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너와 나 그리고 XXX 2
2015. 1. 15. 23:18






"이번 일 절대로 가볍게 다루지마. 큰 건이니까."

"선배, 그 말 벌써 몇 번째라고 생각해요? 알았으니까 그만."



회의실로 향하는 길 오이카와는 1년 위 선배의 끊임없는 다그침에 대충 대답했다. 새파란 신입 사원도 아닌데 뭐 이렇게 걱정이 한아름인지 오이카와는 속으로 혀를 차며 회의실로 향하는 걸음을 가볍게 움직였다. 오이카와가 현재 몸을 담고 있는 곳은 작은 광고회사로 사원수가 고작 10명도 되지 않는 소규모 회사였다. 작년에 꽤 큰 상을 받게 되면서 최근에 상승세에 오르는 중이었는데 그것을 증명하듯 오늘 미팅이 잡힌 회사는 일본 전역에 15개의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유명 고급 디저트 브랜드였다. 곧 출시되는 프랑스의 유명 파티쉐와의 콜라보레이션 디저트를 홍보하기 위해 광고 오퍼를 넣었고 선배 말로는 아마 여기저기 조율 중이라 우리로 정확한 결정이 난 것은 아니라 했다. 그러니 오늘 미팅이 중요했다. 이 일을 따내느냐 마느냐는 오이카와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절대로 저 쪽에게 주도권 쥐어주지마. 사나이답게 흔들리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밀고 나가."

"가볍게 다루지 말라면서요. 일을 따내야 하는데 주도권을 쥐어주지 말라구요? 선배, 진짜 무리한 말인거 알죠?"

"그러니까 니가 안에 들어가서 늘 그렇듯이 화려하게 휘저으면 되는거지. 담당자가 여직원이면 좋겠다."

"왜요?"

"니 얼굴에 가산점을 줄 수도 있잖아. 네 유일한 장점."



유일한 장점이라니. 선배의 무시무시한 칭찬에 오이카와는 웃어 보이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 끌어당긴 입꼬리는 내리지 않았다. 선배의 말 그대로 여직원이라면 이게 보너스 점수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회의실에서 인사를 하기 위해 어정쩡하게 일어선 상대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꼬리를 올려 웃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스가와라 코우시. 인사하는 것도 잊어버렸는지 차게 굳어버린 사내는 쿡 옆구리를 찌르는 동료에 의해 현실로 끌려 올려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홍보팀 담당자인 스가와라 코우시입니다." 조용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울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처음 만나서 반갑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좀 곤란한데. 선배는 주도권을 쥐어주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자신이 어떠한 제안을 내놔도 상대는 분명 거절 할 것이 분명했다. 표정봐, 완전 무시무시하잖아. 시작도 전에 공쳤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게 분명했다. 후- 가볍게 숨을 뱉은 오이카와는 딱딱하게 굳은 스가와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준비 한 작업물들을 테이블로 펼치며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럼, 미팅 시작할까요?" 




약 2주 전, 오이카와는 스가와라 코우시와 잤다.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베드인 했다는 말이었다. 이와이즈미의 권유로 가게 된 과거 카라스노의 주장 사와무라 다이치의 결혼식에서 스가와라 코우시와 재회했다. 식장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막 반지를 교환하는 새신랑을 보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그에게 흥미가 동해서, 그냥 둘 수 없어서 무작정 따라 나가 "우리,잘래?"라고 가볍게 권했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거부하지 않았다. 심지어 침대에서는 꽤 적극적으로 맞춰왔다. 남자 경험이 없는 자신과 달리 스가와라 코우시는 있다고 했다. 그것도 꽤. 그렇게 말하는 스가와라 코우시는 자신이 알고 있던 밝고 강단있는 고교 시절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하지도 못하는 감정을 앓고 앓아 엉망이었다.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에 사와무라 다이치를 찾는 남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안았다. 여운을 즐길 틈도 없이 떠나는 그에게 연락하게 명함이라도 던져주라고 했더니 차갑게 거절하며 떠났다. 그랬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오이카와는 진심으로 웃었다. 그런 오이카와와 달리 스가와라 코우시는 미팅이 진행되는 내내 입을 다문 채로 굳어 있었다. 데구르르-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회의실 가득 울리는 것만 같았다. 




만약에, 이런 관계로 다시 재회할 줄 알았더라면 스가와라 코우시를 꼬시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날의 일을 후회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9년이나 일방적인 감정을 품고 너덜해진 사내를 꾀어내서 안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가질 만큼 오이카와는 좋은 사람은 되지 못했다. 거기다- 상대도 거절하지 않고 꽤 적극적으로 안겨 왔으니 <억지로>라는 불편한 상황도 성립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엮이는 건 역시 불편한 상황이 맞겠지? 오이카와는 아침에 곱게 세팅한 머리카락을 스스로 망가트리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탁 트인 옥상 벤치에 앉아 꺼지지 않는 한숨을 내쉬며 몇 일 전 미팅에서 받아 낸 스가와라의 명함을 이리저리 돌려 뒤적였다. 호텔 방에서는 바로 연락할 생각으로 명함이라도 두고 가라고 했는데, 막상 실제로 명함을 손에 넣으니 연락은커녕 메세지 하나도 넣을 자신이 없었다. 회의실에서 그 딱딱한 태도를 보아하니 좋은 대답을 듣기에는 글러 먹은 듯했다. 그러니- 대표님과 직원들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기대도 하지 말라고 미리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필터가 채 줄지도 않은 담배를 다시 비벼 끈 오이카와는 서둘러 사무실로 내려갔다. 기대감이 더 커지기 전에 먼저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쾅쾅쾅 철제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으슬으슬 추워진 날씨에 팔을 비벼 녹였다. 곧 트렌치 코트를 넣고 두터운 외투를 입어야 할 것 같았다. 밖과 달리 따스한 난방 온기로 가득 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오이카와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멈춰 섰다. 사무실에서 선배와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 스가와라 코우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보다 저 미소는 뭐야?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 밝게 웃으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스가의 모습에 오이카와는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지금의 스가와라 코우시는 저런 미소를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 오이카와! 빨리 와. 스가와라군 왔어. 이번 프로젝트 우리로 결정 났데."

"잘 부탁드립니다."



어정쩡하게 걸어 다가가자 여전히 미소를 그린 얼굴로 스가와라 코우시는 상투적인 대답을 건넸다. 마주 내미는 손을 잡아주며 네, 저야말로요- 라고 예의 있게 말을 전했지만 머리속에서는 어째서? 왜? 라는 궁금증이 일렁거렸다. 오이카와야 이 상황이 불편하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스가와라 코우시와 재회했다는 사실로도 즐겁고 흥분되었다. 하지만 스가와라 코우시 입장에서는 절대로 싫은 수준이 아니던가. <누구라도 좋았던 주제에.>라고 날카롭게 외쳤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자신에게 조금의 호감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미소는 뭐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는 뭘까



"정식으로 인사드리려고 잠시 들린 거에요. 당분간은 조율 문제로 이쪽으로 출근하게 되었으니 그때 뵙겠습니다."



딱딱한 인사와 함께 차가운 손이 스치며 떨어졌다. 사무실 식구들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 바르게도 인사를 한 스가와라는 마지막으로 오이카와에게만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사무실을 벗어났다. 사라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오이카와는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선배! 라고 급하게 외치며 누가 말릴까 사무실 문을 급히 열고 복도로 뛰어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스가와라를 발견하고는 말없이 그대로 팔을 억지로 붙잡아 비상문으로 끌고 들어섰다. 쾅,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떠오르던 복도의 빛이 사라진 후에야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스가의 팔을 놔 주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대로 박혀왔다.



"할 말 있습니까? 오이카와상?"

"할 말은 그쪽이 있겠죠. 스가와라군. 뭐야? 절대로 우리랑은 계약 안 할 줄 알았는데?"

"안 하고 싶었어."

"그런데 왜?"

"누구처럼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멍청이는 아니라서. 내가."



방금전 짓고 있던 따스한 미소를 싸늘하게 굳힌 스가와라는 자신의 구겨진 자켓 소매를 툭툭 치며 날카롭게 뱉었다.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멍청이란 자신을 말하는거겠지? 확실히 ... 스가와라 코우시와 같이 일을 하게 된다면 구분할 자신은 없기는 했다. 



"그래도 절대로 NO라고 말할 줄 알았어. 몸 로비라도 할까 고민했는데."

"그런 싸구려 로비는 안 받아."

"저번엔 받았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라니. 그러니까, 지금 저번의 잠자리가 싸구려 같았다는 소린가? 부들거리면서 자신의 위에서 떨던 주제에 말은 참 잘했다. 그럼에도 밉지가 않아서 오이카와는 픽 웃으며 두 손을 올리며 항복 의사를 표현했다. "싸구려라서 죄송합니다." 농담으로 던진 말에 웃지도 않았다. 선배 앞에서는 그렇게 웃으며 사근사근 굴더니 자신의 앞에서는 싹 모습을 숨기는 스가와라가 살짝 얄미워서 오이카와는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사와무라군, 신혼여행 다녀왔다며? 기념 선물은 받았어?"

"나에게 신경 좀 꺼." 



예상대로 날 선 대답. 스가와라 코우시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온 몸에 어마어마한 가시를 그려주고 싶었다. 방어적인 모습으로. 그런 반응이 더 오이카와를 들끓게 만드는 것을 전혀 모를 사내는 가볍게 돌아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홀로 어두운 비상계단에 남겨진 오이카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눈 위를 덮었다. 아, 젠장. 진짜 좋아. 즐거워. 괴롭히고 싶다.





이 관심이 설령 스가와라 코우시를 죽이게 된다고 해도 조금의 죄책감도 들지 않을 거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 날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잘래?라고 가볍게 제안했고, 9년이나 짝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를 안았다. 죽여주게 좋았고, 관심이 생겼다.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유치한 감정이든 아니든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에게 관심이 있음은 분명했다. 연락처 하나도 제대로 못 받았지만 조만간 이와이즈미를 통해 알아낼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재회하다니, 마치 운명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17살의 여고생도 아니면서 그런 감성적인 상상을 했다.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이대로 정리해서 저희 팀장님에게 승낙받을게요." 



눈꼬리까지 접어 웃으며 사무실 직원들과 대화하는 스가와라를 감상하듯 지켜보며 오이카와는 조용히 데스크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멍청이가 되기는 싫어서 평소보다 더 열심히 짠 컨셉 아트였다. 무사히 1차 OK사인을 받아내니 기분이 좋았다. 메인 디저트인 마카롱의 색감을 그대로 살려 주 타켓이라는 어른 여성들을 위한 세련된 이미지를 뽑느라 고생 좀 했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과거의 애인들에게까지 연락을 했을 정도니까. 조금은 칭찬해주지 않으려나? 오이카와는 헛된 기대를 하며 커다란 포트폴리오 가방을 챙기는 스가와라를 지켜보았다.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사무실 직원들하고만 대화하는 모습이 누가봐도 <일부로>라는게 느껴져 재밌었다.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을 너무도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까. 



스가와라는 일주일에 2번, 많으면 3번 오이카와의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자리는 조금 떨어진 빈 데스크였고 대부분은 회의실에서 다 같이 모여 컨셉 회의와 곧 오픈할 홈페이지 레이아웃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는 자신의 본사에도 들려야 한다는 이유로 대부분 빠른 퇴근을 했다. 같은 공간에, 같은 건물에 있으면서도 하루에 살가운 대화는 조금도 오가지 않는 사이였다. 선배가 서로 담당자니까 술이라도 마시면서 친하게 지내지 그래?라고 제안을 해오기도 했지만 그럴 틈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 술이 들어가면 아마 선배가 생각하는 그 <친하게 지낸다>라는 이상의 짓을 벌릴 것이다. 분명하게, 자신은. 



"아 맞다, 탕비실 냉장고에 가져온 케이크가 있는데- 가져올게요."



지긋한 오이카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스가와라는 어정쩡하게 웃는 얼굴로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탕비실까지 드나들다니, 그냥 우리 회사에 확 이직해서 눌러앉으면 좋겠다. 오이카와는 히죽 이며 허튼 생각을 했다. 그런 오이카와를 본 선배가 "그래도 다른 회사 직원인데 부려먹지 말고 가서 좀 돕지 그러냐?"라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를 해왔다. 평소라면 인턴 여직원에게 시키라며 거절했을 오이카와는 "그럼 도와주러 다녀올게요."라고 산뜻하게 말하며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가 당기지 않으면 발걸음도 잘 하지 않는 탕비실 문을 열고 들어선 오이카와는 냉장고 앞에서 있는 스가와라 뒤로 붙어섰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스가와라가 돌아보자 오이카와는 손에 들린 케이크 상자가 떨어지지 않게 거두며 입을 맞췄다. 뒤로 중심이 넘어가는 허리를 팔로 당겨 안으며 케이크 상자는 가볍게 싱크 선반에 내려놓았다.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잡아 억지로 깍지를 꼈다. 뒤로 도망가는 혀를 잡아 섞어대며 입 안의 타액을 다 거둘 기세로 달려들었다. 억지로 잡힌 손의 힘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끼며 오이카와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은근 쾌감에 잘 무너지는 스타일이었다. 진득하게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자 잔뜩 화가 난 눈동자가 오이카와를 가득 담아냈다. 이어서 당연하게도 "뭐 하는 거야?"라고 짜증을 뱉어냈다. 



"나 잘했잖아. 칭찬을 안 해주길래, 상이라도 받자 싶어서."

"회사에서 함부로 접근 하지마."

"그럼 회사 밖에선 괜찮고?"



아니. 짧게 대답하며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와 얽혀있는 손가락을 풀어냈다. 그리고는 귀찮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밀어내며 케이크 상자로 다가갔다. 단 거 좋아해? 오이카와의 질문에 이번에도 아니-라고 짧게 대답 한 스가는 그럼에도 자신이 일하는 브랜드 로고가 찍힌 상자를 열어 케이크를 보기 좋게 그릇에 담아냈다. 단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디저트 회사에서 일하다니- 귀여워서 더 말을 붙이려던 오이카와는 지잉지잉 울리는 진동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스가와라는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는 그대로 굳었다. 슬쩍, 어깨너머로 보이는 이름은 <사와무라 다이치>였다.



"대신 받아줄까?"



그러길 원한다면. 오이카와가 물었지만 스가는 고개를 저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자신에게는 전혀 들려준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응, 다이치. 왜?" 라며 인사를 대신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자신이 처음 봤었던 그 고등학교 시절의 밝은 모습을 보이는 저 얼굴일까 아니면 지금 자신에게 보이는 날이 선 모습일까. 어느 쪽도 취향이긴 했으나 그래도 이왕이면 웃는게 더 보기 좋은데 말이다. 덧붙여서 오이카와 자신에게만 해준다면 더욱. 전혀 가능성 없는 생각을 하며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사무실 직원들과 있을 때도 항상 웃으며 다정한 모습이었지만 그게 억지로 끌어낸 얼굴이라면 지금의 스가와라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을 왜 끝내지 못하는 거지? 보이는 형태라도 있으면 억지로 가위로 잘라내고 싶었다. 



"알았어, 그래. 주말 저녁에 봐."



마지막까지 웃으며 전화를 끝낸 스가와라는 크게 숨을 뱉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오이카와 역시 방해하지 않았다. 괴로움을 삼키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주말 저녁이라, 만나기라도 하는 걸까? 신혼이면 신혼 답게 제 부인에게나 집중하지 스가와라는 왜 찾는 걸까? 짜증나게. 이유가 뭐든, 다녀오면 죽어 있겠군. 오이카와는 속으로 다이치를 씹어대며 조용히 스가가 준비한 접시들을 들고 탕비실을 나왔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의 회사로 출근했다. 평소와 달리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기분이 나빴다. 주말 저녁, 사와무라 다이치와 만나는 걸 아는 이상 저 흐트러진 스가와라의 이유가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 직원들도 지나가면서 "오늘따라 스가군 상태가 영 아니지 않아?"라고 할 정도로 나빠 보였다. 이유가 뭔데?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내가 해결 할 테니까 징징거려봐, 받아줄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로 대답하지 않을 테지. 스가와라 코우시는 상처를, 고통을 혼자 삼키는데 도가 튼 타입이니까. 뭐, 9년을 그러고 살았으면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에 가깝겠지. 오이카와는 가득 치미는 짜증을 무시하듯 애써 스가와라의 흔들림도 무시했다. 그리고 그 날 오후, 퇴근을 앞둔 시간 결국 스가와라 코우시가 사고를 쳤다. 오이카와가 땀 흘려 만들어 놓았던 홈페이지 메인에 걸 홍보용 파일을 통째로 날려 먹었다. 뭐 말이 통째로 날려먹었다지, 따지고 보면 스가의 본사에서 보낸 그 유명 파티쉐의 작업 영상을 편집해 올린 거라 새로 다시 작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실수를 한 이유가 아마도 아니 명백하게 사와무라 다이치임이 분명하니 오이카와도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치졸하고 약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화를 풀고 싶었다. 



"어쩔거에요. 스가와라군. 당장 내일 모래부터 홈페이지 개장인데. 그쪽들이 정한 데드라인에 처리 안 되면 우리에게 불똥 튈게 뻔한데 지금 장난쳐요?"

"...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죠. 안 그래요?"



영상을 담당했던 직원이 "영상은 백업했으니까 복구하는데 별로 어렵지 않아요."라고 스가와라 편을 들었지만 오이카와는 봐 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신을 어디다 두고 일합니까? 일 할 생각은 있습니까? 없으면 본인 회사로 돌아가요. 괜히 우리 사무실 분위기 흐리면서 걸리적거리지 말고."

"죄송합니다. 알려주시면 책임지고 제가 해보겠습니다."

"프로그램 만질 줄도 모르면서 뭘 합니까. 뒤처리는 오늘 안으로 제가 할 테니 그냥 퇴근하시죠."



꼴도 보기 싫어. 내 앞에서 그 자식 때문에 그렇게 흔들리는거 보이지 마. 충동적으로 거기까지 외칠 뻔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직원이 그만 하라며 중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목구멍을 타고 튀어 나갔을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겨우 입을 열고 말했다. "퇴근하세요. 좋은 주말 보내고." 나는 아마 개 같은 주말을 보낼 테지만. 역시나 뒷말은 삼켰다. 





오이카와의 폭주 아닌 폭주로 금요일 퇴근을 앞둔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대표도 선배들도 직원들도 이 프로젝트 담당자가 오이카와인데다 오이카와가 해 놓은 작업이 엉켰으니 차마 뭐라 하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며 퇴근을 서둘렀다. 꽉 막힌 공기에서 하나둘 직원들이 벗어나고 나자 환한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오이카와 혼자였다. 사무실에서는 금연이라 피워서는 안 되는 담배까지 물고 오이카와는 미리 세이브 해 놓았던 파일들과 전해 받았던 편집 된 영상으로 다시 재작업하며 주름만 늘려갔다. 이딴 작업이야 이제야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백업 파일도 있으니 사실 화를 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시발, 화가 나는 건 이게 아니라고 이게. 탁탁 마우스를 괜히 쳐대며 오이카와는 거칠게 물고 있던 담배를 빈 종이컵에 비벼 껐다. 그때였다. 빈 사무실에 스가와라의 목소리가 울린 것은.



"사무실- 금연 아니었어?"



그렇게 묻는 스가와라 코우시는 퇴근을 하지 않지 않았는지 근처 카페에서 사 온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데스크에 내려주며 참견했다. 금연이든 말든, 내가 담배를 펴서 폐암에 걸리든 말든 관심도 없을 거면서. 오이카와는 무시하며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옆 데스크에서 의자를 빼 앉은 스가와라는 두르고 있던 머플러와 입고 있던 얇은 코트를 벗었다. 단정하게 메고 있던 넥타이를 셔츠 포켓에 넣으며 커프스를 풀고 소매까지 걷었다. 



"뭐든지 도울게"

"필요 없어. 퇴근하라고 했잖아. 다 끝나가."

"그럼 끝날 때 까지 있을게."



진짜, 징그럽게도 말을 안 듣는다. 니 얼굴 보고 싫어서 그래 지금. 오이카와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스가와라를 무시했다. 감정을 이렇게 뱉지도 못한 채 안으로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기분은 개 같았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9년을 이렇게 개 같은 심정으로 버텨왔을까? 진짜 개같네. 짜증을 참아내며 오이카와는 말없이 작업에 몰두 했고 스가와라는 그저 옆에 앉아 오이카와가 틈틈이 비우는 커피를 다시 채운다든가, 컵에 쌓이는 담배를 치우는 시덥지 않은 일을 도왔다. 탁, 엔터를 누르며 마지막 세이브를 끝낸 오이카와가 쭈욱 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켰다. "끝났어?" 조심스럽게 묻는 스가와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달리 날을 세우지 않은 모습 아니 오히려 풀이 죽은 얼굴이 조금 귀여워서 오이카와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다행히 영상 작업은 진행했던 직원이 파일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나도 백업한게 있어서 다시 작업하는데 별로 어렵지 않았어."

"... 그래도- 미안해."

"이런 식으로 홈페이지 메인에 올라갈 거야. 확인해봐."



모니터로 창을 띄우며 말하자 스가와라가 몸을 일으켜 오이카와 곁에 붙어 섰다. 향수인지 비누인지 모를 달큰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허리를 숙이고 가만히 작업물을 살피던 스가와라를 지켜보던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셔츠 포켓에 걸려 흔들리는 스가와라의 넥타이를 휘어잡았다. 그대로 딸려오는 얼굴을, 뺨을 붙잡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중심을 잃은 몸이 오이카와 위로 쏟아졌다. 허리를 잡아 안아 데스크로 앉히며 오이카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키보드가 밀리고 작업물과 서류들이 쏟아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스가와라 코우시를 쓰러트리고 올라타고 박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뺨을 쓸고,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두 팔이 자신의 목을 감는데도 그 어느 것 하나 오이카와의 것은 없었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유치한 감정이든 뭐든, 좋아해. 이게 좋아하는게 아니면 뭐겠어. 꽉 자신의 입술을 문 오이카와를 가만히 올려보던 스가는 툭툭 어깨를 쳐주고는 데스크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의자에 걸어 둔 코트와 가방을 챙겼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오이카와는 팔을 뻗어 스가의 허리를 채듯 잡아 자신 앞으로 끌었다. 



"가지마."

"...오이카와."

"내일, 가지마. 이유가 뭐든, 거기가 어디든, 무슨 자리이든 상관없으니까- 사와무라 다이치 만나러 가지마."

"..."

"가서 상처받고 아파하지 말고, 나랑 있자. 스가와라."



절절하기도 하지. 오이카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사와무라 다이치를 향한 그 절절함이 옮았나 보다. 울 것만 같은 오이카와를 가만히 들여보는 스가와라는 조용히 "조심해서 퇴근해."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오이카와는 쓰게 웃었다. 한 번은 잡아도 두 번은 못잡겠다. 어차피 또 떠날 테니까. 나에게는 절대로 잡혀주지 않을 테니까. 

스가와라 코우시가 좋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하지만 괴롭히고 싶다는 말은 이제 취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