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스가 전력 60분 / 새해 혹은 시작
"어, 내가 너무 늦었어? 아니면 일찍 온 거야?"
추위를 뚫고 다정한 목소리가 조용한 거리를 울렸다. 코트 안에 손을 넣고 두르고 있던 낡은 목도리에 코를 감추고 있던 카게야마는 서둘러 얼굴을 빼내며 살짝 메인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서둘러 왔는지 아니면 이 추위 때문인지 붉게 상기 된 얼굴의 스가와라가 웃으며 "안녕."하고 인사를 해왔다.
"죄송해요. 제가 시간을 잘못 알았어요. 7시가 아니라 8시에 모이기로 했었데요."
"아, 그럼 우리 한 시간이나 먼저 나온 거네?"
스가와라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 보며 말했다. 어둠이 내려앉고 가로등과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한 별들이 박혀있는 거리 아래로 그의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카게야마는 조심히 그 풍경을 담으며 코트 주머니의 따스한 캔 음료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럼 어떻게 할까? 우리 먼저 갈까?"
"그래도 괜찮아요?"
"응, 뭐. 나중에 다 같이 소원 또 빌면 되는 거지."
간단하게도 말해주는 그 대답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가 카게야마를 설레게 만들었으나 애써 그런 티를 감추기 위해 다시 목도리로 얼굴을 감추었다.
겨울방학이 되고 3학년들은 모두 부활동을 은퇴했다. 누구처럼 운다거나, 아쉽다고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카게야마는 손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을 야속하다 느꼈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나누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굴지 못했다. 잠깐씩 그는 체육관에 찾아와 인사를 나누거나 연습을 봐주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카게야마에게는 그 시간들이 부족했다. 그 부족함에 용건도 없으면서 히나타를 데리고 3학년 복도를 어슬렁거리기도 했고, 잠깐 찾아온 그를 붙잡고 토스의 자세와 신호에 대해 물으며 물고 넘어지기도 했었다. 그래도 여전히 부족했다. 카게야마는 스가와라 코우시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은퇴하지 말라고, 졸업하지 말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에 담지 못한 채로 방학이 찾아왔다. 여전히 방학에도 부활동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곳에 이제 그는 없었다.
"방학에도 연습은 잘하고 있어?"
"네."
"체육관 겨울 되니까 춥지? 그래도 난방 틀면 따뜻하니까 열심히 해."
"네."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좀 더 다정한 대답을 하고 싶은데 입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카게야마를 배신했다. 이런 자신을 원망하며 나란히 걷는 스가와라가 힘들지 않게 보폭을 맞춰 걷는 것이 최선이었다. 아 춥다, 하얀 입김과 뱉어지는 중얼거림에 카게야마는 서둘러 주머니에서 굴리던 캔 음료를 꺼내 내밀었다.
"와, 고마워. 날 위해서 산 거야?"
"어...아뇨."
네 맞아요. 맞는데. 아 젠장, 왜 입을 타고 나가는 말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배반하는 걸까. 카게야마는 "뭐야, 아니야?" 라며 웃는 스가와라를 앞에 두고 다시 "아니요." 라는 말을 뱉지 못했다.
"괜찮아.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 알겠어."
"..."
"카게야마군이 서툰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니까요."
노래하듯 공기로 터져 나온 그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왜 나는 선배 앞에 서면 이렇게 서툴다 못해 엉망인 걸까. 하지만 캔 뚜껑을 따는 일은 서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카게야마는 조심스레 걸음을 멈추곤 스가와라 손에 들린 캔의 뚜껑을 땄다. 고마워, 그 대답과 웃음에 내가 얼마나 설레고 아팠는지 알까. 카게야마는 살짝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밤이 가라앉은 거리를 걸어 학교 근처의 신사에 다다르자 스가와라가 카게야마의 곁으로 가깝게 붙어섰다. "사람 많아서 잃어버리겠어." 새해 소원을 빌러 온 사람들 틈에서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에 카게야마는 꽉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잃어버릴 일은 없겠지만, 이왕이면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채웠다. 손잡으실래요? 팔짱 낄까요? 제가 잡을까요? 제 앞으로 와서 서실래요? 어떻게 말해야 자신의 사심을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를 에스코트할 수 있을까. 초조하게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폈지만 입을 타고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스가와라가 사람들 틈을 밀고 들어서며 카게야마의 코트자락을 잡아왔다.
"이러다 소원도 못 빌겠다. 앞으로 가자."
"아..네!"
강하게 잡아당기는 스가와라에게 끌리다시피 카게야마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심장이 쾅쾅 뛰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끌리듯 걸어 겨우 자리를 잡고 서자 웃으며 그가 물어왔다.
"소바나 우동은 먹었어?"
"아뇨."
"그럼 있다가 다 같이 우동집에 가자. 아사히가 분명 괜찮은 곳을 알고 있을 거야."
"다 같이요?"
반문하는 카게야마의 말에 스가와라가 당황한 얼굴로 "응?" 라고 물어왔다. 아차,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 네.. 그! 다 같이요! 네! 다 같이 가요!"
다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단둘이서 소바든 우동이든 먹으며 새해를 맞이하고 싶었다. 꿈도 못 꿀 이야기였지만 어쨌거나 그러고 싶었다. 그 마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아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런 카게야마를 보며 키득키득 웃던 스가와라가 살며시 다시금 잡고 있던 코트 자락을 당겨왔다.
"이제 우리 차례다. 소원 준비해."
"네."
신사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헌금하는 곳으로 올라섰다. 주르륵 줄을 선 사람들 틈으로 들어서 카게야마는 통 크게 500엔 동전을 꺼냈다.
"와, 무슨 소원을 빌려고 500엔이나 던져? 나는 10엔짜리."
"10엔이요? 이왕 비는 소원인데 더 쓰는 게 낫지 않아요?"
"이루어지지 않아도 아깝지 않게?"
어쩐지 그 다운 대답이었다. 데구르르 10엔 자리 동전을 가볍게 던진 스가와라가 먼저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 옆 모습을 훔쳐보듯 바라보던 카게야마도 서둘러 쥐고 있던 동전을 던지곤 손을 모았다. 사실 소원을 크게 정하고 오지는 않았다. 오늘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급급해 그것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란히 곁에 서니 무엇을 빌어야 할지 금세 떠올랐다.
우선은, 스가와라상이 원하는 대학에 붙을 수 있기를. 내년에는 전국에 나가서 우승할 수 있기를. 그리고-
카게야마는 살짝 눈을 떴다. 신사에서 내보내는 하얀 연기 틈에서 여전히 손을 모으고 있는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내년에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소박했다. 더는 같은 부활동을 하지 못하더라도, 같은 학교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와 연락을 하고, 그와 만나고, 이렇게 함께 서 있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제대로 말 한마디 못 건네는 자신이 얼마큼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다면 이 500엔에 모든 것을 걸어보고 싶었다.
"다 했어?"
눈을 뜬 얼굴이 돌아 물었다.
"네, 선배는요?"
"했지. 그럼 이제 갈까? 지금 즈음이면 누군가가 약속 장소에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시계를 바라보며 하는 그의 말에 카게야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을 빌기 위해 올라오는 사람들을 지나쳐 신사의 양 길에 서 있는 야시장 거리를 걸었다. 그 풍경에 스가와라가 무언가 말을 했지만 카게야마는 잘 듣지 못했다. 찰나였던 둘 만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있잖아 카게야마."
반짝이는 거리를 나와 다시금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서며 스가와라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네?"
"우리 학교에 와줘서 고마워."
조금 쑥스러운듯 그가 손등으로 뺨을 가리며 말했다.
"다른 1학년들에게도 전해줘. 내가 정말 고마워한다고."
"왜요?"
"그... 사실 작년까지는 부활동은 그냥 부활동과 같았거든. 나는 너처럼 재능이 없으니 크게 배구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냥 다이치와 아사히와 함께 어울리는 게 즐거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건데.. 너희가 들어오고, 네가 들어와서 경쟁을 배우고 승리를 배우고 열정을 배웠어. 너희가 아니었으면 분명 못 느꼈을 무언가를 느꼈어."
"..."
"배구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비록 전국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후회 없을 정도로 즐거웠어."
"저..저도요."
카게야마는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저도.. 선배랑 배구를 해서 즐거웠어요. 같이 전국에 가고 싶었어요. 선배를..."
전국에 데려가고 싶었어요. 그 오렌지 코트에 함께 서고 싶었어요. 제 뒤를 지켜주는 선배를, 제 이름을 불러주는 선배를 데리고 그곳에 가고 싶었어요. 고백과도 같이 느껴지는 그 말을 카게야마는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문 카게야마를 가만히 기다리던 스가와라는 다 안다는 듯 그저 "괜찮아."라는 대답으로 자신의 멍청함을 위로했다.
괜찮지 않은데. 하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은데. 사실은 오늘 시간을 한 시간 일찍 전한 건 선배뿐이에요. 조금이라도 선배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어요. 선배와 조금이라도 말을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선배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어서 제가 만든 우연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걸 알려주고 싶은데. 그리고 내가-
내가 당신을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꼭 말하고 싶은데.
카게야마는 몇 번이고 목 안까지 꺼냈던 그 말을 이번에도 삼켜냈다. 목 안이 아플 정도로 고통스러운 고백이었다. 조금도 자신의 진심을 모를 얄미운 등이 먼저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잡아, 품으로 안고, 내가 당신을 정말로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카게야마는 손조차도 뻗지 못했다.
"같이 가요."
목을 타고 흐르는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멍청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18살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이것도 전력이었다. 금세 그의 걸음을 따라 잡아 나란히 걸으며 카게야마 아까의 500엔 동전을 떠올렸다. 바라건대, 부디 500엔짜리 소원이 빛을 발하기를. 지금은 아직 그걸로도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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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시간에 맞춘다고 서둘러 썼더니 망글..
어쨌든 새해맞이 같이 소원 빌러가는 카게스가가 보고시펐다.
그리고 나중에 스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야, 너는 내가 500엔짜리냐? 라고 하는 모습이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