번에도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70엔짜리. 주머니를 뒤지면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자금이었다.
아이스크림은 달았다. 매번 하나씩 심심할 때마다 몰래 몰래 하나씩 빼먹고 있는데도 질리는 법이 없었다. 더워서 그런 걸까. 아님 하나씩 물고 하교하는 아이들에게 옮아서 그런 걸까. 묘하게 맴도는 싸구려 맛이 좋았다. 딸기 시럽을 왕창 섞은 얼음 맛. 색소를 타서 먹고 나면 혀와 입술이 벌겋게 변하는 단점이 있지만, 그 단점도 눈감아 줄 수 있는 그런 맛. 기대있는 냉장고에 이미 같은 아이스크림이 가득하였기에 스가와라는 아낌없이 아삭아삭 입안으로 물어 털어 넣었다. 그렇게 얼마나 털어 넣었을까. 오후를 넘어가기 위해 꼭대기에 선 태양의 빛이 끊어졌다. 제대로 가려진 그늘에 스가와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볼펜 있나요?



눈앞에 남자가 있었다. 작은 초등학교, 그리고 문 닫는 가게가 점점 늘어가는 상점가,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 아주머니와 강아지를 산책하는 노부부들이 많은 거리. 이런 거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네?"
"볼펜 사러 왔는데요. 볼펜."



남자는 살짝 웃으며 또박또박 아이에게 말을 알려주는 선생처럼 굴었다. 화이트 셔츠, 블랙 에이프런, 가지런하게 접은 소매, 은은하게 나는 어디의 향수 향. 이런 거리보단 뭐랄까 다이칸야마나 아오야마에 돌아다닐 거 같은 느낌의 남자. 사실 그런 곳과 거리가 멀어 그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스가와라는 전혀 몰랐으나 잡지에서 대충 이런 멋진 남자를 그런 곳에 던져 넣으니 그런가 싶어 떠올려 봤다.



"저기?"
"볼펜. 있어요."



한 번 더 말하면 세 번째. 잘생긴 남자는 세상 사는 데 불편함이 없겠지만, 별거 아닌 말을 세 번이나 하는 것은 불편할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서둘러 남자를 불편함에서 해방해준 후, 냉장고에서 몸을 떼어냈다. 그리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근데 우리 애들 대상으로 장사하는 곳이라.. 막 만년필 같은 건 없는데요?"
"만년필까진 필요 없는데요. 그냥 볼펜 몇 자루만 있으면 될 거 같아요. 메모할 때 쓸 거라."
"아, 이런 거 괜찮아요?"



장난감 물총, 딱지, 구슬, 요요 등이 있는 선반 뒤로 손을 뻗어 볼펜을 집었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인 요괴 캐릭터가 달린 볼펜으로 신상이라 가게에도 몇 개 없는 인기 상품이었다.



"누르면 눈도 돌아가요. 이렇게."



꼭 필요한 기능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세일즈 포인트중 하나였기에 스가와라는 직접 볼펜 꼭지를 눌러가며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요괴 캐릭터를 내세웠다. 하지만 썩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남자는 어설프게 웃으며 "그냥 심플한 게 좋을 거 같은데."라 중얼댔다.



"그럼 이건요?"



이번엔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볼펜이었다. 심이 들어간 통 부분을 사용해 비눗방울처럼 만든 제품으로



"이렇게 꼭지를 빼면 비눗방울처럼 쓸 수 있어요. 봐요, 후-"



이렇게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역시 잘생긴 남자는 세상 사는 게 편할 거 같았다. 같은 남자인 자신조차도 남자를 위해 모처럼 이런 친절을 베풀고 있으니까. 후, 하고 입술을 모아 숨을 뱉자 볼펜 꼭지에 달린 링을 작은 링을 통해 자잘 자잘한 비눗방울이 터져 나왔다. 먼지만 폴폴 날릴 거 같은 낡은 문방구 안으로 반짝이는 비눗방울이 들어찼다.



"핑크색이라서 싫으면 하늘색도 있어요."
"....그러니까 심플한 거..."



어설픈 웃음은 곤란함을 뜻하는 미소였나보다. 이 정도면 심플하다고 생각했는데. 스가와라는 하는 수 없이 비눗방울 볼펜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아이들 장사다 보니까 이런 거밖에 없어요. 급하신 거면 제 거라도 드릴까요?"



이번엔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었다. 할머니가 사용하다 심이 달아 나오지 않는 깃털 모양의 펜과 상점가에서 받아온 볼펜들 틈을 뒤적여 그럭저럭 심플해 보이는 것을 찾아 내밀었다.



"아뇨, 계속 쓸 거라 그냥 새로 살게요."
"괜찮아요. 저 2개 더 있어요."



편의점에서 3개 세트로 샀던 것으로 지금은 없지만, 아마 방을 뒤지면 나머지 2개가 어딘가에서 튀어나올 터였다.



"아, 그럼 받아도 될까요?"



그제야 남자가 어설픔도 곤란함도 지우곤 활짝 웃었다. 어머니가 봤으면 환호라도 질렀겠네. 스가와라는 아직 사라지지 않는 작은 비눗방울 틈에서 웃고 있는 남자를 보며 솔직한 감상을 뱉었다. 받아든 볼펜을 셔츠 주머니에 그저 넣을 뿐인데도 그림 같았다. 졸지에 싸구려인 제 볼펜마저 명품처럼 보였다. 아니, 뭐. 편의점에서 샀으니 100엔샵에서 산 것보다야 덜 싸구려겠지만, 어쨌든.



"감사해요. 잘 쓸게요."
"네."
"보답으로 나중에 가게 오세요. 제가 커피 한 잔 대접할게요."
"가게요?"
"네."



남자가 끄덕이며 가게 밖으로 몸을 뺐다. 그 움직임을 따라 함께 몸을 빼니 그가 기다란 팔을 뻗어 상점가의 입구 쪽을 가리켰다. 뺨을 스치고 간 그의 팔에서 약간의 쓰고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다.



"저기 오픈했거든요, 카페."
"아... 공사하던 곳."
"소란스러웠죠?"
"아뇨."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뺨을 스치고 팔이 거두어졌다. 남자가 예의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 움직임에 그의 갈색 머리가 흔들렸다. 그의 잘생김에 신도 기쁜지 태양의 빛에 머리카락까지 반짝였다.



"그럼 가볼게요. 꼭 놀러 오세요."



남자가 고개를 들고 인사했다. 스가와라는 멍하니 그러겠다는 말 하나 던지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멋진 그리고 그림 같은 등이 빛을 받고 작아지고 작아지고 나서야 뻗어 있던 몸을 다시 가게 안으로 구겨 넣었다.



"이제 4시네."



장사해야지, 장사. 어쩐지 잠깐의 꿈을 꾼 기분,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시계를 확인하고 정신을 붙잡아 놓으며 스가와라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가게 구석, 할머니가 달아놓은 낡은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입술이 벌겋게 오른 건 아이스크림때문일텐데 얼굴이 벌겋게 오른 건 도대체 왜일까. 멍청해 보이는 제 얼굴을 한참을 들여보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돌렸다. 4시를 알리는 뻐꾸기가 가게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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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안나왔지만, 카페 주인은 오이카와이믑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