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카나] 너의 세계
2017. 3. 25. 15:39




무대가 흔들렸다. 몸 안을 마구 울려대던 소리도 사라졌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누군가의 비명을 들으며 멍하니 제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어릴 때부터 붉은색을 좋아했다. 로봇 만화에도 전대물에도 항상 붉은색이 중심이었다. 붉은색은 강했다. 언제나 이겼다. 당당했다. 멋있었다. 그래서 모리사와 역시 붉은색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손에 흥건한 이 색은 무엇일까. 같은 붉은색인데 강함도 강렬함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껍데기만 남아버린 듯한 붉은색. 도대체 이 붉은색은 어디서 나타난 거지?



"대장!!! 뭐하고 있는 검까?!"



정신이 든 것은 제 어깨를 매섭게 밀친 나구모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불어 자신에게 질렸다는 얼굴로 무어라 화를 내고 있는 나구모 테토라. 왜 화를 내고 있는 거지? 모리사와는 고개를 돌려 제 바로 옆에 선 타카미네를 올려보았다. 언제나 지루함과 귀찮음만 담아내던 건 사라지고 두려움만이 가득한 얼굴.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시노부는 어딨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센고쿠를 찾아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강당 끝에 주저앉아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고 있어? 지금 라이브 중이잖아. 봐, 객석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라, 하카제잖아? 어이, 잠깐. 라이브 중에 이렇게 뛰어 올라오면 안 된다고? 언데드의 무대는 아직이잖아. 칸자키에 하스미까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다들 그런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거야? 잠깐, 잠깐. 카나타는 어디 있지? 카나타는-



"모리사와 치아키, 놔. 얼른!!"



하스미 케이토의 목소리에 붙잡고 있던 무언가를 놓았다. 툭, 자신의 허벅지 위로 떨어지는 푸른 머리카락을 내려보며 모리사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보았다. 텅 빈 붉은색이 자신의 붉은색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그 색을 막기 위해 나구모가 손을 뻗었다. 녀석의 유닛복이 엉망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지켜보며 모리사와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치아키는 모두를 「지키는」 히어로에요. 그런 치아키는 제가 「지킬」 거예요."



이게 언제 적 이야기더라. 아마 그가 항상 머무르는 분수대 앞에서. 계절이 언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는 항상 거기에 있었으니까. 카나타, 그러니까 신카이 카나타는 언젠가 저런 소리를 했었다. 버릇처럼 항상 누군가를 지키겠다 말만 했지 실제로 지켜주겠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라 조금은 쑥스러웠다. 그래서 그 쑥스러움에 도망치기 위해 마구 그의 젖은 머리를 헤쳐놓으며 "오! 고맙다!"라고 웃었다. "에에! 머리가 망가진 다고요!" 툴툴대는 그의 짜증을 받아내며.
아, 잠깐. 이게 아니야. 이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지금」「무슨 일이」「일어났는가」이다. 어질 거리는 머릿속에 눈이 핑 돌았다. 끝없이 쏟아지는 빛을 피하기 위해 눈가를 덮자 끈적한 붉은색이 거침없이 침투했다.
그러니까, 라이브 중이었다. 교내 행사로 진행된 이벤트 라이브로 순서는 딱 중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순번. 언제나 레슨받은 대로 연습한 대로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다들 즐거워 보였고 스스로도 즐거웠다. 환호하는 객석, 몸을 울리는 음악, 가슴 뛰는 노래. 완벽한 라이브가 될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로 가면 갈수록 그 시간의 틈을 벌리고 약간의 소음이 침투했다. 끼익, 끼익. 작지만 분명하게 그리고 소름 끼치게.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모리사와는 끊임없이 무대를 방해하려 드는 그 소리를 찾아 신경을 세웠다. 그리고 그 근원지가 자신의 머리 위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삐걱대며 조명이 흔들리는 순간, 그리고 그것이 제 위로 내려오는 걸 눈치챈 순간



"치아키!!"



스피커를 울리는 카나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알고 지내면서 가장 큰 목소리가 제 안을 울렸다. 그리고 어둑어둑한 붉은색이 모리사와 치아키를 덮쳤다.



"쿠누기 선생님이 집에 연락했다고 하니 곧 그의 부모가 올 거야. 의사 말로는 출혈이 심하긴 하지만, 조명이 빗겨 떨어진 덕에 머리에 크게 이상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 네 녀석, 듣고 있나? 모리사와?!"
"아.. 어."



현실감이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모리사와는 얼빠지게 웃으며 하스미 케이토를 올려보았다. 어릴 때 질리도록 맡았던 약품 냄새가 오늘따라 참 낯설었다. "난 학교로 돌아가 상황 정리를 해야 하니, 나머지는 네 녀석에게 맡기겠다." 하스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조용히 부탁했다. 엉망인 그의 교복을 바라보며 모리사와는 조용히 끄덕였다.
병원은 조용했다. 시노부의 훌쩍이는 소리나 나구모의 발 소리를 제외하면 정말로 그랬다. 이어서 타카미네의 한숨 소리까지. 화음도 아닌데 그 소리들이 한데 뭉쳐 돌림 노래처럼 울려댔다.



"치아키는 모두를 「지키는」 히어로에요."



무슨 결정적인 대사도 아니고. 왜 자꾸 떠오르는 걸까. 하아, 깊은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발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신카이 카나타는 언제나 기행을 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눈을 떠 "당장 「생선」이 먹고 싶어요♪"같은 소리를 하진 않을 것이다.



"이제와서 정신 빼고 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다들 학교로 돌아가."
"무슨 소릴 하는 검니까? 아직 신카이 선배 눈도 안 떴다구요?"
"그..그렇소. 졸자도 신카이공 눈 뜨는 걸 보고-"

"아니 아니, 바로 눈을 뜨진 않을 거 아니야? 내일도 그 다음 날도 안 뜰지도 모른다고? 언제까지  이 꼴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와, 당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만히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던 타카미네가 질린다는 듯 외쳤다.



"긍정적이게 구는 것도 시간과 장소를 골라서 해야죠. 지금 이 상황은 아니잖아? 당신, 진짜 믿을 수 없어.."



신카이 카나타는 보통 바다나 해양생물을 제외하면 마음 주지 않고 유유히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모리사와는 알고 있었다. 라이브가 끝나고 지친 아이들의 기둥이 되어주거나 혹은 서로 싸우고 화를 내면 이야기를 들어줄 때라던가 또 누군가가 울면 눈을 마주하고 달래준다거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거리를 두는 그의 말을 던져대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간파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후배들은 신카이의 소중한 것에 속했다. 그러니 그가 소중히 아끼는 것을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물고기의 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다고 혼났듯이 또 혼나게 될 터였다.



"다들 자기 모습 좀 봐. 유닛복도 엉망에 얼굴도 엉망이잖아. 이 상태로 카나타를 만나도 돌아오는 건 그 녀석의 춉 밖에 없을 거라고. 그리고 가장 혼나는 건 나, 모리사와 치아키겠지!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다들 돌아가도록 해."



웃음을 지우고 조금 엄하게 굴자 반박하려던 기운이 빠졌는지 다들 주춤했다. 하지만 바로 물러설 생각은 없었는지 나구모가 입을 열었다.



"그럼 대장도 같이 돌아가는 게 어떻슴까?"
"...그.. 부회장공이 신카이공 부모님이 올 거라 하지 않았소? 그러니 같이-"



센고쿠까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후배의 말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지만, 모리사와는 겨우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락이야 어떻게 닿은 모양이지만, 신카이의 부모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가요. 가. 테토라군 시노부군"
"에엣? 미도리군까지...!"



다행히 타카미네가 제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나서주었다. 여전히 질린다는 얼굴은 지우지 않은 채였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끝까지 무언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나구모에 망설이는 시노부까지 타카미네가 데리고 나가준 덕에 이번에야말로 정말 복도가 조용해졌다. 모리사와는 가만히 텅 빈 복도를 바라보다 이내 병실 문을 열었다.
가만히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신카이에겐 다행스럽게도 요란한 기계들은 붙지 않았다. 상처가 깊어 그 부근의 머리카락을 잘라낸 덕에 붕대를 감고 있는 꼴이 영 이상했다. 거기다 출혈이 심했던 탓인지 묘하게 더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숨은 쉬고 있었다. 조명이 빗겨 나간 게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이보다는 더 산 사람같이 보였을 텐데. 모리사와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피가 굳어 엉망인 손도 닦아야 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후배들에겐 잘난 척 떠들어 놓은 주제에 자신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잠든 신카이 카나타의 얼굴만 들여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바라만 보았을까. 마치 이 공간만 뚝 시간이 잘려나간 느낌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계속해서 그가 부르던 자신의 이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괴로움을 꾸역 삼켜내며 모리사와는 힘들게 부들대던 입술을 열었다. 



"카나타, 나는 네 말대로 모두를 지킬 거야."



친구들도 후배들도 가족도 아이들도 웃음도 행복도, 모두.



"그 모두엔 너도 속해있어."



바다, 물고기, 너의 사람들, 너의 세계.



"나도 부디 너를 지킬 수 있게 해줘."



이 알 수 없는 붉은색에 내가 잡아먹히지 않게 도와줘. 눈물을 꾹 참으며 그의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으니 어디선가 바닷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 물에 파도에 녹아내리지 않게 조심스레 손을 꼭 쥐었다.

다행히 따뜻한 손은 아직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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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나서 다음날 눈 뜬 카나타는 "치아키, 손 「더러」워요!" 라며 웃을 거 같다..^^

앙스타 연성 처음하는데 진짜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