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락, 빗질과 함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어졌다. 태어나 자신의 머리를 제외하곤 타인의 머리를 빗을 기회가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손을 놀리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모양인지 무릎에 올려둔 책 넘기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거기에만 빠져 이쪽은 전혀 신경 쓰지 못 하는 듯 보였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숙여진 머리통만 바라보다 이내 빗을 내려놓고 화장대에 놓여있던 타이를 챙겨 들었다.
"꼭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는데."
제 예상과 달리 모든 신경을 책으로 돌린 것만은 아니었는지 자신의 주인인 스가와라 코우시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고작 집에서 이루어지는 점심 식사를 위해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매일 홀로 정확하게는 뒹굴대는 침대에서 맞이하던 식사가 아닌 그의 형들과 함께하는 식사이니까. 거기다
"그래도 그쪽 파트너가 오는 날이니까, 신경 써야겠지?"
결전의 날이기도 했다.
이틀 전. 이 저택에 들어오기 무섭게 정체를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들킨 그 날, 오이카와는 당장 그만두겠다 선언하고 싶었지만 이 도련님의 협박 아닌 협박에 일단은 한 발을 조용히 뺐다. 남자 거기다 알파인 자신에게 고자가 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가끔은 업무용으로도 사용하는 몸뚱어리였다. 귀한 재산이었다. 그러니 당장 "그만두겠습니다."라는 뻔뻔함을 내보일 순 없었다. 그보다 어떻게 이 도련님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연기가 어색했나 싶었으나, 사와무라 다이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 서류를 잘못 썼나? 하지만 자신을 비롯해 이와이즈미들도 어려서부터 밥벌이로 해오던 짓이 다 이런 일이었으니 그런 사소한 실수는 할 리가 없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수로 그는 자신과 마주하기 무섭게 눈치챘을까. 스스로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직접 그에게 물었다. 물론 질문은 살짝 돌려서.
"제가 각인한 오메가가 없다는 사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보통은 주변에 맴도는 상대의 페로몬에 "아, 각인한 상대가 있구나."라고 알아차리는 편이 보통. 그러니 그 페로몬이 없어 착각할 확률도 분명 존재했으나, 그러기엔 스가와라 코우시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며칠 떨어져 지내서요."라고 대응도 못 할 정도로 단호하기까지 했다. 그런 제 질문이 이상했는지, 자기 전에 항상 틀어놓는다는 호러 영화를 앞에 두고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내가 우성 오메가니까 그렇지."
우성 오메가라니. 그게 뭔데? 오이카와는 눈을 깜빡였다. 제 멍청한 얼굴이 웃겼는지, 스가와라 코우시는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며 "몰라?"라고 되물었다.
"우리 집안은 모두 우성이라 그쪽 같은 보통 알파나 열성 알파의 각인 상태정도는 바로 알 수 있는데.."
"...우성은 뭐고 열성은 뭡니까?"
"알파와 오메가를 그렇게 나누잖아?"
분명히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같은 주제에 대해 대화하고 있었으나 전혀 다른 주제에 대해 떠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저쪽이 아는 걸 이쪽이 모른다고 스가와라는 경악했고 오이카와는 이쪽이 모르는 걸 저쪽이 당연하게 떠들고 있어 당황했다. 한참을 멍하니 TV 속 몬스터만 바라보던 제 주인은 "내가 왕이라면-"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흔들더니 "당신은 이거라고."라며 가운뎃손가락을 펴 보이는 거로 설명을 끝내버렸다. 그래서 그게 뭔데? 그 설명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단어가 주는 이미지 덕분에 대충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성 알파, 알파, 열성 알파로 나뉜다는 건데- 왜 이 사실을 쿠니미 아키라는 진작 말해주지 않았을까. 만약 이렇게 단박에 걸릴 핸디캡을 자신이 쥐고 있었던 거라면 절대로, 절대로 이 일에 뛰어들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그 당혹스러움을 눈치챘는지, 스가와라는 꽥꽥 소리가 튀어나오는 TV를 끄더니 이내 팔짱을 끼고 심각한 얼굴로 물어왔다.
"형들 앞에선 어쩔 생각이었어?"
거기까진 생각도 안 했지. 애초에 당신이랑 이렇게 빠르게 만날 줄도 몰랐다니까? 오이카와는 따져 묻는 그의 행동에 숨을 터트렸다. "우리 집안 상대로 겁도 없이 사고를 쳐놓고 왜 이렇게 허술해?" 힐난하는 말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계획은 이 도련님을 어떻게 해서 돈을 뜯어낼 작정이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계획 시작 한 시간 만에 들통나, 하루 만에 감옥에 가게 생기자 답지 않게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 꼴이 안쓰러웠는지 친절한 주인께서는 물까지 따라 건넸다. 그리곤
"입 다물어 줄게."
라며 이상한 제안을 해왔다. 당장 형들에게 가, 자신을 사기꾼이라 고해도 모자랄 판에 반대로 도와주겠다는 말에 오이카와는 건넨 물 잔을 받지도 못하고 스가와라와 눈을 마주했다.
"대신 사표 쓰지 마. 내가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거기 서서 나 대신 손과 발이 되고 우리 아버지가 그리고 형들이 뭐라 해도 내 편에만, 내 명령에만 움직이는 거야."
집안 어지르기, 이상한 코스튬 입기, 호러 영화 보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을 거라 예상했던 도련님은 예상과 달리 사람을 쥐고 흔드는 것도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기서 나가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네가 꼭 내 편이 되어서 도와줘야 해."
지가 라푼젤이야 뭐야. 오이카와는 단호하게 구는 남자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싫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마른 입술은 달싹이기만 할 뿐,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지금까지 오메가의 눈물에도 강했고, 무시무시한 협박에도 진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물잔을 꾹 쥐고 자신만 담는 저 눈동자에 마음이 약해졌다. 이미 자신의 거짓말이 까발려진 이상, 더는 발을 담그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거절의 말이 나가지 않았다.
"오이카와, 살면서 하지 말아야 할 게 세 가지 있어. 무모한 도전, 손해 보는 장사 그리고 타인을 믿는 것."
그 언젠가 이와이즈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으나, 공교롭게도 지금은 말려줄 그가 곁에 없었다. 거기다 당장 살 방법도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이미 정식이었지만 정말로 정식적으로 그의 집사가 되기로 한 후, 그의 형인 스가와라 코우지로와 코우타의 눈을 속이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사와무라 몰래 숨겨놨다는 감자칩을 입으로 털어 넣으며 온갖 계획을 세웠으나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 없는 도련님의 계획은 대부분 허무맹랑했고 이쪽이 내놓은 계획은 불안하기만 했다.
"차라리 파트너를 초대해. 각인한 상대가 없어도 진지한 파트너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
"설마.. 파트너 있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지? 임신 3개월은? 생명 가지곤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진짭니다."
들킨 것은 자신에게 각인한 오메가가 없다는 것뿐, 아직 스가와라 코우시는 자신을 사사키 카즈야라 생각하고 있었고 여전히 파트너가 있다고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거짓을 굳이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재빨리 대답했다.
"파트너가 곁에 있으면 각인은 안 했어도 페로몬 같은 게 있으니까.. 속일 수 있을지도 몰라."
확신하는 말투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지금껏 서로가 내놓은 계획 중에선 가장 설득력 있고 성공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 외부 일정으로 외부에 있다가 주말을 맞이해 저택으로 돌아오는 두 형제가 고맙게도 먼저 식사를 권했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자신의 없는 파트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쿠니미 아키라를 고용했다.
"파트너 몇 시에 온다고 했어?"
"곧 도착할 시간입니다."
"그럼 마중 나가 봐. 기다리게 하면 안 되잖아. 나는.. 사와무라 불러서 키친으로 가 있을게."
배려하는 스가와라의 말에 오이카와는 끄덕이곤 서둘러 그의 목에 타이를 메어주었다. 빗질과 달리 타이는 지금껏 수도 없이 만져봤던 거라 어렵지 않게 가뿐하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뚱한 표정을 보니 서두르는 자신의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별말 하지 않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홀로 방에 두고 오이카와는 별채를 나섰다. 아직 제대로 인사를 다 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저를 알아보는 사용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며 발걸음을 바삐 했다. 그 서두름의 이유는 혼자 기디라고 있을 쿠니미 아키라가 걱정되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 따질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으득대며 정문 앞, 익숙한 실루엣을 향해 달리듯 걸었다.
"오셨어요?"
평소보다 단정한 차림의 쿠니미 아키라가 제 죄를 아직 모르는지 뻔뻔하게도 미소를 그리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고 웃으며 물었다.
"너, 나 속였지?"
이 바닥에서 구르는 놈이라면 쿠니미 아키라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건 즉, 그가 아주 유용하고 대단한 정보상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분명 우성이니 열성이 뭐니 하는 것들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그는 말하지 않았을까.
"우성 알파니 열성이니, 이게 다 뭐야?"
"아."
그게 뭔데요? 차라리 그렇게 되물었으면 속아줄 생각도 있었는데, 손바닥을 치며 마치 "잊어버렸네!"와 같은 행동에 오이카와는 주먹을 쥐었다.
"화내지 마요. 나는 딱 비용만큼의 정보만 제공한 거라고요. 그리고 원하던 정보가 우성에 관한 건 아니었잖아요?"
"이 일을 하려면 그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 안 했어?"
"그런가요. 잘 모르겠는데."
정보를 사고파는 놈들을 믿을 때는 정보만 믿어야 한다고 늘 이와이즈미가 습관처럼 말하긴 했으나, 그래도 쿠니미 아키라와 해 온 시간이 10년이 넘어가는데 이렇게 배신을 칠 줄이야. 절로 갈리는 이와 쥐이는 주먹을 어쩌지 못하고 부들대고 있자, 그가 답지 않게 즐거운 미소를 띠며 멋대로 팔짱을 끼어왔다.
"뭐하는 거야?"
"지금부터 우리 파트너 아닌가요? 스가와라 형제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들어가야죠."
"우성이 뭐고 열성이 뭔지나 설명부터 하시지."
어디선가 자신을 의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시선 그리고 녹화하고 있을 카메라를 의식해 쿠니미의 팔을 더 잡아 끼우며 오이카와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보상답게 눈치는 빠른지, 쿠니미는 주변을 살핀다거나 카메라를 의식하는 멍청한 행동은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제 보폭에 맞춰 따라 걸었다.
"본디 알파와 오메가는 모두 우성과 보통 그리고 열성으로 나뉜다고 해요. 쉽게 말하면 우성은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존재, 알파든 오메가든 상관없이 상대가 누구라도 임신시킬 수 있고 임신할 수 있어요."
"..누구라도 가능하다고?"
"네. 우성 알파는 같은 알파도 100% 임신시킬 수 있고, 베타도 임신시킬 수 있어요. 반대로 우성 오메가는 같은 오메가의 아이를 가질 수도 있고 베타의 아이도 가질 수 있죠."
"...뭐?"
"놀랍죠? 학교에선 늘 '세상엔 알파 베타 오메가가 존재한단다!'만 알려주고 그들은 또 3부류로 나뉘는데, 까지는 말해주지 않으니까요. 왜인 줄 알아요?"
"왜?"
"우성 유전자는 돈이 있는 곳에만 존재하죠."
대부분 이런 집안, 우성 유전자는 우성에게만 나타나거든요. 쿠니미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우성 유전자는 부를 가진 이들만 소유한 권위라고 해야 할까요, 상류층이 지닌 하나의 특권이라고 해야 할까요. 예로부터 그냥 그렇게 흘러 내려왔다고 들었어요.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알파가 100명이 있으면 우성 알파는 그중에서 한 명 나타날까 말까한 확률이라 그걸 지키기 위해 우성끼리 뭉치다 보니 더더욱 심해졌다고 해요."
"그럼 스가와라 회장과 그의 부인이 알파이고 알파여서 운 좋게 알파 아이들을 낳은 게 아니라-"
"애초에 우성 알파였겠죠. 보통 알파가 알파가 만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으니까. 가능하다고 해도 둘 사이에서 아이가 셋이나 태어나는 건 기적이죠. 어디 가서 씨받이라도 쓴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말 좀 가려."
"어때요. 내가 지어내는 소리 하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거기까진 아닐 거로 생각해요. 왜냐면 이 사회의 지배계층이 대부분 알파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니거든요. 정확하게 지배 계층은 우성 알파들이고 그들은 그걸 아주 귀하고 중요하게 여겨요. 그런데 씨받이라니, 품위 없게. 그러니 대부분 돈 있는 집안이 그렇듯 스가와라 가문도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우성만 배우자로 택하고 가족의 틀에 들였을 거예요."
"...난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해요. 그게 세상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모두가 우성 유전자를 가지려 들 테고, 그럼 피라미드의 바닥과 꼭대기의 경계선이 사라지잖아요. 그걸 그들이 가만히 지켜볼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들은 우리가 계속 우둔하고 무지하고 멍청하길 바라고 주제 파악을 잘하길 바래요. 거기다 돈으론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니 어려울 것도 없고요. 아, 열성은 말 그대로 열성이에요. 알파로서 오메가로서 좀.. 기능이 안 좋은 사람들. 왜, 학교 다닐 때, 발현 검사에서 정상판정 못받고 '주의 요망' 받는 애들. 그런 애들을 우성 사회에서는 '열성'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저 같은 애들."
"뭐??!"
뜬금없는 쿠니미의 고백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쓰레기 같죠? 좋은 건 다들 자기들만 먹어치우고, 나 같은 애들은 멋대로 열성이니 뭐니 꼬리표 붙여서 시시덕거리는 거. 뭐, 하지만 덕분에 정보상으로서는 꽤 괜찮아요."
돈 없을 때, 급하게 팔아 치워도 탈 나지 않으니까. 썩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덧붙이는 쿠니미의 말에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아마... 더더욱 셋째 아들을 숨기려고 했던 걸 거예요. 스가와라 회장은. 아무리 우성 오메가라도 오메가니까요. 알파보다 낮게 취급 받는 게 현실이고 심지어 우성이니 어떤 사기꾼 같은 놈이 접근해 덜컥 임신이라도 시키면 고고하게 지켜온 자신들의 벽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잖아요."
"어떤 사기꾼 놈이라니, 지금 그거 내 이야기?"
"아, 이제야 이해가 되네. 알파 집안이다 보니 사용인으로 오메가를 들일 수는 없어서 베타랑 알파만 들였는데, 막내아들이 우성 오메가니 그도 위험하다 생각해서 각인한 알파만 구하는 거구나? 좋은 정보네요. 그보다... 그럼 왜 진작부터 각인한 알파만 들이지 않은 거지..? 보통 발현은 어릴 때 나오잖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 일한 지 이제 이틀인데."
"그렇겠구나. 아, 그럼 그 사실은 어떻게 안 거예요? 우성이니 열성이니.."
"스가와라 코우시가 말해줬어."
"역시. 단박에 들켰구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도 던지는 말투에 오이카와는 억지로 웃음을 유지했다. 이것저것 더 따지고 싶은 게 많았으나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수다를 떠는 사이 도착한 곳은 저택의 현관 앞, 이제 가면을 써야 할 시간이었다. 쿠니미 역시 제 생각을 읽었는지, 감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그리곤 간지러운 눈으로 자신을 마주 보았다.
"사사키 카즈야씨, 연극에 가담하는 비용은 비싸게 청구할게요."
"이건 쿠니미, 네가 정보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탓이잖아? 그렇게 따지려 했지만, 마치 그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쿠니미 아키라의 입술이 우악스럽게 제게 달라붙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밀어내려 손을 뻗었으나, 코끝으로 미세하게 퍼지는 은은한 페로몬에 오이카와는 손에서 힘을 빼고, 밀어내는 대신 그의 뺨을 붙잡았다. 평소라면 오메가와의 입맞춤은 꽤 달큰한 자극이 될 터인데 일이라고 인식해서 그런가 아니면 쿠니미 아키라가 열성이라 그런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멍청하게 이 녀석은 태어나서 몇 번이나 키스를 해봤을까, 따위를 떠올릴 뿐이었다.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입맞춤은 꽤 짙었지만, 선을 긋겠다는 듯 어떠한 여운도 남기지 않고 떨어졌다.
"페로몬 묻혀 놨으면, 저쪽도 착각하겠죠. 아, 키스 비용은 추가 청구합니다."
"이건 A/S로 쳐줘."
"제일 비싼 거라서 안 되겠네요."
흥정 실패. 딱 잘라 거절하는 그의 뒤를 따라 오이카와는 천천히 저택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직 인사를 나누어 본 적 없는 사용인들과 함께 사와무라 다이치가 안내했다. "셋째 도련님은 먼저 자리에 참석하셨습니다." 둘만 있을 때는 스가와라라 칭하면서 보는 눈이 있을 때, 그는 엄해졌다. 공과 사를 완벽하게 구분하는 남자. 그의 목을 단정하게 채운 타이, 젊은 나이에 이런 저택의 전체적인 일을 책임지는 자리, 그리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흐르고 떨어지는 각 잡힌 수트가 사와무라 다이치를 잘 보여준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이런 남자는 말이나 돈으로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아마, 그래서 스가와라 코우시는 자신을 원했겠지. 말과 돈으로 얼마든지 회유할 수 있고, 신념도 정의도 갖지 않은 사기꾼인 자신을. 부리기에 이토록 적합한 이는 없을 테니까.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절대로 좋은 시간 따위 없을 거 같지만, 식당으로 연결된 문을 열어주는 사와무라의 말에 한껏 웃었다. 척 보아도 좋아 보이는 나뭇결을 뽐내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디 사는 누가 그렸는지 모를 액자들이 빼곡하게 벽을 두른 화려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명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식탁에 놓인 번쩍이는 은식기들 덕분인지 은은한 게 딱 좋았다. 그 위를 차지하고 있는 온갖 음식 역시도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풍경. 굳이 단점을 찾자면
"어서 와요."
함께 식사할 이들이겠지.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서 환영하는 세 형제를 바라보았다. 환영의 뜻을 내 비추며 자리를 눈짓하는 첫째, 스가와라 코우지로. 그리고 그 곁에서 마치 자신을 가늠하듯 발걸음 하나하나 눈길을 떼지 않는 둘째, 스가와라 코우타. 마지막으로 이 일의 원흉까지는 아니었으나 자신을 곱게 놔주지 않고 목을 졸라맨 주인님, 스가와라 코우시. 누구는 손에 땀이 배기 시작했는데, 태평한 주인께서는 별 관심이 없는지 과일만 입에 집어넣으며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있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사키 하루타라고 해요."
사사키 하루타. 언제 이런 이름을 지었을까. 쿠니미 아키라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어서 자리하라는 첫째의 안내에 적당하게 자리를 빼 앉자, 그제야 스가와라 코우시가 과일이 아닌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아닌 곁에 앉은 쿠니미에게.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새 식구가 생기는 데다, 아직 어린 동생을 책임져줄 사람을 들이는 거라 좀 더 친해지고 싶어서 자리를 마련했어요."
코우지로의 뻔뻔한 설명에 오이카와는 서둘러 웃음을 삼켰다. 어린 동생이라니, 프로필을 속이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스가와라 코우시는 스물일곱이었다. 스물일곱이 어마하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유치원생을 대하는 저 꼴이라니. 오이카와는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임신 3개월이라면서요. 입덧은 괜찮아요? 지금이 가장 심할 시기 아닌가?"
"조금 고생 중이에요. 아직은 이렇다 구별 짓기 어려워서 뭐가 힘든지는 잘 모르겠어요."
혹시 그 문제로 폐를 끼친다면 이해 부탁드릴게요. 답지 않게 쿠니미가 활짝 웃으며 좋은 사람인 척을 해댔다.
"어때요? 그.. 아이를 품고 있는 기분은? 전 알파니까 경험할 일이 없어서."
"좋으면서도 불편하죠. 어렵게 가진 아이인데 소중하면서도 잘못되면 어쩌나 하나하나 조심하게 되고-"
"어렵게 가졌어요?"
"아, 네."
"왜요?"
쿠니미는 자신이 열성 오메가이니 상대 쪽에서 알아볼 것을 염두에 둬 말을 흘린 거겠지만,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해오는 코우지로의 행동에 순간 얼굴을 굳혔다. 역시, 식사는 그냥 연막이라니까. 오이카와는 쿠니미 아키라가 벌써 피로를 느끼지 않기를 바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형-"
스가와라 코우시가 빨랐다. 고작 그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이쪽을 시험하듯 보고 있던 두 쌍의 눈이 순식간에 그에게 붙었다.
"나 배고픈데. 우리 밥 언제 먹어?"
스가와라 코우시가 웃었다. 그냥 웃었을 뿐인데, 약간 팽팽하게 느껴졌던 흐름이 뚝 하고 끊겨 나갔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그린 코우지로가 서둘러 식사를 하자며 음식을 권했다. 말없이 앉아있던 차남 코우타 역시 더는 쿠니미와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음식을 덜어 스가와라 코우시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 풍경이 웃겼는지 쿠니미 아키라가 자신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닌 모양인지 누그러진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스가와라 코우지로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은 자신과 쿠니미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언제 만났느냐, 어디서 만났느냐와 같이 평범해 보이지만, 파트너라는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날카로운 질문들만 던졌다. 물론 코우지로뿐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코우타 역시
"아, 그 레스토랑? 거기 음식 맛있죠? 가제 구이가 기가 막히는데." 혹은 "미나미구? 어디? 나 아는 지인도 그쪽 사는데."
와 같이 툭툭 시험하는 질문을 던져왔다. 거기다 말도 짧아지는데, 그 방식이 조금 짜증이 나 "가제 구이를 시킬 만큼 저희가 여유 있는 편이 아니라 잘 모르겠어요." "미나미구가 어디 시골 마을인가요? 구청도 있는 큰 동네인데. 찾다 보면 아는 사람 한둘 정도는 당연히 있겠죠."라는 말로 웃으며 벽을 쳤다.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주방장이 아침부터 온 정성을 다해 만들었을 식사는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름 상사라고 칭할 수 있는 상대와 싸움 아닌 싸움을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차라리 밉보여서 제 목을 잘라준다면 더 잘된 일 아닌가 싶어 굳이 사과의 말을 올리진 않았다. 그렇게 스가와라 코우시만이 편했을 식사 시간이 끝나고 그 누구도 원치 않는 티 타임까지 이어진 후에야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차 준비할 테니, 타고 가요."
"아뇨! 괜찮아요. 택시가 편해요."
코우지로의 배려에 쿠니미가 서둘러 거절했다. 오이카와 역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준비해준 차라니, 순수한 의도일지 몰라도 불편했다. 다행히 거절이 의심쩍지는 않았는지, 그는 더 권하진 않았다.
"그럼... 택시 타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나도 갈래."
이제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조용히 있던 우리 도련님께서는 마지막에 끼어드시는 걸까.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있던 체리를 쏙 입으로 밀어 넣으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건 저만이 아니었는지 스가와라 코우타가 함께 일어섰다.
"안돼. 넌 네 방으로 돌아가."
"배웅하고 같이 돌아가면 되잖아."
"코우시."
"...그럼... 그럼 저택 현관까지만.. 밖으로 안 나갈게."
저택에서 정문까지는 정원이 전부였다. 그냥 꽃이 심어져 있고, 관리가 잘 된 나무들이 즐비했다. 정원사들이 있긴 했지만, 슬쩍 창문을 내다보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밖에 나갈 수 없다니.
"사와무라!"
"네."
"저택에 있는 사용인들 다 물러나게 해. 코우시가 돌아갈 때까지."
"처리하겠습니다."
문밖에 서 있던 사와무라의 목소리와 함께 여러 발걸음이 분주하게 사라지는 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그 소리들이 불만인지 스가와라 코우시의 표정은 어두웠으나, 그에 대해 따지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눈을 떠 자신과 마주할 뿐이었다. 풀이 죽은 그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으니 그가 왜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했는지 알 거 같았다. 완벽한 외부인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그를 이 밖에서 꺼내주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뭐라도 잡고 싶었던 거겠지. 그게 무엇이든. 도련님의 귀찮은 소원에 말려들었다는 생각에 오이카와는 슬쩍 입술을 훑으며 시선을 피했다. 살아가는 데 자신을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누군가를 위하고 배려하는 건 알고 싶지도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쿠니미의 인사를 끝으로 키친을 나섰다. 모두가 사라진 커다란 복도는 너무도 조용한 나머지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함께 배웅하겠다고 나선 스가와라 코우시는 두어 발자국 앞서 걷기만 할 뿐, 별말이 없었다. 그렇게 조용하게 걸어 도착한 현관, 문을 열어주며 스가와라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놀러 와요."
사용인의 파트너에게 던지기엔 참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나쁜 소리도 아니었고 어차피 예의 갖춘 빈말일게 뻔한 소리였기에 쿠니미는 가볍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럼, 택시 태워다주고 오겠습니다." 딱히 그러지 않아도 됨을 알지만, 아직 연극의 막이 떨어지진 않았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를 남겨두고 쿠니미를 따라나섰다.
"...아예 저택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거예요?"
걸음을 옮기며 쿠니미가 속삭이듯 물었다. 오이카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스가와라를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요 이틀간 스가와라 코우시가 별채에서만 지냈다. 가장 많이 나온 게 오늘이었다. 첫날도 그리고 어제도 그는 별채 안에서만 머물렀다. 나가겠다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마 나가겠다 선언했어도 아까 코우타의 반응을 보니 허락받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막내아들이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무덤까지 다들 싸고 갈 것도 아니면서 너무하네."
"..."
"아니면 혹시 오랜 혼담이 있나? 정해둔 상대가 있어서 행동 조심시키는 걸 수도 있잖아요? 과하긴 해도."
"알게 뭐야. 그보다, 안 피곤해?"
"피곤하죠."
미리 열어뒀는지 잠겨있지 않은 정문 앞에 서며 쿠니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평소에 그를 생각하면 오늘은 정말 많이 힘내준 편에 속했다.
"비용은 마츠카와상에게 받을게요."
"대신 상황 설명 좀 해줘."
"그 수당도 마츠카와상에게 달아 둘게요."
"마음대로 해."
"그럼, 조심해요. 부디 7개월 뒤에 아이 데리고 와달라는 이야기 없게만 해주세요."
농담 아닌 농담에 웃으며 문 너머로 쿠니미를 배웅했다. 택시까지 불러 줬는지, 그가 차에 올라 멀어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오이카와는 걸음을 돌렸다. 아름다운 정원, 커다란 저택. 항상 파티가 열리고 사람들이 오가도 이상하지 않을 이 화려한 풍경에 적막이라니. 오이카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현관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스가와라에게로 향했다. 발 하나 뻗는다고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는 참 착하게도 열린 문의 뒤, 저택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갈까요?"
이곳은 그의 집, 그의 성, 그의 왕국.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가 길을 잃은 미아처럼 느껴져 오이카와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 손을 붙잡았다. 빠르고 또 급하게. 이건 당신의 생명줄이 아닙니다. 동아줄도 아니에요. 그리 말해주려다 오이카와는 입을 다물었다. 정신적인 피로가 몰려와 파도처럼 몰려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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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쓸 계획이 없던 2편이라... 설정에 이런저런 빵구가 많을지도...
퇴고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