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delete
2017. 3. 26. 21:02




오늘따라 유달리 밤이 깊었다. 캄캄함이 눈에 가득 들어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팔을 휘저었다. 쿵쿵, 엉망으로 뛰는 심장 소리에 맞춰 몇 번이고 발이 꼬였다. 캄캄함이 덮은 병원 복도는 조용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에 맞이하려던 간호사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오이카와는 숨을 거칠게 그리고 빠르게 뱉어나며 입을 열었다.



"기억 정신과 사와무라 다이치 선생님, 오늘 계십니까?"



이미 사와무라 집은 방문한 후였다. 자신이 알기론 술이나 유흥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니 집에 없으면 당직으로 병원에 있을 게 뻔했다. 그의 행동 루트를 떠올리며 묻자, "잠시만 기다리세요."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당직 스케줄을 확인하는 간호사의 움직임에 절로 손이 떨렸다.



"아, 네. 오늘 사와무라 선생님 당직 스케줄..."
"호출 부탁드립니다."
"네?"
"호출!"



쾅, 저도 모르게 데스크를 내려쳤다. 깜짝 놀란 간호사의 두 눈은 아무래도 좋았다. 당장 사와무라 다이치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이카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던 종이를 더 움켜쥐었다. 사와무라 다이치라는 이름이 반듯하게도 적힌 진단서였다.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들고 온 진단서. 그리고 자신이 들이닥칠 줄 알았다는 듯, 간호사의 호출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와무라가 평온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출장 잘 다녀왔냐?"



병원까지 오는 동안 오이카와는 수도 없이 많은 경우를 떠올렸다. 그가 뱉을 변명에 대한 경우의 수를. 어떤 변명도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럴듯한 걸 뱉어준다면 조금 이해는 해보려 노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그 뻔뻔함에 오이카와는 참지 못하고 사와무라에게 달려들었다. 꺅, 간호사의 외마디 비명이 복도를 울렸다. 동시에 잘난 그의 가운을 잡아채며 벽으로 밀쳤다. 주먹까지 꾹 쥐었지만 뻔뻔하게 저를 올려보는 눈빛에 휘두르진 못하고 웃음만 터트렸다.



"너, 뭐가 그렇게 당당해?"



그는 지금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빌어도 모자랐다.



"나에게 할 말 있지 않아?"



그런데도 저 뻔뻔한 눈빛이라니. 몸에 차오른 화에 오이카와는 자신의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게 다 느껴졌다.



"말 좀 해!!!!!! 뭐라고 말 좀 하라고!!!!"



겨우 쥐고 있던 진단서를 놈의 면상으로 던졌다. 팔락이며 떨어지는 종이 쪼가리 위에 적힌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익숙한 이름에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기억 삭제 요청'이라는 항목에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기억 삭제, 한 마디로 기억을 삭제하는 시술. 약간의 최면을 사용한 정신과 치료법 중 하나로 약 10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의학계에 인정받아 지금은 보편적으로 이용되는 것이었다. 시술비가 비싸긴 했으나, 반드시 잊고 싶은 기억이 있는 이들은 큰 돈을 투자해서라도 기억 삭제를 원했다. 가끔 티비에서도 토론을 하거나 특집 다큐멘터리를 했다. 브라운관 너머로 원하는 기억을 지우고 새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오이카와는 자신에게 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제 연인이 기억을 지웠다. 그것도 자신의 기억만 쏙.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오이카와는 오는 길 내내, 원인을 떠올리려 했지만 감도 잡히지 않았다. 스가와라 코우시와 자신의 관계엔 그 어떠한 문제점도 없었다. 아니 없었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연애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요 몇 년 동안 단 하나도. 물론 연인 사이에 싸움정도는 했지만, 그건 문제점에 속하지도 못했다. 자잘자잘한 싸움은 어느 연인 사이에도 있는 거고 누구나 다 그럴 테니까. 이상 징조도 없었고 우울증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아침을 떠올려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출장에 가는 자신을 배웅하며 던진 "잘 다녀와"라던 인사. 언제나와 똑같았다. 의심할 곳도 이상할 곳도 없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이유를 찾아 이해해보려 해도 오이카와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스가와라가 원했어."



그런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사와무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에게 먼저 연락을 했어야지."
"넌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거잖아, 오이카와."
"당연하지!!! 누가 이걸 허락해?! 누가?!"



당연한 소리를 떠드는 그의 말에 오이카와는 언성을 높였다.



"넌 몰랐겠지만, 스가와라 많이 힘들어했어. 특히 재작년부터 너 외국 지사 설립 문제로 자꾸 해외로 나가면서 더더욱. 넌 정말 몰랐겠지만."
"내 소개로 여기 정신과 다녔어. 약도 먹었고. 확인하고 싶다면 기록 떼어다 줄 수도 있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차분하게 설명하는 사와무라의 말에 오이카와는 멍청하게 눈만 떴다 감았다. 정신과? 우울증? 자신이 알기로 스가와라가 먹는 약은 비타민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와무라는 멈추지 않고 더 입을 움직였다.



"너희 집안이 좀 잘난 집안이야? 네 부모님이 너희 사이 인정한 줄 알았지? 걔가 뒤에서 당한 것들 나열하자면 끝도 없어. 오이카와."



이건 또 무슨 소린데? 부모님하곤 모두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축복은 받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하겠다 약속한 거로 관계에 대한 허락은 받았었다. 가끔 함께 식사도 했고, 생일에는 스가와라를 위해 선물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예뻐하거나 아끼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워하거나 싫어하시진 않았다. 그랬다. 오이카와가 알기론 정말로 그랬다.



"스가와라 데리고 전시회며 행사장 다니면서 얼마나 무시했는지 알기나 해? 겉으론 챙겨주는 척 위해주는 척하면서 네 얼굴에 먹칠하지 말라며 얼마나 구박했는지는 알고? 걔에게 보여준 정성, 선물 그거 사실 다 스가를 위한 건 하나도 없잖아. 오이카와 네 파트너로 부족해 보이지 않게 하려고 보낸 대단하고 귀한 친절이잖아. 그게 걔에겐 얼마나 부담이었을 줄 생각은 해봤어?"
"..."
"너희 부모님이 보낸 관심과 친절, 그거 사실은 다 무시와 비난이잖아. 넌... 뭐가 잘못된 줄도 몰랐을 테지만."
"..."
"널 원망하는 거 아니야. 그럼에도 너와 함께하는 인생을 고른 건, 스가와라 코우시니까."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와무라의 눈빛은 매서웠다. 이해했다. 그는 자신보다 스가와라를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었다. 달라붙는 비난의 눈초리에 오이카와는 턱턱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전혀 몰랐다. 문제점이 없다고만 생각했지,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스가와라가 좀 먹히고 있다는 건 정말, 조금도-



"몰랐어. 나 진짜.... 몰랐어."
"스가와라가 모르길 바랐으니까. 걔 똑똑하잖아. 너에게 숨기는 건 일도 아니었을걸."
"..."
"하지만 걔도 한계였어. 너 외국으로 자주 나가기 시작하면서 참았던 게 터졌거든. 너 없는 사이 매번 너희 본가에 인사드리러 다니면서 수명을 하루하루 깎아 먹는 기분이었데. 너도 없는 그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화살이 걔에게 달려와 박혔겠어. 그렇게 버티다 버티다... 끊어진 거야. 그냥.. 걔의 모든 것이."
"...기억 수술을 하려면 주변 사람의 동의가 있어야 하잖아. 내 기억이니 당연 나와 내 주변인들의 동의도 어느 정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누가... 그걸 허락했어?"
"네 대리인으로 자격으로 너희 부모님. 기뻐하시더라. 그렇게 진심 어린 칭찬받은 거 처음이라며 스가와라 많이 울었어."



하, 마른 숨이 터져 나왔다. 어딘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이 얼얼했다. 자기가 멍청하게 웃고 지내는 사이에 제 뒤로 온갖 화살이 날아들었다. 스가와라가 하나하나 맞아가며 죽어가는 동안 자신은 행복하다 착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웃었다. 행복하다 떠들었다. 사랑한다 속삭였다. 멍청하고 또 잔인하게도.



"지금 어디 있어?"



눈물은 더럽게도 질척하게 자꾸만 쏟아져 나왔다. 닦아도 닦아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내밀며 사와무라가 대답했다.



"걔네 부모님 댁. 아직 한 달밖에 안지나서 집에서 안정 취하고 있거든. 뭐, 지금의 스가와라는 무슨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지만."
"..."
"찾아갈 생각은 하지 마. 빈 기억의 공간이 메꿔지기엔 아직 일러서 너 만나면 발작 일으킬 수도 있어."
"..."
"추가적으로 네 기억도 지울 수 있어. 스가와라가 수술 전에 자신에 대한 기억의 소유권을 포기했거든."



서로가 만든 기억, 그 모든 건 그 기억을 이루고 있는 사람 전부의 것이었다. 의학계는 그걸 두고 소유권이라 불렀다. 오이카와의 소유권 포기는 대리인인 제 부모가 처리했지만, 스가와라는 자신이 직접 처리했단 소리에 입술을 꾹 물었다. 그렇게 괴로웠으면 말을 하지. 그렇게 힘들었으면 말을 하지. 그랬더라면 어디론가 멀리 데려가 줬을 텐데. 무지했던 과거자신의 행동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더는 버틸 수 없어서 오이카와는 무릎을 굽혔다. 힘이 빠진 다리를 꽉 붙잡으며 울음을 토해냈다. 다 큰 어른이 아이처럼 우는 게 얼마나 추한 지 알면서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원한다면 명령어, 알려줄 수 있어. 물론, 넌 그러지 않겠지만.."



명령어. 기억을 다시 풀어내는 말. 스가와라가 정했을 그 명령어를 사와무라가 알려주겠다 제안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이 외롭고 괴로웠다면 그 기억을 그에게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였다.



".. 사랑한다고만 전해줘. 그 녀석이 잠들었을 때라도 괜찮으니까. 내가... 많이 사랑했다고, 네가 날 기억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날 잊어도 상관없을 정도로 널 사랑하고 네 기억이 나에게 소중하다고."



닿지 않을 고백임을 알면서 오이카와는 간절하게 빌었다. 하지만 사와무라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스가와라가 정한 명령어야. 오이카와."



오이카와 토오루의 사랑한다는 말.
잔인할 정도로 완벽하게 모든 걸 끊어낸 연인의 행동에 오이카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생각해도 스가와라 코우시가 독하긴 해. 위로의 말이라고 던진 사와무라의 농담에 오이카와는 웃지 않았다. 참 거한 이별이었다. 돌아보면 연애는 별거 없이 밍밍하고 소박했던 거 같은데 이별은 거했다. 혹시 이건 벌일까? 오이카와는 억지로 웃음을 토해내며 생각했다. 내 행복에 눈이 멀어 네 우울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붙잡아 놓았던 나에 대한 벌? 뭐 그런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너에게 다신 사랑의 말도 담지 못하게 떠나는 게 어딨어? 원망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더 슬픈 것은 자신은 스가와라 코우시를 원망할 수 없다는 것, 그럴 자격조차 없다는 것.


스가와라 코우시가 쏜 화살이 심장에 와서 박혔다. 심장 어딘가에 구멍이 나 피가 철철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네가 이거로 행복하다면 네가 쏜 이 화살은 웃으며 큐피드의 화살이라 떠들 수도 있어. 우습지만, 네가 남긴 이 기억을 그렇게 포장해 안고 살 수 있어. 아니, 그럴 거야. 그렇게 살 거야.


오이카와는 손바닥 아래로 눈을 꾹 눌렀다. 온 눈물을 쥐어짰다. 앞으로 울 날이 많을 거 같은데 벌써부터 이렇게 흘려대선 안되었다. 겨우 무릎에 힘을 넣고 일어섰다. 어쩐지 세상에 자신만 덩그러니 남은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삭제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오이카와는 억지로 웃었다. 가슴 안으로 뚫린 구멍에서 자꾸 텅 빈 소리가 났다. 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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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te키처럼 뭔가 간단하게 기억을 지우는 세계관으로? ㅎㅎ

이번주 전력주제 보고 좋아서 쓰고 싶었는데..... 다른거 하느라 늦게나마 써봤다.

보고 싶은 장면이 있어서 이 부분만 딱 쓰려니까 너무 이상하다.........

퇴고는 나중에



전력주제는 네가 날 기억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날 잊어도 상관없어.

오이카와 대사에 넣어보아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