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colorful
2016. 6. 4. 23:26








초여름 날씨는 후덥지근. 아직은 6월, 바짝 여름이 온 것도 아닌데 벌써 모두가 반팔을 갖춰 입었다. 손에는 따뜻한 커피 대신 아이스 컵이 들렸고 공기 중에 잡히는 습기를 견디지 못한 이들은 부채를 쥐기도 했다. 그 텁텁한 날씨 속에서 스가와라는 멍하니 자신의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곧 있을 1차 학년 전시를 위해 캔버스를 짜고 온갖 재료들을 곁에 가져다 두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었다. 이 짜증 나는 계절 탓인가 아니면-



"..."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 앞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칠흑과 같은 어둠이 눈 앞에 펼쳐지자 열려있는 귀로 온갖 소음들이 넘실댔다. 캠퍼스를 가득 채우는 웃음소리, 조소과 건물에서 울리는 날렵한 톱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그리고



"오늘 아침에 뉴스 봤어? 쿠스카와 이토우 뉴스? 미국에서 전시한다며? 역시 천재는 다르다니까, 센스부터가 달라."
"우리 같은 송사리들은 꿈도 못 꿀 재능이지. 동갑인데 너무 다른 세계 사람 같아."



쿠스카와 이토우에 대한 이야기들. 예술학부 건물이라 그런지 너무도 가볍게 퍼지는 그에 대한 이야기에 스가와라는 얼마 전 아침에 보았던 뉴스를 떠올렸다. 유명 미대에 재학 중인 그가 일본 현대 미술 거장들의 지원과 추천을 받아 이번에 미국 유명 미술관에 그림을 전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화면 가득 쑥스럽게 웃으며 인터뷰하는 낯익은 얼굴에 스가와라는 그만 화면을 꺼버리고 말았다. 그가 싫어서, 그가 미워서, 그를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듯 지방의 작은 학교를 선택했는데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이름이 여기까지 따라와 들러붙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 못난 열등감은 다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쿠스가와와는 같은 병원 동기였다. 나란히 병실을 쓴 어머니들끼리 서로 친해졌다. 집도 그리 멀지 않았던 터라 자연스레 친구가 되어 자랐다. 유치원도 함께 다녔다. 둘 다 외동이라 때로는 형제처럼 지내기도 했다. 둘도 없는 친구. 서로에 세상엔 서로가 존재했던 날들.
그 틈에서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균열 시작은, 아마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스가와라군, 그림 잘 그리네? 쿠스카와도 한 번 따라서 그려볼래?"


미술 선생의 그 한 마디에서부터.

부모님이 모두 맞벌이라 방과 후에는 둘이 함께 추가 수업을 들었다. 온갖 종류의 수업이 있었지만, 스가와라는 그림 그리는 게 가장 좋았고 항상 "그림 잘 그리네!" 라는 칭찬을 받았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미술을 택했다. 쿠스카와는 그저 따라 신청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따라 그렸을 뿐이었다. "스가와라랑 그림 그리는 거, 재밌어!" 그렇게 바보같이 웃던 말에 기뻐 멈추게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함께 이것저것을 그려나갔다. 비행기, 사과, 원숭이, 엄마, 아빠, 꽃, 강아지. 어차피 아이들의 그림은 그게 그거였고, 나란히 그림을 펼쳐 보이면 모두 "둘 다, 너무 잘 그렸네!" 라고 칭찬을 해왔다. 그때는 그게 참 즐거웠고, 문제가 될 거라고 스가와라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쿠스가와는 자신과 달랐다. 그는 천재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금방 스가와라를 따라잡았다. 그도 모자라 넘어섰다. 스가와라의 근처에서 그림을 칭찬하던 이들은 모두 쿠스가와에게로 몰려갔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그려도 쿠스가와가 캔버스 위에 그려내는 세상에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사각사각 연필심이 깎여 나가듯, 스가와라의 자존심도 깎여 나갔다. 붓을 부러트리고 연필을 부러트려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소년의 마음은 계속해서 멍이 들어갔다. 이길 수 없는 뻔한 싸움에서 매번 패배했다. 질리고 질리는 패배감에 허우적대다 도망쳤다. 당연히 쿠스가와와 함께 도쿄의 미대를 지원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부모님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지방의 작은 대학의 미술과로 숨어버렸다.
다시 그리고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벌인 충동이었지만,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그 생각을 증명하듯 뒤숭숭하던 마음은 금방 잔잔해졌다. 1학년 땐 학교 대표로 시 대회도 나갔고 이미 꽤 괜찮은 공모전에서 수상도 여러 번 했다. 1학년 2차 학년 전시 때 그렸던 그림은 학교 로비에도 걸려있었다. 교수님들의 칭찬은 입에서 마를 줄을 몰랐다. 모두가 예술학부 스가와라 코우시라 하면 "아, 걔!" 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다 되었다고, 이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우물안의 개구리."



마치 우물 안에 빠진 개구리. 우물 안의 세상이 전부라 생각하고 우쭐대는 개구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는 벌써 우물을 빠져나가 멀리도 나갔는데, 자신은 여기서 만족하며 웃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이제는 그림 하나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러운 마음은 퍼석퍼석하게 말라갔다. 안 되겠다. 어차피 여기 앉아있는 다고 해서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 절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스가와라는 던져둔 제 가방을 챙겨 작업실을 나왔다. 보통은 팀으로 이루어져 쓰이는 작업실도 특례로 홀로 쓰게 해주었는데,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초조해졌다. "스가와라, 며칠째 붓도 못 들고 있다며?" 누군가가 그렇게 속닥이며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 잠깐!"



그렇게 빨리 걸은 탓일까. 아니면 초라한 저를 세상에 내보이기 싫어 고개를 숙인 탓일까. 퍽, 무언가와 강하게도 부딪혔다. 그 반동에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갔다. 손에 대충 쥐고 있던 가방이 떨어지며 온갖 소음을 토해냈다. 연필이 가득 담긴 필통, 드로잉북, 작은 공구 상자가 튀어나와 요란하게 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턱하고 잡아준 덕에 넘어지는 추한 꼴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스가와라는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붙잡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미안, 괜찮아?"



짧은 쇼츠에 저지, 거기에 운동화, 바람을 타고 흐르는 땀 냄새. 학교 운동부의 꼴이었다. 운동부가 예술학부 건물엔 무슨 일이지. 그런 궁금증이 슬쩍 차올랐지만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스가와라는 팔을 돌려 빼낸 후 서둘러 제 짐을 주워 담았다. 미안, 진짜 미안. 사내가 사과하며 서둘러 함께 주웠다. 아니 줍는 듯했다.



"이거 네가 그린 거야?"



연필 몇 자루 줍나 싶더니, 이내 펼쳐진 드로잉북을 멋대로 뒤적였다. 내놔, 날카롭게 뱉으며 손을 뻗었지만 상대가 더 잽쌌다. 휙, 뒤로 빠진 몸에 중심이 절로 흔들렸다.



"와, 장난 아니다. 진짜 잘 그리네."
"내놓으라니까?!"
"알았어. 줄게. 주긴 줄 건데, 지금 시간 좀 있어?"



뭐? 뜬금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시간이라니, 무슨 시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들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제 말이 막히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 그는 멋대로 드로잉 북을 제 허리에 끼웠다. 그리곤 또 멋대로 남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빈손에는 자신의 정리된 가방까지 챙겨 들었다.



"시간 좀 내줘라."



그러니까, 내가 왜! 그 질문은 빠르게 당긴 그의 힘에 쏙 들어가고 말았다. 운동선수라 그런지 약력이 장난이 아니라 방금처럼 억지로 빼내지도 못했다.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그의 보폭에 맞춰 걸으려니 그걸로도 숨이 가득 차 어디로 가는지, 뭘 하러 가는지 따질 기운도 없었다. 돌아가면 별자리 운세를 확인하자, 분명 오늘 최악의 운세라 적혀있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걸어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왔냐?"



같은 저지를 입은 다른 선수들이 모여있는 체육관 앞, 정확하게 말하면 낡은 체육관의 벽 앞이었다. 이쪽으론 영 지나갈 일이 없어 본 적이 없는 작은 그 건물의 벽에는 [쓰레기 같은 배구부, 꺼져라] 라는 글귀가 악의를 품고 번뜩이고 있었다. 누가 밤사이 써놓고 튀었는지, 스프레이 자국은 벽에 비해 덜 낡아 보였다.



"아침에 연습하러 왔더니, 어떤 쓰레기 같은 놈이 저렇게 써놓고 갔지 뭐야. 우리가 이번 대학 배구 예선 탈락을 했거니와, 그래도 쓰레기 소리는 들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야."
"원래 쓰레기인 놈들이 쓰레기란 소리를 하는 거야."



그의 말에 근처에 서 있던 선수가 픽, 웃으며 중얼댔다.



"지우려고 생각해 봤는데, 지우면 뭔가 저 말을 우리가 인정해서 창피해서 지우는 거 같잖아. 그건 싫거든."



녀석이 손목을 놓아주곤 팔짱까지 끼며 진지하게 떠들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스가와라는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은 채로 그를 바라보며 눈으로 물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꽃이나 뭐 나비나 이런 거 좀 그려줄래? 귀엽게?"



꽃이나, 나비나, 귀엽게? 스가와라는 찌푸린 얼굴을 풀고 눈만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금, 벽화를 그려달라는 건가? 당황한 얼굴로 다시 묻자 이번엔 분홍 머리의 선수가 "난 후낫시가 좋아." 라며 허튼소리를 지껄였다.



"우리가 지원도 못 받는 가난한 운동부라 비용은 대지 못하지만, 재료비랑 완성 때까지 매번 식사는 쏠게. 쏜다고 해봤자 이와짱네 어머님 가게에서 다 같이 밥 먹는 거지만, 네가 괜찮다면."



그가 이번엔 끝에 서 있던 사내를 콕콕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간절하게도 안 될까? 라며 불쌍한 척 저를 들여보았다. 여자애들이 보았다면 얼굴을 붉히며 끄덕였을지도 몰랐지만, 참 아쉽게도 스가와라는 건장한 남자였다. 잘생긴 얼굴이 통할 리가 없었다.



"나 그림 못 그려."



그래서 깔끔하게 거절했다. 머릿속으로 조금도 그리지 못한 흰 캔버스를 떠올렸다.



"거짓말."



그가 허리에 낀 드로잉북을 들어 흔들었다. 마치 인질처럼 대해 기가 막혔다.



"정말이야, 나 그림 못 그려.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었고, 정신도 없었다. 오래된 열등감에 똘똘 묶여 졸업은커녕 썩고 곪아가는 중이었다. 귀찮아서라던가, 보상이 하찮아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지금의 자신으론 정말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런 제 말을 이해했는지 그는 별 대꾸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깔끔하게도 결론을 내렸다.



"그냥 그려."
"...뭐?"



무슨 소리야. 지금 내 이야기 못 들었어?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스가와라는 바락 외쳤다.



"지금은, 이라며. 그럼 예전에는 그릴 수 있었잖아? 아니면 나중에는 그릴 수 있는 거잖아? 그럼 결국은 그릴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 괜찮아. 이건 작품도 아니고, 중요한 것도 아니야. 그냥 낙서한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라고. "
"..."
"망쳐도 상관 없어.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럴 거면 그냥 네가-"
"하고 싶은데, 우리가 하면 저 벽이 더 엉망이 될 거 같아서."



소중한 체육관인데 엉망으로 만들기엔 미안하잖아.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내가 더 엉망으로 만들지도 몰라."

지금의 스가와라 코우시라면 분명 그럴 거야.



"정말 쓰레기 같은 벽이 나올지도 몰라."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더 놀림감이 될지도 몰라."



자신 없는 목소리가 자꾸만 줄줄 세어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웃었다.



"괜찮아, 좀 엉망이면 어때."
"..."
"악의를 가진 낙서만 아니면 괜찮아."



저런 것처럼.

그리곤 꽤 상처가 되었는지 손가락으로 콕콕 벽을 가리켰다. 스가와라는 멍하니 붉은 글씨를 바라보았다. 배구부라는 글자가 마구 뒤틀려, 스가와라 코우시로 변해가는 기분이 들었다. [쓰레기 같은 스가와라 코우시, 꺼져라] 마치 누군가가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그 비난은 제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사실은, 사실은 이런 엉망진창인 감정 모두 다 잊고 편해지고 싶은데. 분명 나이 먹으면 이런 자신이 가엽고 불쌍하고 우습고 후회가 될 텐데. 왜 마음은 자신의 것인데 이다지도 어려운 것일까. 멍하니 벽을 바라보며 간절하게도 묻는 말에 그는 품으로 드로잉 북을 안겨 주었다.



"할 수 있어."



아마 별 의미를 담은 말은 아니었겠지만,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그래서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속아 넘어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스가와라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후낫시는 못 그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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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참여하는 오이스가 전력, 주제는 캠퍼스.

후낫시는 일본의 배 캐릭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