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bye bye dramatic
2017. 1. 23. 00:05







"잠시만요, 저 진짜 물 공포증 있어요. 이런 이야긴 처음부터 했어야죠."
"에이, 칸자키. 현장에서 대본 수정되는 게 한두 번인가? 우리 드라마의 첫 촬영, 첫 신인데 자네가 이러면 안 되지."
"저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신이잖아요. 없었던 신이면 불필요한 신인 거 아닙니까?"
"칸자키 미즈오, 드라마라고 지금 무시하는 거야?"
"감독님,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판에서 좀 이름 알렸다고 무시하는 거냐고. 어? 지금 첫 촬영이고 첫 신인데 당신 때문에 촬영 딜레이되고 있잖아!"



수영장을 꽝꽝 울리는 감독의 고함에 몰래 거울로 모습을 체크하던 스가와라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런 분위기의 현장이 처음도 아닌데 언제 들어도 누군가의 고함은 사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 대상이 감독이라면 더더욱. 스가와라는 슬쩍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슬쩍 수영장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촬영 들어간다는 감독의 목소리가 터지고 두 시간이 지났다. 배우와 감독의 입씨름으로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였다.



"그냥 원래 대본으로 가요. 여기서 총 맞는 거로 하자고요. 난투에 물고문이라니, 그렇게 잔인해질 필요가 있습니까?"
"이 대본 누가 썼는지 잊었어? 키타무라 아츠코가 쓴 대본이야. 그녀가 얼마나 깐깐한지 몰라서 그래?"



10년 전, 드라마계를 평정한 성공작은 모두 키타무라 아츠코의 손에서 탄생했다. 내놓으라 하는 감독들이 그녀와 작품을 하고 싶어 했고 모든 배우가 꽃길과 다름없는 그녀의 작품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했다. 그녀가 탄생시킨 배우만 해도 열 손가락을 훌쩍 넘겼으니 당연했다. 스가와라 역시 그녀의 드라마를 보며 배우의 꿈을 키워왔다. 그녀가 10년 만에 방송국 드라마로 복귀한다는 이야기에 자그마한 역이라도 따고 싶어 엑스트라 오디션에 사활을 걸기까지 했다. 그 노력을 알아봐 준 덕인지 수영장에서 죽어가는 형사 마츠무라(연기:칸자키 미즈오)를 발견하는 호텔 직원역을 따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선 형사 마츠무라는 죽어가기엔 글렀고 오늘 안으로 죽어가는 그를 구해내는 멋진 히어로 연기도 글러 보였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일만 몰고 온다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늘 그렇듯이 스가와라는 주저 없이 툭 말을 던졌다. 어차피 말 한마디로 무언가 변하기엔 자신의 인생은 너무 늦어버렸다. 벌써 28살. 10년 전, 배우를 꿈꾸며 시골에서 상경한 반짝이는 소년은 죽은 지 오래였다.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이 아까워서, 도망칠 곳이 없어서 10년이나 이름도 없는 배우 생활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슬슬 끝이 보이는 듯했다. 2년 뒤면 서른이었다. 주변에서 말하듯 이젠 좀 철이 들어야 할 때였다. 그래도 겁쟁이 주제에 포기를 못 해서 "마지막으로!"라고 외치며 본 이 드라마의 오디션, 고작 엑스트라 역으로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희망적이었는데 상황을 보니 이러다 아예 오늘 촬영은 엎어질 것만 같았다.



"전 죽어도 못합니다."
"지금 스태프 다 너 하나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오이카와는 4시간째 대기 중이야!!"
"저 진짜 죽어요. 이 신 찍다가 죽는다고요. 어릴 때, 수영장에서 익사할 뻔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불가능하다고요."
"아니 미즈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요. 우리가 설마 배우를 죽게 두겠어?"
"그런 뜻이..! 아.. 됐습니다. 저 못하겠어요. 이렇게 강압적인 환경에 맞추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매니저!!"



칸자키 미즈오가 결국 승부수를 던졌다. 24살의 젊고 유망한 배우. 작년에 찍은 영화가 대박이 나면서 한 방에 슈퍼스타가 된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아직 데뷔 1년 차의 병아리. 더뎌지는 촬영과 밀려나는 스케줄과는 달리 재밌게 돌아가는 상황에 스가와라는 스태프 뒤에 숨어 화로 붉어진 감독의 얼굴을 살폈다. 보통 이런 경우는 결국 감독이 한 수 빼고 배우를 달래거나 촬영을 접는 게 대부분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래. 그럼. 때려치워!!!"



감독은 드라마 판에서 몇십 년을 버티고 선 이름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신인에 가까운 배우의 말 한마디에 흔들릴 리가 없지. 이 세계에선 자존심이 제일 중요했다. 코를 높이고 잘난 척하고 있는 게 무기였다. 아아, 그게 없어서 자신은 이 모양 이 꼴일까. 스가와라는 또 부정적인 생각을 늘어놓으며 눈치 보는 매니저를 끌고 나가는 칸자키 미즈오의 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멋대로 현장을 박차고 나가는 배우는 별로였지만, 이번만은 그의 편이었다. 통보 없이 바뀐 대본이며, 트라우마가 있다는 배우에게 억지스러운 강요는 나가도 너무 나갔다. 뭐, 보통은 다들 참고 버티지만. 저것도 인기가 있으니 가능한 거절이지. 스가와라는 칸자키 미즈오의 당당함에 부러워 슬쩍 입술을 씰룩였다.



"어떻게 할까요? 감독님. 우선 키타무라 작가님과 전화 연결은 해놨는데..."

"잘 설명 드려. 그리고 작가도 작가지만 오이카와 토오루가 벌써 4시간 대기야. 스태프 중에서 그나마 제일 봐줄 만한 여자애로 골라서 사정 설명하고 오라고 해. 심기 거슬리게 하지 말고. 저기까지 화내고 뛰쳐나가면 이거 감당 안 돼."
"그나저나 칸자키 미즈오 많이 컸네요."



조연출의 말에 감독이 수영장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그래 커도 많이 컸지. 스가와라는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이 외치는 소리> JBC의 황금 시간대라고 불리는 월요일 10시 편성 드라마. 연출 감독에 나카무라 코헤이 각본에 키타무라 아츠코. 믿고 보는 감독, 황금 시간대와 10년 만의 그녀의 복귀작으로 이미 화제였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의 중심을 꼽자면 바로 배우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아역배우부터 시작한 그의 데뷔작은 키타무라 아츠코의 히트작 중 하나였고, 그 이후로도 그녀가 작품을 그만두기 전까지 '키타무라 사단'이라 불리며 함께 해왔다. 그 덕분에 전 국민이 모두 그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런 키타무라 사단 부활이니 모두가 기대가 클 수밖에.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키타무라 아츠코의 이름이 없어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언제나 화제였다.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소년이라는 타이틀로도 모자랐는지 17살에는 돌연 다니던 명문고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영화학교에 다닌 오이카와 토오루는 당시 교수로 지내던 헐리우드의 유명 감독의 눈에 들어 찍었던 영화가 그해 아카데미에서 노미네이트, 수상을 휩쓸었다. 물론 어린 동양의 배우가 서기엔 큰 무대라 그에게 돌아온 트로피는 없었지만, 그 이후 외국 진출이 수월해졌는지 몇 편의 영화를 더 찍었고 성인이 되기 전에 이미 이 일본에선 그는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갔다. 그러니 그는 언제나 화제였다. 화제의 중심이었다. 모두가 그를 보고 싶어 하고 사랑했다. 이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이 있는 배우들에게는 부럽고 자랑스러운 후배였고 젊은 배우들에게는 선망의 대상. 그리고 그건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배우 준비를 하며 오이카와 토오루의 연기를 참고하고 배우기 위해 토할 정도로 보았으니까. 그에 대해 떠들려면 일주일이 모자랄 정도로 그의 연기를 좋아했고 좋아하며 작품을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이 드라마의 호텔 직원역을 따냈을 때는 하늘을 날 정도로 기뻤는데. 첫 단추부터 영 아니올시다였다. 물 공포증이라니. 물론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에게는 공포스러운 환경이긴 하지만, 만약 자신이라면 그래도 참았을 텐데. 연쇄 살인범을 연기하는 오이카와 토오루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를 잡는 형사인 마츠무라 역시 주연에 가까운 큰 역할이었다. 이런 드라마의 이 정도 위치라면 물 공포증 정도는 참고 버티고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뭐... 내가 공포증이 없으니까 이런 속 편한 생각을 하는 거겠지."



넝쿨째 굴러 들어온 황금 호박을 찰 정도로 칸자키 미즈오는 견딜 수 없던 모양이니까.



"감독님, 작가님께선 감독님 뜻에 따르겠다고 하는데요?"
"아 왜 또 나에게 돌려? 잘못되면 이거 쪼이는 건 나잖아."



툴툴대면서도 선택권을 쥔 건 기분이 좋은지 감독이 조금은 누그러진 얼굴로 떠들었다. 그래서 촬영은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스가와라는 지겨움에 수영장 타일 바닥을 툭툭 가볍게 찼다. 호텔 측에서 촬영을 위해서가 아니면 시설 보호를 위해 벗어달라고 요청한 덕에 모두가 맨발에 바지를 둘둘 말아 올리고 있었다.



"이봐."



아마 오이카와 토오루는 제공 받은 호텔방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겠지. 4시간이니 뭐니 해도 이런 고급 호텔에서 보내는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을 터였다.



"이봐!"



호텔방은 사비로 빌린 걸까? 아니면 방송국에서 제공? 그것도 아니면 호텔에서?



"이봐, 거기!"



오늘 안으로 머리털 하나는 볼 수 있을까. 촬영도 기대했지만, 실물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는 것도 엄청 기대했는데.



"저기... 직원분?!"



뭐, 머리털 하나는 보겠지. 그런 태평한 생각을 얼마나 했을까. 툭툭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놀라 고갤 들자 곁에 서 있던 음향 스태프가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뭐지? 퇴근하라는 건가? 싶어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설치된 모니터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카무라 감독이 있었다.



"몇 번을 부르는데 몰라! 당신?!"
"아... 죄송합니다!"
"당신, 배역 오디션 때 <데이지> 대본 연기했었지?"



<데이지> 키타무라 아츠코가 복귀하지 않았으면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을 드라마. 여교사와 제자, 금단의 사랑을 주제로 한 멜로 드라마로 당시 주연이 외국으로 건너가기 전의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어린 그가 연기하기엔 너무 성숙하고 섬세한 배역이라는 걱정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연기해 그해 최연소 남우 주연상을 받았던 게 그리고 그 장면을 TV로 보며 환호했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오디션 당시 마음에 드는 각본으로 연기를 해보라 해서, 그걸 골랐었다. 물론 오이카와 토오루 연기의 발끝도 쫓아가지 못했지만.



"네... 전데요."
"옷 벗고, 마츠무라 의상으로 갈아입어."
"....네?"
"뭐해? 그 촌스러운 호텔 직원 의상 벗고 옷 갈아입으라고."



지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걸까. 감독의 입 모양이 느릿느릿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였다. 그가 눈앞에서 짝, 박수를 치지 않았더라면 평생 정신을 못차렸을 정도로 넋이 빠졌다 돌아왔다. 술렁대는 스태프들의 반응처럼 마음이 술렁댔다. 마츠무라라니, 마츠무라? 방금 칸자키가 차고 나간 그 마츠무라? 이 드라마의 주조연, 아니 투톱 주연 마츠무라? 멀어지는 감독의 등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뺨을 때렸다. 곁에 선 음향 스태프가 놀라 흠칫대는 게 느껴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꿈을 꾸는지 아니면 현실에 있는지 알 수 없을 거 같았다.



"할머니, 할머니가 틀렸어요."



부정적이게 굴어도 기회는 오나 봐요. 스가와라는 서둘러 손짓하는 분장팀에게 달려갔다. 탈의실이 간이 분장실이 되었다. 개인 매니저와 코디가 있던 칸자키와 달리 자신은 기획사도 없는 놈이니 모두 스태프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거 칸자키상 사이즈로 맞춘 거라서 좀 클 텐데."
"괜찮아요."
"아니 그쪽이 괜찮아도 카메라에 이상하게 잡히면 의미 없으니까..."



웃음을 터트리는 스태프의 말에 얼굴이 붉게 올랐다. 뭐, 이름도 없는 배우의 의사보다는 그림이 중요한 거니까. 섭섭하거나 서럽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런 감정을 떠올리기엔 너무도 아까웠다.
빨리 서둘러, 빨리! 멈춰 있던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급해졌다. 하지만 제일 급한 건 스가와라 코우시, 손에 든 대본을 넘기고 또 넘겼다. 형광펜으로 단 한 줄도 칠 수 없었던 대본이 많이는 아니지만 꽤 여러 줄 반짝반짝해졌다.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준비 끝났어요."



분주하게 자신의 주변을 오고 가던 스태프의 완료 신호에 스가와라는 대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급히 준비된 분장용 거울에는 꽤 괜찮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도 나오지 않을 예정이었던 역이라 메이크업도 제대로 안 해서 엉망이었던 모습이 전문가의 손길로 이만큼이나 달라지다니. 스가와라는 떡하니 입을 벌렸다.



"입 넣어주시고 빨리 와주세요! 오이카와상 스탠바이했어요!"



완료 신호에 달려온 연출팀 스태프가 웃으며 말했다. 오, 오이카와라니. 머리털도 못 볼 줄 알았던 그 배우를 눈앞에서 보는 건가? 의자에서 벗어난 다리가 절로 후들댔다. 찬 타일에 방치되었던 발바닥은 어느새 부드러운 양말과 형사 배역을 위해 낡게 준비된 신발로 감싸져 있었다. 그만 좀 떨어요. 데리러 온 스태프가 웃으며 핀잔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게, 지금 한 발 한 발 떼는 이 걸음이 제 역사적인 걸음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리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스가와라는 눈빛만 보냈다.



"스가와라군, 여기!!"



스태프를 따라 수영장으로 돌아오자 감독이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다. 지금껏 10년 간 배우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호칭에 눈물이 터질 거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눈물은 감독의 곁에 선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는 순간 쏙 들어갔다.



"세상에. 실물 오이카와야."



실물 오이카와 토오루. 그가 자신의 허리만 한 신장을 가졌을 때부터 자신은 그의 연기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연기를 보고 공부했고 그와 같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절대로 불가능하겠지만, 뭐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할머니가 그랬으니까. 어쨌거나 그런 상대가 눈앞에, 머리털 한 올이 아니라 TV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잡지에서 거리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니, 눈물이 나올 틈이 없었다. 눈물을 흘릴 시간에 1초라도 그의 얼굴을 제 눈에 넣어야 했으니까.



"만나서 반가워요,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합니다. 배우 교체에 대한 이야기는 감독님에게 설명 들었어요."
"이 친구 오디션에서 네 연기를 했었어."
"아, 진짜요?"
"어. 잘한다 싶었는데 영 마스크가 곱상한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어쩔까 하다가 아까워서 이름 채워놨는데, 이렇게 써 먹히네."



암요, 제 마스크는 유행이 지나도 너무 지났죠. 하하하. 스가와라는 감독의 말에 바보처럼 웃었다. 그가 똥을 초콜릿이라 우겨도 감사합니다, 하고 입에 넣을 거 같았다.



"궁금하네요. 이렇게 현장에서 바로 캐스팅에 올릴 정도면 믿어도 되겠죠."
"그럼요!!"



분명 감독에게 하는 말이었을 텐데,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크게 외치고 말았다. 두 쌍의 눈이 어이없다는 듯 달라붙었지만, 이 역시 웃음으로 대충 넘겼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이 역시 할머니가 늘 하던 말씀 중 하나였다.



"그럼 대충 동선하고 대사 맞춰봐요. 리딩 때는 칸자키랑 맞춰본 게 전부라.. 새로 맞춰야겠네요."
"네! 대본.. 다 외웠어요."
"그거 다행이네요."



어쩐지 약간 빈정대는 거 같았지만, 아무렴 좋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말이 법이었다. 저 멀리 지켜보기만 했던 동경의 대상이 하는 말인데 그게 좀 빈정거림이면 어떻고 욕이면 어때. 스가와라는 눈을 반짝이며 끄덕였다.



"그만 끄덕이고, 대사를 쳐요."
"아..! 네.! 어... "



<어둠이 외치는 소리>의 주연은 따지고 보면 자신이 맡은 마츠무라가 맞았다. 쫓고 있던 살인범을 잡았다고 생각했던 순간, 그만 역으로 당해 기억을 잃고 휴직하게 되는 새내기 형사. 그리고 TV 속 끊이지 않는 살인범에 관한 뉴스에 자신도 모르게 발이 움직이고 형사일 때는 눈에 두지 못했던 단서와 실마리를 찾게 된다는 게 주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실상의 주연은 바로 살인범인 아나기 타츠나리. 왜냐하면, 오이카와 토오루의 첫 악연 연기니까. 그러니 모두가 주연을 그로 대우했다. 스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사실상은 즉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보다 튀지 않게, 절대로 앞서 나가지 않게, 그의 그림자처럼



"네 손에 수갑을 채우는 날만을 꿈 꿔왔어."



가라앉은 연기를.


스가와라는 수갑을 쥐고 흔드는 시늉을 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본래 칸자키가 맡을 예정이었던 마츠무라는 그의 이미지에 맞게 패기 가득한 젊은 열혈 형사, 그 패기는 유지하면서-



"그 대사는 채우고 나서 하셔야죠. 형사님."



대사와 함께 눈앞의 오이카와 토오루가 사라졌다. 수영장의 통유리를, 그리고 그 뒤의 어둠을 등에 쥔 아나기 타츠나리만이 거기 서 있었다. 스가와라는 순간적으로 변한 오이카와의 매서운 눈빛을 마주하며 침을 삼켰다.



"그리고.. 여기서 들어갈게요?"



그에겐 무슨 스위치가 있는 게 아닐까. ON OFF가 자유로운. 다시 오이카와 토오루로 돌아온 그가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무어라 방어 자세를 취할 틈도 없이 발이 공중으로 붕 떴다. 수영장 천장이 빙그르 도나 싶더니



"악!"



그대로 타일 바닥에 내동댕이. 대사에 비명은 없었지만,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오이카와의 공격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여기서 발로 밟고-"



형사의 신발과 달리 살인마의 신발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구두에 달린 장식을 보니 유명 명품 브랜드의 것이었다. 망할 살인마, 돈도 있는 설정이야? 아니면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들어온 협찬이야? 하지만 그걸 따질 틈이 없었다. 스가와라는 자기 배 위로 가차 없이 내려앉는 발길질에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마지막은 물이었던가요? 감독님?"



잠깐, 잠깐! 스톱을 외치려 했지만 입을 열고 터져 나오는 것은 공기 빠진 비명. 4년 전에 전국 시대물 드라마의 엑스트라로 병사 144를 연기했을 때보다 더 아팠다. 그때는 칼을 맞고 죽는 신이라 무기도 있었는데!



"일본 형사는 다 죽었나 봐요. 다음엔 좀 더 대단한 놈을 보내길 기대하고 있을게요, 형사님."



자신은 죽어가는데 오이카와 토오루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손아귀에 머리채가 잡혔다. 바둥거리는 몸이 꼴사납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겨우 제대로 숨을 들이켜고 도와달라고 외치려 크게 입을 벌리는 순간, 물이 들이찼다. 소독냄새가 입과 코를 마구잡이로 괴롭혔다. 팔에 힘을 주고 벗어나려 몸부림쳐도 오이카와의 힘이 얼마나 쎈지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칸자키가 벗어던지고 나간 게 100% 이해가 되길 시작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 스가와라는 자신이 만약 여기서 살아 다시 숨 쉰다면 절대로 물가에 얼씬도 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감독님?"



산뜻한 목소리와 함께 소독물을 얼마나 들이켰는지 모를 입에서 괴로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뺨에 닿는 차가운 타일의 감촉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본 촬영은 못 할 거 같은데, 리허설만 하고 오늘 끝내죠. 저 대기한지 벌써 다섯 시간째인데. 그리고 부디 제대로 된, 상대역을 캐스팅해주시길 부탁드릴게요. 정중하게요. 칸자키나.. 여기 이름 모를 엑스트라 말고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감독님."



그의 줄줄 떠드는 소리를 줄이자면 아마 이거겠지. 이러시면 곤란해요. 겨우 돌아온 숨을 진정시키며 스가와라는 손에 힘을 주었다. 타일 바닥을 딛고 상체를 일으켰다. 웃으며 친절한 척 떠들고 있는 낯짝에 열이 올랐다. 방금 이 순간은, 지난 10년간 자신이 애타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바로 물에 처박은 거로 모자라 박살을 낸 오이카와 토오루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주저하지 않았다. 다리를 뻗었다. 분명 몇 백만 원은 할, 그리고 자신의 목숨 값으론 갚을 수 없는 정장이 걱정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너는 다 좋은데 성격이 너무 욱해. 그 성격 고쳐야 할 거다."



할머니, 죄송해요. 저는 아직도 부정적이고 욱하답니다. 사고 하나만 치고 이제 철들게요. 그리 결심하며 힘껏 오이카와 토오루의 정강이를 찼다. 억, 소리를 내며 그가 요란한 물소리와 함께 수영장으로 가라앉았다. 수영을 못하는지 꼴사납게 버둥대는 그를 보며 스가와라는 혀를 내밀었다. 그리곤 칸자키 미즈오처럼 그의 발끝도 쫓아갈 수 없지만, 여하간 그의 뒷모습을 흉내 내며 현장을 나왔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본다면 바로 이런 맛이겠지.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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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을 피하고 싶은 자의 몸부림.... 퇴고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