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사치의 날들
물이 얼굴로 끼얹어진 것은 정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대충 예상은 했던 상황이었지만, 실제로 찬물을 맞고 나니 심장이 요동을 쳤다.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숨을 숨김 없이 뱉어내며 눈앞의 중년 부인을 바라보았다.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니?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어머니가 만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옆에서 툭 던져진 쌀쌀맞은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눈썹을 찌푸렸다. 아, 그냥 이 상황에선 입을 다무는 게 좋을 텐데. 화가 난 사람에게 저런 태도는 불 난 집에 기름통을 던지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부인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어떻게 망신을 줘도 이런 망신을 주니, 어?!"
"제가 언제요. 그보다 소리 좀 낮추세요. 이러다 진짜 망신당하시겠어요."
"너!!!"
날카롭게 올린 부인의 손가락이 부들댔다. 그 작은 움직임이 스가와라는 그녀가 지금 느끼는 분노의 정도를 가장 정중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물을 끼얹은 것은 제외하고.
"내가 이런 장난에 속아 넘어갈 거 같니? 그쪽도 그래요. 여기가 어떤 자리라고 당당하게 나타나요? 그렇게 얼굴 들고 있어도 될 만큼 나에게 보여줄 건 있어요? 없겠지!!! 그런 청년이면 내가 어디선가 이름이라도 들어 봤을 테니까! 저 정신 나간 놈에게 넘어가서 아까운 짓 하지 말고 사람답게 살아요. 세상에...!! 남자 둘이서...!! 짐승도 그렇게 안 굴어!!"
그 말을 거침없이 던지곤 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또각대는 구두 소리에 레스토랑의 지배인이 당황한 얼굴로 따라붙는 걸 보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냅킨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곁에 앉은 남자는 테이블에 머리를 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짐승도 그렇게 굴지 않는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동성애를 하는 동물들의 수는 꽤 되었다. 돌고래, 갈매기, 펭귄, 코끼리등등. 오래전 책에서 읽은 거라 확실하게 답할 순 없지만, 어쨌거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말이 모두 틀린 건 아니었다. 적어도 두 가진 맞았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내세울 거 없는 자신, 그리고 그 곁에 앉은 정신 나간 놈.
"아, 미안해요. 어머니가 이렇게 밖에서 화를 내는 걸 처음 봐서.. 좀 웃었네."
그게 웃을 일인가. 남자의 말에 그리 따져 묻고 싶었지만 스가와라는 꾹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오늘 몇 시간이죠?"
"백화점에서 만난 것부터 계산하면 총 3시간이고, 어머님하고 마주한 거로만 계산하면 30분이요."
"3시간으로 해요. 쇼핑하느라 힘들었잖아요. 아 옷은 그냥 가져요. 그럼 보자, 시간당 15,000엔 주기로 했으니까 45,000엔에 세탁비 10,000엔 교통비 5,000엔 해서 깔끔하게 60,000엔으로 합시다."
"...세탁비랑 교통비는 그렇게까지-"
서비스 수당이라 생각해요.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로 남자가 지갑을 꺼냈다. 하지만 6만 엔씩이나 지갑에 넣고 다니지는 않는 모양이었는지 "계좌로 보내 줄게요."라며 금세 덮었다. 그의 철저한 계산은 요 몇 주 빼곡하게 통장에 찍혀져 믿을 수 있었기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떼어먹을 정도로 나쁜 사람도 아니고 쪼잔한 타입도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럼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교통비를 주겠다고 한 걸 잊어버렸는지 남자가 나섰다. 혼자 돌아가고 싶었지만, 쫄딱 젖은 제 꼴을 보니 영 아니다 싶어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닦아낼 수 있는 얼굴과 달리 젖어버린 머리는 방법이 없어 대충 쓸어 넘겼다. 그것도 괜찮네요, 데이트할 때 그렇게 해줘요. 남자가 헛 소리와 함께 먼저 일어섰다.
"데이트가 아니라.. 일이죠."
별 뜻 없는 이야기겠지만, 굳이 정정하며 스가와라는 몸을 일으켰다.
"뭐, 데이트나 일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 가벼운 말투와 행동에 스가와라는 속으로만 고개를 저었다.
이 가볍고 또한 이상한 남자를 만난 것은 한 달 전의 일로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에서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게이바. 카운터에서 주문 들어오는 술을 만들어 "저쪽에 계신 분이 보내시는 겁니다." 따위의 멘트를 하는 일로 "게이도 아닌데 일할 수 있겠어?" 라는 사장의 의심에 "그렇다고 스트레잇이라 당당하게 말하기도 좀 그런데요. 연애를 안 해봐서."라는 말로 의지를 보여 채용된 곳이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성격 마음에 드네!"라는 사장의 엉덩이 쭈물거림은 별로였지만, 시급은 1,500엔. 돈이 필요하고 저녁 타임의 일을 찾고 있던 자신에게는 완벽한 곳이었다. 가끔 작업을 걸어오는 손님들을 거절하는 게 어려웠지만, 그 외의 일은 정말 간단해서 나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가볍고 이상한 남자는 그 바에 온 손님이었다. 자주도 아니고 가끔도 아니고 처음 온 손님. 뉴 페이스라 그랬을까, 아니면 워낙 잘생긴 외모라 그랬을까. 그는 등장과 동시에 하루 마무리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가져갔다. 그게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남자는 오히려 즐기듯 여유 있게 웃으며 카운터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 웃음과 달리 바의 분위기는 팽팽했다.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한 모두의 눈치 싸움이었다. 스가와라는 그 분위기를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주문을 받았다. 예거밤, 간단한 메뉴가 날아들었다. 복잡한 주문이 아니라 술잔은 바로 남자의 앞으로 내려졌고, 그는 빠르게 잔을 비웠다. 그렇게 몇 잔을 더 마시던 틈으로 사람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치싸움 끝에 다가온 상대들을 남자는 모두 거절했다. 그렇게 몇 번을 거절했을까, 그가 결국 질렸는지 피곤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여기 물 별로네요."라고. 스가와라 입장에선 다른 곳의 물이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그런가요?"라는 말 이외에는 대꾸할 것이 없었다.
"네, 그래도 유명하다고 해서 기대하고 왔는데 다 별로네요. 너무 싸구려 티가 나. 다들."
싸구려라니, 물건에 써도 썩 좋은 어감이 아닌 말을 남자는 거침없이 사람들에게 썼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티 내지 않으며 스가와라는 묵묵히 술잔만 닦아댔다. 문득, 그에게 거절당하고 돌아서던 남자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얼굴값, 더럽게 하네."라던. 정말 그런 듯 보였다. 그 후로는 그에게 접근하는 이가 없었다. 그의 높은 벽에 모두가 나가떨어졌다. 그렇게 혼자 술잔을 비우던 남자는 이내 지겨워졌는지 갑작스레 뜬금없는 것을 물어왔다.
"시급 얼마 받아요?"
딱히 비밀이라는 룰은 없었고 아르바이트 공고 사이트를 뒤지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정보라 별생각 없이 밝히니 그가 눈을 키웠다. 그렇게나? 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닌 듯 보였다. 낮에 일하는 편의점 시급에 비하면 2배에 조금 못 미치는 금액인데 적나? 같은 고민을 할 때 즈음, 남자는 조용히 속삭였다.
"정기적인 일은 아닌데, 그쪽 시급에 0하나 더 붙여줄 테니 아르바이트 안 할래요?"
라고.
0을 하나 더 붙이면 만 오천 엔이었다. 일급도 아니고 시급. 척 보아도 수상해 보이는 제안이라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 손님이다 싶어 슬쩍 컵을 정리하는 척 몸을 돌리려 하자 무겁게도 붙이고 있던 엉덩이를 떼어낸 그가 다급하게 팔을 붙잡아 왔다.
"이상한 일, 절대 아니에요. 맹세, 맹세! 일단 들어나 봐요."
하는 수 없이 듣게 된 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남자는 게이가 아니며 오히려 여자가 좋은 스트레잇이지만, 집안에서 슬슬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멋대로 약혼을 진행해 현재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생각해낸 게 게이인 척을 하는 건데 같이 맞춰줄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 그 상대를 찾으러 며칠 계속 게이들의 핫플레이스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영 성과가 없다는 것. 그나마 지금까지 본 상대 중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니 한 번 아르바이트하지 않겠냐는 것이 내용이었다. 말 그대로 간단한 일이었지만 스가와라는 눈썹을 찌푸렸다. 일의 내용은 둘째치고 자신은 그 일에 적합한 케이스가 아니었다. 게이도 아니었고 연애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가난한 자신에게 연애나 사랑은 모두 과분하고 사치였다. 그러니 적당하게 그에게 맞춰줄 만한 행동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거절하고 싶었는데
"나쁜 이야기는 아닌데? 혹시 애인 있어요? 그럼 어쩔 수 없고."
그깟 만오천 엔이 뭐라고. 하지만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현실적으로 만오천 엔이란 금액은 그깟 이라는 단어가 붙기에는 크고 컸다. 하루에 한 시간만 그와 어울려줘도 하루에 자신이 버는 금액이랑 비슷했다. 거기다 자신이 조금 망설이는 걸 알았는지 남자는 이것저것 수당까지 붙여주겠다며 떠들었다. 수상하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아르바이트 권유였지만, 스가와라에겐 돈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어떤 손님에게도 적어준 적 없는 숫자 11자리를 적어 건넸다.
그리고 실제로 이 아르바이트는 수상하고 이상하고 말도 안 되었지만, 착실하게 돈은 되었다. 남자는 고맙게도 기존 아르바이트가 없는 시간에만 약속을 잡았고 하는 일이라곤 "그쪽, 좀 촌스러우니까."라는 이유로 쇼핑이나 헤어숍 투어였다. 그리고 나서는 밥을 먹었다. 여기저기 소문 나는 편이 좋다며 그렇게 끌고 다녔다. 데이트 같은 코스를 끝내고 나면 남자는 그날 어울린 시간을 계산해 현금으로 쥐여주거나 계좌 송금을 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통장은 꽤 배가 불러 있었고 스가와라도 배가 불렀다. 이런 일로 이 정도 돈을 벌 수 있다면 평생직장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얼마 전 비장한 얼굴로 찾아온 "드디어 올 것이 왔어요."라며 자신의 어머니와 만나야 한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진 일이 오늘의 찬물세례였다.
"아, 물 맞은 것도 미안하니까 수당으로 쳐서 넣어줄게요."
"옷에 세탁비까지 받았으니까 괜찮아요."
"계산은 확실하게 해야죠. 일이잖아요."
데이트나 일이나 그게 그거라더니, 주차장에 내려온 남자는 조수석 문을 열어주며 아까와 다른 소리를 해댔다. 아무렴 어때, 준다니까 스가와라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바로 갈 거죠?"
그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자신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묵직한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바에 출근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대답없는 끄덕임에 남자는 별말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 외제 차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며 스가와라는 멍하니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음 하나 없이 흘러나오는 에어컨의 바람이 젖은 몸에 들러붙어 소름을 만들어 냈지만, 굳이 바람을 줄여달라거나 꺼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았다. 그의 차였고, 그의 에어컨이었다. 그저 손바닥의 온기로 덮어 감출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차는 빠르게도 익숙한 동네로 들어섰다. 몇 번이나 마중 오고 배웅했던 터라 남자는 길을 잘 알았다. 대충 세워달라거나 설명할 필요도 없이 차는 정확하게 자신의 아파트 앞에 멈춰섰다. [보증금/감사금 없음! 단기 계약 환영!]이라고 적힌 큰 홍보 간판이 오늘따라 참 처량해 보였다. 주인 할아버지가 붉은 페인트로 직접 적은 간판이었다. 그 건물 앞에 정확히 차를 세우며 남자는 신기한 걸 보듯 가만히 핸들에 기대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그쪽이 제일 싸구려 같아요."
라 웃으며 말했다. 바에서 다가온 남자들이 모두 싸구려 같다며 자신에게 이 일을 제의한 주제에 평가가 너무도 박했다. 하지만 악의가 담긴 말은 아니었다. 그런 걸 담을 정도로 그와 자신의 사이는 대단하지 않았다. 거기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스가와라는 낡아빠진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보며 끄덕였다. 맞다. 자신이 제일 싸구려였다. 돈 때문에 웃기지도 않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제일 싸구려였다. 스가와라는 굳이 상처받진 않았다. 사실에 상처받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건 빠르게 인정하는 편이 가장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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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에 있을 오이스가 온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 신간의 sample 이믑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초고상태라 변동 가능성 있어요.
마감에 무사히... 성공하면 나옵니다. 실패하면 구간만 들고... 죄송합니다.^_ㅠㅠㅠ
대책 없이 밝고 즐거운 도련님 오이카와 x 끌려다니는 가난한 스가와라의 고용관계 연애 이야기이믑니다.
이로써.... 커튼콜, 너 더불어 나에 이은 가짜 연애 3편..^_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재라 질리지도 않고 또! 라는 느낌이지만, 다시 한 번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