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없어도 그저 함께 걷고 있는 순간이 좋았다. 스가는 검은 마스크를 더 올려 코까지 감추며 묵묵히 자신의 곁에 서 있는 사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평일 저녁임에도 분주한 신주쿠의 거리에서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치이고 부딪혔지만 차마 그의 코트 자락을 잡을 수는 없었다. 아슬아슬 닿는 손등의 마찰이 더 큰 온기를 원했지만 스가는 익숙하게 참아냈다.
"잠깐!"
얼마나 그렇게 말없이 거리를 걸었을까, 인적이 드문 골목을 찾아 걷는 사내의 뒤를 따르던 스가는 TV들이 가득 찬 전파상 쇼 윈도우 앞에서 급히 멈춰 섰다. 한겨울에, 그것도 밤에 선글라스에 마스크와 머플러를 두른 상대가 "왜?" 라고 물으며 멈춘 스가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너 나와."
제각각 작고 큰 TV의 화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곧 있을 일본 프로 배구 시상식의 홍보 영상이 쏟아지고 있었다. 쟁쟁한 선수들의 프로필과 경기 활약상 편집본 속에서 민트색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가득 담겨 나왔다.< 올해의 세터 / 올해의 선수 후보 오이카와 토오루> 화면 아래에 뜨는 이름에 스가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이름도 나와."
"내가 나오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하다고."
"난 항상 신기해."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이렇게 브라운관을 통해 보는 얼굴은 느낌이 달랐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웃으며 즐거워하는 스가의 머리카락을 오이카와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잘게 흩트려 놓았다.
"자랑하고 싶다."
"뭘?"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내꺼라고."
그럴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스가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로 손을 거두었다. 이렇게 밖에서 닿는 작은 움직임도 허락될 수 없는 사이라는 게 스가는 조금 슬펐다. 그걸 각오하고, 이해하고 오이카와 토오루와 사귀기 시작한 것이었지만 연인 사이에서 지키지 않아도 될 일들을 지켜내야 하는 것은 스가에게는 힘들었다.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마주보고 웃고, 함께 다정하게 밥을 먹고,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는 간단한 일들이 스가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도 같았다.
"미안."
사과를 해오는 오이카와의 말에 스가는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잘난 남자를 곁에 둔 자신의 죄려니 생각하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이 관계를 지키고 오이카와를 지켜내는 방법이 이것뿐이라면 스가는 평생도 없는 사람처럼 살 수 있었다.
그랬는데-
"스가, 일어나. 얼른. 일어나!!!"
다급한 다이치의 목소리에 스가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차 적응을 겨우 끝내놨는데 왜 벌써 깨우는 거야. 스가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칭얼거리며 팔을 휘휘 저었다. 저리 가라는 의미였다.
"야, 지금 니가 잘 때가 아니야! 오이카와 토오루가 사고 쳤어!"
"...뭐?"
오이카와라는 이름은 스가에게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지만 그 뒤에 붙는 사고 쳤다는 말은 더 강력한 주문이었다. 다이치의 말에 스가는 호텔 침대에서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뉴욕 시내가 보이는 전망 좋은 창에는 푸르슴한 새벽의 기운이 가득 끼어있었다. 마구잡이로 뻗친 머리로 껌뻑껌뻑 눈을 감았다 뜨는 스가 앞으로 아사히가 노트북을 내밀었다.
"방금 끝난 프로 배구 시상식이야."
"아, 맞다. 오늘이었지!"
시상식은 꼭 잊지 않고 체크하겠다고 오이카와와 약속했는데 시차 적응과 뉴욕 여행의 피로가 겹쳐서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뭐? 스가는 화면에 가득 뜬 동영상을 바라보았다. <올해의 선수상을 탄 오이카와 토오루의 수상 소감> 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세상에! 토오루가 올해의 선수상을 탔어!!!"
스가가 신이 난 목소리로 방이 떠나가라 외쳤다. 진짜 사고 쳤네? 세상에!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 상에 후보로 올라갔지만 모두 다른 선수에게 밀려 받지 못했었다. 올해는 다를 거라고 뉴욕에 오기 전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마음을 비워놓고 있었는데...
"그 상이 문제가 아니고, 영상을 보라고."
다이치가 답답하다는 듯 짜증을 내며 대신하여 영상을 재생시켰다. 프로 배구 협회의 협회장이라는 나이 지긋한 남자와 최근에 인기 있는 유명 여자 모델이 시상자로 나오는 장면부터 영상이 시작되었다. 반짝이는 스포트라이트 조명 아래에 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만담과 같은 인사 후 드디어 수상 장면이 흘러나왔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2014, 프로 배구 시상식 올해의 선수상! 이 영광을 차지 한 선수는요...! 어머, 이 분이시구나. 제가 정말 팬인데요!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입니다!"
모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녀팬들과 박수갈채가 뒤섞여 노트북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왔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지직거리는 음에 스가가 아사히를 돌아보며 "노트북 좀 새로 사."라고 가볍게 핀잔을 던졌다. 같은 팀 선수들 사이에 앉아있던 오이카와는 항상 멋있었지만 오늘은 정말로 멋있었다. 블랙 셔츠와 수트를 핏 되게 맞춰 입은 그는 평소와 달리 옅은 갈색 머리를 뒤로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냈다. 웃으며 자신을 향하는 카메라의 플래시들을 당당하게 받아내며 단상으로 오르는 그의 모습에 스가는 저도 모르게 뛰는 심장을 꽉 쥐었다. 저 남자가 내 남자라고! 내 남자! 당장에라도 뉴욕 시내로 뛰어 나가 외치고 싶었다.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 없을 테니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허튼 생각을 하며. 그렇게 스가 눈에는 반짝반짝 멋있는 오이카와는 긴장도 하지 않았는지 여유 있게 웃으며 꽃다발과 트로피를 받았다. 어쩐지 스가는 코가 찡해져서 입술을 꾹 물었다.
-"와, 사실 매년 기대하는 상이기는 했는데 이렇게 받아보니 기분이 참 이상하네요. 다음 시즌에도 좋은 모습 보여달라는 의미로 알고 열심히 더 노력하겠습니다. 올해도 별로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터라 준비된 수상 소감이 없는데요..."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오이카와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이고 트로피를 바라보는 모습에 스가는 결국 왈칵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훌쩍이는 스가를 지켜보던 다이치가 혀를 차며 서둘러 곽 티슈를 품으로 안겨주었다.
-"우선은 누구보다 이 순간을 기뻐하고 계실 부모님. 두 분의 지원과 응원과 믿음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함께 해 준 저희 팀원들, 스태프들, 그리고 제 막무가내인 성격을 너그럽게 받아주시는 감독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또.. 어... 아직 부족한 저를 항상 응원해주시는 팬들이 있기에 오늘 인기상과 세터상 그리고 이 최고 선수상까지 탈 수 있었던게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팬들을 향한 감사 인사에 객석에서 환호가 함께 터졌다. 그 소리에 오이카와가 웃으며 여유 있게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다시 마이크로 입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 더 말해도 되나요? 그럼 조금만 더 시간을 받겠습니다. 그 ... 자랑은 아니지만 대학에서도, 그리고 프로에 나와서도 부족한 주제에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항상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던 단 한 사람이 있어요. 사실은 가장 처음, 그리고 항상 제 고마움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데 입에 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묵묵히 언제나 저를 응원하고, 아껴주고,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고 말해주는 연인 스가와라 코우시... 와, 이렇게 말하니까 떨리네요. 그가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저도 없을 겁니다. 그에게 당당한 연인이 되고 싶고, 그에게 자랑스러운 연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서 내려가는 순간 분명 축하 인사보다 더한 공격을 받게 될 것이 뻔하지만 그걸 각오하고 이 자리에 섰는데.. 역시 그래도 조금 떨리고 무섭고 긴장은 되네요. 하지만 제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과 같은 이런 날에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이 상의 영광은 그에게 돌리겠습니다. 항상 고마워, 네가 주는 한없는 애정이 나를 살게 해. 그리고 화내지 마."
떨리는 목소리로 차근차근 소감을 끝냈지만 시상식장은 정적에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을 끝으로 꺼진 영상에 스가는 덜덜 떨리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끌어안았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이 멍청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스가는 자신이 방금 본 영상이 믿기 지가 않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아사히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대답할 정신도 없었다. 다이치와 아사히와 함께 뉴욕으로 2주간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공항에서 배웅하며 그가 넌지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 사고 쳐도 화내지 마." 라던 그 말. "다른 팀으로 이적할 거야?" 스가의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오이카와의 사고의 기준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고가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뉴욕행 비행기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입을 막았을 것이다. 당당하게 오이카와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싶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스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시트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오이카와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화를 내야 했다. 하지만 풀려버린 다리 덕에 얼마 가지 못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지 못한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어. 그런 말을 오이카와에게 하는 게 아니었어. 그에게 부담을 주는 게 아니었어. 그저 곁에 있는 걸로도 만족한다고 했던 주제에 욕심을 부린 탓이었다. 자신이 오이카와의 미래를 망쳤다는 생각에 스가는 숨이 다 막혀오는 것 같았다.
"괜찮아?"
"아니."
어디서 사왔는지 파슬리와 치즈가 뿌려진 감자 수프를 내밀며 묻는 아사히의 말에 스가는 날카롭게 외쳤다. 호텔 거울에 비치는 스가의 몰골은 엉망이다 못해 추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서 떠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 몇 일째 잠도 못 자고 인터넷을 살피느라 눈이 붉었다. 아직 뉴욕 여행이 3일이나 더 남은 시점에서 스가는 밖에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이 기분으로 뉴욕의 야경이, 풍경이 들어올 리도 없으며 무언가 입에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 좀 자."
식사를 사 온 다이치가 머플러를 푸르며 추운 뉴욕의 기운을 뿜어댔다. 스가는 고개를 저으며 손에 쥔 수프에 플라스틱 수저를 담갔다. 이 와중에 꼬르륵거리는 자신의 배가 미웠다.
오이카와의 커밍아웃은 연일 인터넷에서 화제의 중심이었다. 하루에도 기사가 수십 개씩 쏟아져 나왔으며 그 밑에는 응원을 하는 댓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좋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사히는 "네가 그런 거만 집중해서 봐서 그래."라며 어울리지도 않게 긍정적이게 말해주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어제는 오이카와의 팬이라고 밝힌 누군가가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면서 남긴 글이 스가를 괴롭게 만들었다. 팬이 남긴 게시물에는 오이카와가 즐겨 하는 SNS의 사진들이 가득 있었다. [완벽한 시간] 이라는 멘트와 함께 찍어 올린 사진에는 화려한 식탁풍경이 담겨 있었다. 잘 기억 안 나지만 작년에 아마 오이카와의 생일이라 스가가 아침 일찍 차려 준 생일상과 같았다. [오이카와는 보통 친구들이나 팀원들하고 만난 날은 얼굴까지 나오는 사진을 찍었는데 이렇게 2개의 그릇과 수저나 컵이 찍히는 사진에는 항상 상대방이 없음. 거기다 저기 오이카와네 집.] 이라는 코멘트가 사진 아래에 달려 있었다. 그 외에도 함께 여름에 오키나와에 여행을 갔을 적에 찍었던 풍경 사진과 그 날 찍힌 파파라치 사진 같은 것들이 함께 올라와 비교되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찍은 해변 사진에 찍혀 있는 스가의 슬리퍼를 신은 발을 확대한 모습과 함께 파파라치에 찍혔던 오이카와 옆에 서 있는 모자이크 된 스가의 발을 확대한 모습이 함께 올라와 있었다. [여름휴가도 같이 감. 단둘이. 주간지에서는 친구들이랑 갔다고 했지만 파파라치에 찍힌 사람은 저 남자 하나뿐. 휴가 내내 올라오는 사진에 친구들 사진은 하나도 없었음] 완벽한 분석에 스가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뒤로는 대부분 파파라치에 찍힌 사진들이었다. 최대한 떨어져 걷거나, 닿지 않게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들이 찍혀 있었는데 찍힌 스가 조차도 이런 사진들이 있었다는 게 놀라 울 정도로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심지어 작년 오이카와가 코트 위에서 갑자기 무릎의 통증을 호소하며 들 것에 실려 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 날 같이 구급차에 오르는 사진까지 있었다. 게시물에 달린 리플을 보던 스가는 입으로 넘어가는 수프가 어떤 맛인지도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팬들 사이에서 다들 쉬쉬했지만 저 남자 유명했음. 다들 회색 머리라고 불렀는데 경기장에도 엄청 자주 왔었음. 오이카와네 가족들이랑 앉아서 경기 보는 것도 봤었음]
[저번에 오이카와가 인터뷰에서 이상형 물으니까 자긴 눈가에 점있는 사람들에게 끌린다고 해서 뭐야 저 웃기지도 않은 이상형은?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남자 눈에 점있네]
[잘생긴 남자는 게이던가 임자가 있다더니 오이카와는 둘 다야. 거지 같다.]
[나는 오이카와가 성격이 좀 까탈스러운 편이라 친구가 쟤 하나인 줄. 근데 애인이었네. 헐]
[다음 시즌 우리 팀 어쩔? 오이카와 연애질 때문에 시즌 다 말아먹게 생김. 방출시키고 싶다.]
"방출시키고 싶데!!!!"
빽- 외치는 스가의 울음 섞인 말에 다이치가 "지들이 시키고 싶다고 시키겠냐? 그 팀에 오이카와 말고 잘하는 놈도 없던데!?"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해왔다. 그리고는 스가가 들고 있던 수저를 뺏어 푹푹 스프를 섞어 입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좋은 반응도 많던데. 둘이 잘 어울린다. 용기 있다. 응원한다. 뭐 그런 거도 있으니까 그런 거만 봐."
"...그런 건 눈에도 안 들어와. 나쁜 것만 보이고 나쁜 생각만 들어."
"잘난 남자랑 사귀려면 이 정도는 감수했어야지. 자, 아 해라 아-"
어째서 다이치는 이렇게 평온하지? 스가는 그의 대담함을 부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입으로 밀어 넣어지는 뜨뜻한 수프는 여전히 어떠한 맛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뉴욕 여행을 마지막 앞두고 여전히 스가는 호텔 방에서만 생활했다. 아사히는 "어차피 곧 사람들이 잊을 거야."라고 위로했지만 잊기는커녕 이미 스가의 신상 정보까지 모두 탈탈 털려 방송을 타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 배구 선수였던 과거와 어디서 구했는지 그 당시 아오바죠사이와 시합했던 사진들까지 인터넷에 올라왔으며 그것도 모자라 팀 훈련을 하러 가던 길에 기자들에게 붙잡힌 카게야마는 억지로 인터뷰까지 해야만 했다. "두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완전 별로예요. 저희 선배가 아까우니까." 무뚝뚝한 얼굴로 그렇게 던진 카게야마의 인터뷰는 영상으로 온갖 사이트에 올라올 정도였다. 우울한 스가와 달리 그 인터뷰에 다이치와 아사히는 "쟤 장난 아니야." 라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진짜 장난 아니거든?
"진짜 마지막 날인데 혼자 있을 거야? 나가자니까? 어차피 뉴욕에서 누가 널 알아보겠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여행할 기분이 안 난다고."
"그럼 뭐 기념품이나 먹고 싶은 거 없어? 우리가 사다 줄게."
"괜찮아. 그냥 둘이 재밌게 놀다 와."
나갈 준비를 하는 아사히와 다이치의 등을 보며 스가가 쓸쓸하게 말했다. 자신을 두고 간다며 툴툴거리던 오이카와가 작정하고 여행을 망칠 생각으로 벌인 일이라면 진짜 완벽하게 망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우울하고 힘들다고 큰돈 들여 여기까지 놀러 온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스가는 애써 웃으며 배웅했다. "룸서비스 주문하고 갈 테니까 뭐라도 먹고 있어." 걱정하는 아사히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방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시트에 얼굴을 묻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사고를 친 오이카와 토오루는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닿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다며 다이치가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나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야 프리랜서로 번역일을 하니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리가 없으니 상관없었지만 오이카와는 달랐다. 유명하다 못해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있는 선수였고 한 팀의 에이스였다. 입장이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만약 아사히나 다이치의 말 대로 이 일이 잠잠해지지 않으면, 더 거세지고 비난이 커져서 선수 생활도 못 할 정도가 된다면- 헤어져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스가는 눈물이 왈칵 터져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이 와중에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자신이 너무도 이기적이라서 싫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망할 오이카와."
쿠소카와. 스가는 단 한 번도 입에 담아보지 못한 거친 애칭을 중얼거리며 눈물을 닦아냈다. 전화라도 받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은 갈 곳을 잃은 채로 스가의 주변만 배회했다. 엉망인 스가의 마음과 달리 창 너머의 뉴욕의 낮은 밝고 활기차 보이기까지 했다. 침대에서 벗어난 스가는 찬 창에 괜스레 이마를 대며 훌쩍였다. 이렇게라도 머리를 식혀야 할 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홀로 훌쩍이고 있었을까 조용한 방 안으로 벨 소리가 울렸다. 딩동 울리는 소리에 스가는 쓱쓱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아사히가 주문했다는 룸서비스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팁을 주기 위해 식탁에 놓여있던 지갑을 들고 문을 열었다. 룸서비스 팁은 얼마를 줘야하는거지? 그리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하지만 열린 호텔 문 앞, 생각했던 룸서비스가 아닌 생각하지 못했던 남자의 등장에 스가는 쥐고 있던 지갑을 놓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놀래?"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웃으며 묻는 그 말에 스가는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는건지, 환상을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며 오이카와가 손을 뻗어왔다. 찬 겨울에 얼어붙은 체온이 눈가에 닿자 그제야 스가는 이게 현실이구나 싶었다.
"만지지 마."
"뭐?"
"나 만지지 말라고!"
하지만 애타던 마음도, 그리움도 잠시 스가는 그보다 먼저 터져오르는 분노에 화를 냈다. 오이카와의 손을 쳐내며 그를 서둘러 밀어냈다. 망할인간, 뻔뻔하게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
"잠,잠깐. 코우시? 왜그래? 나 잠도 못 자고 날라온 건데-"
"누가 오라 그랬어? 망할 오이카와!"
"하하, 화났어? 그보다 그 이와짱 같은 말투는 뭐야? 코우시에게 안 어울리게. 미안해. 화내지 마. 내가 잘못했어."
"진짜 싫어!!"
왈칵 터지는 눈물에 울음소리를 내며 스가가 외쳤다. 미안해, 오이카와는 정말로 쓸쓸한 얼굴을 하며 사과를 해왔다. 정말로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스가는 오이카와의 저 얼굴에 약했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저 외로워 보이는 얼굴에 항상 약했다. 그래서 자신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는 사내의 행동에 거부도 못 하고 폭 안겼다. 하지 말라고 말해서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기에 스가는 더이상 오이카와를 거부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길래 눈이 개구리가 된 거야? 완전 못 생겨서 내가 방을 잘못 찾은 줄 알았어."
"...입 다물어."
"왜 울고 그래. 속상하게."
"네가 속상하게 만들었잖아. 나에게 상의도 없이 그게 뭐야? 왜 그런 사고를 쳐?"
스가가 엉망인 얼굴로 고개만 들어 물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내려보며 오이카와가 서둘러 손바닥으로 그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불안하기 싫어서."
"..."
"내가 나로 있는데,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느끼는 이 감정들로 더이상 불안해하기 싫어서."
"..."
"너를 숨기고 나를 숨기면서 불안해하기 싫어서 그랬어. 솔직히 나 지금 무척 편해. 너 이렇게 울려 놓고 할 소리는 아니지만, 정말 나 편해."
"나는 안 편해."
"알아. 그런데 어쩌나. 내가 이미 나는 니꺼라고 떠들어댔는데. 화 풀고 불쌍한 나를 거둬줘."
살살 웃으며 말하는 그 말에 스가가 픽 웃었다. 어디서 애교야. 그런데 그 애교에 언제나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가는 하는 수 없이 오이카와를 방 안으로 들였다. 이렇게 나쁜 버릇들이면 안되는데, 이렇게 쉽게 용서해주면 안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방도가 없었다.
그 후 오이카와에게 들은 상황 설명은 스가를 또 울게 만들었다. 시상식에서 끝나기가 무섭게 구단에서 인터뷰 금지 통보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집 앞에 온갖 기자들과 방송국 카메라가 대기 중이라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는 것, 핸드폰은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꺼두었다는 것 등등. 그리고 그 난리 통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체격의 팀 스텝을 불러내 기자들을 따돌리고 바로 하네다로 가 남아있던 뉴욕행 비행기 중 가장 빠른 것을 끊어 왔다는 것. 그 덕에 출국은 크게 방해는 받지 않았으나 아마 귀국 할 즈음 되면 난리 통이 되어 있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에이전트 사무실에 이미 연락해놨고, 아마 우리 비행기에 있을 시간 즈음이면 구단에서 성명서도 발표할 거야."
"성명서?"
"나를 지지하겠다는 성명서. 나 아직 계약 기간 많이 남았고 버릴 생각 없으니 수습이나 잘하라더라고."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누군가가 오이카와를, 그리고 자신들의 관계를 지지해준다는 사실로도 스가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위로는 되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오이카와는 멋대로 스가의 비행기 티켓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것과 맞춰 새로 예약했다. 절대로 같이 입국하지 않겠다며 스가는 우겼으나 "주장군이랑 에이스군이랑 들어가면 저 두 사람에게 너무 민폐 아니야? 차라리 나에게 민폐를 끼쳐."라는 이유로 정리해 버렸다. "난 그 난리 통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라고 강하게 말하는 다이치의 매정한 말 역시도 포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뉴욕의 이른 아침 JFK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오르며 스가는 오이카와가 들고 온 선글라스를 뺏어 썼다. 여전히 퉁퉁 부은 눈은 가라앉지 못한 채로 엉망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출국 심사를 하며 기다리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스가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뉴욕에 이렇게 일본인이 많았던가? 땀이 차는 손을 어쩌지 못하고 떨고 있자 오이카와가 조심스럽게 맞잡아 왔다.
"하지 마."
"뭐 어때. 이제 알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차례차례 짐을 바구니에 넣고 심사를 받는 도중에 신발을 벗은 스가에게 제가 두르고 있던 머플러까지 깔아 내밀었다. 도대체 왜 이래? 하지 마라니까? 스가가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며 이를 악물고 속삭이자 오이카와는 "왜, 내가 매너있는 벤츠남 흉내 좀 내보겠다는데." 라며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뱉었다. 자신은 이렇게 초조하고 겁이 나서 죽겠는데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그렇게 출국 심사를 끝내고 면세를 구경하면서도 쇼핑 따위 눈에 안 들어오는 스가와 달리 오이카와는 이것저것 열심히도 카드를 긁어댔다. 결국 비행기를 기다리며 탑승구 근처에 자리 잡았을 때에는 스가는 녹초가 되어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자신을 정신없게 만들어서 이 불안함을 날려버릴 생각이라면 탁월한 초이스였다. 활주로가 그대로 보이는 창가 앞에 앉아 스가는 꽉 잡힌 오이카와의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그의 어깨에 기댔다. 예전이라면 꿈도 못 꿀 행동이지만 어쩐지 조금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때였다. "저기..." 라는 조심스러운 부름이 두 사람에게 닿은 것은. 고개를 들어 천천히 돌아보자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저, 오이카와 선수 맞으시죠?"
"아..네."
"완전 팬인데 사진 하나만 찍어 주시면 안 될까요?"
뜻밖의 말이었다. 평소에 이런 부탁이나 요청을 받는 것을 스가는 어렵지 않게 보아왔지만 사고를 친 지금 누군가가 오이카와의 팬이라며 다가오는 모습이 새로우면서도 기뻤다. 흔쾌하게 끄덕이는 오이카와의 대답에 밝게 웃은 그녀가 스가를 돌아보며 물었다. "같이 찍으실래요?" 라고.
"아뇨, 저... 저는 괜찮... 괜찮아요!"
생각치도 못한 제안에 스가가 떨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녀의 카메라를 받아 두 사람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트에 사인을 받으며 그녀가 말했다. 두 분 잘 어울리세요 라고. 오이카와는 무척이나 행복한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마디일 뿐인데 처음 두 사람으로서 받아 본 시선이 날카롭지 않다는 이유로 스가는 안심이 되었다.
그 후, 몇 번이나 스가는 오이카와를 알아본 사람들과 마주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사진과 사인을 요청하는 이들 모두는 여전히 오이카와를 좋아해 주었고 응원한다 말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렇게 짧은 사인회들을 끝내고 스가는 오이카와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올 때에는 이코노미였는데 갈 때에는 오이카와가 예약 한 일등석이었다. 고작 한번 타는 비행기에 무슨 돈을 쓴 거냐며 스가는 툴툴거렸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비행기에 오른 동안은 정말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약 15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스가는 오로지 잠만 잤다. 오이카와로 인해 제대로 취하지 못했던 수면이 우습게도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몰려왔다. 간간이 잠시 눈을 뜨면 오이카와가 묵묵히 곁에 있었다. 잡혀있는 손이, 전해지는 온기가 다정해서 스가는 그 편안함에 꿈 조차 꾸지 않은 채로 푹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일본,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니 찾아왔던 안정과 편안함은 사라져 버렸다.
"입국장에 기자들 장난 아니라는데."
오이카와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짐을 찾으며 중얼거렸다. 스가는 자신의 케리어를 찾아들며 떨리는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서웠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면 나중에 공항 직원하고 나와. 나 먼저 나갈게."
"..."
"내가 나가면 다 나에게 따라 붙을 테니까. 넌 좀 편할 거야."
"괜찮아."
"...진짜?"
"아니."
그냥 해 본 소리였다. 괜찮을 리가 있나. 하지만 이렇게 엎질러진 물, 쳐버린 사고에 오이카와만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폭력적인 시선과 차별에 싸워야 한다면 그건 두 사람의 몫이었지 오이카와 홀로 책임져야 할 것은 아니었다. 스가는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손을 내밀었다. 긴장으로 가득 찬 그 손을 오이카와가 웃으며 잡았다.
"여기 나가면 우리가 알던 세상이랑 조금 달라질지도 몰라."
"...응."
"그래도 나 놓지 마."
응. 스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스가에게 오이카와가 살짝 손을 놓고는 자신의 머플러를 둘러 꽁꽁 감춰주곤 마지막으로 선글라스까지 끼워주었다. 이제야 좀 사람답네. 우습지도 않은 농담에 스가가 주먹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하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가자."
이번에는 오이카와가 손을 내밀었다. 스가는 다시 그 커다란 온기를 붙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닫혀있던 게이트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플래시가 눈앞을 가렸다. 스가는 그렇게 오이카와가 보는 세상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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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전개 그리고....급 종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뒤는 전혀 생각이 안나서...
낮잠자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새벽3시 개졸림...
오이카와가 보는 세상 = 카메라가 쩌는 세상!
이러케 스가와라 코우시는 파파라치에게 시달리게 되믑니다.....ㅋ..
둘이 데이트 하면서 사진이나 많이 찍혔으면. 그 주간지 제가 삽니다........
갑자기 이렇게 말도 안되는 클리셰적이면 클리셰적인 두 사람이 보고 시퍼서.
뭐 그렇다고 해피 엔딩은 아니고, 나중에 경기하면 원정 가서 그 팀 팬들에게 오이카와 막 모욕당하구... 그런 매서운 시선에 속상해하는 스가도 보고싶구... 그래 니들은 짖어라 나는 나대로 행쇼할란다 하면서 더 유난떠는 오이카와도 보고싶구... 그르네...
그리고 난 뉴욕 안가봄.
그러므로 뉴욕 시내에서 공항까지 택시로 얼마 나오는지 알게 뭐야...
그냥 심사 받으면서 스가 발 시려울까봐 급 매너 선보이는 오이카와가 보고싶어서 넣었을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