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스가] One more Chance
2016. 7. 31. 22:20




"카게야마 선수, 그럼 이번엔 조금 개인적인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요! 카게야마 선수의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세요!"


한가득 미소를 띈 아나운서가 약간의 호들갑을 섞어 질문을 던졌다. 카게야마는 제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상형, 연애, 첫사랑. 자신은 코트에서 공을 올리는 세터일 뿐인데 왜 항상 이런 질문이 따라붙는 걸까. 매번 적당하게 '노코멘트'의 뉘앙스를 보여도 끊이질 않았다.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첫사랑이란 결국 이루어지 않고 사라지는 거잖아요."



대놓고 질문을 거절하면 온갖 추측기사가 떠돌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대답하면 이번엔 온갖 로맨스 소설이 떠돌았다. 카게야마는 그런 가십으로 자신이 평가 받는 게 싫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적당하게 거절 의사를 담아 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질문이 이번 시즌을 앞둔 배구 선수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저를 찍고 있는 카메라도 보고 있는 눈도 너무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짓말도 아니었다. 자신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고 사라졌으니까.


18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다해서 고백했다. 상대는 두 살 연상의 선배. 같은 배구부, 같은 포지션을 경쟁한 세터. 그리고 남자.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상대였으나, 그때에는 그 걸림돌이 돌로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다정함에 취해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미소, 건네는 목소리, 잡아주는 손길. 처음에는 처음 받아보는 관심이라 당황했고 그러다 조금은 부담스러웠고 결국엔 익숙해졌고 마지막에는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가 졸업하던 날, 고백했다. 여자아이처럼 얼굴을 붉히고 단추를 달라는 둥 그런 로맨스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게 정말 진지하게 고백했다.



"선배, 좋아해요."



쿵쾅대는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았고 머리는 어질댔다. 좋아해, 그리 어렵지 않은 세 글자의 폭풍은 그렇게 컸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예의 그 다정한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나도 너 좋아해."라고. 자신과 똑같은 말, 하지만 좋아해, 라는 단어의 무게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카게야마는 그때 알았다. 그와 자신의 말은 같지 않았다. 그가 건넨 대답은 자신처럼 두근대고 무겁고 어질대는 무게가 아니었다. 아주 간단하며 가볍고 산뜻한 것이었다. 카게야마는 그 가벼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생각했다. 아, 나 차이지도 못했구나 하고.


그렇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더를 외치며 도전하기엔 다음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그가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모두에게 다정했던 사람이라 가끔 연습을 보러 오지 않을까 혹은 연락을 주지 않을까 했지만, 다른 선배들과 달리 그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마냥 뚝 끊겨 사라져버렸다. 슬쩍 동기인 부원들에게 물어도 아는 이가 없었다. 가끔 보러오는 선배들에게 넌지시 물어도 "바쁜 거 같더라."라는 말이 전부였다. 원 모어 찬스, 그 기회조차 잃었다.


이루어지지 않고 끝나버린 첫사랑. 따지고 보면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쓰라린 추억이지만, 그래도 그가 남기고 간 것들이 자신을 성장시켰다. 하나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그가 알려준 둘 셋을 되새기며 코트에 섰다. 열이 오르면 조바심을 내고 생각에 갇혀버리는 저를 냉정하게 만들어주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경기에 임했다. 주변을 살피고 대화를 유도하던 그의 모습을 그리며 팀원들을 대했다.



"생각해보니,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니네요."



천천히 그를 떠올리며 카게야마는 서둘러 정정했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자신은 그의 후배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이루어지진 않아도, 사라지진 않는 것. 첫사랑은 참 가엽고 괴롭네. 답지 않은 간질함을 생각하며 웃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추억에 젖은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가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계속 전화가 울렸어요. 친절한 덧붙임에 부재중 목록을 확인하자 반가운 이름이 반짝였다.


[야마구치 타다시]


가끔 안부를 묻고 답하는 사이인지라 어색함 없이 재연결 버튼을 눌렀다. 가벼운 신호음 끝에 왁자지껄한 소음이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배구선수 카게야마씨 휴대폰이 맞습니까?!"
"...타나카상?"



전화는 야마구치에게 걸었는데 들려온 목소리는 다른 이의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졸업 후, 몇 번이고 가진 동기 모임에서 마주 앉았던 한 학년 위의 선배 것이었다.



-"우리 지금 갑자기 모여서 술 마시고 있는데 올래?"
"...지금요?"



벽에 놓인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9시 20분. 내일은 월요일이었다.



-"어!! 우연히 길에서 히나타를 만나서 말이야! 그래서 지금 막 여기저기 연락해서 되는 사람 다 부르고 있어!"
"내일 월요일인데요..."
-"재미없긴! 원래 주말의 끝은 발악이지!!"



동의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와! 오랜만에 스가와라상도 온다니까!!"
"...누구요?"
-"스가와라상! 근처에 계신다고 오신데!"



뜻밖의 이름이었다. 카게야마는 멍하니 휴대폰을 쥔 채로 스튜디오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방금 자신이 앉아있던 카메라 앞의 툴 의자. 저기에 앉아, 정말 오랜만에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떠올리기 무섭게 재회라니. 운명일까? 또 답지 않은 간질함에 슬쩍 웃음이 피어났다.



"갈게요."



그가 졸업하고 처음, 그러니까 몇 년 만이지? 약 6년 만인가. 그렇게 오래된 거 같지도 않은데 떠올리니 아득했다. "나도 너 좋아해." 라고 웃으며 말하던 그의 얼굴이 어느새인가 뿌옇게 번져 비어있었다.
전화를 끊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내일 오전부터 팀 훈련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도 발걸음은 코트 위에서보다 더 가벼웠다. 역시 사라지지 않았어.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며 모임 장소의 문을 열었다. 시부야에 있는 룸 형식의 선술집이었다.



"카게야마다!"
"슈퍼스타가 이제 오셨네!!"



문을 열기 무섭게 반가운 얼굴들이 한 마디씩 던지며 환영했다. 그 틈에서 카게야마는 어렵지 않게 제 첫사랑을 찾았다. 스가와라 코우시, 그가 이제 교복을 벗고 셔츠와 넥타이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오랜만이야!" 웃으며 말하는 그 인사는, 제 고백에 답하던 그 말의 무게와 똑같아 이상한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웃는 거 심하네, 너."



예전 같았으면 히나타의 놀림에 발끈했겠지만, 그럴 틈도 없이 서둘러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자 그가 잔에 술을 채워주며 끄덕였다. 섭섭하게도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굴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응? 그냥 회사 다녔지."
"회사요?"



난 몰랐는데. 카게야마는 그 말을 빠르게 삼켰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였다. 자신은 그가 졸업하고 뭘 하고 지냈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묻고 싶은 게 계속 생겨났다. 목이 근질대고 입이 달싹였다. 답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어느 대학을 갔는지, 누굴 만났는지, 뭘 배웠는지, 지금은 어디 사는지,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만나는 사람은 있는지 등등. 하지만 그 질문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질문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저 스쳐 지나간, 잊혀진 카게야마 토비오에게는.



"아, 나 잠깐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자신만이 즐기지 못하던 왁자지껄함을 깨며 스가와라 코우시가 일어섰다. 담배, 진짜 안 어울리네. 카게야마는 그리 생각하며 술만 삼켰다. 그동안 이야기들을 하나둘 풀어놓으며 즐겁게 떠드는 얼굴들을 멍하게 바라보다 옆자리를 따라 일어섰다. 어디가? 히나타의 질문에 "담배."라 대답하고 나섰다. 실제로 담배를 쥐어본 적도 없으면서 허세를 부렸다.
룸을 나오자 복도 끝, 흡연 공간에 선 스가와라 코우시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반쪽만 팔짱을 끼고 담배를 들고 있는 모습. 카게야마는 급히 걸으며 방금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취소했다. 담배, 진짜 잘 어울렸다.



"카게야마 너도 담배 펴?"
"어, 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그의 곁에 섰다. 멀뚱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어색하지 않게 주머니를 뒤적였다. 두고 나왔네요. 그리 말하자 그가 서둘러 쥐고 있던 담배를 입술에 끼우곤 새것을 건넸다. 그걸 똑같이 입술에 끼우는 대신 카게야마는 가만히 손에 쥐었다.



"스가와라상."
"응?"
"혹시..."



카게야마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저,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자신이 오늘 떠올렸던 수만 가지 질문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사실 이 질문은 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제 고백에 그렇게 어물쩍 넘겨버린 걸까, 그래서 졸업하고 찾아오지 않은 걸까, 그래서 연락이 없었던 걸까.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
자신의 뻔뻔함이 놀랐는지, 아니면 당황했는지 스가와라 코우시는 연기를 들이켜다 캑캑댔다. 그리곤 서둘러 재떨이에 비벼 껐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졸업하시고 한 번도 연락 없으셨잖아요. 다이치상이나 아사히상하고는 연락하셨으면서.."
"그거야...! 나 걔네랑 3년이나 함께 했잖아."
"저랑은 1년이나 함께 했잖아요."
"...친구랑 후배는 좀 다르지 않나. 관계에 범위가 있다면 말이야."
"손가락 하나에서 셋이 되는 데에 얼마나 걸린다고요."



억지인 걸 알면서도 툴툴대자 그가 웃었다. 그리곤 물었다.



"그럼 카게야마, 너는 왜 나에게 연락 안 했는데?"



역공. 할 말이 사라졌다.



"손가락이 하나에서 셋이 되는 게 그렇게 간단한데, 너는 왜 나에게 연락 안 했어?"
"...그건."
"내 연락이 가끔 그리웠으면, 네가 먼저 했어도 되잖아. 카게야마."



제가 어떻게 그래요. 차였는데. 아니 차이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신은 그렇게 뻔뻔하진 못했다.



"...그리고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 너 안 싫어해."
"..."
"뭐.. 솔직히! 솔직히 처음엔 좀 그랬어. 3학년인데 후배에게 주전 뺏겼다는 소리 듣는 것도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했고 그랬어. 그러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네가 밉다거나 싫다거나 그런 적은 없어.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그게 맞는 선택이었잖아."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애초에 너와 나는 출발점도, 도달점도 달랐잖아. 나는 그냥... 그 순간이 즐거워서, 모두와 함께 하는 배구가 즐거워서 거기 있었던 거야. 너처럼 진지하게 프로 선수를 목표한 것도 아니고, 그냥 즐거워서, 배구가 좋아서 거기 있었던 거야. 그런 나랑 너는 달라. 엄청난 재능, 배구에 대한 열정, 미래에 대한 확고함. 나는 그런 거 없었어. 카게야마. 가질 수 있다면, 그래 뭐 한 번 가져보고 싶긴 한데! 난 현실주의자거든."



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흩어진 연기 사이로 울렸다.



"아마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때보다 덜 진지했을지도 몰라. 카게야마. 나 대신 네가 세터라는 자리에 서주어서 내가 더 나아갈 찬스를 주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즐거웠고 분했고 행복했고 슬펐어. 네가 알려준 것들 덕분에 나는 성장했고 어른이 된 거야."



그런데 내가 너를 어떻게 싫어하겠어. 그렇게 덧붙이며 그가 예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연락 안 해서 섭섭했구나? 앞으로 할게. 나는 네가 불편할까 봐 그랬지! 딱히 너 친화력 있는 타입도 아니고! 거기다 지금은 엄청난 선수니까, 연락하면 막 속 보이는 거 같고 그렇잖아!"
"...안그래요. 절대로."
"그래, 알았어. 이제 앞으로 자주 연락할게. 너도 자주 해."



그의 손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곤 가볍게 머리에 닿았다. 간질간질,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는 손끝에서 담배 향이 남아있었으나 그마저도 참 꽃처럼 느껴져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머물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슬슬 들어갈까? 너 담배가 아니라 그냥 나 따라 나온 거지?" 제대로 간파한 그가 먼저 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는 그의 작은 등을 물끄러미 보다 카게야마는 작게 웃었다. 자신이 준 것 때문에 어른이 되었다는 그의 말, 그게 참 기뻤다. 나는 당신 덕분에 어른이 되었는데.

카게야마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언젠가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스가와라상-"



역시 난 아직도



"좋아해요."



당신을 좋아하나 봐요. 이루어지지도 못한 그 감정이 사라지지도 않고 남아 앓나 봐요.
그 교실, 아직은 찬 봄바람에 휘날리던 그의 머리카락, 사라진 두 번째 단추에 대한 서운함, 그런데도 멈춰지지 않는 애정 같은 것. 그런 온갖 것들이 넘쳐 흐르던 곳에 여전히 자신은 남아있었다. 저울로는 절대로 젤 수 없는 마음을 또 한 번 간절히 떠들며 카게야마는 스가와라 코우시와 마주했다.



"응, 나도 너 좋아해."



그의 대답은 변함없이 가벼웠지만, 이상하게 슬프진 않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있을 다음을 떠올리며 카게야마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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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진짜 오랜만에 카게스가 쓰는 느낌적인 느낌, 전력 주제는 사라지는 것

사라지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