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와라군, 수고했어! 이것만 내주고 퇴근해."
아직 가게 마감 시간은 20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평일 그리고 월요일이라 그런지 단골의 발길도 줄어 오늘은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났다. 빈 병이 담긴 박스를 내미는 마담에게 '수고했어요.'라는 일상적인 인사를 건넨 후, 스가와라는 서둘러 가게를 나섰다. 확실히 계절이 돌아오는지 낮에는 그럭저럭 포근했던 거리가 저녁이 되니 꽤 쌀쌀맞았다. 유리병 상자를 차곡차곡 가게 앞에 쌓아두곤 서둘러 목티를 끝까지 끌어올려 꽁꽁 감쌌다. 분명 작년에 딱 맞게 산 옷이었는데 어째서인지 폼이 낙낙하게 커졌다. 안 그래도 근래 마담에게 점점 말라간다고 들은 터라 커진 옷이 예민하게 다가왔다.
"하아.."
센터에 안 간지 얼마나 지났더라. 스가와라는 탁한 한숨을 뱉으며 센터 방문일을 되감아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날짜가 없는 것을 보니 오래도 안 간 모양이었다. 밤톨 머리의 작은 의사 선생과 "반드시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진료받기로 해요."라고 약속한게 마지막이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약속을 깨어버리고 말았다. 뭐, 그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어차피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란 모두 스쳐 지나가는 존재와 같지 않은가. 그리 가볍게 또 한 번 센터 방문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스가와라는 푸석하게 느껴지는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그리곤 천천히 입어 낮게, 익숙하게 노래를 불렀다.
"현재 과거 미래, 그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고 누군가가 전해줘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조금 오래된 노래였지만 흘러나오는 가사는 막힘이 없었다. 어머니의 애창곡이자 마담의 스낵바에서 가끔 분위기를 띄울 때 선곡하는 곡으로 가볍게 울리는 박자음이 너무도 좋았다.
"마치 희극 같지 않아요? 혼자서 들떠서. 차갑게 식어버린 그 사람에게 고집을 부렸다니."
까만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은 밤, 이제는 눈 감고도 거닐 수 있는 익숙한 골목을 걸으며 누가 들을까 작게 그리고 조용조용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나둘 가사가 입을 타고 흐를 때마다 마담이 준 주먹밥이 얇은 천 가방 안에서 흔들리며 굴러다니는 게 느껴졌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로등을 지나, 코너를 몇 번 더 돌자 익숙한 건물이 나타났다. 도쿄로 올라와 자리 잡은 낡은 2층 아파트로 지어진 지는 대충 30년도 더 된 곳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언제나 삐걱삐걱 녹이 슨 소리를 내었고 목욕을 할 때는 가스를 데워야 했고 가끔은 얼어 물이 안 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있을 곳이었고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하나의 굽은 길, 한 번 틀려서. 헤매는 길 구불구불."
그 계단을 올라 정확하게 203호라 적힌 문 앞에 서니 노래가 끝이 났다. 완벽한 시간 계산이라며 스스로를 칭찬하며 스가와라는 주머니에서 열쇠고리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작은 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나름 현관인데도 키 하나에 참 쉽게도 문이 돌아갔다. 달칵,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기 무섭게 방 안에 맴돌던 한기가 훅 끼쳐왔다. 안보다 밖이 더 따뜻한 겨울을 한 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닌데 언제나 이 시림은 적응이 되질 못 했다. 후후, 서둘러 뜨뜻한 숨으로 손을 녹인 후 불을 켰다. 아직 난방을 켜기엔 이르니 대신이라기엔 우습지만 주전자를 가스 위에 올리곤 짐과 옷가지를 대충 식탁 의자에 걸어두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엔 많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단출한 마담의 주먹밥을 가방에서 꺼내 그릇에 담아 올리고 픽픽 울기 시작하는 주전자를 들어 올려 찻잔에 가득 물을 부었다. 마지막으로 찬장에서 얼마 전에 사 두었던 레몬티백을 꺼내 담그자 그래도 썩 나쁘지 않은 한 상 차림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잘 먹겠습니다."
적당하게 손을 씻고 대충 바지를 걷어 한쪽 다리를 의자에 세우며 자리를 잡았다. 식탁에선 똑바로 앉아야지, 하고 잔소리를 할 어머니가 없으니 나쁜 습관이 배 사라질 줄을 몰랐다. 뭐 어때, 지금 나 혼자인데. 스가와라는 어머니의 얼굴을 잠깐 떠올렸다 이내 술술 주먹밥을 감싼 랩을 떼어내고 한입 크게 물었다. 연두색 콩과 우엉 그리고 간장이 적절하게 뒤섞인 밥이 입안에서 굴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고 찬 것도 아닌데 어쩐지 식욕이 사라져 스가와라는 쥔 주먹밥을 다시 그릇에 내려놓았다. 몸에서 제대로 식사를 받지 않는 것도 이젠 익숙한 일이라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그 정상적이지 못한 식사를 꾸짖으려는지 막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조용한 공간을 울리는 벨 소리의 주인공은 뻔했다. 이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으니까. 무뚝뚝한 아버지가 이 시간에 아들을 찾을 확률은 극히 낮으니 반대로 극히 높은 확률로 어머니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통화 내용은 "밥 잘 먹고 있니?" "언제 집에 올 거니?" "생활비는 괜찮니?"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해 "잘 먹고 다니라고 했잖아. 몸도 안 좋은 애가 왜 이렇게 자꾸 걱정시켜." "얼른 내려와서 얼굴 좀 보여줘. 이러다 아들 얼굴 다 잊어먹겠어." "센터 방문 예약 주기적으로 잡으라고 몇 번을 말하니? 자꾸 이러면 내가 도쿄 올라간다?!" "처방받은 약 말고 다른 거 먹지 말라고 했지? 내가!" "아르바이트비로 생활비가 충분하겠어? 괜찮으니까 어려워하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 좀 해." 같은 잔소리로 끝날 게 분명했다. 익숙하다 못해 달달 외운 레퍼토리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앉아 버텼다. 한참을 받으라는 듯 시끄럽게 울리던 전화기는 삐, 소리와 함께 메시지 함으로 전환되는 안내 방송을 뱉었다.
-"코우시? 아직 집에 안 왔니? 오랜만에 아들 목소리 좀 들으려고 전화했는데 전화를 안 받네. 날 추워졌는데 따뜻하게 지내고 있지? 난방비 걱정하지 말고. 센터는 계속 다니고 있지? 히트사이클 주기는 어때? 여전히 비주기적이니? 미안하다. 내가... 내가 신경 써야 하는데.. 어디 안 좋으면 꼭 병원 가고."
역시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어머니의 전화였다. 한숨과 걱정 그리고 그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를 들으며 스가와라는 슬쩍 눈을 감고 찬 식탁에 머리를 눕혔다. 자장가도 아닌데 세상에서 제일 많이 들었던 목소리라 그런가 참 편하고 듣기 좋았다.
-"오늘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그, 얼마 전에 오이카와군 만났다. 여전히 네 안부 묻길래 모른다고 해놨다."
조심스레 전하는 소식에 스가와라는 감았던 눈을 떴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도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어졌다.
-"도쿄에서 일하고 있다는데, 괜한 걱정이지만 네가 일단 알아야 할 거 같아서."
"...."
-"혹시 이미... 알고 있니?"
알고 있을 리가 있나. 오이카와 토오루와 연락하지 않은 지도 벌써 10년째였다. 그 사이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사를 했다던가 어느 대학을 갔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어머니를 통해 주워듣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은 지는 벌써 10년이었다. 10년이나 멀어졌으면 이제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도 불쑥 들려온 이름에 스가와라는 가슴이 시렸다. 시리다 못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나중에 또 전화할게." 어머니의 인사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지만, 스가와라는 식탁에 여전히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깜빡깜빡 눈만 감았다 뜨며 슬쩍 자신의 목뒤를 쓸었다. 그리곤 오랜만에 오이카와 토오루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자신이 이제 열여덟이 아닌 스물여덟의 청년이 되었듯 오이카와 역시 소년에서 어른이 되고 그 자라난 차이만큼 달라졌을 텐데 이상하게도 제 머릿속의 그는 여전히 소년이었고 여전히 교복을 입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인가.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으니 그 모습 말고는 알 수가 없었다. 소년티를 벗고 청년이 오이카와를 그려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아 포기하며 스가와라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차게 식은 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쉽게 열 여덟살의 오이카와 토오루를 떠올렸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뒤져보면 늘 나타나는 등장인물이었다. 부모님끼리 매우 친해 어려서부터 같이 어울리고 같이 생활했다. 친구라기보단 형제에 가까웠고 가족과도 같은 완벽한 관계였다. 그래서 아마 나이를 먹어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이 관계에 변함은 없을 거라고 스가와라는 쉽게 미래를 그리곤 했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그림은 마치 꿈이라고 확인시켜주듯 열여덟의 겨울, 완벽한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날은 겨울임에도 날씨가 꿉꿉했다. 공기가 찐득거리며 온몸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감기 기운에 몸이 예민해졌나 싶어 무시했지만 증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삼일 째가 되던 밤 스가와라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응급실을 찾았다. 끊임없이 오르는 열에 뚝뚝 끊겨 나오는 숨이 보통 증세는 아닌지라 잔뜩 겁이 났다. 부모님 역시도 내리지 않는 열에 걱정하시며 병실 침대를 지키셨다. 하지만 그 걱정과 달리, 검사 결과를 들고 온 의사는 웃으며
"오메가 발현열이에요. 2차 발현인 것 같은데 센터 가서 정확한 검사받아보시고 설명 들으시는 게 나을 거예요."
간단하게도 사형 선고를 내렸다.
오메가, 스가와라 코우시가 아는 오메가라는 것은 아주 지독하고 추하고 더러운 단어였다. 걔들은 알파를 유혹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어, 냄새는 또 어떻고, 누가 그딴 냄새를 꽃향기라 포장하는 거야? 천박해 등등. 지금까지 살면서 들어왔던 말은 그게 전부였다.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들어왔던 소리들이었다. 스가와라는 떨리는 손으로 뜨겁게 터져 나오는 숨을 멈추기 위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병원이 떠나가라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절대로 오메가에게 휘둘려 내 운명의 상대를 정하지 않을 거야."
오이카와 토오루는 곧잘 그렇게 떠들었다. 그는 알파였다. 모두가 원하는 알파였다. 그와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베타였기 때문이었다. 베타 부모님 아래에서 태어난 베타 스가와라 코우시는 알파인 오이카와에게 발정하지도 않았으며 다리를 벌리지도 않았으니까. 서로에게 본능적인 알파와 오메가와 달리 베타는 두 집단 어디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메가 발현이라니. 그 말은 즉, 그와 이루었던 '친구'라는 관계가 무너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메가는 알파와 친구가 될 수 없었고, 알파 역시도 오메가와 친구로 지낼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스가와라 코우시는 분명하게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휘둘렸다. 그를 꿈꾸며 몽정하고 다른 오메가들이 그랬듯 그에게 눈길 한 번 더 받고 싶어 안달 냈다. 스가와라는 그가 자신에게 각인해주길 바랐다.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 잇자국을 내고 그대로 운명의 상대가 되어주길 바랐다. 그의 것이라는 증표가 갖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웃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의 친구로 이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엉망인 꼴로 그의 운명의 상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오메가들과 똑같이 무작정 목을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스가와라 코우시가 아닌 그저 그런 오메가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매일매일이 고통스러웠다. 그의 앞에 서는 순간순간마다 자신이 오메가라는 게 들킬까, 그에게 달려들까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쳤다. 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향했다. 어머니의 오랜 친구인 스낵바의 마담인 히토미상 가게에서 요리를 배우고 일을 하며 이른 독립을 했고 외로운 홀로서기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환경이 바뀌어서 인지, 아니면 2차 발현의 부작용과 같은 것인지 완벽한 오메가는 될 수 없었다. 센터 검사 결과 베타였던 탓에 페로몬도 미미했고 질구도 만들어지다 말아 막힌 상태였으며 히트 사이클 주기 역시 엉망이었다. 이 상태면 알파랑 각인도 불가능해요. 딱한 얼굴의 의사의 말에 감사하다 인사했다. 많이 안 좋은 상태라 제대로 검사를 받고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 병원에서 권유 받았지만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보기에 베타와 같으면 제 속이 죽어가든 오메가든 망가진 오메가든 상관 없었다. 베타로 있을 수 있다면 제 안이 어떤 모양을 띄우고 있든 스가와라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센터는 가야겠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자꾸 살이 빠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지금도 제 눈에는 스스로가 걸어 다니는 시체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더 죽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스가와라는 묵직한 몸을 일으키며 덜렁 걸려있는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만큼이나 잔소리가 심한 담당 의사는 무서웠지만, 더 미루다간 그 미룬 기간만큼의 잔소리가 쌓일 거 같았으니 이즈음에서 한 번은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계획을 세우면 행동은 빠르게. 다음날 스가와라는 눈을 뜨기 무섭게 씻고 센터로 향했다. 처음엔 히토미상이 추천해준 큰 센터로 다녔지만, 그곳을 찾아드는 여러 오메가들에게 호기심을 받는 게 불편해 작년에 옮긴 집 근처의 작은 센터로 옮겼다. 작다고 해도 다른 센터에 비해 작다는 소리이지 동네에 자리 잡은 규모 치고는 꽤 큰 곳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탈취제를 다 쓸 기세로 뿌려대고 나왔음에도 영 불안해 자꾸만 몸 여기저기에 코를 묻었다. 어차피 자신의 페로몬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고 탈취제 역시 무향임에도 불안했다. 강박증, 머릿속으로 단어를 떠올리면서도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더 킁킁댄 후에야 스가와라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곧 겨울이 찾아올 것 같은 쌀쌀한 거리를 걸어 도착한 센터에는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서며 접수창구로 향하자 간호사 하나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담당 의사분은 야쿠 선생님 맞으시죠?"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불러 드릴게요. 그녀의 친절함에 끄덕이며 스가와라는 적당하게 빈자리를 잡고 앉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아니면 예민한 오메가들을 배려한 것인지 병원 내부는 따뜻하고 포근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살갗에 닿는 그 부드러운 공기를 가만히 문지르다 슬쩍 옆에 앉은 오메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남자인 그는 아이를 가졌는지 커다란 배를 가지고 육아 잡지를 읽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따뜻해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스가와라에게는 조금의 감흥도 일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오메가, 당연 있겠지. 하지만 아마 저 따뜻한 풍경은 자신과 인연이 닿지는 않을 것이었다. 오메가면서도 각인과 임신이 불가능한 병신이었고, 베타면서도 오메가처럼 알파를 원했으니까. 임신도 각인도 안될 오메가를 사랑할 알파는 없었다. 정상이 아닌 베타를 사랑해줄 베타 역시도 없었다. 그러니 저 풍경은 자신이 누릴 수 없는 그림이었다.
"스가와라상, 진료실로 들어갈게요!"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옆의 오메가를 감상하고 있었을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굳어있던 몸에 힘을 넣어 삐걱거리며 일어서 진료실로 향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야쿠 모리스케>라 적힌 담당 의사의 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죽은 줄 알았어요."
라는 날카로운 인사가 대신했다. 이쪽은 보지도 않고 모니터에 집중한 작은 의사를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번 방문일로부터 벌써 석 달이 지났네요. 잘 지냈어요?"
"그럭저럭이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살 저번보다 더 빠졌죠? 밥 제대로 안 먹죠? 히트사이클 주기는 여전히 들쑥날쑥해요? 아직도 억제제를 비타민 먹듯이 쏟아 넣어요? 우르르 쏟아내는 그의 질문에 뭐라 대답해야 하는지 몰라 스가와라는 슬쩍 눈치만 보았다. 모든 대답에 '네'라고 뱉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그가 지금 쥐고 있는 마우스가 혹은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이 날아들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의사 말은 조금도 안 들으면서 이번엔 왜 왔어요?"
"..."
"적립한 잔소리 들으러 왔겠지, 뭐. 쌓이고 쌓이면 더 혼날 테니까. 맞죠?"
정확한 야쿠의 지적에 스가와라는 슬쩍 마른 입술만 훑었다. 하아, 그가 한숨을 쉬며 타닥타닥 키보드에 무언가를 적더니 이내 프린트해서 내밀었다.
"처방전이에요. 시중에서 파는 억제제와는 다른 약이니까 이걸로 받아 가요. 그렇다고 매일같이 억제제를 먹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건 히트사이클때만. 알았어요? 억제제를 그렇게 무식하게 먹는다고 해서 오메가가 아닌 것도 아니고 베타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요. 시중에서 파는 억제제는 지독해서 속이 남지 않을 거예요. 내장기관 다 녹여서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약 좀 그만 먹어요. 이러다 겨우 붙어있는 아기집까지 사라지겠어요. 아, 이걸 노리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석 달 전에 왔을 때, 막혀있는 질구 뒤로 아주 작은 아기집이 생기다 말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거기까지 무언가 들어설 일은 없으니 있으나 마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었다. 억제제를 매일같이 섭취하는 건, 아기집을 지워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마음의 위안과 같은 행위일 뿐이었다. 이걸로 나을 거라는, 이걸로 돌아갈 수 있다는 뭐 그런 위안. 하지만 거기까지 털어놓았다가는 눈앞의 의사가 바로 정신병원으로 저를 입원시킬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스가와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가 오메가라서 한 번도 괴로웠던 적이 없어요."
그가 처방전을 곱게 접어 밀어주며 말했다.
"그런데 스가군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나 자신까지 부정당하는 거 같아서 참, 그래."
"...."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그걸 누리는 일, 나쁜 거 아니에요. 정말로."
의사의 처방은 언제나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야기들뿐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강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말하는 야쿠 모리스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다시 흘리며 스가와라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다음 주에 또 나와요! 애타는 그의 말에 대강 끄덕이며 처방전을 챙겨 진료실을 나왔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펴보자 알 수 없는 용어의 약들이 주르륵 적혀있었다. 어차피 억제제의 성분은 거기서 거기, 뭐가 더 독하고 약하냐 혹은 뭐가 더 비싸고 저렴하느냐의 차이였지 그 외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 아니, 그 차이가 중요하겠지만 스가와라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었다. 이미 제 찬장에 가득 채워진 억제제 병들을 떠올리며 처방전을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신 꺼내지 않을 것처럼 쑤셔 넣었다.
센터 안에 위치한 약국을 지나쳐 건물 밖으로 나오자 아침까지만 해도 맑았던 날씨가 어둑한 게 곧 뭐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가방을 뒤져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우산은 잡히지 않아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이 쌀쌀한 날씨에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 게 뻔해 보였다. 그러고보니 처음 이 센터에 와 야쿠 모리스케를 만났을 때에도 이런 날씨였다. 우중충하고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하늘. 그 하늘을 배경으로 앉은 의사는 삐딱하게 턱을 괴곤 말했다. "알파나 베타가 오메가 혐오인 건 여러 번 봤는데 오메가가 오메가 혐오인 건 또 처음 보네요."라고. 그 호기심 가득한 말에 뭐라 했더라. 아마
"전 오메가 혐오가 아니라, 오메가인 제가 혐오스러운 거예요."
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다시 베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스가와라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원인은 자신이었다. 그러니 스가와라는 오메가인 자신이 미웠고 싫었고 또한 혐오스러웠다. 스가와라는 그렇게 가만히 옛 기억을 떠올리다 조금 전, 의사의 말을 다시 머릿속에 꺼내 보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그걸 누리는 일, 나쁜 거 아니에요. 정말로."
하지만 그거 아세요? 선생님? 제가 사랑받고 싶은 건 누군가가 아니에요.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눈꺼풀 뒤에는 반듯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소년이 그대로 서 있었다. 오랜만에 울컥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 자란 오이카와 토오루가 궁금했다.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그의 얼굴이 너무도 궁금했다. 궁금해선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스가와라는 비 대신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지도 않으며 푹 고개를 숙였다. 이 마음은 도대체 어디까지 흐르는 걸까. 차게 식어버린 손을 뻗어 습관처럼 목을 덮었다. 베타로 돌아가길 바라면서도 여전히 자신은 목덜미는 그의 입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모순적인 자신에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오늘도 끔찍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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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자유.
각인 설정은 일본 설정을 가져와따 (목 물어서 각인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