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가시의 둘레
2016. 11. 18. 23:07











하루 그리고 일주일이 끝나가는 저녁은 어딜 가나 소란스럽다. 그중에서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선술집은 딱히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왁자지껄했다. 모두가 피로를 풀어 헤쳐 놓으며 건배를 외치고 벽에 틀어놓은 TV를 보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안주 삼아 이것저것 떠들며 풀어 놓는 곳. 그리고 그 곳에는 가끔 어마어마하게 재밌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마련인데, 예를 들면



"그 이야기 들었어? 스가와라 회장 이야기?"
"아아, 얼마 전에 있었던 셋째 아들 이야기지?"
"그래. 셋째 아들이 있었다니, 그 누구도 몰랐잖아! 그 난리가 났는데 어쩜 기사 한 줄이 안 나?"

"뭐 언론 장악하는 거야 우스운 집안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나이가 되도록 집 안에 가둬놓다니. 너무 불쌍해. 안쓰러워 죽겠더라."
"알파 사회라는 게 다 그런가 보지 뭐, 우리랑은 상관없지만. 하하!"



바로 이런 이야기. 오이카와는 척 보아도 질 좋아 보이는 정장을 입은 중년 사내들의 이야기에 귀를 세우며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그들에게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빈 잔 정리할게요,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거품 자국만 남은 잔을 트레이에 옮기며 여전히 세운 귀를 감추지 않은 채 손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커다란 저택이 다 타고 소방차가 그렇게 몰려들었다는데 기사 한 줄이 안 나는 거 보고 혀를 찼다니까."
"오죽했으면 불을 냈겠어, 오죽했으면. 아직 어리다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뭐 요즘 같은 세상에선 오메가로 태어난 게 죄지. 죄야. 그러고 보니 이번에 우리 기획팀 프로젝트 말인데-"



술도 들어갔겠다 좀 더 재밌는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별로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넥타이 부대에 속한 이의 업무 이야기는 같은 넥타이를 두른 자가 아니면 어딜 가도 공감을 얻거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오이카와는 끝까지 웃으며 빈 잔을 들고 테이블을 벗어났다. 그리고 대충 설거지대에 트레이를 밀어 넣은 후, 업자와 스태프들이 이용하는 뒷문으로 나섰다. 녹이 슬어 듣기 싫은 소음을 내는 문을 열고 나오자 성큼 찾아온 겨울의 한기가 훅 몸을 끼쳤다. 하지만 그 추위를 아무렇지 않게 뚫으며 오이카와는 입고 있던 유니폼을 벗어 던졌다. 일주일동안 열심히도 입었던 티셔츠를 구기듯 구석으로 던져내곤 미리 가져다 놓은 쇼핑백에서 후드 점퍼를 걸쳤다. 지퍼를 끝까지 올린 후,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모자를 눌러쓴 후, 바지 뒷주머니에 넣어 놓은 휴대폰을 들어 익숙하게 번호를 눌렀다.



"방금 SW그룹 직원들 술자리에서 사실 확인했어. 셋째 아들이 있다는 거 진짠가 봐."



여보세요, 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술술 떠들며 오이카와는 철제 계단을 두 개 세 개씩 쿵쿵 밟아 내렸다. 수화기 건너편의 이와이즈미가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물어왔다. 어떻게 하긴, 뻔하지.



"해야지."



그러려고 팔자에도 없는 아르바이트를 일주일이나 버틴 것이었다. 무거운 맥주잔을 양손에 네 개씩 들어 옮기면서. 거기다 이렇게 무단으로 나왔으니 일주일 일한 값은 받지도 못할 게 뻔했다. 점장의 성격을 보니 분명히. 그러니 그 값 정도는 퉁 칠 정도의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물론, 이번에 하려는 일은 일주일 치 아르바이트비에 비하면 꽤 짭짤하겠지만.



- "알았어, 준비할게."



그 말을 끝으로 끊어진 휴대폰을 다시 바지 뒷주머니로 밀어 넣으며 오이카와는 얼마 전, 쏠쏠한 정보 혹은 구미를 당기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주 드나드는 바에서 들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스가와라 코우시. SW그룹의 회장 스가와라 와타루의 셋째 아들. 바의 주인이자 정보를 사고파는 정보원인 쿠니미 아키라가 던진 그 이름은 실제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게 세간에 알려진 SW그룹 회장의 아들은 두 명뿐이었으니까. 그룹의 대표 이사로 지내고 있는 첫째인 스가와라 코우지로 그리고 얼마 전, 유학 갔다가 돌아왔다던 둘째 스가와라 코우타. 딱 그 두 명이 스가와라 와타루의 아들로 알려져 있었다. 범람하는 정보 확인을 위해 애용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도 그 두 이름만이 회장의 이름 아래에 함께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이라니,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오이카와의 흥미를 끌었다.



"스가와라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산 정보니까 100%라곤 말하지 못해도 어느 정도는 확실해요. 지난주에 그 저택에서 불이 났는데 그 불이 난 곳이 사용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방이었다고 하나 봐요. 뭐 정보 제공자 말에 의하면 금기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가끔 그 방에서 소리가 나거나 인기척이 느껴져서 사용인들 사이에선 귀신이 붙었다는 소문이 돌아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고 해요. 웃지 마세요, 그들의 공포의 비웃지 말라고요. 어쨌든... 불길이 그 방부터 시작되어서 불길을 잡기 위해 사용인들이 움직였는데 스가와라 와타루 회장이 직접 나서서 그 방에는 누구도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발만 동동 구르는 사이 두 아들이 문을 부쉈는데 그 안에서 나온 게 한 남자였다고 해요. 황급하게 나온 남자를 스가와라 회장이 감추듯 데리고 나갔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사용인 모두가 알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남자가 오메가라는 것을요."



늘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던 쿠니미에게도 그 남자의 존재는 꽤 재미있게 다가왔는지 그는 조금의 지친 기색 없이 술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알파 집안으로 이 나라의 실세나 다름없다는 소릴 듣는 재벌가의 숨겨진 오메가 아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 오이카와는 술잔을 기울이며 쿠니미의 반응에 공감했다.



"그럼 탈출하려고 불을 지른 건가? 그 셋째 아들은?"
"뭐 그런가 봐요. 대대로 알파로만 이루어진 집안이다 보니 오메가인 아들은 수치라 여겼겠죠. 어쨌든 그 장면을 목격한 사용인들은 모두 큰 돈을 받고 입막음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뭐, 그래도 늘 그렇듯 소문이라는 건-"



발이 없어도 멀리 흐르잖아요? 그렇게 묻는 쿠니미의 말에 하나마키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어쩔 거야?"라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와이즈미와 마츠카와의 눈도 자신에게 와 박혔다. 어쩔 거냐니, 너무 뻔한 질문이었다. 오이카와는 돈을 가장 사랑했고 돈만을 신용했다. 그리고 그런 돈을 물어다 주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니 돈 냄새가 나는 이 일을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확신이 필요했다. 100% 확실하지 않은 일에 발을 담갔다 수갑을 차는 일은 싫었다. 그래서 요 일주일간 SW그룹 본사 앞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누구보다도 이 소문에 촉각을 세우고 있을 사원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그들의 말대로 언론은 저택의 불이나 숨겨진 아들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었지만, 사원들은 달랐다. 그들의 술자리 안주는 대부분 스가와라 코우시에 관한 것이었다. 스가와라 회장이 외도해 낳은 아이라더라, 오메가라 가둬놓고 키웠다더라, 말도 잘 못한다더라, 아프다더라, 학대를 받았다더라. 대부분은 그런 끔찍해 보이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오이카와가 건진 것은 누군가가 웃으며 떠든 농담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스가와라 회장 아들이잖아? 임신이라도 시키면 사위라도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 집안이 미쳤다고 너 같은 놈에게 사위 자리를 주겠냐? 돈이나 주면서 입막음이나 시키겠지."



집안의 수치를 막기 위해 스가와라 회장은 과연 얼마의 돈을 내놓을까. 오이카와는 자신이 알파라는 걸 단 한 번도 자랑스럽게 여긴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집 안의 데릴사위가 되어도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입막음으로 돈을 받는다면 끝내주는 장사였다.

그리고 그 끝내주는 장사를 하기 위한 준비는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사사키 카즈야?"



이와이즈미가 내민 완벽하게 위조된 서류와 이력서를 보며 오이카와는 어색한 이름을 소리 내 불러 보았다. 찍은 기억도 없는 증명사진이 붙은 이력서에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아닌 사사키 카즈야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성과 이름이었다. 거기다 본 적도 없는 배우자 정보까지.



"스가와라 회장이 입을 막겠다고 큰돈을 푼 덕분인지 먹고 사라진 사용인들이 많아 새로 사람을 뽑고 있다는데, 조건이 추가되었어. 각인한 배우자가 있는 알파만이야. 기존엔 베타도 허용한 모양이지만, 이번엔 베타는 안 들인다네."
"아하, 셋째 아들이 벌일 창피를 막기 위함인가?"

"적어도 한 쪽이라도 각인해 있으면 발정할 필요는 없을 거 아니야? 이미 그 집안 내에서는 공연한 비밀이 된 이상 최대한 조심하겠다는 거겠지. 괜찮겠어?"

"괜찮아. 어차피 감금 중일 거 아니야? 오메가 발정기에만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 걸릴 일 없어."



아니, 오히려 마주치는 편이 좋은 거 아닌가? 오이카와는 히죽이며 서류를 흔들었다. 팔랑이는 서류들 틈으로 이번엔 마츠카와가 커다란 도면을 펼쳐 내밀었다. 현재 옮긴 스가와라 저택의 도면이었다.



"시공했던 사람에게 산 도면이야. 급히 옮겼으니 리모델링을 하거나 이것저것 건드릴 시간이 없었을 거야. 전의 저택에서 감금했던 방의 위치를 미루어 볼 때, 우리의 셋째 도련님 방은 여기."



그가 붉은 매직을 꺼내 저택 2층의 가장 구석에 놓인 커다란 방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별로 복잡할 거 없는 위치를 머릿속에 그려 넣는 오이카와에겐 이번엔 하나마키가 가방 하나를 던졌다.



"위조 신분증, 네 러트 억제제, 그리고 사사키 카즈야 이름으로 개통한 휴대폰 넣어놨다. 아, 그리고 가짜 오메가 억제제도 넣어놨으니까 틈 봐서 바꿔."



자신의 얼굴이 박힌 사사키 카즈야의 신분증, 가끔 챙겨 먹는 브랜드의 러트 억제제, 그리고 낡아 빠져 보이는 휴대폰 마지막으로 유리병에 든 알약. 틀리지 않았는지 하나하나 체크한 후 오이카와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이 직업이라 그런지 긴장감조차 돌지 않았다. 잘 다녀와라, 저만큼이나 시큰둥한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그렇게 오이카와는 스가와라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도심에서 차를 타면 30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곳답게 저택의 근처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높게 뻗은 담벼락을 보며 슬쩍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제 자리에서 발꿈치를 들었다가 놓았다, 잔뜩 긴장한 사람의 흉내를 내었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싶었는데 망할 카메라가 정확하게 자신을 찍어대고 있으니 별수 없었다. 후우, 이번엔 진실된 긴장을 숨으로 뱉어내며 벨을 눌렀다. 보통 버튼을 누르면 누른 티가 나도록 딩동 혹은 삐리리 소리가 나게 마련인데 끊어 놓기라도 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라, 싶어 다시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철컹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담벼락으로 자세히 볼 수 없었던 저택의 모습이 드러났다.



"휘유-"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정원사를 얼마나 갈아 넣으면 이렇게 멋진 정원을 가질 수 있는 거지? 그 무엇도 없던 외부와 달리 스가와라의 저택은 화려하다 못해 우아했다. 옮긴 지 얼마 안 된 저택으로는 보기 힘들어 보였다. 물론 마츠카와가 보여준 도면도 귀퉁이에 적힌 날짜를 보면 지은 지는 꽤 지난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토록 빠르게 건물에 생기가 돌다니. 역시 돈으로 안되는 건 없었다.



"사사키상?!"



천천히 정원을 감상하며 저택의 현관으로 다가가자 벌컥 문이 열리며 단정하게 수트를 입은 남성이 나타났다. 오이카와는 서둘러 긴장을 얼굴에 그려 넣으며 꾸벅 허리를 숙였다.



"사..사사키! 카즈야 입니다."



말을 씹거나 더듬는 버릇은 없었지만, 이 정도는 해줘야 얼빠진 놈으로 보이겠지. 오이카와는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며 고개를 들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이 저택의 총괄 책임자인 집사 사와무라 다이치입니다. 기무라상에겐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기무라상?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오이카와는 당황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아까 살폈던 위조 서류를 빠르게 떠올렸다. 이곳에서 일하다 몇 년 전, 나이가 나이인지라 은퇴했다는 주방장 기무라 타케히코라는 이의 이름이 추천인 부분에 적혀 있었다.



"기무라상은 잘 지내시나요? 고향에 가 농사짓는다고 떠나신 후로는 연락이 뚝 끊겨서요."
"아..네! 네 잘 지내세요."
"그거 다행이네요. 우선 머물 숙소부터 안내한 후, 간단히 일에 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괜찮나요?"
"네...? 네..!"



얼빠진 연기를 멈추지 않으며 오이카와는 끄덕였다. 겉으로 보기에 사와무라 다이치는 건실해 보이고 다정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에 이 저택의 총괄 책임을 지고 있다는 거 보면 쉽게 봐선 안 되는 이였다. 조금의 잘못된 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오이카와는 제 손바닥에 슬쩍 손톱을 박아 넣으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밖에 펼쳐진 정원과 마찬가지로 공기 중에 먼지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저택은 완벽하게 관리된 모습이었다. 숙소로 향하며 사와무라는 간단하게 저택의 위치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리곤 물었다.



"파트너가 임신 3개월이라면서요, 두고 오기 마음에 걸렸겠어요."



이건 또 뭔 소리냐. 처음 듣는 소리에 오이카와는 눈만 깜빡였다. 하지만 이내 빠르게 수줍음을 얼굴에 그려내며 웃었다. 완벽하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이와이즈미가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이 필요하니까요."
"그렇죠. 일주일에 한 번은 외출 허가가 나오니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 원하면 차도 이용 가능하니까요."
"아, 감사합니다."



파트너도 없었고 키울 아이 역시 없었지만,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감격한 얼굴로 감사의 말을 뱉었다. 사와무라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은 후, 이번에는 저택 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마츠카와가 구해 온 도면에선 볼 수 없었던 건물이 있었다.



"사사키상이 일해 줄 건물입니다. 숙소도 이 별관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별관?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다. 마츠카와가 예상한 저택의 끝 방과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거기다 숙소까지 여길 사용하라니, 이러다간 셋째 도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볼 판이었다. 하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언제나 위기에 강했다.



"별..관에서 정확하게 어떤 업무를 하면 되나요?"
"....저희 셋째 도련님의 시중을 담당해주시면 됩니다."



봐, 이번에도 그렇잖아.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삼았지만, 이번에는 기회로 삼지 않아도 되었다. 그야말로 위기가 행운이 되어 찾아왔으니까. 오이카와는 사와무라의 설명에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잡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의 눈에는 자신이 놀라고 또 놀란 얼굴로 보일 것이었다.



"셋째 도련님이라니,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아아, 네. 저희 셋째 도련님이.... 좀 특별하셔서요. 외부에는 노출되지 않게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
"하지만 사사키상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각인까지 한 배우자가 있고, 심지어 곧 애까지 태어날 예비 아빠인 설정이니까. 오이카와는 자신을 신뢰하는 사와무라의 미소에 따라 웃으며 끄덕였다. 제게 조금의 의심도 품지 못한 불쌍한 남자는 앞날은 예상하지 못한 채 굳게 닫혀있던 별관의 문을 열었다.



"스가와라-"



2층으로 이루어진 별관은 아주 작은 저택의 축소판과 같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먼지 한 톨 날리지 않던 본관과는 달리 이 저택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대리석 위에 마구 떨어진 꽃들, 소파에 되는대로 던져진 책들. 거기다 음식은 먹다 말았는지 식기가 유리 테이블 위해 엉망으로 놓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얼빠진 오이카와와 달리 사와무라는 익숙한지 태연하게 이 별관의 주인을 불렀다.



"스가와라, 오늘부터 네 시중을 담당할 새 집사가 들어왔어! 내려와서 인사해!"
"나중에!!!"



2층 어딘가에서 빼액 목소리가 울렸다. 귀찮음 가득한 그 대답에 사와무라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와, 빨리!"
"나 지금 중요한 일하고 있단 말이야!!"
"네가 하는 일에 중요한 게 어딨어!!"
"있어! 내가 저택 밖으로 못 나간다고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아?!!!"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쿵쿵 억지로 울리는 발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내 2층의 난간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보였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들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스가와라 코우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인상을 구겼다.



"...너 꼴이 왜 그래?"
"왜? 이렇게 입는 거 아니야?"



왜 사람들은 흔히 오메가를 꽃에 비유하지 않던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오이카와는 썩 오메가들을 존중하거나 대우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는 동의하는 편이었다. 대부분 오이카와가 아는 오메가들은 그랬으니까. 그런데 저건 뭐야. 눈앞에 나타난 스가와라 코우시는 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도 그럴게 이상한 요괴 형태를 한 마스크를 끼고 있었으니까. 보통의 오메가라면 징그럽다며 시선조차 주지 않을 법한 디자인의. 거기다 촌스러운 저 초록색 수트는 뭐란 말인가. 심지어 넥타이는 맬 줄 모르는지 그냥 매듭으로 묶여 있었고 자켓은 재단선이 다 보이는 게 거꾸로 입은 듯 했다. 아름답고 자신을 가꾸기 좋아하는 오메가들이 보면 비명이라도 지를 모습이었다.



"그게 다 뭐야?"
"뭔지 모르겠어? 영화 <새벽의 울음소리>에 나오는 악당이잖아? 코우타형이 미국에서 주문해줘서 오늘 도착했어."
"그런 영화 몰라. 얼른 내려와서 새 집사와 인사부터 해."
"다이치, 너는 좀 일에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어. 호러 영화의 명작 대열에 오를 위대한 영화라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반에 한두 명씩 존재하던 괴짜 학생의 대사 같은 걸 마구 떠들며 2층에서 걸어 내려왔다. 그리곤 손을 내밀었다. 스가와라 코우시, 잘 부탁해. 가면 뒤의 그가 밝게 말했다.



"사사키 카즈야입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내민 작은 손을 잡았다.



"사사키상은 알파지만, 각인한 파트너도 있고 곧 아이 아빠가 될 사람이야."
"흐응. 그렇구나."



자신의 개인 집사가 될 사람의 이야기인데도 별 흥미가 없는지 스가와라 코우시가 대충 대답했다. 그 심드렁한 분위기가 당황스러웠는지 사와무라가 서둘러 별관 안내와 지낼 방을 안내하겠다며 나섰다. 하지만 스가와라 코우시가 끼어들며 방해했다.



"내가 할게. 내 방이니까."



저택을 방이라고 하는구나. 참 좋은 단어라고 생각하며 오이카와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보는 사와무라에게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한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그는 "허튼짓 하지 마!"라고 엄하게 자신의 셋째 도련님을 다그친 후 서둘러 별관을 나섰다.



"다이치는 항상 걱정이 많아."



스가와라 코우시가 창밖으로 멀어지는 사와무라 다이치 쪽을 바라보며 떠들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들도. 다들 내가 어떻게 될까 걱정만 해."



걱정을 한다고? 오이카와는 그 말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얻은 정보와 비교하면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곧 자신의 주인이 될 남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우스꽝스럽다 표현하기도 뭣한 가면을 벗어 던졌다. 징그러운 호러 영화의 악당 얼굴 아래로 옅은 머리카락이 빛을 받으며 쏟아졌다.



"..."



왜 사람들은 흔히 오메가를 꽃에 비유하지 않던가. 그래 그들의 말이 맞았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꽃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오메가를 마주했지만, 그들이 내보인 모습도 내뿜던 향기도 다 부질없게 만들 정도로 가장 아름다운 꽃. 그리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걸 무척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를 올려보며 접어 웃는 저 미소가 자신의 무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거짓말."



스가와라 코우시가 그리 말하며 성큼 다가왔다. 방금까진 느낄 수 없었던 아찔한 향기가 훅 코를 파고 들어왔다. 오이카와는 바로 몸을 빼고 싶었지만, 마치 무언가에 칭칭 묶인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 각인한 오메가 없잖아?"



당신에게서 어떠한 오메가 냄새도 안 나는 걸. 가까이 다가온 스가와라 코우시가 귓가에 속삭였다. 하하, 오이카와는 웃었다. 이런, 이건 예상 밖이었는데. 단박에 간파당하다니. 뭐, 오메가가 다른 오메가의 존재에 예민한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빠르게 들킬 줄은 몰랐다. 물론 이렇게 빨리 그와 단둘이 마주하게 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고.



"당신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재밌어 보이니까 어울려줄게. 나 한동안 방에서만 지내서 엄청 심심하고 지루했거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별난 도련님은 고자질할 생각이 없는지 금세 떨어지며 웃어 보였다. 분명 아름다운 미소인데 왜일까, 오이카와는 그 미소가 참 무시무시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 그런데 조심해. 네가 그냥 알파라는 걸 알면 형들이 네 거기를 잘라 쫓아낼지도 몰라."



봐, 무시무시한 거 맞잖아. 정확하게 자신의 하반신을 눈짓하며 던진 무시무시한 소리에 오이카와는 침을 꼴깍 삼켰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고, 역시 일주일 동안 자료 수집은 너무 대충이었나? 100% 확신이 들어서 뛰어들었는데, 이건 아주 정말로 많이 아주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소문은 다리도 없이 멀리도 흘렀지만, 그 동시에 언제나 많은 것들이 들러붙는 법이라는 걸 떠올렸야했는데. 오이카와는 쿠니미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돈을 뜯어낼 생각으로 이 저택에 발을 들이밀었는데 이젠 자신의 하반신이 잘려나가지 않게 이 저택에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잘 부탁해."



부디 자신의 주인이 고자 집사를 곁에 두는 걸 재미로 여기지 않기많을 바라며 오이카와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말에 끄덕였다. 그리고 그 미소에 따라 웃었다. 물론 억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