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방문?"
"네..."
거짓말. 스가와라는 머릿속으로 세글자를 천천히 떠올리면서 들키지 않게 필사적으로 팀장과 눈을 마주했다. 스가와라군, 저번 달에도 학교 방문 해야 한다고 하고 반차 내지 않았어? 일 적으론 전혀 날카롭지 않은 주제에 이런 데서는 눈치가 백단이었다.
"아뇨, 그때는 학부모 참관이요. 팀장님. 오늘은 진로 상담때문에..."
"진로 상담을 벌써 해?"
"네. 열아홉이니까요."
거짓말, 모두 거짓말이었다. 진로 상담은 이미 학기 초에 이루어졌고,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당분간은 학교에서의 호출은 없을 예정이었다. 그럴 예정이었지만, 이것 외에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생각해낼 수 있는 거짓말이 없었다. 거짓말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고 자신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럼 미리 신청하지 왜 갑자기.... 어쨌든, 알았어. 잘 하고 내일 늦지 말고 출근해."
"감사합니다."
영 탐탁지 못하다는 팀장의 혀 차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짐을 챙겨 들었다. 손목에 찬 시계는 오후 1시 23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코하네가 알려준 행사는 2시부터였으니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지각이었다. 수고하세요, 먼저 갈게요. 눈치 보이는 인사를 억지로 웃으며 던진 후, 스가와라는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곤 내달렸다. 누가 보면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오빠, 부탁이야. 진짜. 딱 한 번만! 응?!"
이 웃기지도 않은 핑계와 거짓말은 모두 그녀의 저 한 마디 때문이었다. 스가와라 코하네, 19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하나뿐인 여동생. 그리고 유일한 가족. 스가와라는 그녀에게 약했다.
"싫어."
출근 준비를 하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우물쭈물하길래, 용돈이 필요한가 했더니 그녀가 던진 부탁은 그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녀가 요 몇 년 동안 열정적으로 빠져있는 어느 밴드의 이벤트에 대신 참가해달라는 것. 말 그대로 말도 안 되는 부탁이었다.
"나도 내 이름으로 당첨되었으면, 내가 갔을 거야! 그런데 오빠 이름으로 당첨된 걸 어떡해!!"
내용은 간단했다. 새 앨범인지 싱글인지 발매 기념으로 그녀가 좋아하는 밴드와의 식사 이벤트가 열리는데 제 이름으론 한 번밖에 응모를 못 하니 자신의 이름까지 신청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정작 온 마음을 다해 적어낸 스가와라 코하네가 아닌 혹시 모르니까! 라는 기분으로 낸 스가와라 코우시, 자신의 이름이 당첨되고 말았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2시부터야, 미나미 타워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오빠 전에 TV에서 여기 나온 거 보고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 응? 얼마나 좋은 기회야. 거기 가서 밥 맛있게 먹고, 내가 챙겨주는 CD에 사인만 받아주면 되는 간단한 일이야! 응?! 제바알! 이 동생의 평생 소원입니다. 오빠! 제바아알!!"
하나하나 들어주면 그다음은 더 커진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했듯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녀에게 약했다. 곧 눈물까지 터트릴 얼굴로 제 팔을 붙잡고 징징대는데 도무지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저게 다 자신을 함락시키려는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결국,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말은 "알았어."였고, 그 대답 덕분에 자신은 갑작스러운 반차를 내고 달리고 있었다.
올여름은 무섭게 덥다고 아나운서가 떠들더니 그 말이 맞는지,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소매를 걷고 넥타이를 풀었지만 몸에서 피어오르는 열과 공기 중의 열이 맞닿아 더 뜨거워졌다. 안 되겠다. 스가와라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70엔짜리 아이스바를 계산했다. 와그작, 이가 시린 것도 느끼지 못하고 씹어 삼키며 택시를 잡았다. 동생이 좋아하는 밴드와의 식사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미나미 타워의 전망대엔 땀에 샤워한 꼴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출발하는 택시 안, 찬 에어컨 바람과 아이스바가 만나니 천국이었다. 미나미 타워의 전망대보다 여기가 더 좋을 거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가만히 택시에 흐르는 라디오와 에어컨 바람 소리를 음악으로 바꿔 들으며 아이스바의 마지막을 맛보았을 때, 차는 멈추었다. 큰 지출인 택시비를 계산하고 나오자 다행히 땀은 기분 좋게 식어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찬 기운을 두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평일임에도 사람이 북적였다. 쇼핑센터와 함께 전망대 그리고 수족관까지 들어와 있는 곳이다 보니 당연했다. 그중에서 미나미 타워의 전망대 레스토랑는 제일 유명한 명소였다. 창가로는 도쿄의 전망이 그리고 레스토랑의 가운데는 수족관과 연결된 커다란 수조가 놓여 있어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어 인기였다. 하지만 인기가 많다 보니 모든 좌석은 예약제였다. 거기다 비싸기까지 했다. 평범한 회사원인 자신에게는 사치인 곳인 데다 같이 갈 사람도 물론 없었고, 가족 외식 장소로는 너무 고급스러웠다. 그래도 언젠가는 한 번 정도는 가보겠지 했는데, 그게 이렇게 이루어질 줄이야.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스가와라는 한숨을 뱉었다. 그런 기회를 잡았으니 즐거워야 하는데 전혀 즐겁지 않았다. 왜냐하면
"손님. 오늘은 레스토랑이 대관 되어 이용할 수 없으십니다."
"...저... AOBAJOHSAI VOLLY BALL CLUB의 이벤트 때문에 왔는데요..."
쪽팔렸으니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무섭게 친절함으로 무장한 직원의 제지에 붉어진 얼굴로 방문 목적을 말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양복을 입은 멀쩡한 남자가 나타날 거라곤 그녀도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저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방에서 코하네가 넣어준 우편물을 꺼내 내밀었다. 이벤트 당첨을 알리는 초대권이 든 봉투였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지 한껏 목을 붉게 물들인 그녀는 몇 번의 헛기침과 함께 초대권을 확인한 후, 안으로 안내했다. 언제나 만석이라던 레스토랑은 오늘만큼은 완벽하게 비어 있었고 은은한 재즈풍의 음악과 유유히 헤엄치는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조용함과 함께 스가와라를 반겼다.
"그럼 편하게 기다려 주세요."
좌석엔 이미 물과 식기들이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전망도 가장 좋은 테이블인지 저 멀리 낮의 붉은 도쿄타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곤 그 뒤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한 번, 그리고 고개를 돌려 푸른 수족관을 한 번 돌아보았다. 말도 안 되는 자리에 나와버렸지만, 어쨌거나 이 풍경들에 포함되고 나니 기분이 살짝 들떴다.
"그럼.. 외운 걸 확인해 볼까."
기분은 좋았으나 그것과 별개로 자신은 즐기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제 목적을 다시 상기하며 가방에서 CD를 우르르 꺼내 펼쳤다. 모두 코하네의 것이었다. 아침에 급하게 그녀에게 누가 누구고 어떤 악기를 연주하고 뭘 좋아하는지 10분 족집게 과외를 받았지만, 스가와라 눈에는 다 똑같이만 보였다. 전혀 모르겠어. 그렇게 고개를 저었더니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도대체 어디가?! 자 봐! 여기 이렇게 머리를 삐죽하게 세운 오빠가 이와이즈미 하지메! 드럼이라고 드럼. 여기 스틱 들고 있잖아. 그리고 핑크 머리가 기타인 하나마키 타카히로! 하나(花)랑 벚꽃이랑 같이 생각해보면 외워진다니까? 여기 눈매가 섹시하게 생긴 오빠가 마츠카와 잇세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빠고 베이스야, 베이스. 꼭 이 오빠에겐 내 이야기 해줘야 해?! 마지막으로 오이카와 토오루오빠. 제일 잘생겼지? 외울 수 있겠지?"
라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외쳤지만, 여전히 북클릿을 들여보는 제 눈에는 누가 누군지 구별 가질 않았다. 밴드든 아이돌이든 누가 누군지 외우고 구별하기엔 자신은 이미 나이를 먹었다. 곧 아저씨였다. 그런 아저씨에게는 이런 연예인보다는 맛있는 맛집이나, 시설 좋은 스파 시설이 더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나저나 왜 아오바죠사이 발리볼 클럽이야?"
밴드면서? 제일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을 굳이 입에 담아 뱉는 순간,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들자 이번엔 목이 아닌 얼굴이 붉어진 아까의 직원이 4명의 장신을 안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모델로 착각할 법한 네 명의 늘씬한 키에 스가와라는 CD를 챙겨 넣고 인사를 위해 일어서다 주춤 멈춰 섰다. 그냥 길쭉하면 길쭉할 것이지, 넷 다 옷까지 끝내주게 잘 입은 데다 얼굴은 밴드도 모델도 아니고 아이돌에 가까웠다. 스가와라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양복과 지금의 자신의 상태를 그리며 어설프게 웃었다. 완전 오징어잖아? 나?!
"안녕하세요!"
하지만 제 생각을 알 리 없는 신의 축복을 받은 듯 보이는 네 남자는 테이블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유일하게 머리 색으로 외운 하나마키 타카히로였다. 밝은 그의 인사에 스가와라는 끄덕이며 어정쩡한 포즈로 그들이 자리 잡기를 기다렸다.
"라이브에 가면 남자 팬들이 꽤 있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남팬 아닌데. 자리를 잡는 하나마키의 말에 스가와라는 정정하고 싶었지만, 웃음으로 때우며 따라 의자에 앉았다.
"그럼 식사부터 주문할까요? 뭐 드실래요?"
하나마키의 옆자리를 차지한 남자가 메뉴판을 건네며 물었다. 글쎄요, 뭘 먹어야 할까. 간단한 메뉴판에는 생소한 음식들이 가득이라 뭘 골라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적당하게 스테이크 목록에서 아무거나 손가락으로 찍어 골랐다. 어차피 이 분위기에선 물 하나도 제대로 넘어갈 거 같지 않았다. 메뉴를 주문하고 나니 테이블에는 침묵이 가라앉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그대로 피부에 와 닿아 스가와라는 입술이 바짝 탔다. 이런 분위기에는 약했다.
"그나저나, 누구 팬이에요? 우리 중에?"
꽝꽝 굳어있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려는지 다시 하나마키가 입을 열었다. 팬이라, 스가와라는 쭈욱 저를 바라보고 있는 네 남자를 둘러 보았다. 자신은 누구의 팬도 아니었다. 이름도 사실 하나마키 타카히로를 제외하면 외우지도 못했다. 당연 얼굴은 더더욱. 아아, 코하네가 누굴 좋아한다고 했더라. 그녀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던 얼굴을 떠올리려 했으나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뭐, 아마 제일 잘생긴 멤버겠지.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하며 스가와라는 가장 끝에 앉아있던 남자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그리곤 후다닥 다시 손을 내렸다.
"와, 영광이네요."
그가 웃으며 대꾸했다. 기쁨을 담은 말이었지만, 얼굴은 웃지 않았다. 팬이라도 남자에게 좋아한다고 듣는 건 별로인가. 뭐, 이왕이면 여자 팬이 더 좋겠지. 스가와라는 쿨하게 이해했다.
"그럼 우리 곡 중에서 뭘 제일 좋아해요?"
이번에는 메뉴판을 건넨 남자의 질문이었다. 왜 이렇게 질문이 많을까. 그냥 밥만 먹고 헤어지면 안 될까? 우리. 스가와라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학생 때는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밥먹 듯 들었던 자신이었다. 대학도 전액 장학금이었다. 물론 대학에 다니기 위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데로 골라 간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장학금이었다. 그러니 돌아라, 머리! 스가와라는 머릿속으로 코하네가 흥얼거리는 노래들을 떠올렸다. 그녀가 밤낮없이 틀어놓았던 노래도 떠올렸다. 집에서 야광봉을 흔들며 외치던 노래들을 떠올렸다.
"여름을 돌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너야. 여름 하늘, 여름 하늘.."
아마 이런 가사였던 거 같은데, 스가와라는 허밍 하듯 기억나는 데까지 흥얼댔다.
"아아, 여름 하늘. 그거 어디에 실린 거더라?"
"우리 세 번째 싱글에 커플링 곡. 엄청 오래된 곡인데,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네요."
하나마키의 질문에 무뚝뚝해 보이는 사내가 얼굴을 풀며 말했다. 아아, 삐죽삐죽 세팅된 그의 머리를 보니 이름이 떠올랐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드럼!
"막 이렇게 후리도 하잖아요."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했는데. 맞춘 것에 기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들떠 코하네가 집에서 휘두르던 야광봉대로 팔을 휘저었다.
"그 후리는 melody tomorrow."
하지만 틀렸는지, 코하네가 가장 좋아한다는 멤버가 딱 잘라 찬물을 끼얹었다. 멜로디 투모로우던 멜로디 투데이던 처음 듣는 제목이었다. 뭐 아무렴 어때. 자신은 모르는게 당연했다. 왜냐! 팬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만 외쳐대며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빠르게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열었으나 정말로 고맙게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음식이 나왔다.
"맛있겠네요!!!"
애써 목소리를 키우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 때문이 아니었다. 제 뺨에 달라붙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기 위해서였다.
레스토랑의 명성에 맞게 음식은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보았던 스테이크 중에서 가장 최고였다.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음식은 훌훌 잘만 넘어갔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지켜보고 있던 이와이즈미가 "더 시킬까요?"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배불렀다. 그렇게 식사를 한 후에는 기념 사진이라며 수족관 앞으로 나가 사진을 찍었다. 코하네를 위해 불편하지만 스가와라는 용기 내어 그녀가 가장 좋아한다는 멤버 옆에 섰다. 가장 좋아하는 멤버라며요, 다정하게 찍어요! 메뉴판 멤버의 말에 억지로 웃으며 슬쩍 팔짱을 꼈다. 코하네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럼, 오늘 즐거웠습니다."
약 두시간, 정말 그들의 팬이었으면 짧고도 짧은 이벤트였겠지만 온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던 스가와라에게는 길고 긴 시간이 끝났다. 끝났다는 이와이즈미의 인사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 한가득 웃었다.
"야, 네가 배웅해드리고 와라. 네 팬이잖아."
그렇게 가방을 챙겨 나서려는데 메뉴판 멤버가 이번에도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스가와라는 손까지 저으며 거절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하아, 스가와라는 꾸역꾸역 한숨을 참아내며 앞서 나가는 사내를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불편한데, 하지만 제 생각을 알 리 없는 그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함께했다.
"아, 맞다."
그렇게 나란히 서자 잊고 있던 CD가 떠올랐다. 코하네가 싸인 받아오라고 했는데! 뭐, 모두는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멤버 사인이면 다 괜찮지 않을까. 스가와라는 서둘러 가방에서 챙겨온 CD를 꺼내 내밀었다.
"사인 좀 해주세요."
꺼내보니 양이 많았다.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들더니 말없이 매직으로 차곡차곡 모든 CD의 북클릿에 사인을 남겼다. 심지어 말하지 않은 자신의 이름까지 친절하게도. 그러고 보니, 다들 서로 통성명도 안 했네? 스가와라는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며 멍하니 적혀진 제 이름을 들여보았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신청서에 적었잖아요."
"아.. 맞다."
그랬다고 했지. 코하네가 자신의 이름으로 신청을 했다고 했다. 그러니 통성명을 안 했구나. 스가와라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 싶어 어색하게 웃으며 빠르게 CD를 챙겨 넣었다. 그리고 띵, 하고 울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에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올라탔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 이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언제 이런 곳에 와 스테이크를 먹고 연예인을 구경하겠는가. 비록 반차를 쓰고 팀장에게 거짓말을 하고 온 자리였지만, 정말 나쁘지 않았다. 솔직하게 뱉는 스가와라의 마지막 인사에 남자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마츠카와 잇세이가 아니라 오이카와 토오루."
"...네?"
"오이카와 토오루라고요."
무슨 소리지? 하지만 그걸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텅, 하고 굳게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눈만 깜빡였다. 뭐, 아무렴 어때. 다신 안 볼 상대. 다시 보기엔 먼 상대. 스가와라는 자신이 저지른 어마어마한 실수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웃었다. 스테이크가 정말 맛있었다.
+
제목 : 새 앨범 이벤트에 응모합니다!!!!!!!!!!!!!!!!
신청인 : 스가와라 코우시
나이 : 27세
연락처 : 090-2222-0613
내용 :
안녕하세요, 저는 도쿄에 사는 회사원 스가와라 코우시입니다. 아오바죠사이 발리볼 클럽의 노래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제 인생의 큰 활기이며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가라오케에 가서도 늘 아오바죠사이 발리볼 클럽의 노래를 부르고, 또 여동생과 매번 라이브에도 함께 가고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멤버는 마츠카와 잇세이군 입니다. 같은 남자가 봐도 그의 눈매는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의 베이스는 마음을 녹아내리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곡은 Liar입니다. 이 곡이 실린 싱글 앨범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북클릿은 이미 너덜너덜할 정도랍니다. 27살인 성인 남성이 이런 이벤트를 신청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마츠카와군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용기도 낼 수 있는 팬이기 때문에 응모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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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가 아니라 노이즈같은 두 사람의 착각의 첫만남... 가튼.. 그런...
전력 주제 :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