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팔리는 인간만큼 비참한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생각했다.
“그냥 한번 제안 해보는 거야. 최근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잖아. 내가 너 아끼는 거 알지? 스가와라?”
“알아요.”
나카지마 유우히토, 그가 얼마나 자신 아끼는지 스가와라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5년 전, 버스를 여러 대 갈아타고 동경으로 상경한 자신을 스카웃해, 오디션에 떨어져도 혹은 구석에서 행인1과 같은 역을 해도, 심지어 그보다도 못한 행인 103번과 같은 물량 공세의 일을 잡아와도 아무 말 없이 통장에 꼬박꼬박 돈을 채워주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심지어 3년 전부터는 일거리가 뚝 끊긴 상태였음에도 소속 배우라며 홈페이지에 이름도 올려주었다. 이렇게 안 팔리는 배우라면 "근본적으로 너는 재능이 없어." 라고 말하거나 계약을 파기해도 모자라는데 지금까지 그는 늘 자신을 대접해주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을 아끼느냐 마느냐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가치가 없었다.
"오이카와의 매니저인 료타가 휴직을 냈어. 아내가 출산했거든."
"그래서요?"
"어차피 회사에서 주는 기본 월급으로는 집세도 빠듯하잖아. 그렇다고 당장 뭐 준비하는 것도 없고 오디션도 최근에 전혀 안가고."
"...그래서요?"
"이 직업, 그만둘 생각 아니라면 어때? 1년 정도만 그 녀석 옆에 붙어있는건.”
"…슈퍼스타의 매니저로요?"
그건 여기서 더 비참해지란 소리가 아닌가? 스가와라는 픽 웃었다. 안 팔리는 배우로도 부족해서, 자신보다 데뷔 후배인 거기다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녀석의 매니저를 하라니. 비참해도 너무 비참한 제안이었다. 하다 보면 분명 촌스럽고 약해 빠진 자신은 견뎌내질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 오이카와 토오루와 자신을 비교하겠지. 그는 되면서 왜 자신은 안되는지, 그는 잘 팔리면서 왜 자신은 이토록 안 팔리는지를 사사건건 비교하고 상처받고 땅을 팔 것이 분명했다. 아, 혹시 나카지마가 노리는 게 이건가? 알아서 스스로 나가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스가와라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많지 않았다. 그나마 연기를 할 줄 안다 생각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올해 들어 오디션을 14번이나 낙방한 충격으로 잠깐 안식을 찾는 중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오디션 볼 거예요.. 다시.."
우물쭈물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구차하고 하찮아 보여 스가와라는 속상했다. 자신도 이런데 이걸 늘 지켜보는 나카지마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나쁜 제안 아니라고 생각해. 오이카와 토오루가... 좀 제멋대로긴 하고, 성격도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지내다 보면... 나쁘지 않을 거야. 현장 공부한다고 생각해도 좋고, 네가 경험하지 못한 일들도 배우고."
"..."
"같이 다니면서 눈도장 찍는 것도 좋잖아. 걔, 이번에 할리우드 영화도 나가."
할리우드라니, 동양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꿈의 무대였다. 자신은 어디 단편 드라마에도 출연할까 말까인데 누구는 할리우드라니, 안 좋던 기분이 더욱더 다운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너 지금 받는 기본급 월급에서, 오이카와 매니저로 일하는 동안은 료타만큼 줄 테니까-"
"좋아요."
할리우드? 좋지. 단편 드라마? 좋지. 하지만 비참한 스가와라 코우시에게는 모두 꿈과 같은 이야기였고 허황한 이야기였다. 계속되는 오디션 낙방과 긴 휴식기, 거기에 오래된 무명생활은 사람을 점점 하찮게 만들었다. 꿈같은 이야기보다는, 당장 먹고 살길이 중요했다. 얼마 남지도 않은 자존심을 세워서 이 일을 거절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었다. 나카지마의 말대로 기회로 삼고, 오이카와 토오루의 곁에서 보고 배우고 느끼면 뭐라도 달라지겠지. 우선 월급 통장도 달라질 테고.
"정말?"
"네."
"알았어, 타네무라에게 말해둘게!"
타네무라는 이 사무소의 실장으로 안 팔리다 못해 폐기처분에 가까운 자신의 스케쥴을 유일하게 챙기는 사람이었다. 보통 매니저가 담당하는 일이지만, 그 인건비를 투자할 가치가 없는 자신에게는 그가 붙어있었다. 이제 한동안은 그것도 졸업이겠네, 그리 생각하며 끄덕이자 나카지마가 이야기가 끝났는지 나가도 좋다며 입을 열었다. 바람이 차 챙겼던 목도리를 잊지 않고 들고 나서다 스가와라는 문득 궁금해져 걸음을 멈췄다.
"대표님."
그리고 데스크로 돌아가는 나카지마를 붙잡았다.
"왜?"
"대표님은 왜 날 캐스팅했어요?"
깡촌에서 올라와 소극장에서 먹고 자며 잡일을 했다. 그러다 기회가 생겨 오른 무대에선 대사 몇 마디로 없는 작은 역을 했다. 그리 유명한 작품도 아니었고, 내세울 역도 아니었다. 그래도 첫 작품이라 온 열정을 다 쏟아부었다. 이제부터 이 앞은 탄탄대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나카지마가 나타났다. 보기 좋다며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 제안했다.
"내가 잘 될 거라 생각했어요?"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때의 나카지마는 도대체 자신의 무엇을 본 것일까. 뭘 보고 그리고 뭘 믿고 자신을 캐스팅했을까.
“… 으음 글쎄.”
“…”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모르겠어. 네가 성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다른 녀석들은, 미래를 생각하며 계약하긴 했지만... 넌 아니었어."
“…그래요?”
“응. 그냥.. 그냥 그때는 연기하는 네가 정말 행복해 보였거든. 그래서 내가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만약 네게 미래를 기대하고 계약했다면 이미 계약 해지했을 걸.”
잔인하셔라. 장난스럽게 키득대며 그가 떠들었다.
"지금 스가와라 코우시는 너무 지쳐 보여. 무명생활? 쉽지 않은 거 당연히 알지. 내가 왜 모르겠어. 지치는 것도 알아. 아는데, 지금 그 상태로는 계속 지칠 뿐이잖아. 그러니까... 꼭 1년이 아니라도 좋아. 네가 동경하던 세계를 직접 보고 충격받고 충전하고 와."
"..."
"내가 반했던 그 스가와라 코우시로 돌아오라고."
답지않은 그의 다정한 말에 귀가 화끈댔다. 고맙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우리 사이에 낯간지러운 소리처럼 느껴져 씩 웃는 것으로 대신하며 사무실을 나왔다.
그의 말대로, 처음 도쿄에 올라왔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그 작은 단역을 맡았다고 잠 못 이룰 정도면 말 다했지. 나카지마와 첫 미팅을 하고 계약서를 썼던 날에는 돌아가는 길에 울기도 했었다. 그렇게 간절했던 과거의 자신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 기대만큼 자신은 크지 못했고 높은 현실에 계속해서 좌절만 해갔다. 시작은 분명 나쁘지 않았는데. 하나뿐이고 단편이지만 나름 영화 주연도 해봤고 모 브랜드의 청바지 모델도 해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과 같은 배우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태어났고 그 수만큼 사라졌다. 스가와라는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더 나아가고 싶었다. 계속 오디션에 떨어지고 더는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니, 재능인가. 어쨌든 그랬다. 그런 날이 계속되자 점점 지쳐갔다. 열정도 의욕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금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포기가 되지 않아서 포기 못 하는 꼴이라니, 비참한 꼴이었다.
그에 비해 오이카와 토오루는 전혀 다른 케이스였다. 그는 지방에서 운동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우연히 시합을 본 타네무라가 캐스팅해서 사무실에 처음 나타났다. 처음 1, 2년은 모델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게 대박이 났다. 그가 찍은 캠페인 사진들은 백화점 건물에 크게 걸렸고 동시에 마치 사무실의 자랑처럼 건물 로비에도 걸렸다. 그도 모자라 첫 데뷔한 드라마가 월요일 편성이었고 심지어 시청률도 잘 나왔다. 그 후 찍은 영화도 흥행했고, 하는 일마다 잘되었다. 당연히 인기도 치솟았다. 사무실 지인이나 친구들만 있는 자신의 SNS와 달리 그의 계정은 공인인증까지 마크가 달린 수준이었다. 스가와라는 이뤄보지도 못하고 경험도 해보지 못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사는 맨션 주소야. 료타가 없어서 좀 엉망일 거야. 성격 별로니까 심기 건드리지 말고. 아직 네 이야기 못 했으니까, 가서 인사 잘해! 화이팅!]
그런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자신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그 세상으로 향하며 스가와라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타네무라가 보낸 메시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름 배우지만 전혀 일정이 없던 터라 스가와라는 전철을 이용해 깜빡이는 주소지로 향했다. 장소는 다행히도 사무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층 맨션이었다. 사무실에서 배우나 모델들에게 빌려주는 좁디좁은 원룸 맨션과는 전혀 다른, 자신이 사는 방과는 너무도 다른 맨션. 심지어 로비에 가드까지 붙은 그런 맨션이었다. 시작부터 다른 세상이구나, 괜히 큼큼대며 긴장되는 마음을 누른 후 로비의 가드를 지나쳤다. 흘끔 아래위로 훑는 가드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쭈욱 어깨를 폈다. 이런 고급스러운 맨션일 줄 알았으면 옷 좀 갈아입을걸. 머리라도 좀 자르고 올 걸 그랬나? 최근에 돈을 아낀다고 헤어숍을 안 다녔더니 머리가 엉망이었다. 초라한 꼴을 어떻게든 감춰보려 머리를 단정하게 귀 뒤로 넘기며 스가와라는 픽 웃었다. 뭐야… 좋게 보여서 뭘 어쩔 건데. 진짜 매니저로 살 것도 아니면서.
소리없이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은 가장 높은 층이었다. 사람 하나 없이 그저 조용하게 카펫만이 깔린 복도를 지나 문자에 남겨진 방문 앞에 섰다. 진짜 매니저도 아니면서, 마치 면접 보러 온 사람마냥 쿵쾅쿵쾅 긴장되었다. 돌아갈까? 살짝 다른 생각도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꾸욱 벨을 눌렀다. 안쪽에서 "누구세요?" 라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아… 오늘부터 사사키 료타상 대타로 일하게 된 임시 매니저입니다. 대표님께 연락 받-“
고 왔는데요. 라는 말은 안에서 들린 소리에 끊겨 이어지지 못했다. 우당탕,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잠시만요!!" 라는 다급한 소리가 이어졌다. 뭐야, 왜 그러는데?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한참을 요란하게 울리던 소리가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갑작스레 벌컥, 문이 열렸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 앞에는 자다 일어났는지 조금 부스스해 보이는 미남이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황한 얼굴,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연신 뻗친 머리를 정리하려 만지작대는 그의 행동에 스가와라는 저도모르게 긴장이 툭 풀렸다. 자신보다 상대가 더 긴장한 꼴이었다.
“저...?”
거기다 왜 이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건데? 그의 이상한 행동에 스가와라는 조심스레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는지, 눈앞의 미남 그러니까 오이카와 토오루는 서둘러 문을 열어주며 안으로 들어오도록 비켜섰다.
“아, 죄송해요, 들어오세요.”
다정한 말투였다. 성격 안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랬던 거 같은데. 나카지마와 타네무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슬쩍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날카롭게 생긴 이미지라 까칠하게 보이긴 했으나, 서둘러 실내용 슬리퍼를 내주는 이는 그리 느껴지진 않았다. 거기다, 집 꼴은 어떻고. 까칠한 미남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온갖 대본들이 바닥에 널려있었고 그 위에는 옷과 수건이 엉망으로 펼쳐져 있었다. 아니, 그것도 일단은 치우려 했는지 한구석에 마구 쌓여있었다. 그뿐이면 다행이지 저 인스턴트 용기들은 다 뭘까. 먹다 남은 음료수병들은 뭐고. 스가와라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미안해요, 집이 좀 더럽죠? 료타상이 휴직하고 나서 전혀 신경을 못 써서..."
"관리인은요?"
"제가 집에 사람 왔다 갔다 하는 걸 별로 안 좋아 해서, 아! 그보다 춥지 않아요? 커피? 코코아? 녹차? 뭐 따뜻한 거 드실래요? 아마 여기 어딘가에 선물 받은 캡슐 머신이 있을 텐데-"
급히 그렇게 말하며 그가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이카와 토오루가 손을 뻗는 곳은 찬장이었다. 캡슐 머신이 왜 찬장에 있는 걸까. 사용하려고 산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제 생각을 비웃듯 박스채로 보관된 머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새 건가? 지금 자신에게 커피 대접한다고 새것을 까는걸까 싶어서 “괜찮아요!” 라고 서둘러 외쳤다. 그가 걱정하는 것처럼 자신은 딱히 춥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저 박스를 열면 더 골치가 아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를 들어... 작동하는 법을 모른다든지, 아니면 오랫동안 박혀 있어서 제대로 작동이 안 되는 그런 문제들. 그럼 결국 자신이 저 커피 머신을 만지게 될 게 뻔했기에 스가와라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가 서둘러 묻길래 서둘러 끄덕였다.
"커피는 괜찮고....오늘 스케쥴 없어요?"
일단은 여기 온 손님이 아니라 매니저였기에 스가와라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아니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전담 매니저가 없었기에 준비해 온 게 없어 서둘러 휴대폰 메모장을 펼쳤다. 다시 찬장에 박스를 밀어 넣은 그가 앉으라는 의미로 후다닥 의자를 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아, 있어요. 무용 수업받으러 연습실에 가야 하고, 내일 오후에 LA로 넘어가야 해요. 거기 스튜디오에서 주말부터 촬영 들어가거든요.”
“…주말부터 촬영이라고요? 이번 주? LA요? 저도 가요?”
LA? 어디 홋카이도도 아니고 오키나와도 아니고 심지어 한국이나 중국도 아니고 미국 LA??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스가와라는 눈만 깜빡였다.
"스가와라상이 제 매니저니까 당연히 가겠죠?"
그런 소리는 전혀 못 들었다. 주말에 크랭크인 하는 배우를 데리고 내일 당장 LA까지 가라니? 왜 이 중요한 이야기는 쏙 빼놓고 말해준 거지? 그보다 자신의 비행기 티켓은? 여권은?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당황한 스가와라와 달리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의 오이카와는 상쾌하게도 웃으며 “식사는 했어요?” 라고 물었다.
"아뇨, 아뇨. 일단... 무용 연습실 주소부터 알려줄래요? 있다가 운전하려면 검색을 미리 해보는 거 같아서. 그보다, 차 키 못 받았는데? 혹시 료타상이 준 거 있어요? 그리고 미안한데 관리인 불러도 될까요? 집 정리 해야 할 거 같은데. 짐은 챙겼어요? 비행기는 끊었고? 아, 그리고.... 타네무라상에게 연락 좀 할 테니까-"
식사가 문제가 아닌데. 스가와라는 다급해진 마음으로 저도 모르게 빠르게 입을 움직였다. 당황하면 나오는 버릇으로, 오디션에서도 몇 번 이랬다가 낙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마음 급한 자신과 달리 오이카와 토오루는 뭐가 즐거운지 계속 웃고만 있었다.
"웃음이 나와요? 저 여권도 어디 있는지 모른단 말이예요. 도대체 사무실은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이런 건 아까 이야기했어야지! 그나저나 LA에서 무슨 촬영이에요? 나 정말 들은 거 없는데? 어디서 지내는지도 정해졌어요? 트레일러도 빌려놨데요? 그보다 촬영이면 영화? 지금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죠?"
그러지 않고서야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말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부인이 출산을 앞둔 직원이 있으면 미리미리 출산 휴가 쓰게 만들고 대체자를 구해놔야 하는 거 아니야? 심지어 다른 배우도 아니었다. 그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스가와라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오이카와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유 있게 웃으며 대뜸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뭐예요? 눈으로 묻자 대답 대신 차가운 금속이 찰칵 소리를 내며 손목에 감겼다. 메탈이 은은하게 빛나는 시계였다.
"...뭐예요?"
"시계요."
"...그러니까 이걸 왜..."
"필요해서요."
그러니까 왜? 스가와라는 손에 쥔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현대인의 시계인 휴대폰이 있으니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보아하니 쓰던 것도 아니었다. 새것처럼 보이는 데다가 심지어 비싸 보이기까지 했다. 명품이고 뭐고 자신의 눈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 오이카와 토오루가 채워줬으니 한두 푼 하는 물건은 아닐 기분이 들었다.
"연습실 주소는 제가 아니까 차는 제가 몰면 되고요. 차 키도 제가 갖고 있어요.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 관리인이든 아주머니든 스가와라상이 편한 대로 불러 쓰면 되고, 짐은 다 챙겨놨고, 비행기 티켓도 끊어 놨을거예요. 우리 둘 다. 타네무라상에게 연락해도 아마 같은 대답 할 테고, 또 뭐였죠? 웃음이 나오냐고요? 네, 나오네요. 여권은 사무실에 있겠죠? 스가와라상 거. 사무실 일 처리는 제 담당이 아니고 이야기는 지금 듣고 있으니 됐고, LA에서 영화 촬영이에요. 저에게 관심 없구나, 섭섭하네. 기사 많이 나갔는데. LA에 빌라 빌려놨고 당분간 거기서 같이 지낼 거에요. 트레일러도 빌려놨으니 걱정 안 해도 되고, 네 영화 촬영이에요. 그리고... 몰래카메라도 아니고요."
오이카와는 아주 단정한 말투로 매너 있게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했다. 깔끔하게 정리한 그의 행동력에 감탄하며 스가와라는 슬쩍 정리되지 않은 집을 다시 둘러보다 이내 마지막으로 제일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알아요?"
타네무라상은 아직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이야기를 못 전했으니 인사를 잘하라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상, 아직 제대로 통성명도 하기 전이었다. 그런데 오이카와는 처음부터 아무렇지 않게 '스가와라'라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이상한데? 스가와라는 찜찜한 기분으로 오이카와를 빤히 올려보았다.
"...음, 나카지마상에게 들었어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오이카와는 그리 말했다. 어쩐지 석연치 않은 대답이었지만, 따지기에도 이상했기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그보다, 연습실 시간 늦었는데."
뒤이어 나온 그의 통보에 스가와라는 서둘러 시계를 바라보았다. 몇 시까지죠? 다급히 묻자 그가 3시요, 라고 여유 있게도 떠들었다. 빨리 준비해요! 바락 외치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오이카와 토오루는 제 기분도 몰라주고 콧노래를 흥얼댔다. 그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이상하게 시계가 채워진 손목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무게를 의식할 틈도 없이 스가와라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세상에 발을 디뎠다. 정신없는 늦은 오후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시계.. 가죽 채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메탈이어야지 수갑 느낌도 나니까^_^....
시계에는 gps가 장착되어 이씁니다.
오이카와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무명 배우 스가와라 코우시의 데뷔작이자 은퇴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