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왔어요."
익숙한 현관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달그락 달그락 주방에서 울리던 소리가 멈추고 오랜만에 마주하는 어머니가 웃으며 "토오루!" 라고 반겨왔다. 와락 안기는 그녀의 몸을 안으며 오이카와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들 얼굴 처음 봐요? 뭐 이렇게 반겨?"
"그럼 반기지! 이 비싼 얼굴 보기가 쉬운가? 아이고, 얼굴이 또 왜 이렇게 상했어?"
"상했다고요?"
절대 아닌데. 오이카와가 능글맞게 웃으며 떨어지는 자신의 어머니를 놓아주곤 운동화를 벗었다. 무릎은? 하고 묻는 그녀의 걱정스러운 말에 뒷목을 습관처럼 긁적이며 "그냥 뭐 뻔하죠."라며 둘러 말했다. 무릎이 좋지 않은 것은 오이카와의 배구 인생의 고질적인 문제점과도 같았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하기가 무섭게 또 아작이 날 줄이야.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차라리 시합 중에 다친 거라면 억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습지도 않게 팀 훈련 중에 동료 선수와 충돌로 넘어지면서 다쳤는지 갑작스러운 통증이 몰려와 설 수가 없었다. 결국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병원에 갔더니 지긋지긋한 부상 판정이었다. 무릎과의 싸움은 오이카와가 프로 선수로 데뷔하면서 줄곧 안고 있던 문제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데뷔 시즌에는 전방 십자 인대 파열로 수술과 전치 6개월이라는 어마어마한 선고를 받기도 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인대 문제로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라 수술 없이 전치 8주라는 판정이었다. 말이 8주이지 인대가 붙고 떨어진 제 폼을 끌어 올리고 제대로 코트에 서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다리에 둘린 깁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어머니에게 걱정 말라며 거짓으로 웃은 후 오이카와는 오랜만에 방문한 자신의 본가에 들어섰다.
"타케루는요?"
"아직 학교 가서 안 왔어."
타케루는 오카이와의 조카였다. 결혼을 서둘렀던 누나가 낳은 하나뿐인 조카로 오이카와하고는 꼬박 8살 차이가 났다. 대학을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 집에서 모두 같이 살았는데 현재는 누나는 매형의 전근으로 함께 외국에 나가 있었고 타케루는 이곳에서 홀로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혼자 남겨진 게 조금 외로울 만도 할 텐데 워낙 어릴 때부터 제집처럼 이곳을 드나들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녀석은 적응을 잘 해나가고 있었다.
"타케루가 올해 몇 학년이죠?"
"걔? 고등학교 2학년이잖아."
"우와, 시간 진짜 빠르다."
타케루가 어릴 때는 돌보는 것이 대부분 오이카와의 몫으로 떨어져 아이가 자란다는 말이 그다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과 함께 집을 떠나 지냈던 오이카와에게 그 어린 조카가 벌써 18살의 소년이 되었다는 소식은 놀라우면서도 이상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조금 징그럽다는 생각까지 들어 웃음이 나왔다.
"여자친구는 있데요?"
"뭐 가끔 집 앞에서 기다리는 애들은 있더라. 누구 닮았는지 배구공 말고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낳기는 네 누나가 낳았는데 왜 널 닮아가는지 모르겠어."
"배구공에 관심 있는 게 어때서."
"거기에만 집중하니까 문제지. 그래도 최근에는 생긴 것 같아."
주방으로 향하던 어머니가 돌아 웃으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누구요? 여자친구? 익숙한 소파에 몸을 앉히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속삭였다.
"담임 선생님."
"...선생님이요?"
"그렇다니까? 배구 말고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어서 숙제 안 해서 혼나고 시험 못 봐서 엉망인 성적표 들고 오더니 2학년 들어가서 얼마나 착실해졌는지. 밥상 앞에서 맨날 담임 선생님이 어쩌고~저쩌고~"
"푸핫, 청춘이네."
얼마나 미인이길래 저를 닮은 배구 바보 타케루를 함락시켰는지 꽤나 궁금해졌다. 어차피 그 나이 때의 소년들이 가질 수 있는 아주 조금의 망상과 꿈이 이루어낸 것이겠지만,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로도 어른이 된 오이카와에게는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사내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을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제 아들도 아닌데 참 우스운 생각이었다. 오이카와는 그리 생각하며 얼른 오랜만에 볼 조카의 얼굴을 떠올렸지만 만난지 오래된 탓인지 쉬이 그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녀석도 그리 양반은 되지 못하는지 타이밍 좋게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저 다녀왔어요!"
우렁찬 소년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쿵쿵, 더는 아이의 것이 아닌 무게를 담은 발소리와 함께 검은색 가쿠란 교복을 빼입은 소년이 싱글싱글 웃으며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곤 오이카와를 발견하고는 크게 눈이 커졌다.
"토오루!"
"오랜만이다?"
"언제 왔어? 무릎은 괜찮아?"
보다시피. 오이카와는 말 대신 손가락으로 콕콕 제 오른쪽 다리의 깁스를 가리켰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아이는 살짝 울상인 얼굴로 "아파?" 라며 걱정스레 물어왔다. 훌쩍 커버린 녀석이 지어낸 그 표정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았다.
"아냐, 전치 8주고 집에서 휴식하면서 재활 다니면 금방 나아."
"오, 다행이네? 그럼 아쉽지만 이번에 배구 연습 도와달라고 하는 건 그만둬야겠다. 토오루 오기를 기다렸는데."
"너 배구 아직도 해?"
"응. 학교 배구부에도 들어갔는걸? 뭐, 고작 7명밖에 안되는 작은 팀이지만."
히죽 웃으며 그리 말한다. 7명이라니, 아슬아슬한 숫자였다. 학교가 어디랬지? 오이카와의 질문에 녀석은 제 가쿠란에 박힌 학교 마크를 가리키며 [야마노자카]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하지만 그 자랑스러움에도 오이카와가 알고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아 맞다, 할머니! 저 학교에서 진로 상담 있다고 다음 주에 보호자 모셔오라고 하는데요~"
오이카와 무릎에 붙어있던 타케루는 급히 생각났는지 제 가방을 뒤적여 통신문을 들고 쪼르르 주방으로 향했다.
이제 나란히 서면 고작 손 한 뼘도 나지 않을 만큼 아이는 자라 있었다. 소년의 어깨는 사내의 태를 내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성큼 자라버린 조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오이카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자신이 태어나서 스무 살까지 자라 지냈던 집안을 둘러 보았다. 거실 한구석의 장식장에는 자신이 어릴때부터 타왔던 여러 트로피가 빛을 잃은 채로 하염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창 앞에는 여전히 아버지가 취미로 기르는 식물들이 저무는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이제 자신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은 도쿄에 있는 맨션이었지만 휑한 그 공간보다 이곳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창가로 쏟아지는 주황색의 저무는 빛을 받아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집으로 오는 신칸센 안에서 뒤쑤셔지던 부상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안은 적막하게 몸 안에서 그렇게 가라앉아 내렸다.
***
고질적인 무릎 부상은 언제나 오이카와 토오루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특히 데뷔 직후 시즌에서 6개월이나 아웃당한 날들은 고통만 남은 추억이었다. 자신은 여전히 코트에서 뛰고 싶었고 땀을 흘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가장 빛날 자신도 있었다. 부상을 끝내고 다시 그 위에 서면 언제 아팠냐는 듯 훨훨 날아다녔지만 그럼에도 부상에 대한 걱정은 언제나 들러 붙어왔다. 모든 운동선수가 그렇겠지만 오이카와에게는 그 걱정은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는 가끔씩 슬럼프가 되어 오이카와의 발목을 질척하게 붙잡아 왔다. 이번 시즌에도 그랬다. 시작과 함께 몸이 삐걱거림을 느꼈다.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자신의 다리가 미웠다. 그것을 제대로 돌리기 위해 무리해서 독하게 훈련에 참가했더니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무릎을 아껴, 운동선수 생명 연장 하고 싶으면. 팀 닥터의 매정한 말에 "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아끼고 있어요."라고 항의해 보았지만 그가 제 무릎은 아니었으니 통할 리가 없었다. 뼈가 자리를 잡아가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연습을 하고 버텨온 결과가 고질적인 부상이라니. 이 자리를 위해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텨온 것이었는데 그 시간이 남긴 것이 이것뿐이라니.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재활을 잘해서 다시 경기에 나가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오이카와는 오로지 무릎을 되돌리는데 모든 하루를 투자하고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구단 트레이닝장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평소보다 더 많은 연습 메뉴에 매달렸다. 불편한 무릎을 안고 재활의 목적이라며 아침 러닝까지 강행했다. 안 그래도 활약이 좋지 못했던 와중에 부상이라니. 이대로 자신이 설 발판이 사라질까 두려워 겁이 나고 초조해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그런 자신이 보기 싫었는지 팀 매니저가 결국 모든 훈련 메뉴를 중단시켰다. 항의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그녀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다 무릎 더 아작나기 전에 그만둬." 아작이라니, 전 되돌리려고 하는 건데요. 짜증을 섞어 말했더니 그녀는 신칸센 티켓을 내밀었다. "네가 부상에 얼마나 예민한지 다 알아. 네 자리는 언제나 비워져 있으니까 걱정말고 머리 좀 식힐 겸 돌아가서 쉬다 와." 전 쉴 필요 없어요. 제가 왜 쉬어요. 제가 있을 곳은 여기예요. 코트 위에요. 억지를 부리는 오이카와의 말도 그녀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쫓겨나다시피 밀려나는 등 뒤로 그녀는 멋대로 숙제를 내었다.
"너는 지금 슬럼프와 부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코트 위에서 오로지 집착만 내보이고 있는 거야. 꼴사나운 오이카와군. 가서 네가 품었던 순수한 열정을 좀 되찾아와."
라고.
"순수한 열정이라"
그런 게 있었던가. 천재라고 불리우던 중학교 시절부터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집착뿐이었다. 코트에 서야 한다는 집착. 내가 서야 한다는 그 집착. 최고가 되고 싶었고 승리자가 되고 싶었다. 거기에 열정은 당연히 뒤따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에게는 늘 그 집착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멍하니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잘하는 일을 잘하고 싶다. 최고가 되고 싶다. 이것은 그 순수한 열정에 속하지 못하는 걸까. 그저 그런 집착으로 치부되는 걸까. 사실 자신의 안에서 그 두 가지의 차이점을 찾아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답을 찾아내는 것이 귀찮았다. 어차피 무릎은 곧 돌아올 터였고 자신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굳이 답을 찾아낼 필요는 없었다.
"토오루!"
"네?"
어린 시절 붙여 놓았던 빛바랜 야광별 스티커를 노려보던 오이카와를 현실로 이끈 것은 노크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어머니였다. 그녀는 어디 가는지 한껏 치장한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혹시 오늘 타케루 상담 대신 좀 다녀올 수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진로 상담이다 뭐다 저번 주에 자신이 왔던 날 호들갑을 떨던 타케루가 떠올랐다.
"문화센터 제과 수업이랑 겹쳐서. 괜찮으면 네가 대신 다녀와."
"제가 가도 되는 거에요?"
"응. 삼촌이잖아. 보호자니까 상관없지."
삼촌이라. 낯선 호칭이었다.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가 달라며 부탁하는 그녀의 말에 오이카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반듯하게 차려입고가! 타케루 망신시키지 말고! 단호한 잔소리에 또 한 번 대충 대답한 후 오이카와는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반듯하게 차려입을 게 뭐가 있더라. 그보다, 고작 고등학교 진로 상담에 반듯하게 차려입고 갈 필요성이 있나? 거기다 난 지금 이대로도 반듯한 데? 오이카와는 시트에서 서둘러 얼굴을 떼어내며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눈에도 자신이 그리 썩 마음에 드는 꼴은 아닌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자신이 챙겨 온 가방을 뒤적였으나 <반듯한>에 해당되는 차림이 무엇인지 몰라 고를 수가 없었다.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셔츠와 티, 그리고 간절기용 외투가 전부였다. 나름 진로 상담이라니 무게를 잡고 가야 할 것만 같은데 영락없는 대학생으로 보일 법한 의상들이었다. 다시금 끄집어냈던 옷가지들을 쑤셔 넣으며 이번엔 방에 남아있던 옷장을 열었다. 안 입어서 두고 간 옷들이 가득 걸려있었다. 촤락 촤락 옷걸이를 밀어내 옷을 뒤지며 그나마 고교 졸업 후 매형에게 받았던 수트 하나가 눈에 걸렸다. 거울을 보며 몸에 대어보니 얼추 맞을 것 같기는 한데 그동안 훌쩍 자란 자신에게 좀 타이트해 보이기도 했다. 특히 바지 길이는 조금 짧아 보였다. 패션이라 우기며 괜찮은 삭스와 슈즈를 갖춰 신으면 나름대로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걸로 정하고..."
고른 옷은 대충 침대 위로 던져 놓았다. 그래도 중요한 자리라고 이 꼴로 반듯한 성인을 흉내 내려는 자신이 우스웠다. 가만히 던져진 옷을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천천히 손가락을 세워 콧등을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짜증이 날 때 모든 신경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는 습관이었다.
오후 느지막이 어머니가 차리고 간 식탁을 치우고 씻었다. 욕조에 앉아 탈부착이 가능한 깁스를 풀어내곤 면도를 했다. 치덕치덕 크림을 발라 깔끔히 물에 털어 얕게 난 수염까지 밀어낸 후 머리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침대에 올려놓은 아까의 그 맞지 않는 수트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었다.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가을 남자의 필수 아이템이라며 누나에게 선물 받았던 트렌치를 걸치면 그나마 흉한 핏은 가려질 것 같았다. 튀어나온 복숭아뼈는 부드러운 촉감의 양말로 가려 감추고 가방은 두고 지갑만 챙겨 집을 나섰다. 현관으로 나와 왼쪽에는 로퍼를 오른쪽에는 다시금 깁스를 고정해 채우며 목발을 들었다. 목발과 깁스는 이제 익숙하고 또 익숙한 친구와 같았지만 여전히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다. 타케루의 학교까지 가는 길을 모르니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을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조금만 고생하자는 마음으로 꾹 목발을 쥐고 집을 나섰다. 모두가 세상으로 나간 낮의 동네는 고요하고 적막했다. 근처에 유치원이라도 있으면 조금 활기가 느껴질 텐데 그저 촘촘히 집들이 들어선 주택가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그 고요를 깨는 목발 소리를 내며 큰길까지 나가 어렵지 않게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모시냐는 기사님의 말에 웃으며 [야마노자카 고등학교]라는 이름을 대었다.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 금방 도착하겠거니 생각했던 택시는 달리고 또 달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넘어 한적한 곳에 덜렁 놓인 학교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택시를 타도 30분이 더 걸리는 거리였다. 여기까지 등교를 한단 말이야? 오이카와는 제 조카의 어마어마한 등굣길을 계산하며 질린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자전거든 버스든 마음 잡고 달려도 넉넉잡아 한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 이런 곳에 있으니 배구부에 7명밖에 안 들어가지. 자신이 나온 아오바죠사이도 번듯하게 아직 있는데 왜 이런 학교에 왔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오이카와는 제 뒷목을 주무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교문을 넘자 기분이 이상했다. 교복을 입고 번질나게 넘어서던 그 교문을 다 큰 어른이 되어 수트 차림으로 넘게 되니 정말로 자신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하교 시간인지 저를 흘끗 바라보며 움직이는 학생들 틈에서 오이카와는 떠올렸다. 이 아이들 눈에 자신은 어른으로 보일까. 이제 막 26살, 흐름에 따라 사회로 던져졌지만 자신은 여전히 어른이라는 자각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 어른이 무엇인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얼굴에 박히는 시선들에 유하게 웃으며 넘겼다. 수군거리며 "오이카와 선수야." 라고 저를 알아보는 말들은 이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나저나 타케루가 몇 반이지? 교실로 가야 하나? 아니면 상담실? 목발에 힘을 줘 기댄 채로 오이카와는 멍하니 학교 교내 안내판을 바라보았다. 바라보아도 딱히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 아무래도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싶어 휴대폰을 꺼내는데
"토오루!!!!"
그보다 빨리 조카가 자신을 발견했다. 쾅쾅쾅 계단을 2칸씩이나 밟고 내려온 녀석이 씩씩거리며 "여기는 무슨 일이야?!"라고 따져 물었다.
"너 진로 상담 내가 하러 왔어."
"토오루가 왜?!"
"왜냐니, 다들 바쁘니까."
마치 자신이 온 것이 큰 방해라도 되는 마냥 굴었다. 뭐야,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길래 저렇게 입까지 내밀면서 싫다는 티를 팍팍 내는지 알 수 없어 오이카와는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상담 어디로 가서 받으면 됩니까, 타케루군."
"안 받아도 돼."
"뭐?"
"그냥 돌아가라고."
보호자 없이 진로 상담을 어떻게 하겠다고 이런 억지를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어이없는 기분으로 혹시나 싶어 물었다.
"너 설마, 담임 선생님 때문에 그래?"
"뭐어? 거기서 우리 선생님 이야기가 왜 나와?"
"어머니가 그러던데. 네가 완전 푹 빠졌-"
다고 전하려던 말은 텁하고 뻗어온 손에 의해서 막히고 말았다. 씩씩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아낸 타케루는 "시끄러워! 다 듣잖아."라며 이를 악물며 짜증을 냈다. 아, 그러니까 진짜로 제 담임 선생님을 보여주기 싫어서 이런다 이거지? 청춘이네.
"담임 선생님께 이상한 소리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이상한 소리 뭐?"
"그... 내가 몇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쌌다던가, 초등학교 때 올 빵점을 맞았던 적이 있다던가 그런.. 창피한 과거 말이야!!"
본인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오이카와도 굳이 기억을 해낼 리 없었던 추억까지 떠들어대며 단단하게 주의를 시킨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같이 지냈고 자라온 자신이 그 창피한 기억을 선생님에게 떠들까 걱정을 한 모양이었다. 덩치만 커졌지 알맹이는 영락없는 초등학생과 같아서 오이카와는 어이가 없었다.
"진로 상담을 하러 왔는데 내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겠어."
"토오루는 성격 나쁘니까."
"오냐, 고맙다. 알았으니까 얼른 앞장서."
딱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초면에 만나는 담임 선생님을 앉혀놓고 제 조카의 창피한 과거를 A부터 Z까지 나열해 떠들 생각은 정말로 없었기에 오이카와는 당당한 마음으로 명령했다.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는지 머뭇거리던 타케루는 폭, 한숨을 내쉬고는 따라오라며 걸음을 옮겼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학교이긴 했지만 신설인지 교내는 깔끔하며 곳곳에 새것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학교 신설이야? 라고 물으니 이제 막 3년이 된 학교라며 타케루가 설명했다. 무사히 타케루가 졸업한다면 이 학교의 2회 졸업생이 되는 셈이었다. 깔끔한 복도를 걸어 도착한 곳은 <2-5>라 적힌 푯말 앞이었다. 상담일이라 모두가 빨리 떠났는지 안 쪽에서는 조금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똑똑, 예의 있게도 타케루는 문을 노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창을 열어 두었는지 가을바람이 적당하게 날려 오이카와의 힘을 준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타케루의 보호자인-"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매끄럽게 뱉으려고 열었던 입은 자신을 반기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굳어 사라지고 말았다. 놀란 저와 달리 조금의 미동도 없이 포근해 보이는 얇은 니트를 갖춰 입은 단정한 사내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타케루군의 담임인 스가와라 코우시 입니다."
그가 입은 니트 만큼이나 포근한 미소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포근함도 잠시, 자신의 앞에 비워진 의자를 권하는 그의 손길에 끌려 자리 잡고 앉으며 오이카와는 뚫어지게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가와라 코우시.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그리고 분명 저런 얼굴이었다.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만 자신의 네트 반대편에 서 있던 남자의 흐릿한 얼굴을 오이카와는 어렵지 않게 다시 그려낼 수 있었다. 제 중학교 후배였던 카게야마 토비오의 고교 선배이자 적으로 몇 번이나 네트를 가운데에 두고 만났던 사이였다. 저는 이렇게 똑똑하게 기억을 하는데 상대는 전혀 아닌지 변화가 없는 얼굴이었다.
"타케루군의 할머니께서 부모님 대신 오신다고 들었는데..."
"아, 저희 어머니가 바빠서요. 삼촌인 제가 대신 왔습니다."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가? 알 수가 없었다. 스스로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렇게 존재감이 옅은 인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상대가 더 옅은 인물일 텐데.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몰라보았다. 그런 상대와 달리 오이카와는 똑똑하게 머릿속으로 과거의 코트 위를 하나둘 그려내며 기억 속에서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웃는 얼굴과 달리 냉정하고 날카로웠던 그의 플레이 방식들. 벤치에서 울려 퍼지던 그의 강한 목소리들. 그런데 상대는 조금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니 허탈했다. 자신이 그 허탈함으로 당황하거나 말거나 선생님이라는 어색한 호칭이 붙은 그는 조근조근한 말로 타케루의 이름이 적힌 기록부와 함께 입을 열었다.
"타케루군 성적이 무척 좋아요. 2학년 올라와서 성적이 많이 올랐고요, 조금만 더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더 좋아질 거예요. 활동적이고 사교성도 좋아서 주변에 친구도 많아 학교생활에는 전혀 문제없어요."
찬찬히 제 앞의 기록부를 넘기며 그는 타케루의 성적에 대해 나열했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자랑스레 저를 올려보는 조카의 얼굴이 밝았다. 초에 있었던 신체검사의 기록까지 알려주며 평균보다 신장도 훨씬 큰 편이라며 오이카와를 보며 웃었다.
"삼촌을 닮았나 봐요."
"가족들이 다들 키가 큰 편이라."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아요."
아니에요, 저 없어요!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반박하며 타케루가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왜? 나쁜 이야기 아닌데? 그가 눈을 접어가며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의 그 간지러운 분위기에 오이카와는 자신의 조카가 좋아한다던 <담임 선생님>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리곤 눈앞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지? 지금? 녀석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그 담임 선생님이. 귀까지 달아오른 타케루의 얼굴을 보니 제 추측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18살의 소년이 자신의 담임 선생님, 그것도 사내인 선생을 좋아해 부끄러워하는데 어째서인지 크게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팔랑팔랑 다시금 기록이 적힌 종이를 넘기는 그를 보며 타케루의 감정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에게 이런 말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미인이었다. 청초하면서 고고한 느낌을 가졌다. 그러면서 또한 어른스러운 어른이었다. 18살의 천방지축 소년이 흔들리기에 나쁘지 않은 타입이었다. 심지어 웃는 얼굴은 잘생겼다는 범주보다는 예쁘다는 수식이 더 어울렸으니까.
"그런데 타케루에게 조금 문제가 있는데-"
팔랑 종이를 넘긴 후 그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그, 배구부 활동이요. 운동을 좋아하고 취미로 삼는 것은 나쁘지 않은데 거기에만 너무 시간을 몰두하는 게 아쉬워서요."
"...아, 7명뿐인 배구부 말하는 거죠?"
"네."
"나쁘지 않잖아요. 본인이 선택한 길이고 책임은 얘가 질 텐데요 뭐. 두세요. 하고 싶은 거 하도록."
누나여도 아마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3학년이었다. 입시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아마 성적도 점점 오르는데 다른 곳으로 신경을 쏟는 제자가 걱정되어 한 소리겠지만 글쎄, 그의 입으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오이카와는 조금 우스웠다. 자신이 기억하기에 눈앞의 사내도 고교 3학년까지 배구부에 목숨을 걸고 있었다. 자신처럼 대학 추천은 꿈도 꾸지 못할 선수였음에도 봄고 대회까지 나왔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2학년인 타케루의 취미 생활은 양반에 가깝지 않은가. 설득되지 않는 그의 말을 그리 받아치며 "그럼 이제 끝났나요?" 라고 물었다. 조금 당황한 얼굴의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는 책상에 걸쳐 둔 목발을 쥐며 몸을 일으켰다. 착하게도 먼저 일어나 문을 열어주는 그를 지나쳐 걸으며 오이카와는 오늘 상담 내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선생님."
"네?"
"저 기억 못 하세요?"
자신의 과한 자신감일까? 아니면 그의 억지스러운 거짓말일까. 오이카와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복도로 나온 자신과 달리 바닥이 다른 경계선 뒤에서 문을 붙잡고 교실 안에 남은 그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서 만났던가요?"
평화로운 그 물음에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착각인가 봅니다. 그가 그 대답을 원하는 듯 보여 오이카와는 원하는 대로 대답했다. 살펴 가세요. 조용히 떨어지는 마지막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곤 등을 돌렸다. "선생님에게 왜 추파 던져?" 눈치 없이 따져 묻는 타케루의 말은 무시한 채 오이카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그 경계선을 가르며 교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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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0 에 나왔던 소설 오이스가 born to be blue, 재판을 위한 smaple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