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커튼콜 선입금 특전으로 나갔던 카피본입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 첫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For the FirstTime
빌어먹을. 오이카와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욕설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물에 젖은 솜 마냥 무거운 몸을 부축했다. 술이 약하면 적당히 받아먹던가. 미련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오이카와는 치미는 짜증을 애써 눌러 담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옅은 머리카락을 내려보았다. 오이카와의 어깨에 대충 한 팔을 둘러 메어진 사내는 완전히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택시에서 몇 번이고 집 주소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몰라."였고 심지어 핸드폰마저 비밀번호가 걸려있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후- 참자. 참아. 오이카와 토오루."
그렇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막 내린 호텔로 들어서려는 찰나, 오이카와의 귓가로 아주 작지만 선명하게 찰칵하고 울리는 셔터음이 들렸다. 최근 계속 신경을 잡아먹는 누군가의 시선을 알고 있었기에 오이카와는 셔터음이 울렸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찰칵하고 소리가 울렸다. 파파라치인지, 아니면 2달 전부터 자신에게 붙은 스토커인지 알 수 없었으나 오이카와는 깡그리 모든 것을 무시하며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스가와라 코우시, 사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말해주기 전까지 오이카와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고등학교 시절에 카게야마 토비오의 선배로 이름을 몰라 2번군, 상쾌군과 같은 호칭으로 대충 지칭했었으니 이름따위 기억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이름조차 몰랐던 그는 반듯한 방송국 기자가 되어 오이카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시절보다 조금 키가 자란 것을 제외하면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옅은 머리색도, 눈가의 점도, 호리호리한 체격도, 약간 선이 고운 얼굴도. 아는 척을 하니 금세 당황해서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는 것이 즐거웠다. 인터뷰 자체는 무척이나 귀찮았지만 자신을 의식하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모습은 재밌어서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답하고 질문에 응했다. 그리고 애초에 계획에도 없었던 식사를 제안했다. 당연히 싫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그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좋아."라며 흔쾌하게 OK 사인을 던졌다.
그렇게 잡힌 갑작스러운 식사는 괜찮았다. 식사 시간까지는. 자주 가는 초밥 정식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정말로 괜찮았다. 문제는 술이었다. 가볍게 곁들여 마실 생각으로 주문했던 일본주를 거침없이 마셔대더니 그대로 녹다운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서러운지 "사회부에서 1년만 더 일했으면 내 몸은 반으로 줄어 들었을 거야." "연예인 놈들 비위 맞춰주는 거 진짜 짜증 나." 등등의 말로 시작된 술주정은 이내 신세 한탄으로 바뀌었다. 반듯하고 올곧은 이미지의 사내가 술에 취해 징징거리는 게 재밌어서 가만 두었던 게 잘못이었다.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질 줄이야. 그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술조차도 입에 못 대게 했을 것이었다. 뭐, 후회해도 이미 늦은 일이지만.
"읏차-"
오이카와는 스가를 침대 위로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이 험난한 여정 덕에 땀으로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대로 두고 가도 괜찮겠지? 쪽지라도 적어 놓고 가는 게 나으려나? 최소한의 예의는 남겨둬야 나중에 공적인 자리에서 만나도 껄끄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오이카와가 서둘러 펜을 찾았다. 어쨌든 상대는 방송국 기자였고 스포츠를 담당하고 있으니 배구 선수인 오이카와가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괜히 밉보여서 좋을 것도 없었고. 천천히 방을 둘러보며 펜과 종이를 찾던 오이카와는 이내 지잉-지잉- 자신의 바지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음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라는 기본적인 궁금증도 없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도착한 메시지를 열어 확인했다. 누군지 너무도 예상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 누구예요?]
의미 없이 나열 되어있는 번호로 온 메시지는 2달 전 즈음부터 오이카와에게 붙은 스토커였다. 가끔 집이나 핸드폰으로 걸어오는 전화나 남기는 음성 메시지로 여자라는 것만 알뿐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 사는지 오이카와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일부러 여자들까지 만나고 다녔다. 그것도 쉼 없이 갈아치워 2달 동안 여섯 명이나. 여자들과 시간을 보낼 때에도 항상 이런 문자가 왔다. [그 여자 누구예요?] [그 여자 배우 맞죠? 그 가볍게 다리 벌리고 다니는 여자 맞죠?] [그런 여자 오이카와상이랑 어울리지 않아요.] [오이카와상이랑 어울리는 여자는 저예요]와 같은 메시지들이. 물론 오이카와는 일부로 가볍다고 이 업계에 유명한 여자들을 골라 만났다. 그래야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지고 더러운 스캔들에 엮이지 않을 테니까. 이용할 목적으로 만나는데 괜히 질척거리고 늘어지면 스캔들로 이어질 게 뻔했다. 그렇게 이어진 스캔들은 오이카와 자신의 이미지를 떠나 현재의 자신의 팀에게 피해로 이어질 테니 피하고 싶었다. 리그 2위로 올 시즌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은데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스토커도 신고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오이카와상이 남자를 만나다니. 절 속이려고 하지 마요.]
[그 여우 같은 놈 당장 내보내요.]
지잉,지잉. 이어서 오는 메시지를 확인 한 오이카와는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해 거칠게 구석으로 던졌다. 퍽,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계가 벽에 맞고 떨어졌다. 아까 분명 사진을 찍은 것도 그녀일 것이었다. 창가로 다가가 호텔 아래를 확인했지만 딱히 이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마른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훑으며 커튼을 쳤다.
"나... 물."
방을 울리는 목소리에 오이카와가 천천히 돌아서자 침대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스가가 눈조차 뜨지 못한 채로 물을 찾고 있었다. 진짜, 가지가지 한다. 스토커에 술주정뱅이에- 오이카와는 속으로 얕게 씹어대며 서둘러 룸에 설치된 냉장고를 열었다. 기본 서비스로 제공되는 생수를 까 내밀자 스가가 목이 탔는지 허겁지겁 그것을 받아 마셨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물이 입을 타고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대로 마셔."
날이 선 말투로 오이카와가 요구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스가는 대충 입가를 닦아내며 물병을 다시 내밀었다. 그리곤 꿈뻑꿈뻑 느리게 눈을 감아 뜨며 오이카와를 올려보았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래."
"어? 오이카와 토오루네?"
"... 무슨 헛소리야.. 그보다 정신이 들어?"
"아니, 너무 어지럽고 속이 아파."
고개를 살살 저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투정을 한다. 기다려, 편의점에 가서 술 깨는 약이라도 사올게. 오이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자신의 셔츠 자락을 붙잡는 스가의 행동이 아니었다면.
"왜 뭐 필요한 거 있-"
어? 라고 물으려던 오이카와는 이내 "우욱-"하는 소리와 함께 자신을 붙잡고 거하게 쏟아내는 스가의 행동에 말을 잊고 말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후두둑 토사물이 셔츠에 젖어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오이카와는 꽉 주먹을 쥐었다. 참아야 한다. 자신은 운동선수니 일반인을 함부로 때려서는 안 되고 상대는 무려 중학교 후배의 선배이자 방송국 기자였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참을 인자를 그려 넣으며 오이카와는 자신의 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이 시간에 호텔에서 세탁 서비스를 해줄 리가 만무했으니 자신이 이 모든 뒤처리를 감당해야만 했다.
"아... 나 죽을 거 같아."
"...내가 죽을 거 같아."
그러거나 말거나 오이카와는 울먹이며 침대로 쓰러지려는 스가의 팔을 붙잡아 서둘러일으켜 세웠다. 저 상태로 침대에 누우면 침대 시트까지 엉망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흥건한 토사물에 닿지 않게 스가를 끌고 욕조로 집어넣은 오이카와는 서둘러 스가의 옷가지를 벗겨냈다. 자신이 옷보다야 덜 묻어서 대충 물로 흔적만 지우면 말끔할 것 같았다.
"싫어, 벗기지 마-"
"벗어야 세탁할 거 아니야."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끈기있게 대답해주며 옷을 벗겨냈다. 속옷까지 다 벗겨낸 후에 거침없이 물을 틀었다. 쏴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싫은지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무시하며 서둘러 턱을 붙잡아 입을 헹구도록 했다. 남자 둘이서 욕실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오이카와는 남이 보면 참 웃길것 같은 이 상황을 애써 무시하며 스가의 젖은 머리를 넘겨주곤 욕조에 물을 받았다. 어쨌든 뜨뜻한 물에 담가 놓으면 술이 조금 깨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는지 따뜻한 물에 금방 노곤해진 스가가 젖은 얼굴을 욕조에 기대 누르며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예전 애니메이션인 시끌별 녀석들의 주제곡이었다. 다 큰 28살 남자가 술에 취해 부르는 애창곡이 <라무의 러브송>이라니. 오이카와는 세면대에 서서 옷들을 빨아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코올에 취한 혀가 제대로 가사를 뱉어내지 못했지만 듣기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 정도 주정이야 자신의 비싼 셔츠를 버린 것에 비하면 애교였다.
"...이거 한정판인데."
애교는 애교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눈앞에 점점 엉망이 되어가는 셔츠에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한정판으로 샵 매니저에게 직접 예약 넣어서 산 셔츠인데. 하지만 별수가 없어 세탁소에 맡겨야 할 셔츠를 호텔 비누를 사용해 빨아 꽉 쥐어짠 뒤 방으로 나와 테이블과 의자에 걸었다. 그리고 비치된 타올까지 이용해 바닥까지 싹 닦아냈다. 대학 시절에도 술 취한 동기들 뒤처리도 안 했는데 진짜 대단한 기자님이었다. 이제 저 인간을 어떻게 처리 해야 하나.. 오이카와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솔직하게 뱉어내며 다시 욕실로 들어섰다.
"이제 닦아내고 가서 자자."
"싫어, 따뜻해서 여기서 잘래."
"곧 차가워져."
애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는 스가를 억지로 물에서 일으켜 세운 뒤 꼼꼼하게 닦아낸 후 마른 타올을 둘러 밖으로 내보냈다. 가서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어! 물을 빼며 오이카와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지만 이내 쾅하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파!!!"라는 비명까지 들려왔다.
"젠장...!!"
열 걸음도 안되는 침대까지 왜 못 가는 건데? 오이카와는 서둘러 욕실에서 튀어나왔다. 테이블에 부딪혔는지 허리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진 스가가 고래고래 아프다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테이블은 멀쩡했다.
"아파.."
"그래, 아프겠지."
우는 소리를 내는 스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 오이카와는 부드럽게 침대로 끌고 가 앉혔다. 그리고 떨어진 수건으로 서둘러 몸을 둘러주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연신 허리가 아프다며 징징거리길래 하는 수 없이 슬쩍 손을 뻗어 부딪힌 부근을 손바닥을 이용해 마사지까지 해주었다. 침대 아래에 속옷 하나만 덜렁 걸치고 남자 허리를 마사지하고 있으려니 참 기분이 이상했다. 팀 전용 마사지사에게 전수받은 스킬이 효과는 있는지 더이상 스가는 칭얼거리지 않았다.
"멋있다."
"뭐가?"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감탄사에 오이카와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너."
"나?"
"응. 멋있어."
멋있다, 잘생겼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는데 이 상황에서 이 분위기에서 이 사람에게 들으려니 어쩐지 이상해서 오이카와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로 크게 웃으며 "내가 좀 멋있게 생기긴 했지."라며 농담하듯이 대답했다.
"아니, 얼굴 말고.. 물론 얼굴도 멋있지만..."
"얼굴 말고 뭐가 멋있는데, 그럼?"
"배구 선수로서 멋있어. 점프 서브도 엄청 멋있고, 코트 위에서 에이스라는 느낌이 팍팍 드는 게 멋있어."
"점프 서브는 나 말고도 토비오짱도 하잖아. 걔는 심지어 천재라고."
"너도 천재잖아."
그렇게 떨어지는 말에 오이카와는 피식 웃었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었다. 천재인 척 하는 노력가일 뿐이었다. 카게야마 토비오같은 재능은 자신에게 애초에 주어진 적도 없었다. 그저- 그런 후배에게 붙잡히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앞만 보고 달렸더니 이 정도가 된 것뿐이었다.
"난 천재가 아니야."
"나에 비하면 천재지. 나는 너 같은 노력도 할 줄 몰랐고, 끈기도 없고, 능력도 없었는걸.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기자가 되었잖아."
"..."
"나처럼 포기 안 하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멋있어."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그 칭찬에 오이카와는 오늘 처음으로 시원하게 웃었다. 그래, 누군가에게 자신은 이 모습 그대로도 멋있게 보이는구나 싶어서.
"아, 역시 얼굴도 멋있어. 웃으니까 더 멋있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비행기 태워. 그렇게 안굴어도 오늘 일은 용서-"
해줄게. 너그러운 척 그렇게 말하려던 입은 부드럽게 부딪혀오는 다른 온기에 먹혀 사라지고 말았다. 물에 촉촉하게 젖은 부드러운 입술은 조심스럽게 오이카와를 머금으며 혀를 내었다. 지금, 키스하는 건가? 왜?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스가의 행동에 어정쩡하게 굳어버린 오이카와는 눈을 내리감은 채로 입을 맞추는 스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 헹구긴 했어도 아까 토했는데. 문득 그런 현실적인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다가온 입술을 거부하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장 조심스러운 입맞춤을 했다.
"해보고 싶었어. 잘생긴 남자랑 키스."
"...뭐?"
촉-소리가 나게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스가가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먹으니까 이제 바에 가도 괜찮은 사람이 없거든. 뭐 나는 원래 괜찮은 남자 만날 팔자가 없는 걸지도 몰라."
풀썩 몸을 뒤로 뉘이며 침대로 쓰러진 스가가 그렇게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바? 괜찮은 남자? 설마 게이였어? 오이카와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당황스러움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술에 취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기억도 못 할 스가는 웃으며 조잘조잘 자신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첫사랑은 대학교 선배였는데 완벽한 이성애자라서 고백도 못했거든. 그 선배 얼굴이 진짜 취향이었는데. 너보다는 덜 잘생겼지만 잘생겼었어. 그래서 막 바에 가서 술을 마셨는데 누가 내 얼굴이 취향이라면서 자자고 하잖아. 그렇게 첫 경험을 날렸다니까아? 진짜 너무너무 아파서 욕이 나왔는데 그래도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건 중요하잖아. 그래서 나름대로 버티고 참았거든. 그런데 매정하게 나만 방에 두고 나가버리더라."
살짝 돌아누운 스가가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는 오이카와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냥 막 여러 사람들을 만났어. 그런데 다 나에게 원하는 게 똑같더라. 그냥 하룻밤. 그거 말고는 없는 거야. 그렇게 만나다 보니까 나도 막 가벼워지는 거야. 그 사람들이랑 똑같이 되어가더라고. 그러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연애를 했는데... 글쎄! 양다리인 거 있지?! 나 말고 다른 남자가 있더라니까?! 심지어 내가 세컨드였어. 최악이었지! 와...!!"
"그래서?"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래서 또 막살다가... 누굴 또 만났는데 이번엔 사귄 지 2달 만에 청첩장을 주더라고. 하하하 완전 웃기지? 청첩장이라니까? 그거 받고 내가 얼마나 황당하던지... 그놈들이 차라리 오이카와 너처럼 잘생기기라도 했으면... 아, 얼굴값 하는구나 하고 넘길 텐데... 더럽게 못생긴 놈들이 내 진심 가지고 장난치고!! 그래도 막 이십대 초반에는 적당하게 괜찮은 애들이 막 접근도 해왔는데 이제 28살이 되니까 그런 것도 없더라."
"그래서, 궁금했어? 잘생긴 남자랑 하는 키스?"
"응. 끝내주네. 헤헤.... 나도 이제 28살인데 이렇게 장난처럼 막 만나고 그러면 안될 텐데... 우리 부모님이 나 걱정하는데... 게이인 것도 모자라서 진득하게 연애도 못 한다고... 근데 나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야. 여유도 없고 시간도 없어. 기자 일이 얼마나 바쁜데에! 그래도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잖아... 이런 나라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는 게... 그게 이상한 게 아니잖아."
어느새인가 스가의 눈에 물이 맺혔다.
"누군가의 처음이 되고 싶은 게.. 나쁜 게 아니잖아. 나를 처음으로 위해주길 바라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
그 눈물이 굴러 시트로 흩어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싶어. 제대로 된 연애를 하고 싶어.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싶어. 그리고 사랑받고 싶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그 순간들은 도대체 언제 오는거야?"
울먹이는 그 질문에 오이카와는 어떠한 대답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왜냐면 오이카와 역시도 그 처음이라는 것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시절에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만났던 여자친구들이 뭘 좋아했는지도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는 바빠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며 진지하게 만날 틈이 없었다. 그런 날들 속에서 자신의 처음은 언제나 배구였다. 그걸 이길 만큼의 어마어마한 인연이 아직까지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그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에게도 그 순간이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 완벽한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스가는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훌쩍이며 우는가 싶더니 이내 방에는 조용한 숨소리만이 가득 찼다.
"언젠가는 오겠지."
그 언제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바람인지, 위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조금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입에 담았다.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오이카와는 불편하게 누운 스가를 바르게 침대에 눕힌 후 흔들리지 않게 옆자리에 누웠다. 일단은 자자. 자고, 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마음 구석으로 감춰두자. 그렇게 좋은 마음을 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날, 쪽지 하나 없이 사라진 싸늘한 옆자리를 보며 오이카와는 낮게 욕설을 뱉었다. 내가 비밀이야기도 들어주고, 술주정도 받아주고, 씻겨주고, 빨래까지 했는데 인사도 없이 튀어? 셔츠값도 청구를 못 했는데?! 으득 이를 씹으며 일어선 오이카와는 지난밤 자신이 던졌던 핸드폰부터 다시 조립했다. 다행스럽게도 액정이 나가지 않은 기계는 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어마어마한 양의 메시지들을 토해냈다.
[그 남자 가짜라고 말해요.] [재미없는 연극 그만둬요] [오이카와군이 게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날 속이지 마요.] [얼른 나와요. 나 여기서 기다릴게] [그 남자 가만 안 둘 거에요] 등등 쉬지도 않고 스토커로부터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지금까지 여자랑 밤을 보낸다고 해서 이 정도로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을까? 가만히 액정을 들여다보던 오이카와는 퍼뜩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대로 밀고 나가면 망할 스토커도 질려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자신하고 될 리 없는 게이라는데? 자신이 생각해도 꽤 괜찮은 것 같아 오이카와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자신의 한정판 셔츠값은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다른 것으로 갚게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며 오이카와는 주름이 잔뜩 진 자신의 셔츠를 집었다. 그때에는 아직 몰랐다. 자신에게 있어 진심을 다할 상대가, 사랑스러움으로 넘치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될 순간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그게 스가와라 코우시라고는 오이카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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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은 수정하지 않았어요. 2년 전 글을 발굴하는 그런 미친 짓은 다시 하지 않겠읍니다.
구매해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