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사랑은 몇 번이나 찾아오는 걸까. 누군가에게는 여러 번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 스가와라는 되도록이면 자신에게는 단 한 번만 찾아오기를 바랐다. 단 한 번만 하고 죽어도 절대로 아쉽지 않은, 아깝지 않은, 모자라지 않을 그런 사랑.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랑이 어디 있어."
슬프게도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오늘도 쉴 줄을 몰랐다. 그 꼴을 한심하게 보고 있던 사와무라가 약간의 한심함을 담아 핀잔하며 몇 번 째일지 모를 휴지를 건넸다. 킁, 받아들어 눈물을 닦기는커녕 차오른 코부터 풀었다. 써버린 휴지를 손으로 꾸깃하게 접어 손이 닿는 곳 아무 데나 놓아 버렸다. 그런 휴지 뭉치가 벌써 꽤 쌓여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있을 줄 알았어."
그렇게 휴지를 하나 버렸는데도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훌쩍이며 반박하자 반대편에 앉은 사와무라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없을 수도 있었다. 완벽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서 완벽함을 추구하고 기대하지 않을까? 자신은 다르다고. 자신 역시도 그랬을 뿐이었다.
태어나 24년, 연애에 데뷔한지는 이제 막 1년 차. 평균적으로 남들이 다 한다는 연애에 대한 스타트가 늦어서인지 스가와라는 환상이 많았다. 특히, 자신이 게이이다 보니 조금 더 많았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파트너. 함께하면 즐겁고 모자람이 없는 파트너. 후에는 부모님에게 소개해도 아깝지 않고 제 인생을 걸고 같은 집에 살아도 부족하지 않은 파트너. 그런 사랑을 꿈꾸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다가오는 가벼운 사랑은 모두 거절하고 자신과 꼭 맞을 사람. 짧고 간결하게 끝날 사랑 말고 오래오래 질리지 않을 사랑을 위해. 그리고 드디어 그런 남자가 나타났다. 바에서 만난 그는 파트너나 연애에 대해 꽤 진중한 타입이었다. 대화 몇 마디로 "나갈래요?" "술 더 마실래요?" 라고 묻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그에게 홀랑 마음을 주었다. 몇 번을 바 테이블에서 마주해 대화만 나누고 간단한 칵테일을 나누다 겨우 첫 데이트를 했다. 마치 다른 연인처럼 만나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레스토랑에서 종료되는 평범함이 스가와라는 너무 좋았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오고 가는 그의 다정함, 여유, 배려 역시도. 그래서 이 남자라 생각했고, 이 남자라면 제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그런데 양다리라니. 부인이 있다니, 이게 말이 돼?"
그는 자신의 곁에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이토록 배려 깊고 자상하고 다정했던 것은 스스로를 감추고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정함에 눈이 멀어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아마 어쩌면 유부남이라는 티가 났을 수도 있고 의심할 만한 상황이 분명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의 부인이 나타나 울며 "헤어져 주세요." 라고 말할 때까지, 정말이지, 조금도 그리고 요만큼도.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해. 신이 도왔다고 생각해. 훅 끌려가 더 놀아날 걸 빨리 끝났다고 생각해."
사와무라는 벌써 몇 번 째일지 모를 똑같은 말들을 반복하며 위로하고 휴지를 내밀었다. 하지만 모든 걸 걸고 싶었던 사랑이 이렇게 끝난 데에 대한 억울함과 속상함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펑펑 울어도 다시 또 펑펑 눈물이 나왔다.
"있지, 스가."
"왜."
다시 그가 내민 휴지를 받아 강하게 코를 풀며 부름에 대답했다.
"남자 소개해 줄까?"
"뭐?"
"주변에 내가 찾아볼게. 믿을만하고 괜찮은 사람. 소개팅을 하고 새로 만나면 좀 다르지 않을까."
"싫어."
"왜?"
"대놓고 그렇게 만남을 추구하는 자리는 싫단 말이야. 서로 평가하고 계산하고 눈치 보고! 싫어!!"
거기엔 내가 기다리는 사랑은 없어! 꾸깃, 다 쓴 휴지를 뭉쳐 더미 위로 추가하며 바락 외치자 사와무라의 표정이 금세 짜증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만나서 오래가는 커플, 주위에 많아. 그가 엄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내키지 않는 것은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한바탕 그렇게 울고 진상을 부리고 헤어진 다음날, 사와무라가 멋대로 시간과 장소가 적힌 메일을 보내왔다. 척 보아도 제 의견은 무시하고 멋대로 잡은 소개팅이 분명해 보였다. 안가, 취소해. 침대에 누워 퉁퉁 부은 눈을 겨우 떠 메시지를 찍어보내려는 순간, 다시 메시지 하나가 이어 도착했다.
-내키지 않아도 나가봐. 괜찮은 사람이래. 네가 기다리는 사랑이 아닐지 몰라도, 일단 나가서 누군가를 만나면 그 빌어먹을 쓰레기는 금방 잊히지 않을까.
둥실 떠오른 말풍선의 조언에 한참을 ㅇ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있었던 스가와라는 결국 아무 답변도 보내지 못했다.
그렇게 무시도 아니고 긍정도 아닌 상태로 시간은 차곡차곡 쌓였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어차피 나가도 별 소득 없을 거야, 그리 쉽게 포기하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입고 나갈 옷까지 샀다. 그러면서 금세 새 사랑을 준비하려는 자신이 한심하고 모순적이게 느껴져 몇 번을 또 울었다. 그렇게 그 사람에게 모든 걸 걸었던 주제에, 빠른 회복을 위한 이 움직임이라니. 그동안의 제 감정이 다 거짓이 되는 거 같아 쓸쓸했다. 그래서 다시 '안 갈래' 라고 메시지를 보내려다 또 몇 번을 지우고 잠들었다. 잠들면서 베개를 적시고 또 적셨다.
갈팡질팡. 스스로의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나가는 게 상대에 대한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그날 아침부터 걸려온 사와무라의 독촉에 못 이기는 척 거리로 나섰다. 스스로 호들갑을 떠는 게 우스워 보여 이날을 위해 샀던 옷은 입지 않았다. 평범하게 늘 입던 셔츠에 면바지, 얇은 자켓 하나를 깔끔하게 걸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마 옛날이라면 사랑에 데이지 않았던 스가와라 코우시라면 조금은 들뜨고 설레고 떨렸을지 모르겠지만, 기대감이 모두 사라지고 배신과 상처만 덩그러니 남은 스가와라 코우시라 그런지 걷는 발걸음은 무겁고 또 무겁기만 했다.
그렇게 도착한 카페엔 상대로 보이는 남자는 없었다.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멍하니 대리석 무늬의 판판한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직원이 와 주문하겠느냐 물었지만, 나중에 하겠다며 돌려보냈다. 주문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니 아꼈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었을까,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 작은 카페가 아닌지라 이동하고 움직이는 사람들로 발소리는 여러 개였는데 이상하게 그 발소리가 귀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소리가 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곤
"스가와라 코우시, 맞아요?"
가볍게 인사 대신 상대를 확인하는 말이 머리 위를 울렸다. 슬쩍 고개를 들자 갈색 머리카락의 미남이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느 남자보다 월등하게 잘생긴 그 얼굴에 하마터면 "아니요." 라고 대답할 뻔했으나 달싹이는 입술은 소리를 내질 못 했다. 그 반응이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맞죠?" 라고 그가 보기 좋게 웃으며 의자를 빼 앉았다. 그리고 그가 앉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뭐라도 먼저 주문하지 그랬어요,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어요?"
처음 보는 상대, 거기다 연애를 주제로 한 만남. 불편할 만도 한데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술술 뱉으며 먼저 메뉴판을 권했다. 가벼우면서도 다정한 그의 물음에 스가와라는 다시 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제가 좀 늦었죠? 서둘러 나온다고 나왔는데 전철이 늦어서요."
"아뇨..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괜찮아요? 멍하니 건네받은 메뉴판을 내려보고 있는 자신에게 그가 물었다. 뭐가요? 하고 눈으로 되묻자 그가 가만히 저를 들여보며 "안색이 너무 안 좋은데, 이 자리 좀 불편한 거 아니예요?" 라고 물었다.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제 얼굴이 심한가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카페 유리창에 비추는 제 얼굴은 최근 살이 조금 빠져 말라 보이기는 했으나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괜찮은데.."
"아, 그래요? 좀 안 좋아 보여서. 괜한 소리를 했다면 미안해요. 남 살피는 게 어려서부터 버릇이라."
"..."
"너무 불편하면 말해요. 사와무라군에게는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밥도 다 먹고 들어갔다고 전해줄게요."
배려하듯 조용히 전해진 그의 제안에 어쩐지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아, 안돼. 머릿속에서 다급히 외쳐댔지만 이 빌어먹을 눈물은 눈치도 없이 금방 시야를 물들이고는 뚝뚝 쏟아져 흘렀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렇게 손등과 테이블을 적시던 눈물은 이내 줄줄 흘러 뺨과 얼굴을 뒤덮었고, 초면인 상대 앞에서 추한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아 급히 손등으로 닦아내보았지만 이상하게 멈추질 않았다. 결국, 스가와라는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었다. 엉엉 아이처럼 우는소리를 낼 것 같아 입술만큼은 버티기 위해 강하게 물며 소리 없이 울었다. 마주 앉은 상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데 입을 열면 울음부터 튀어나올 것 같아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랑이 끝났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이렇게 계속 아팠다. 믿은 사람은 잘못이 없다지만 믿었던 자신이 제일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데여놓고 이런 자리에 나와 또 다른 사랑을 찾는 자신 역시도 멍청하게 느껴졌다. 스스로에게 잘못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그랬다. 거기다, 이곳에 앉아있으니 지금까지는 크게 자각하지 못했던 그 '끝'이라는 게 확실하게 와닿아 견딜 수가 없었다. 정말로 끝이 났어, 내 사랑은. 내가 그렇게 아끼고 아꼈던 내 사랑이 끝이 났어. 그래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꼭 누가 괜찮으냐 물으면 더 울긴 했었는데, 그 버릇을 못 버렸는지 그의 괜찮으냐는 그 질문 하나에 우르르 무너지듯 그 감정이 눈물을 타고 줄줄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무언가가 제 쪽으로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들자 보기만 해도 달아 보이는 초코 파르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단 거 먹으면 기분 좋아지잖아요."
남자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먹고 기운 내요."
그리곤 제 청승이, 제 눈물이 질렸는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를 붙잡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그럴 정신도 마음도 들지 않았기에 스가와라는 겨우 미안하다는 사과를 우물우물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은 제가 했고-"
그가 가볍게 말하며 파르페 옆으로 무언가를 밀어주었다. 편지처럼 곱게 접힌 휴지조각이었다. 이걸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라는 건가 싶었지만, 흰 휴지 안에 번진 푸른 잉크를 보니 그런 뜻은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보이니 일어날게요."
그렇게 덜렁 파르페와 휴지를 남기고 사내는 돌아섰다. 아주 짧았지만 상대를 살피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니 분명 괜찮은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놓치면 후회할 거라는 그런 생각조차도 지금의 스가와라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뿌옇게 물든 시야로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배웅할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슬쩍 그가 남긴 휴지를 펴 보았다. 학창 시절, 같은 반 여자아이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던 방법으로 접힌 작은 편지를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제 눈물로 더 번지지 않게 조심조심. 그렇게 편 휴지 위에는
-모든 게 정리되면 다시 만나요.
번진 파란 잉크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마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번호가 함께 물들어 있었다. 소개팅에 나와 엉엉 우는 상대 따위, 무시하고 그냥 나가도 될텐데. 다신 만나지 말자며 화를 내도 될텐데. 사내는 다정해도 너무 다정했다. 툭툭,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떨어지는 눈물이 그의 번호를 더 물들이지 않도록 서둘러 휴지를 챙겨 넣으며 스가와라는 수저를 들었다. 그의 다정함이 가득 담긴 파르체를 한 입 크게 떠 입에 물었다. 눈물 맛이 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달콤해서 또 울었다. 이상하게 혀끝으로 간질함이 피어올랐다. 상대는 이제 제 앞에 없는데 그가 남겨놓은 다정함에 스가와라는 뒤늦게 웃었다. 파르페는 마지막까지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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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운명을 믿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보고시퍼서..
전력 주제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