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Something There
2016. 6. 25. 23:14







지독한 장마가 끝나고 나니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뚝뚝 흘렀다. 간편하고 짧아진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며 오이카와는 쓰고 있던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내린 시선으로 계절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양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론 땀으로 젖어가는 얼룩덜룩한 손, 답답해보이는 투박한 구두, 마지막으론 그 구두 앞에 놓인 지갑. 어디선가 떨어졌는지 제 발치로 굴러온 지갑은 주인도 갈 곳도 잃고 그렇게 놓여 있었다. 보통 이럴 땐 어떻게 하더라. 주워서 역무원에게 가져다주겠지. 하지만 오이카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갑의 주인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제 것도 아닌 물건 때문에 사람과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피어오르는 일들은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악몽이었고 지옥이었다. 한 마디로 스트레스 그 자체. 그런 일을 굳이 자처해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자 곧 도착한다는 열차 음이 가득 울렸다. 플랫폼을 가득 채운 사람들 틈에서 오이카와는 움츠러든 어깨 대신 모자로 얼굴을 감췄다. 더는 눌러 내릴 곳도 없는 애꿎은 모자만 꾹꾹 당겼다. 그렇게 완벽하게 제 시야를 감추는 사이, 그 사이로 한 남자가 눈에 걸렸다.



"...아 어쩌지."



남자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반팔 셔츠로 길게 빠져나온 흰 팔은 몇 번이고 들고 있는 가방을 훑고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다 이내 바닥을 둘러보곤 마지막으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오이카와는 그를 한 번, 그리고 다시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가 지갑의 주인인 듯 보였다. 역무원을 부를 필요 없이 그에게 전해주면 그만이었지만, 차마 입이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소란스러움을 뚫고 그를 부르려면 큰 소리를 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를 불렀다간,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볼 것이었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오이카와는 어쩌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댔다.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로를 어둠에 가뒀을까. 꾹 눈을 감으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분명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그 말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오이카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얼굴에 관한 칭찬은 오이카와에겐 무기와 같았다. 그 무기만 있으면 모두가 자신을 좋아했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다가왔고, 자신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안달을 냈다. 그래서였을까. 부족한 것 없는 관계는 대부분 진중하지 못했다. 짧기도 짧았고 가끔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넘쳐나니 오이카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다. 가끔 매섭게 손이 날아와도, 혹은 뚝뚝 우는 얼굴을 마주해도 아무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날도 그랬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만나?!"



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많은 비였다.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는 엉망으로 젖은 얼굴로 자신에게 화를 내었다. 흔히 말하는 바람, 양다리 때문에 일어난 싸움이었다. 머릿속으론 해선 안된다는 생각은 물론 있었다. "지금 여자 친구 있어서." 라고 적당하게 거절도 매번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상대들은 대부분 완강하게 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상관없다고 하니 만났다. 그 말은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마치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 없는, 가벼운 관계를 위한. 눈앞의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이 좋다고 떠들길래 "나 별로 괜찮은 남자 아니야." 라 했더니 "상관없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만났다. 이런 자신이라도 상관없다고 해서 만났다. 그래놓고 왜 화를 내는 거지. 참 지겨웠다. 매번 반복되는 이 이별도, 자신을 탓하는 말도, 우는 목소리도 모두, 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짜증을 냈다.



"내 소문 모르는 거 아니잖아. 알고 만난 거잖아. 내 탓 하는 거 좀 웃기지 않아?"



라고. 평소였다면 분명 미안하다는 말로 적당하게 사과하고 깔끔하게 끝냈을 텐데, 그렇게 못되게 굴었다. 결국, 화가 난 여자가 뺨을 때렸다. 그리곤 말했다. "너는 한 번 크게 데여 봐야 해."라고. 그래, 그러라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더니 그녀의 얼굴이 엉망으로 무너졌다. 그렇게 또 헤어졌다. 뭐 여기까지는 정말 평범한 이야기. 평범한 이별. 그렇게 슬프지도 그렇다고 상실감도 없이 돌아서는 길, 웬 노파가 말을 걸었다.



"에구, 그렇게 사람을 울리면 못쓰지."



라고. 방금 비난에 뺨까지 맞은 사람에게 또다시 잔소리라니. 안 그래도 치솟는 짜증이 더 치솟았다. 신경 끄세요, 어른에게 할 말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 툭 그렇게 던지곤 지나쳤다. 돌아서는 등 뒤로 그녀가 외쳤다.



"그러게 살다가 후회할 거야!"



짜증이 나서 맞받아쳤다.



"네 후회하게 두세요."



맞은 뺨에 들러붙은 물기를 털어내며 무시했다. 그 꼴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노파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큰 목소리인지, 요란한 비를 뚫고 온몸에 닿았다.



"정말로 자네는 한 번 크게 데여 봐야 해!"



마치 저주처럼 그렇게. 


그리고 다음 날, 울며 자신의 뺨을 때린 여자 때문인지 아니면 그 노파 때문인지 자신은 정말로 데여 있었다. 온몸이 화상 입은 사람처럼 뭉개져 있었다. 꿈이겠지,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눈을 비벼보았지만 어제의 자신은 그곳에 없었다. 대신 흉측하게 일그러진 오이카와 토오루만이 덜렁 남았을 뿐이었다.


망가진 모습에 곧 현실이 들이닥쳤다. 사람들은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친구라 생각했던 녀석들은 물론이고 제 얼굴에 넋을 놓고 찬양하던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남은 이 없이 모두가 돌아섰다. 연락해도 받는 이가 없었고 인사해도 받아주는 이가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곁에 성큼 외로움이라는 게 들이차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 온몸을 죄고 감쌌다.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오이카와는 최선을 다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 언젠가 돌아오겠지 싶어 긍정적으로 굴려 노력했다. 모두가 피하고 쑥덕대도 학교에 나갔고, 억지로 사람들 틈에 끼어보려 노력도 했다. 받아주는 이는 누구도 없었지만, 자존심도 버리고 그렇게 굴었다.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동기들과 똑같이 취업 준비도 했다. 면접 때마다 당황하는 면접관과 예상대로 날아드는 낙방 소식에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몇 번이고 신에게 기도도 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나아지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그 틈에서 오이카와는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마주하면 비명을 지르거나 가슴을 쓸어내렸고 수군댔다. 졸업하고 시간이 꽤 흘렀지만, 변변한 직장도 없었고 아르바이트도 구하지 못해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는 신세였다. 나름대로 계속해서 취직자리를 구하겠다고 웃기지도 않는 꼴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버티는 건 꽤 어려웠는데 무너지는 건 쉬웠다. 더는 살아갈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죽을 용기가 없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이 앞으로 더는 좋은 일 따윈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이렇게 외롭게 그리고 손가락질받으며 죽어 갈 게 뻔했다.
그러니까



"저기요-"



이 지갑도 무시하면 그만인데. 자신이 도와준다 해도 고마워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데. 그런데 왜 입이 움직이고 마는 걸까. 아차 싶었지만, 오이카와는 우르르 전차에 오르는 사람들 틈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사내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천천히 허리를 숙여 지갑을 들었다. 낡은 가죽 지갑, 오래되어 보였지만 꽤 소중하게 다뤘는지 깔끔했다.



"지갑-"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후다닥 구두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훅 가까워진 거리, 그의 샴푸 냄새인지 아니면 향수 냄새인지 모를 향긋함이 코를 간지럽혔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꽉 물었다.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가 창피해졌다.



"지갑, 찾으시는 거 맞으시죠?"



자국이 남도록 슬쩍 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 맞아요, 남자는 밝게 외치며 자신과 눈을 마주했다. 1, 2, 3. 이제 그가 뒷걸음질을 치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그도 아니면 입을 틀어막거나 혹은 돌아서거나. 지금까지 자신을 마주했던 사람들의 흔한 레퍼토리를 떠올리며 오이카와는 속으로 초를 세었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 달리 사내는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제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그리곤 지갑을 가져갔다. 울퉁불퉁한 피부에 스쳤음에도 손을 빼거나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웃으며 서둘러 가방을 뒤적였다. 오이카와는 기분이 멍했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요란하게도 가방을 뒤적이더니 이내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지금 제가 출근 중이라서요! 꼭 사례하고 싶은데 나중에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명함, 오이카와도 익히 알고 있는 회사의 로고가 이름과 함께 가지런하게 찍혀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그가 말했다. 여전히 입가에는 미소가 남아있었다. 공중에 덩그러니 흔들리던 손이 움찔댔다. 이상하게 그에게 닿고 싶었다. 닿아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자신이 손을 뻗기도 전에 천천히, 마치 비디오를 느리게 감아놓은 것 처럼 사내가 돌아섰다. 그의 작은 등이 멀어지더니 이내 아슬아슬하게 닫히는 전차로 뛰어들었다. 오이카와는 그 등 뒤로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신이 지금껏 마주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공포, 경멸의 표정을 한 얼굴들. 물론 다정한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연민과 동정은 숨길 수 없었다. 사내는 달랐다. 그는 다정했으나, 그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빈손으로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어쩌면 다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웃음을 자신에게 보일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피부는 여전히 끔찍한 감촉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이런 나에게 왜?
오이카와는 멍한 기분으로 명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가와라 코우시, 곱게 적힌 이름을 조용히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종이를 쥔 손이 화상을 입은 듯 화끈댔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데인 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레긴커녕 제 마음으로 쳐들어오는 끔찍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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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이카와 토오루의 짝사랑이 시작되어씁니다!!!!! 가튼 느낌으로..


전에 트위터에서 미녀와 야수 현실 버전으로 오이스가 써보고 싶다고 징징댔는데..

몬가 이번 전력 주제랑 어울리는 거 같아서... 급하게....... 음........ 원고 안하고^^;;;;;;;;;;;;;;


오이스가 주제 : 외사랑/짝사랑

제목은 미녀와 야수 ost 제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