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끊겼다.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몇 번을 반복되는 상황에 스가와라는 멍하니 서서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번호를 눈으로 확인했다. 이 번호가 제 휴대폰에 뜬 게 몇 년 만이더라. 이제 자신이 스물아홉이 되었으니 적어도 9년 만의 연락이었다. 받아야 하나. 받지 말아야 하나. 받지 않아도 다시 벨이 울리니 꽤 급한 연락인듯싶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받기에는 9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은 꽤 컸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한참을 울린 전화는 다시 끊어졌다. 이젠 오지 않으려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막 짐을 챙겨 일어나려는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벌써 열 번도 넘은 것 같은데. 지치지도 않는구나 싶어 하는 수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분명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니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9년 만에 먼저 걸려온 전화의 용건이 궁금한 탓이었다.
"...여보세요?"
작은 침묵 끝에 아주 조금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입술을 떼었다.
-"...코우시니?"
자신의 조심스러움만큼이나 거리를 둔 목소리가 조용히 물어왔다.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울컥 무언가가 안에서 치밀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애써 감추며
"네"
마르게도 대답했다.
-"지금 어디니?"
"...회산데요."
-"아, 그럼 지금 잠깐 얼굴 볼 수 있을까?"
잘 지냈니? 아픈 곳은 없었니? 괜찮았니? 그녀에게 듣고 싶은 말은 꽤 많았다. 그냥 보통의 부모가 오랜만에 아들에게 연락해 할 수 있는 그런 기본적인 말들. 안부를 묻고 답하는 그런 말들. 하지만 그녀는 다급하게도 갑작스레 9년 동안 찾지도 않았던 아들의 시간은 잊어버린 듯 훌쩍 뛰어넘었다. 만나자니, 지금? 당혹스러워 눈만 깜빡이고 있자 어색하게 그리고 애써 웃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왔다.
-"네 누나 곧 결혼하거든. 지금 그 상대랑 만나고 있는데 너도 한 번 보고 싶다네. 너도 매형 될 사람이니 한 번 보는 게 좋잖아."
아, 그럼 그렇지. 너무도 그녀다운 목적에 자신이 품었던 자그마한 기대가 쏜살같이 물에 밀려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회식이 있다고 할까, 남은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기가 어렵다고 할까. 어떤 핑계를 대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제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오랜만에 네 아버지도 나도 네 얼굴이 보고 싶기도 하고. 응? 잠깐 얼굴만 보여주고 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이 말이 나가지 않았다. 분명 가면 좋은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싫다는 말이 나가질 못했다. 스가와라는 한참을 전화를 쥐고 입술을 달싹인 끝에야 멍청하게도 "어디로 가면 되나요?"라고 물었다. 기쁨 가득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부르는 주소를 휘갈겨 적으며 꾸역꾸역 한숨을 집어삼켰다.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급 호텔의 주소를 보며 30분 뒤에야 도착할 것 같다는 말을 전한 후 전화를 끊었다.
"..미쳤지."
다시는 그 얼굴 보이지 말라는 소릴 듣고 집을 나왔다. 너 같은 녀석을 품어 낳았다는 사실이 역겹다는 비명을 듣고 집을 나왔다. 어머니는 그 소릴 하며 아마 울었던 것도 같은데, 아버지에게 너무 맞아 여기저기 퉁퉁 부어있어 실제로 어땠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었다. 아, 그래도 하나는 보았다. 쫓겨나는 자신을 보며 웃고 있던 여자. 이란성 쌍둥이로 3분 먼저 태어나, 누나라는 이름으로 제게 불리던 여자. 스가와라 코유키. 그녀가 결혼을 한다니 웃음이 나왔다. 그 지독한 성질머리를 받아줄 남자가 세상에 있다니. 그 불쌍한 남자는 대체 누굴까. 스가와라는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러니까, 그냥 그걸 확인하러 가는 거야. 스가와라는 습관처럼 눈썹 부근을 문지르며 자신을 달랬다. 다른 기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그것만.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뒤숭숭했던 마음이 쑤욱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가 참 치졸하게 느껴져 우울하긴 했지만, 아까의 기대감을 품은 자신보다는 덜 불쌍했으니 나아 보였다. 그래도 어쩐지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데스크에 머무르다 겨우 가방을 들었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작업물을 챙겨 들고 복도로 나오자 통유리로 쭈욱 펼쳐진 복도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람들 덕에 곳곳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 빛을 하나둘 밟아 삼키며 스가와라는 눈치 없이 기대하는 제 마음을 꾹꾹 눌러 감추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그리고 반질반질하게 닦인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까지 내려갔다. 듬성듬성 빠져나가 구멍이 생긴 주차장으로 들어서 어렵지 않게 자신의 차를 찾아 올라탔다. 온갖 서류들과 파일이 너저분한 조수석에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 옮겨 적었던 호텔로 차를 몰았다. 평소와 같았으면 운전 중의 고독을 잊기 위해 라디오라도 켰겠지만, 그럴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투둑투둑 핸들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풍겨대는 긴장감을 안고 거리로 나오자 비껴간 퇴근 시간 덕인지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차라리 좀 밀리면 좋을 텐데. 그럼 도중에 자리가 끝났다고 연락이 올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제바람과는 달리 차도는 막힘이 없었다. 두어 번의 신호에 붙잡히며 U턴을 수십번 고민하다 결국은 계속 달려 호텔에 도착했다. 워낙 이런저런 미팅으로 자주 왔던 곳이라 익숙하게 내려 직원에게 키를 건네주곤 안으로 들어섰다. 격식 있는 차림이라기엔 미치지 못하는 꽤 캐쥬얼한 복장이었으나 그래도 합격점이었는지 저를 붙잡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런 호텔에서 상견례라니. 상대 집안이 꽤 잘사는 걸까. 자신이 기억하는 제 집안을 생각하면 너무도 넘치는 장소 선정이었다. 이런 장소에 9년이나 찾지도 않았던 자신을 불러내는 걸 보니 귀한 집안 아들을 잡은 모양인지라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그저 허무한 웃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금방 지워졌다. 대신 딱딱한 얼굴이 자리 잡았다. 바짝 마른 손바닥으로 그 얼굴을 감추듯 쓸어내린 후, 스가와라는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 레스토랑이 자리 잡은 층의 버튼을 눌렀다. 멈춰라, 멈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커다란 박스 안에서 간절하게도 빌었지만, 빠르게도 올라간 엘리베이터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이내 자신을 뱉어냈다. 돌아갈까, 이미 늦어도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라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예약하셨습니까?"
친절하게도 지배인이 물어왔다. 아뇨.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안쪽을 가리켰다. 일행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코우시!"
창가의 둥그런 테이블, 도쿄의 야경을 등에 진 여성이 벌떡 일어나 반갑게도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코우시라니, 그녀가 자신을 이토록 살갑고 다정하게 부른 적이 있던가? 아 어릴 때. 그때는 아마 코우시라고 불렀던 거로 기억한다. 그리 다정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 이후로는 뭐라 불렀더라. 부르기는 했던가?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기야, 여기!"
휘휘 커다랗게 팔까지 흔들어 보이며 부르는 스가와라 코유키의 목소리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마냥 질질 발을 끌어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의 곁에 앉아있던 익숙한 얼굴들도 일어서 자신을 반겨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은 세월이 지나간 얼굴의 부모님이었다.
"회사 바빴지? 오느라 고생했다."
테이블까지 벗어나 다가온 어머니가 마치 오늘 아침 출근길을 배웅했던 사람마냥 다가와 제 가방을 들어주며 살갑게 굴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아직은 자신을 보는 게 거북한지 아버지는 무뚝뚝한 얼굴로 일자로 그린 입술을 고집했다. 아뇨, 괜찮았어요. 적당하게 맞장구치며 비워진 자리를 차지하기 무섭게 다가온 스가와라 코유키가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인사해, 여기는 곧 나와 결혼할 오이카와 토오루. 토오루, 인사해. 여긴 내 동생 스가와라 코우시."
팔짱, 참 어색했다. 자신이 옷깃만 붙잡아도 벌레 대하듯 쳐내며 꽥꽥 비명을 지르던 그녀가 팔짱이라니. 어색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이름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런 생각으로 앞에 선 사내를 마주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이름만큼이나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저 얼굴에 저 이름이면 단 한 사람밖에 없는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언젠가 한 번 붙잡았던 그의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토오루는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어."
가볍게 손을 잡았다 놓기 무섭게 그녀가 이미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을 자랑스레 떠들어댔다.
오이카와 프로덕션의 대표 오이카와 토오루. 한 기업의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이름은 모를 수가 없었다. 광고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고 요 몇 년 사이 반응 좋고 화제가 되었던 광고들은 모두 그와 그의 팀의 손을 탄 것이었다. 소규모의 회사지만 이 판에서는 꽤 입지가 탄탄하고 유명세 있는 사내. 일로도 그랬지만, 그의 완벽에 가까운 외모 역시도 유명해 온갖 소문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은 여성편력에 관한 것들로 조금은 낯부끄러운 것도 더러 섞여 있어 함께 작업하기 전에는 조금 이미지가 안 좋았는데, 작년에 함께 일하게 되면서 꽤 젠틀한 그의 행동이나 마인드에 깔끔하게 지워냈었다. 얼굴을 붉히는 여자 팀원들과 함께 저런 남자는 누가 데려가려나? 와 같은 허튼 고민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 주인공이 스가와라 코유키라니.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전개라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팀원인 아이자와나 밀어주는 거였는데. 그에게 살짝 마음을 품었던 같은 팀의 여직원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코유키에게 들었어요. 아지노야마에서 일한다면서요. 저 거기 캔커피 마니안데."
자리에 앉기 무섭게 그가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지 직장 이야기를 꺼냈다. 한 번 같이 작업했던 사이인데 저를 기억 못하는지 아주 가벼운 말투라 약간은 섭섭함이 들었다.
"맛있죠."
그래서 짧게 대답이 튀어나갔다. 사실 캔 커피는 거기서 다 거기라 생각했지만, 적당하게 대답은 맞춰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거기 음료 광고 제가 담당했었어요. 홍차 음료요."
그 현장에 있었는데. 그보다 그 기획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던 홍보팀이었는데. 광고 미팅부터 촬영까지 내내 함께했었는데. 저리 언급하는 걸 보니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혼자 아는 체를 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스가와라는 "맞아요, 그랬던 거 같네요."라며 적당하게 맞장구를 쳤다. 그 대답에 이어 뭐가 또 그리 궁금한지 그가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제 옆에 앉은 어머니의 말이 더 빨랐다. 그리고 평생 들어본 적 없었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줄을 지어 테이블로 쏟아져 나왔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제 누나가 많이 가르쳤다, 1등을 놓쳐 본 적도 없다, 보다시피 그리 넉넉한 살림도 아닌데 이 녀석 학원 보내주느라 코유키는 언제나 뒷전이었다, 대학도 좋은 곳으로 갔다, 학비가 비싸 벅찼는데 코유키가 헌신해 무사히 졸업시켰다, 제 누나가 끔찍하게 아끼는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우애가 좋았다, 코유키가 상대적으로 동생 때문에 포기한 게 많아 언제나 미안해한다, 오늘도 회사 때문에 바쁜데 제 누나 결혼 상대 보겠다고 달려왔다 등등. 죄다 거짓말인 이야기들이 가식적인 웃음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넘쳐 흘렀다.
어려서 공부를 잘하고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건 맞았지만, 스가와라 코유키가 제 공부를 도운 적은 없었다. 넉넉한 살림이 아닌 것은 맞았지만 학원에 다닌 것은 스가와라 코유키였지 자신이 아니었다. 대학을 좋은 곳으로 간 것은 맞으나 모두 전액 장학금이었지 스가와라 코유키가 희생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 이미 그 당시 자신은 집을 나왔으니까. 거기다 스가와라 코유키가 자신을 끔찍하게 아낀다니. 스가와라는 이 대목에서 웃음이 터져 나올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끔찍하게 생각할지언정 그녀는 자신을 아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녀와 자신 사이에 우애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치 그게 진실인 양 술술 뱉어댔다. 여러 번 울리던 전화벨의 끝을 보았을 때 대충 예상했던 시나리오지만, 그게 현실로 펼쳐지니 입안이 다 텁텁했다.
"그런 것치고는 코유키가 동생분 이야기를 전혀 안 해서, 정말 궁금했어요. 어떤 분인지."
"내가 언제? 했어!"
"그래, 했지. 이란성 쌍둥이고, 조금 닮았고, 아지노야마에서 일한다고. 그 외에는 들은 게 없었잖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된 거지, 뭐!"
어울리지도 않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툴툴대며 오이카와의 공격에 스가와라 코유키가 반격했다. 끔찍해도 대기업에 다니는 동생은 자랑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식사가 아직 나오지 않았는지, 테이블은 텅 비어있었고 제 위 역시도 텅 비어있었지만 이 자리 자체가 더부룩하고 목을 채워 답답했다. 앉은 지 겨우 10분 정도가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이렇다니.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물론, 절대로 못 하겠지만. 스가와라는 조심스레 여전히 제게 둘린 누이의 팔을 풀어내며 자신을 향한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어요?"
별로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온갖 거짓말을 듣는 것보다야 백배는 나아 보여 애써 물었다. 가게에서 만났어요. 오이카와는 간단하게도 대답하며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내 가게에 토오루가 우연히 들렸거든. 촬영에 쓰일 꽃이 필요하다고."
가게, 꽃. 부러 그 단어에 힘을 주며 대신 코유키가 대답했다. 꽃집을 하는구나.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 가게는 도대체 무슨 돈으로 차렸을까. 가게를 심지어 도쿄에 번듯하게 하나 차려줄 정도로 집안 사정이 넉넉하진 않을 텐데. 자신과는 이제 상관없음에도 스가와라는 별것이 다 궁금했다.
"그리곤 이상한 작업을 걸었지? 뭐라고 했더라??"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냐고."
"너무 흔해 빠진 대사라 웃었다니까? 그 이후론 매일 왔어. 매일 와서 이야기 나누고 꽃을 사 가다-"
"데이트 신청을 했어요. 제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쏟아내는 그녀를 대신해 오이카와 토오루가 대답했다. 그렇게 벌써 1년째야, 라고 마무리는 스가와라 코유키가 내었다. 1년이라, 그러고 보니 자신과 그와 함께했던 광고도 그즈음이었던 거 같은데. 함께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이에 그가 스가와라 코유키와 데이트 중이었다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사람의 연이 이렇게도 닿을 수 있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미 없는 관심은 고스란히 눌러 죽인 채로 스가와라는 그저 웃었다. 그래요,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하며 드디어 테이블을 차지하는 음식들로 시선을 돌렸다. 애피타이저부터 시작되는 음식들은 이 호텔의 이름에 걸맞게 꽤나 고급스러운 차림이었다. 송로 버섯이 들어간 수프부터 시작된 음식들은 매니저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온갖 어려운 이름의 메인 디쉬로 바뀌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출장 다니면서 먹어보았던 것들이라 다행히도 스가와라에게는 그리 생소한 음식들은 아니었다. 그런 자신과 달리 와인에 절인 에스카르고가 나왔을 때, 스가와라 코유키와 부모님은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프랑스에서 버터와 마늘로 요리된 달팽이만 먹어보았지, 와인으로 절여진 건 처음인지라 스가와라 역시도 멈칫했으나 생각보다 입맛에 맞아 그릇을 깔끔하게 비웠다. 물론, 눈앞의 오이카와 토오루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진행된 식사는 송아지로 구워진 스테이크와 마지막 디저트로 셔벗이 나오고 나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그나저나, 일하다가 나온 거 아니야? 가봐야 하지 않아?"
말린 오렌지와 베리들이 함께 얹어 나온 셔벗은 보기만 해도 상큼하고 시원해 보였다. 하지만 그 맛을 맛보기도 전에 자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스가와라 코유키가 딴지를 걸어왔다. 무시하고 있을까 오기가 들었지만, 어쨌거나 누군가에게는 좋은 자리 방해꾼은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수저를 내려놓았다.
"잊고 있었네, 아직 일을 다 마무리하고 온 게 아니라 가봐야겠어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아쉽네요,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예의상의 인사말에 "저도요."라고 대답하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그 예의라는 것도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아 할 코유키가 뻔했기에 스가와라는 그저 웃었다. 가방과 옷가지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자 배웅하겠다며 달갑지 않게 그녀가 따라붙었다. 마치 정말로 사이좋은 사이처럼 팔짱까지 끌며 이끄는 그녀를 거절하지 못하고 질질 끌리다시피 자리를 떠야만 했다. 그렇게 끌리듯 걸어 멈춰선 곳, 그리고 그녀가 팔짱을 풀어낸 곳은 계산하는 카운터 앞이었다.
"계산 좀 해줘. 너 그럴 여유 있잖아."
"..."
"결혼 선물이라 생각할게."
뻔뻔한 요구라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았다. 픽 터진 제 웃음에 구겨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조금 즐겁기도 해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갑을 열어 카드를 내밀었다. 총 5명의 코스 요리값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으나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결혼식에는 오지 마."
"..."
"내가 쌍둥이란 이야기에 토오루가 관심이 많아. 그럴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혹시나 다시 이런 자리가 생겨도 나타나지 마. 한 번은 어쩔 수 없지만 다음은 싫어."
"...왜?"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결혼식에 갈 생각은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시 이런 자리에 끌려 나올 생각 역시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어쨌거나 자신도 이 집안의 일원이고 가족인데 왜 이렇게까지 밀어내는지. 그 애타는 궁금증에 묻자 그녀는 기가 차다는 듯 하, 하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왜냐니, 너 같은 게이 새끼가 내 결혼식에 와서 내 남자에게 추파 던지는 꼴 내가 가만히 두고 볼 거 같아? 더러운 새끼. 한 번은 봐줬지만, 두 번은 아니야. 알아들어? 다신 토오루랑 말도 섞을 생각하지 마. 알았어? 내 눈앞에도 얼쩡대지 마."
아냐, 그게 아니잖아. 내가 게이라 밝히기 전에도 너는 날 싫어했잖아. 으득 이를 갈며 뱉는 그녀의 독설을 고쳐주고 싶었지만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소리를 붙잡지는 않았다. 아마 다른 이유를 묻는다 하더라도 그녀는 너무 많다며 다 뱉지도 못할 것이었다. 하하, 이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매니저의 어색한 웃음 속 배웅을 받으며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어쩐다.."
다신 오이카와 토오루와 마주할 생각 하지 말라 으름장을 놓았지만, 이번에 들어가는 베이커리 믹스 시리즈 광고가 아마 그의 프로덕션이랑 계약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회사의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대대적인 홍보 프로젝트에도 그가 포함되어 있었다. 절대로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마 그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지겹게도 보고 마주해야 할 얼굴이었다. 이걸 알면 당장 스가와라 코유키가 제 목을 조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쩍 뒷목을 쓸어보는데, 그 손 위로 들리면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가와라상!"하고. 점차 늘어나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확인한 후, 돌아서자 오이카와 토오루가 급하게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계산, 제가 해야 하는데 했다면서요? 그런데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보내는 거 같아서-"
"괜찮아요. 바빠서 코하...아니, 누나 결혼식도 못 갈지도 몰라 이 정도는 제가 해야죠."
"아, 참석 못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코유키와 부모님께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벌써 정했던 일이구나. 그래놓고 이 자리에는 저를 불러 식사비까지 내게 하다니, 조금 상처였다. 그래도 애써 그런 티는 내지 않으려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놔달라는 의미와도 같은 인사였다.
"조심해서 돌아가요. 그리고-"
띵, 울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와 함께 드디어 문이 열렸다. 지체없이 발을 뻗어 들어가는 스가와라의 등에 대고 오이카와가 다급하게 이어 외쳤다.
"기억력 안 좋다는 소리 자주 듣지 않아요?"
네? 그건 이쪽이 할 소리인데? 하지만 그렇게 다시 따져 묻기도 전에 쿵,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눈을 깜빡이며 다시 열림 버튼을 누를까 하다 그냥 가장 아래층의 숫자를 눌렀다. 아무렴 어때, 지금은 그가 던진 질문에 쏟을 정신적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어서 돌아가서 씻고, 쉬고, 잠들어서 오늘은 잊고만 싶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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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진짜 오랜만에 steal away를 듣다가 생각난...
잘못된 만남 + 막장 아침드라마 같은 오이스가가 보고싶어서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