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의 아들이라는 직함은 무척이나 편했다.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굴어도 누구 하나 나서서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라는 마인드는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없었기에 스가와라는 자신이 가진 자리를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너 아버지 회사에서 일 할 예정이었어."
자신이 홀랑 까먹은 지난 20년을 묻자 어머니는 찻잔에만 시선을 고정하며 그리 말했었다. 그랬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회사에 나오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재미없고 지루한 곳이었다. 5살에서 순식간에 25살이 되었으니 아는 것도 없었다. 사수라고 붙은 남자가 이것저것 알려주긴 했지만, 덧셈도 뺄셈도 스가와라에게는 어려운 것이었다. 거기다 제약 회사에서 쓰이는 덧셈과 뺄셈은 2-1=1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 스가와라는 자신의 위치를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그래서 출근해 무엇을 하느냐면- 아침, 책 읽기. 의사가 추천한 것으로 방에 놓인 책을 읽으면 어느 정도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의견 때문이었다. 동의해 읽기 시작은 했으나 손댄 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온갖 문학책들은 스가와라가 이해하기엔 너무도 어려운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렇게 열심히 책들과 씨름하다 누가 복사나 인쇄 부탁을 하면 커다란 기계 앞에서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는 간단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 팀 회의나 단체 일정이 잡히면 참가했다. 전쟁 속에서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오가고 모두가 열을 내며 의견을 던졌지만, 스가와라는 손가락에서 펜만 굴렸다. 누구도 자신에게 "그래서 이번 분기 실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던가 "다음 신약 예상 매출은 어떻게 보세요?"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는 오후가 되면 홀로 식사를 하러 나가거나 아버지와 함께했다. 오후는 똑같은 일의 반복. 하지만 소설책은 지겨우니 연습장을 펴 그림을 그렸다. 심심해서 하기 시작한 일인데 자신이 잊어버린 또 다른 자신은 꽤 그림을 그릴 줄 알았는지 손의 움직임에는 고민이 없었다. 그림 역시도 5살 스가와라 코우시에 비하면 어마한 발전을 보였다.
물론 이렇게 지내다 보면 누군가가 눈치를 주기 마련이었다. 슬쩍 쳐다보거나, 스가와라군 지금 바빠? 같은 말로. 하지만 겉에는 대부분 '호의'라는 것을 포장해 내보이곤 했다. 자신의 자리가 '회장의 아들'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내보이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
쿠로오 테츠로.
스가와라는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떡하니 마주친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보는 남자는 한 손에는 공구 상자를, 한 손에는 페인트 통으로 보이는 걸 들고 있었다. 이제는 초면도 아닌 사이인데 안녕하세요, 라는 흔한 인사는 입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스가와라는 인사 대신 커피 컵을 꾹 쥐고 그가 지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10시 20분입니다."
스윽, 가볍게 스쳐 지나가며 부장도 팀장도 사수도 지적하지 않은 것을 사내가 지적했다.
"늦게 일어났어요."
누구씨 때문에. 아마 들리지 않을 그의 뒤에 대고 중얼댄 후 스가와라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오늘은 꿈에서 악몽과 싸웠다. 이유는 기억도 나질 않는다. 자신은 뭐가 그렇게 속상하고 분한지 울며 소리 지르고 있었고 악몽은 지친 얼굴로 그 화를 받아내고만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그렇게 외치는 자신에게 악몽은 무엇 하나 말해주지 않았다. 그게 무척이나 속상했던 것 같다. 아마도 꿈속의 스가와라 코우시는. 푹 자도 모자를 시간에 어마어마한 감정 소비를 하고 일어났더니, 쉬이 침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기분이 울적했고 꼬리를 타고 눈물도 흘렀다. 그저 꿈일 뿐인데도 정말 한바탕 그와 싸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침대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회사는 나가야했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안겨드리고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느지막이 준비하고 내려가 도우미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밥을 꼭꼭 씹어 먹고 커피 한 잔 챙겨 출근했다.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는데 쿠로오 테츠로에게는 아닌 모양이었다. 살짝 나아졌다 싶었던 기분이 훅 어두운 곳으로 떨여졌다.
그런 기분을 안고 사무실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제 얼굴에 꽂혔다. 하지만 누구도 왜 늦었느냐, 지금이 몇 인 줄 아느냐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봐, 아무도 없잖아. 스가와라는 찌푸린 얼굴로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무슨 있었어요? 스가와라군?"
"아뇨."
조심스레 묻는 옆 테이블의 여직원의 말에 빠르게 대답한 후 책상에 놓인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근대 문학의 기원, 단언컨대 아마 학생 시절에 샀다가 2, 3페이지 읽고 덮었을 게 분명해 보였다. 그때보다 모르는 사이에 자신은 훌쩍 더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글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공부를 잘했을까? 자신은? 다섯 살에는 다들 똘똘하다고 해주었던 거 같은데. 앨범으로 보았던 교복 입은 자신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다시 책을 덮었다. 이력서 어디에도 한 줄 써낼 수 없겠지만, 제일 자신 있는 '시간 죽이기'를 하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애매한 시간에 아침을 먹었더니 점심을 먹어야 할 때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버지도 바쁜지 따로 불러내진 않았다. 산책이라도 하러 나갈까 했지만, 그러려면 쿠로오 테츠로를 지나쳐야 했기에 그만두었다. 이 기분의 원인이 분명한데 애써 더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오후에는 연습장을 펴놓고 꿈속의 자신이 악몽과 싸운 이유를 추리했다. 그렇게 좋아 죽던 사이에 왜 싸움이 났을까, 가 무척이나 궁금하고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라는 자신의 외침에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악몽을 보아하니 분명 잘못은 저쪽일 테지. 그럼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바람을 피웠다, 아마도 악몽이.
일 층의 쿠로오 테츠로를 생각하면 뭐, 나쁘지 않은 도달점이었지만 지금까지 자신의 꿈에 나타난 악몽의 눈빛을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추리였다.
-헤어지자 했다, 아마도 악몽이.
오, 이건 좀 그럴듯해 보였다. 그래서 이유를 묻고 화를 내고 싸웠을 수도 있지.
그렇게 두번 째 줄을 채우며 히죽 이던 스가와라는 이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만약 정말 제 꿈의 악몽이 아래층에서 열심히 호랑이 따위를 그리고 있는 쿠로오 테츠로라면 (물론 자신 스스로는 한 60%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자신이 모르는 스가와라 코우시와 그는 헤어졌을까.
"...."
헤어진 연인에게 대하는 태도보다 더 무례했지, 그 사람. 스가와라는 벽화 앞에서 던진 그의 가시와 오늘 아침의 잔소리를 떠올렸다. 그게 아니면 혹시 이게 미래인가? 꿈이 미래를 보여주는 건가? 스가와라는 볼펜으로 연습장 크게 '미래' 라고 적어보았다. 과거보다 미래가 더 현실감이 없었다. 이 냉랭한 그리고 정의하기도 힘든 이상한 관계가 뒤바뀐다고? 그렇게 사랑스럽게? 말도 안 되지. 우선 지금 자신이 쿠로오 테츠로에게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적의로 보아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거기다 저쪽이 가지고 있는 적의는 또 어떻고.
"그래서 결국 뭐야."
도대체 꿈은 뭘까, 이 악몽은 뭘까. 뭘 이야기 하고 싶어서 매일 찾아오는 걸까. 스가와라는 펜을 내려놓고 슬쩍 머리를 감싸 쥐여보았다. 살짝 아플 정도로 힘도 주어보았다. 나아지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궁금증은 계속되는데 답은 어디에도 없다니, 짜증만 치밀었다.
"괜히 생각했어."
펜으로 적어 내린 것들을 마구 긁어 지워냈다. 안 그래도 별로였던 기분이 또다시 별로가 되어버렸다. 이 기분을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꿈이야말로 제대로 악몽일 것만 같아 시곗바늘이 직선으로 서기 무섭게 스가와라는 잠을 챙겨 일어섰다. 누군가가 보면 뻔뻔하다 할지 모를 행동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에 스가와라 코우시의 머리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가득 찼다.
다행스럽게도 회사 로비에는 쿠로오 테츠로가 없었다. 덩그러니 아직 완성되지 않은, 어떻게 보아도 호랑이로 보이지 않는 그림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주인을 잃은 어지러운 자리를 가만히 지켜보다 스가와라는 돌아섰다. 점점 차가워지는 바람을 뚫고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슬프게도 백업된 스가와라 코우시의 머릿속에는 스트레스나 우중충한 기분을 풀 때 사용할 명령어가 없었다. 5살의 자신처럼 푸딩이나 사탕을 입에 굴리는 거로는 분명 풀리지 않겠지. 그럼 뭘 해야 기분이 나아질까. 꼬리와 꼬리를 무는 생각을 떠올리며 서둘러 겨울의 바람을 뚫었다. 그리고 이윽고 찾아낸 답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술."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통 술을 마시잖아. 아버지도 집에 와 일로 피곤하면 장식장에 진열된 양주병을 들곤 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분명 이 나이정도 되었으면 꽤 마셨을 거 같은데. 아니 그 전에 마셨을지도 모르지. 요즘 아이들의 호기심이란 그런 법이니까.
스가와라는 술이라는 단어 하나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걷고 또 걸었다. 발이 닿는 곳으로 향하며 적당한 곳을 찾아 걷다 이내 작은 바를 발견하고 들어섰다. 낮에는 카페로 운영하는지 한쪽 벽에는 커피 메뉴들이 분필로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에 손님은 누구도 없었다.
"어서...오세요?"
카운터 너머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이상한 인사를 던졌다. 또르르 말려 올라간 말의 끝부분에 스가와라는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적당하게 빈 툴 의자를 잡고 앉았다.
"음, 저... 저녁 6시부터는 저희 커피 메뉴는 안되고 바 메뉴만 가능한데.. 괜찮으세요?"
어딘가 불편한지, 사내는 이리저리 시선을 흔들어대며 물었다. 적잖게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에 스가와라는 어디서 만났던 사이인가 싶어 찬찬히 뜯어보았다. 자신보다 작은 신장, 마른 몸, 밤톨 머리. 당연하게도 기억엔 없었다. 그냥... 정서 불안 같은 건가? 스가와라는 주인이 내민 메뉴판을 받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메뉴판에는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아기자기하게 손으로 주르륵 적혀 있었다. 말장난과도 같은 이름들이 쭈욱 써있었다. 딸기 맛이면 딸기 맛, 초코 맛이면 초코 맛, 술이면 술, 음료수면 음료수라고 적어주면 좀 덧나나. 아는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음, 추천해드릴까요?"
"...네."
"이거 어떠세요. 도수도 그렇게 높지 않고 복숭아 향이 강해서 상큼하게 한잔 하기 괜찮은데."
"그럼 그걸로 주세요."
"식사는 안 하셨죠?"
그러고 보니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며 스가와라는 끄덕였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에 애매한 시간이긴 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웃으며 그릇에 수북이 나초를 담아 건넸다.
"서비스니까 드시고 계세요."
친절하기도 했다. 아까와 달리 안정되어 보이는 사내는 서둘러 진열장에서 이것저것 꺼내 술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리 빠르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 스가와라는 알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넣고 섞고 휘저어대는데 신기하게도 금방 기다란 잔에 아이보리색의 술 한 잔이 뚝딱 만들어져 내밀어 졌다. 이게, 칵테일이구나. 스가와라는 가만히 잔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레 입에 가져다 댔다. 달고 향긋하고 상큼했다.
"맛있네요."
"나쁘지 않죠?"
으쓱하며 웃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맛이 입에 감도는 게 좋아 스가와라는 빠르게 잔을 비웠다. 마치 음료수처럼 벌컥벌컥 들이켜자 사내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 키우며 "그렇게 드시면 취해요." 라며 만류했다.
"괜찮아요. 오늘 술 마시고 싶은 날이니까!"
오, 이거 좀 어른 같은 말이었어. 툭 튀어나간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히죽 웃었다. 그리곤 어디서 보았던 기억을 떠올려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한 잔 더."
라고.
빠르게 마시면 위험해요. 그는 타이르듯 그리고 걱정스럽게 말하며 두 번째 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푸른 빛이 도는 새로운 것이었다. 역시 달고 맛있어 먹기 편했다. 그렇게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석 잔이 되는 사이에 슬슬 가게에 손님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젊은 여자들로 짝을 이뤄와 익숙하게 주문을 했다. 직원은 따로 없는지 그는 홀로 주문을 받았다. 아까보다 더 빠르고 분주해진 손을 보며 스가와라는 턱을 괴고는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왜 이 풍경이 익숙해 보일까. 자꾸만 감기는 눈을 겨우 부릅뜨며 버텼다. 여러 가지 맛을 들이켰더니 속이 울렁댔다. 온갖 맛의 아이스크림을 잔뜩 먹은 후의 기분처럼 느껴졌다. 이대로 홀로 돌아가는 건 무리라는 생각해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찾았다. 집에 연락해 사람을 보내달라 할 셈이었다.
"야쿠상! 스가와라상이 왔다는 게 정말이에요?!!"
문을 벌컥 열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스가와라는 겨우 눈에 힘을 주고 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끝없이 고개가 올라갈 정도로 긴 신장을 가진 사내는 놀란 얼굴로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우리 어디서..."
만났었어요? 당연히 난 전혀 기억에 없는데.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자신만큼이나 푹 알코올에 녹아내린 혀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쿵, 카운터 위로 몸이 무너졌는지 이마가 아팠다. 하지만 아프다는 징징거림을 뱉을 틈도 없이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어쩐지 오늘은 어떠한 꿈도 꾸지 않을 거 같았다.
-
B님이 얼마 전에 이 뒤에는요!! 라고 외친 것이 생각이 나서...
하라는 원고는 안하고 딴짓이 하고 시포써여. 퇴고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