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Fair Play
2016. 3. 28. 00:51




"나, 여자친구 생겼어."



놀랍지도 않은 말이었다. 예상도 했던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자기 전에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도 했다. 괴로움에 발버둥 치면서도 어떻게 하면 가장 멀쩡하고 평범한 자신을 연기할 수 있는지도 연습했다.



"아..."



그런데 왜, 연습한 대로 잘되지 않을까. 스가와라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래? 축하해" 라는 말을 떠올렸지만, 입을 타고 흐르는 것은 얼빠지고 이상한 목소리뿐이었다. 어느새 축하한다는 글씨는 마구 머릿속 칠판에서 지워져 엉망으로 번져나갔다. 이런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이카와 토오루는 얄밉게도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며 줄줄 제 새 애인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만났고 어떻게 생겼고 무슨 전공이며 어디가 좋은지.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던 스가와라는 유치하고 우습게도 스스로와 비교했다. 애초에 여자인 그의 애인에게 자신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데도. 스타트라인이 다른데도.



"내 말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그래서?"
"...축하해."



나쁜 자식. 축하하고픈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데 결국 억지로 그 대답을 끌어냈다. 입안이 텁텁해서 까슬해서 아직 접시에 많이 남아있는 꼬치 하나를 들어 우걱우걱 입으로 밀어 넣었다. 왜 술을 사겠다고 하나 싶었다. 집에서 보면 될 일을 왜 밖까지 불러냈나 싶었다. 이거 그거지? 그러니까 가끔 집 좀 빌리겠다는 말 하고 싶어서? 뻔하잖아. 이 나잇대의 남자애들은. 동거인에게 양해 정도는 구해야 하니까 지금 뇌물 먹이는 거잖아, 이거 그거잖아, 맞지? 뻔한 레퍼토리에 스가와라는 우물우물 다 씹지도 않은 닭고기를 그대로 꾸역꾸역 삼켜내곤 이내 잔을 들었다. 한 잔 깔끔하게 비우고 내려놓자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대며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행복하냐? 좋아 죽겠어?"



그 꼴이 얄미워 눈을 흘기며 묻자 그가 끄덕였다.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된 거지. 전혀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애써 위로하며 스가와라도 따라 웃었다. 어쩐지 눈가가 아팠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만나게 된 것은 대학교 입학 후, 학생들이 이것저것 붙여놓는 안내 게시판 앞에서였다. 도쿄로 상경해 자취하겠다고 고른 집이 생각보다 커서 룸메이트를 구할 생각으로 붙여놓았던 벽보를 익숙한 얼굴이 들여보고 있었다. 사실 고등학교 때를 떠올리면 재회라는 말이 어울리지만, 딱히 이렇다 할 관계성이나 교류는 없던 사이라 어찌 보면 그게 첫 만남에 가까웠다. 다행히도 그 역시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꽤 놀란 얼굴로 "룸메이트 구해?" 라고 물어왔다. 지금 지내는 집이 너무 낡고 시끄러워서 방을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눈을 반짝이는 그를 스가와라는 흔쾌히 룸메이트로 받아들였다.


처음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세죠의 주장이며 당시 최고의 세터였던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것밖에. 생활 습관이 어떤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교양은 뭘 듣는지도 모르면서 가볍게도 그를 집에 들였다. 어차피 같이 집세를 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지 대단한 동거인이나 친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은 예측불허라고, 금방 가까워지고 말았다. 우선 오이카와 토오루는 자신이 못하는 청소나 요리에 능해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다. 거기다 성격도 좋아 친해지는 데 그리 장벽이 높지 않았다. 생활 패턴도 비슷한 데다 수업이 겹치거나 시간이 겹치는 게 더러 있어 매번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같이 수업을 듣고 같이 학식을 먹고 그러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러다 주말에는 함께 DVD를 빌려 늘어지게 누워 보내거나 가끔은 나가 볼링을 치고 가라오케에 가서 신나게 스트레스를 풀고 들어오기도 했다. 과거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좀 불편하겠지? 싶었던 생각이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스르륵 녹아내렸다.


그리고 언제부터였을까, 그 녹아내린 틈 속에서 오이카와 토오루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것은. 조금씩 제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다니다 이내 훌쩍 지워버리고 말았다. 좋아한다고 자각하고 나니 더 좋아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밤,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었다. 부디 이 마음을 들키지 않게 해달라고. 그래, 그렇게 빌었다. 관계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여자친구라니, 그건 빌지 않았는데.



"치사해."



빈 것만 들어줘야지. 억울해서 한탄이 터져 나왔다.



"뭐가?"



어느새 새로 주문한 맥주를 그가 쥐여주며 물었다. 속이 상해서 그런가 술이 절로 꼴깍꼴깍 넘어갔다. 평소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양을 비우고 빈 잔이 가득 테이블을 채웠다. 마음이 아파서 속이 아픈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뭐긴 뭐야, 뭘 거 같은데?"
"내가 여자친구 생긴 거?"
"그래! 그거!!"



어떻게 네가 나에게 그럴 수 있어? 탕, 요란하게도 방금 비운 잔을 내려놓으며 스가와라는 따졌다. 여자친구 만들 거면 나에게 잘해주지 말했어야지. 아침마다 잠투정하는 나를 받아주지 말고, 시리얼만 먹으면 허하다고 토스트 같은 것도 챙겨주지 말고, 우산 없다는 말에 데리러 오지도 말고, 동아리 모임에 막차 끊겼다고 마중 나오지도 말고, 주말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도 빌려오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마파두부도 만들어주지 말고, 수업 없는데도 나 챙긴다고 기다렸다 같이 밥 먹지도 말고 그랬어야지. 그 외에도 너무 많은데 너무 많아서 다 떠오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떠올리고 나니, 그냥 오이카와 토오루는 동거인으로서, 룸메이트로서, 친구로서 잘해준 것인데 홀로 북 치고 장구 치고 김칫국을 들이켠 거 같아서 더 슬퍼졌다. 찡하게 아파오는 코끝을 꾹 누르며 스가와라는 빈 잔만 꾹 쥐였다.



"그럼 너도 얼른 하나 만들어."



여기, 맥주 추가요. 종업원을 부르며 오이카와 토오루가 참 간단하게도 말했다.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 보다, 너도 얼른 만들라는 그 말이 더 속상해 눈가가 뿌옇게 변했다. 강이 흐르듯 넘실넘실 흔들리다 이내 넘쳐 흘렀다.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리 따지고 싶었으나 스가와라는 꾹 참았다.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있겠지. 스가와라 코우시, 네가 그렇게 신에게 빌었잖아. 그랬던 주제에 이제와 몰라준다고 원망하다니, 스스로가 싫어졌다. 하지만 그런 제 마음도 몰라주는 남자는 뭐가 좋은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쪽은 울고 있는데도. 결국 참지 못하고 주룩주룩 흘려대자 놀랐는지 뻗어온 손이 뺨에 닿았다. 눈물을 닦아 주는 커다란 손에 더 서러워져 꽉 입술 뒤를 물어 버텼다.



"너 술버릇 없지 않아? 왜 갑자기 울고 그래?"
"아냐, 있어."
"뭐?"
"오늘부터 생겼어."



이제 술을 마실 때마다 미운 저 얼굴을 동시에 사랑스러운 저 얼굴을 떠올리며 매번 울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더 맥주를 비우고, 아예 주정을 부리듯 테이블에 엎드려 엉엉 울고 징징 울다가 "그만 들어가자." 라는 오이카와의 말에 억지로 일어나야만 했다. 하지만 가게를 나와 몇 걸음 채 걷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알코올에 다리도 뇌도 모두 녹진하게 녹아 사고가 마비된 기분이었다.



"눈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아파."



떼를 부리듯 주저앉아 중얼대자 걸음을 멈춘 오이카와가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적당하게 마시지. 라는 얄미운 핀잔도 날아들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버럭 화를 내려 입을 열었지만, 그보다 텁하고 입을 막아서는 손이 빨랐다.



"쉬- 동네 사람들 다 깨우겠다."



아이 취급하듯 달래는 그의 목소리에 이를 세워 콱 손을 물려 했지만, 그보다 빨리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곤 돌아앉아 널찍한 등을 내보였다.



"자, 업혀."



별로 낯선 등도 아니었다. 계단에서 넘어졌을 때도 빌려준 등이었고 과 회식 때 진탕 먹고 돌아가는 길에도 빌려준 등이었다. 그런데 이제 저 등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서러움이 터졌다. 얼른, 재촉하는 오이카와의 말에도 스가와라는 꾸역꾸역 눈물을 삼키며 버텼다. 하지만 이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흔들거리는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토하지 마. 엄한 목소리와 함께 엉덩이가 받쳐지고 훌쩍 시야가 위로 솟았다.



"있지, 오이카와."
"왜"
"방은 절대로 안 빌려줘."
"응."
"우리 집에 데리고 오지마, 알았지?"
"알았어."
"그리고 여자친구, 나도 보여줘."



흔들리지 않게 배려라도 해주는 건지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등에 꾹 얼굴을 묻고 부탁했다. 그래, 간단하게도 나오는 대답에 절로 입술이 삐죽댔지만 스가와라는 다시 삼켰다. 그리곤 선전포고하듯 말했다.



"나는 페어플레이가 좋아."



라고.


고백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포기할 생각도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와 페어플레이가 하고 싶었다. 동일 선상의 스타트라인이 아니니까 그녀에게 핸디캡을 주자. 조금 치사하게 굴고, 약게 굴고, 못살게 굴어서 그녀가 떨어져 나가게. 못된 짓이고 못된 마음인 거 알지만, 그래도 이쪽이 먼저니까. 내가 먼저니까. 오이카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럼 누가 그렇게 잘해주래? 누가 반하게 만들래? 모든 원흉은 오이카와 토오루부터 시작되었으니 그도 할 말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을래. 그렇게 결심하며 스가와라는 안고 있던 팔에 더 힘을 주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멍청한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도 좋아."




속 좋게도 동조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기쁘지는 않았다. 이 일그러진 마음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오늘부터 신에게 빌 기도를 바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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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하는 스가와라 코우시 + 술주정하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동시에 보고시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