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그림자 너머
2017. 3. 29. 22:34




"소금!!!"



소금, 소금! 정확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 스가와라는 병에 담고 있던 소금을 그대로 휘두르고 싶은 걸 참아내며 뒤를 돌았다. 벌컥 예의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를 보며 불편함을 가득 담아 인상을 찌푸렸지만, 전해지지 않은 모양인지 불청객은 쾅쾅 시끄럽게 문까지 두드렸다.



"쿠니미 아키라 부 수행원이 찾아."
"소금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나도 이불이라고 불리잖아, 뭐가 문제야. 여기선 다 그래. 그럼 이름을 알려주던가."



이불의 말에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빈 소리만 입 안을 맴돌았다. 이름, 당연히 가지고 있었지만 함부로 입에 담지 않도록 주의받고 있는 데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자신들에겐 이름은 필요 없었다. 성에서 일하는 사용인 대부분은 모두 서로 담당하고 있는 일로 이름을 대신했다. 그 편이 업무상으로 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불을 옮기는 그는 '이불' 그리고 왕가를 위한 입욕제를 만드는 자신은 '소금'. 심지어 각자 담당하는 일이 겹쳐도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서글픈 일이었다.



"그래도 소금보단 좀 더 다른 이름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나마 입욕제를 담당하는 이는 저밖에 없어 소금은 이 성에서 자신뿐이었지만, 그래도 불만은 불만. 스가와라는 제 뒤에 놓인 선반을 가리켰다. 라벤더, 장미꽃잎, 녹차, 레몬, 단호박 등등. 입욕제로 사용되는 소금에 섞기 위해 준비한 가루들이 놓인 선반이었다. 레몬이라든지 라벤더라든지 그런 이름인 편이 소금보다 좋은데. 그런 기분을 가득 담아 항의했지만, 이불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지



"사내놈이 라벤더 같은 이름 들어봤자 뭐가 좋다고. 소금도 나쁘지 않아."



라고 할 뿐이었다.



"이불은 감정이 메말랐어요."
"그래, 알았어. 우선 가보도록 해. 부 수행원이 기다리고 있다니까?"



아 맞다. 그가 전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허리에 둘렀던 앞치마를 풀어 던졌다. 그리곤 말을 전해준 이불에게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서둘러 제조실을 나섰다. 쾅쾅 오래되어 여기저기 나간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사용인들의 숙소 바로 앞, 입구에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누가 볼까 빠른 움직임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와이즈미님이 찾고 있습니다."
"아..."



왕자의 제1 수행원이자 보좌관이기도 한 이름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야단맞을 일 하셨습니까?"



쿠니미의 말에 뜨끔했지만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스가와라는 떳떳했다. 절대로 야단맞을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으나



"...혼날 거 같아요."



아마 혼나겠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애써 약한 척을 해보았지만, 제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지 한숨과 함께 "이번엔 무슨 짓을 했습니까?"라는 꾸짖음이 날아왔다.



"별로.. 아무것도. 그냥 어젯밤에 입욕제 채워 놓으면서.. 그냥 욕조에 제가 모아놓은 꽃을 몇 개 띄어 놨을 뿐인데..."
"...몇 개?"
"...보다 조금 많이?"



어제는 장미가 들어오는 날이었다. 입욕제에 섞어 줄 장미 꽃잎 분말을 만들기 위한 장미들이 들어오는 날. 하나하나 잎을 떼어내다 색도 예쁘고 향도 짙길래 아까운 마음에 조금 챙겨 왕자의 욕탕에 풀어 놓았다. 물론 그런 일은 욕탕 관리를 담당하는 다른 사용인의 일이었지만, 장미잎은 안정 효과가 있으니 왕자에게 나쁘지 않을 거로 생각해 벌인 일이었다.



"왕자님 눈에 뜨일만한.. 아니, 성의 그 누군가에게도 눈에 뜨일만한 행동은 하지 말라고 늘 이와이즈미님께서 주의 주셨던 거 같은데."
"네.. 맞아요."
"저번에는 멋대로 왕자님의 화병에서 꽃을 바꾸셨고, 또 저번에는 이불 시트 위에 멋대로 향초를 두고 가지 않았나요?"
"..."
"물론 문제없이 넘어갔지만, 자꾸 이런 행동을 하시면 곤란해지는 건 스가와라님 아니신가요."
"어차피 그 누구도 날 모르니까 괜찮아요."



화난 목소리가 아닌데도 제 잘못을 아는지라 목소리가 절로 죽어갔다. 자신의 반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쿠니미 아키라가 얼굴을 굳혔다. 호되게 혼날 걸 예상하며 스가와라는 슬쩍 불쌍한 척을 했다. 왕실에 속해 왕자를 보필하는 사람 중 하나인 그가 이런 행동으로 쉽게 눈감아 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 해보았다.



"잔소리는 이와이즈미님에게 들을 테니까... 1차만 하죠."



다행히 그는 더 지적하는 대신 걸음을 옮겼다. 먼저 시용인들의 숙소를 빠져나가는 그를 지켜본 후, 스가와라는 빠르게 몸을 숨기곤 그의 뒤를 따랐다. 성안은 나무도 많고 벽도 많고 기둥도 많아 몸을 숨기고 뛰어오르기에 편리했다. 가볍게 우거진 나무 아래를 이용해 움직이며 스가와라는 늘 가지고 다니는 천을 입가에 둘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누가 볼세라 슬쩍 웃었다. 방금 혼난 주제에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먼발치에서나마 오랜만에 왕자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콩콩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쿠니미의 안내로 도착한 보좌관실에 도착해서는 서둘러 심장을 가라앉혔다. 천자락 아래에 감춰둔 웃음도 지워냈다. 조심성 없었던 자신의 행동은 혼나도 어쩔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제 마음까지는 혼나고 싶지 않았다.



"왔습니까?"



소리 없이 보좌관실에 깔린 카펫에 발을 딛기 무섭게 제 2 왕자의 보좌관인 이와이즈미 하지메가 반겼다. 업무 중인지 들여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 하나 떼지 않고 묻는 그의 인사에 스가와라는 익숙하게 빈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왕실의 상징인 푸른잎 색의 소파였다.



"식사는 했습니까?"
"아, 아뇨. 아직. 내일 저녁에 올릴 입욕 소금을 만드는 게 더뎌..."
"식사는 챙겨야죠. 전에도 말했듯이 입에 맞지 않으면 말씀해 주세요."
"괜찮아요. 지금도!"



허튼 행동을 한 사람으로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의 괜한 친절과 관심으로 사용인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양이었다. 소문이 빠르고 귀와 입이 열려있는 그들 사이에서 제2 왕자 보좌관의 편애를 받고 있다고 알려지면 곤란했다. 물론 절대 편애 같은 건 아니지만.



"키타지역은 어땠습니까?"
"조용했어요."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대륙 아오바조사이의 북쪽, 국경에 위치한 키타시(市). 얼마 전, 이와이즈미의 요청으로 약 일주일간 갔다 온 곳이었다. 숲으로 이루어진 경계 너머 네코마가 위치하고 있어 언제나 시선이 닿아있어야 할 곳이긴 했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목적으로 방문했었다.



"조용했다고요? 츠키모토가에서 움직인다는 소문은 확실합니다. 그냥 침묵은 아니었을 겁니다."



츠키모토, 여왕의 본가가 위치한 곳이며 그녀의 아버지인 츠키모토 료타로가 관리직인 시장으로 지내고 있는 곳. 왕의 병세가 깊다는 소문은 이미 성안을 돌고 대륙을 돌고 있었다. 왕이 이대로 눈을 감으면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현재 왕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운 이는 제1 왕자인 오이카와 류우지. 그 류우지 왕자가 온전히 왕관을 쓰기 위해 여왕 측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거라는 게 이와이즈미의 의견, 그리고 스가와라는 그 의견을 받아 그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일주일가량 소금에 섞을 귀한 차 가루를 가지러 간다는 핑계를 대면서 머물렀지만, 무엇하나 잡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여왕의 본가인 츠키모토 저택까지 들어가 서재까지 뒤졌는데도 이렇다 할 건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여왕이며 류우지 왕자의 뒤도 틈틈이 밟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마 조심하는 게 아닐까요...? 성내에선 류우지 왕자가 아닌 왕자님을 당연하게 계승권자로 대우하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여왕이 멍청하지 않은 이상, 제 아버지도 눈에 띄는 사람인데 쉽게 접선하고 움직일 거 같진 않아요."
"그녀가 멍청하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는 자신과 달리 보좌관이면서 조금의 조심성도 없이 이와이즈미가 툭 말을 던졌다. 스가와라 역시 동의하는 바라 말리거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여왕은 멍청했다. 멍청한 대다 시끄럽고 화려하고 욕심도 많았다. 돌아간 자신의 여왕과는 다르게. 



"어쨌거나 계속 주시해주세요. 폐하가 눈을 감는 순간이 전쟁이 될 테니까요."
"....많이 위독하신가요?"
"네."



예의상 아니라고 말할 법도 한데 참 솔직한 사내였다.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웃으며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그가 시킨 일은 이게 전부이니 아마 용건도 끝이겠지 싶어서 서둘렀으나 다 끝난 게 아니었는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왕자님 욕탕에 장미꽃 풀어놓은 거, 스가와라님이 하셨습니까?"



잔소리가 날아왔다. 변명이 통하지 않을 게 뻔했기에 스가와라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스가와라님이 하셔야 할 행동은 왕자님을 지키는 일입니다. 선대 여왕님과 약속하신 것, 잊으셨습니까?"



알아요, 안다니까. 자신을 그리고 왕자를 위해 던지는 잔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매번 막혀버리는 제 마음이 가여워서 슬펐다. 하지만 별수 있나. 왕자님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잊지 않았어요."



선대 여왕에게. 스가와라는 숨길 수 없는 침울함을 말에 담아내며 그녀를 떠올렸다.


태양의 여왕,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그렇게 칭했다. 자애로우며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여왕. 스가와라는 거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하루하루 여기저기서 훔치고 딴 꽃을 팔던 시절, 할 줄 아는 거라곤 "사 주세요."라는 말밖에 모르던 어린 시절, 우연히 그녀와 만났다. 조촐하게 수행 기사들만 데리고 외출한 그녀는 꼬질꼬질한 꼴로 "사 주세요."라 뻐꾸기처럼 떠드는 자신에게 밝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품었던 꽃을 모두 사주었다.



"이름이 뭐니?"



금화를 몇 개나 쥐여주며 그녀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질문에 눈만 깜박였다. 사람들이 저를 부르는 이름은 많았다. 도둑놈, 꽃 도둑놈, 꽃 팔이 등등. 하지만 그런 우스운 이름을 그녀에게 알려줄 수 없어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어쩐지 코도 아팠다.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그녀는 친절하게도 "괜찮으면 내가 이름을 선물해도 괜찮을까?"라 물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이름은 그녀가 자신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는 자신에게 더 많은 선물을 주었다. 이야기 상대가 되어 달라며 자신을 성안으로 이끌었다. 씻겨주고 먹여주고 좋은 것들을 주었다. 매일매일 그녀 곁에서 이야기를 떠들었다. 거리에서 보았던 것, 일어났던 것, 들었던 것 등등. 아이가 떠드는 이야기는 거기서 거기일 게 뻔한데도 여왕은 지루해하지 않고 언제나 웃으며 들어주었다. 그 마음이 너무 좋아 스가와라는 매일 같이 그녀의 화병에 온갖 꽃을 꽂아주었다. 거리에서 살았던 경험 아닌 경험이 있어서인지 왕실의 정원사를 따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잔뜩 꽃을 꽂아두면 그녀는 고맙다 인사하면서도 다시는 남의 것을 훔치면 안 된다 알려주었다. 그래도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언제나 꽃을 꺾었다.



"스가와라, 부탁이 하나 있어."



그러던 어느 날, 여왕이 말했다.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었던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부탁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지금 내 아이가 왕위 계승권에 올라와 있지만, 아마 몇 년 사이에 크게 뒤바뀔 거야. 나는 힘 없는 상인의 딸로 태어나 내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 아이를 지켜줄 수조차 없을 거 같아. 그러니, 스가와라. 너에게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부탁이야. 내 아이를 지켜줄 수 있니?"



아이, 스가와라는 어렵지 않게 왕자를 떠올렸다. 그녀를 닮아 똑똑하고 아름다운 왕자. 혹여 왕자에게 독이 될까 멀리 지내던 그녀를 따라 스가와라 역시 왕자에게 다가간 적은 없었으나 언제나 지켜보고 있었다. 정원에서 꽃을 따가지고 오다가 혹은 그녀의 방 창 너머에서.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왕자님. 여왕은 물론이고 그런 그녀의 왕자를 위해서라면 스가와라는 얼마든지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울먹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으며 고민도 없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라고.


여왕은 자신의 측근이라며 믿을 수 있는 이를 소개해주겠다 했다. 왕이 가장 아끼는 충신이라는 자였다. 그의 아들이 커서 왕자를 보필할 거라 알려주었다. 스가와라는 단출한 가방을 챙겨 그 집으로 향했다. 그 집에서 온갖 학문을 익히고 무술을 배웠다. 그리고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만났다.


여왕의 곁을 떠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스가와라는 언제나 열심히 성으로 편지를 썼다. 쓰는 김에 왕자의 안부도 물었다. 몇 줄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주제넘고 부끄러워 쭉쭉 긋기도 했다. 매해 여왕 그리고 왕자의 탄생일이 찾아오면 저택 창으로 반짝이는 성을 바라보며 돌아갈 날을 꿈꾸었다. 돌아갈 날을 떠올리는 거로 스가와라는 외로움도 이겨내고 혹독한 훈련도 이겨냈다.


그리고 18살이 되던 해, 여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몸 안에서 오랫동안 쌓인 독 성분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왕은 크게 노했다. 그녀를 관리하던 사용인들의 목이 모두 잘려나갔다. 스가와라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와 함께 지내던 시절, 어떤 꽃이 어떤 잎이 독을 품고 있는지 어떤 향을 내는지 알려주고 또 알려주었다. 자신이 함께 있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만 같아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에게 냉정해지라 충고했다. 여왕의 모든 것이 헛되지 않도록 처신하라 일렀다.


자신에게 모든 걸 준 이는 떠났지만, 세상은 멀쩡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하나둘 바뀌기 시작했다. 빈자리를 다른 이가 채웠다. 새 여왕의 아이가 자신의 왕자를 밀어내고 왕위 계승권에 올랐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바로 성으로 들어갔고, 스가와라는 조금이라도 빨리 홀로 남아있을 왕자의 곁에 가고 싶어 초조했다. 언제든 저택을 떠날 수 있도록 가방도 챙겨 침대 아래에 두었다. 왕자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도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의 곁으로 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려 스무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성에 들어섰다. 그를 지키기 위해 낮에는 소금을 만들고 저녁에는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흘렸다. 눈을 감는 시간조차 없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게 자신의 임무였으니까. 왕자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지키고 또 지키는 일. 그러니 상처도 흘리는 피도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제 마음을 경고받고 지적받는 건 너무 아팠다. 확실히, 그 임무를 생각하면 지금 자신의 마음은 존재해선 안 되었고 심지어 주제도 넘는 일이었지만, 그랬다.



"...잊지 않으셨다는 말,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이와이즈미의 단호함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잘 해오신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마세요. 충고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알겠어요. 그 뜻을 담아 힘없이 끄덕인 후, 방을 나섰다.

텅 빈 복도. 스가와라는 가만히 그 끝을 바라보았다. 왕의 침소가 있는 곳이었다. 소금은 채워 넣었으니 당분간 그의 방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방금 혼나 놓고 이 아쉬운 마음이라니, 스스로가 어이없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쭈욱 팔을 위로 뻗었다. 그렇게 힘을 풀어준 후, 손도 탈탈 털었다. 다음으론 창가에 가 잠겨있는 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금의 흔적도 남지 않게 발끝에만 힘을 넣어 창틀에 올라섰다. 살랑살랑 바람이 천 자락을, 그리고 자신의 긴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걸어가는 게 더 좋긴 하지만."



이와이즈미 가문 그리고 쿠니미 아키라를 제외하면 이 성에서 '스가와라 코우시'를 아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아는 것은 오로지 '소금'. 왕자의 소금이 아직 떨어지기 전인데 자신이 성안을 휘젓고 다니는 건 이상했다. 의심받기 좋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아, 결국 오늘 왕자님의 머리카락도 보지 못했네. 막을 수 없는 아쉬움과 함께 크게 숨을 들이켰다. 긴 머리를 질끈 묶었다. 그리고 스가와라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그림자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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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빠진 그림자 무사의 왕자님 지켜내기! 같은 게 보고 싶어서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근데 오이카와 안나와따....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