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날
오이카와 토오루x스가와라 코우시
"헤어지자."
이 말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연습했더라? 스가는 천천히 잠기는 목을 무시하며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접히는 손가락은 차고도 넘을 정도라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헤어지자, 헤어지자, 헤어지자, 자신이 먼저 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그 말을 가까스로 뱉으면서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보며 마음속 어딘가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미안, 나 제대로 못 들었어. 코우시. 뭐라고?" 제대로 들었으면서 되묻는 오이카와를 똑바로 바라보며 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를 담고 있는 눈동자가 흔들리면 안 된다고, 목소리가 떨리면 안 된다고 테이블 아래 내려놓았던 땀에 젖은 손을 꾹 쥐며-
"헤어지자, 토오루."
겨우 뱉어냈다.
어느, 화창한 봄날의 이별이었다.
***
널 위한 선택이야, 너를 위해서 헤어지는 거야, 널 사랑해서 보내주는 거야.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그런 대사들이 나오면 스가는 우습다고 비웃었다. 떠나보내는 것으로 사랑을 지킨다니, 그럴 바에는 곁에서 지키면 되는게 아니냐고 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랬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고 싶어졌다.
"인사해, 스가군. 오늘부터 우리가 지원하기로 한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야."
사람을 보고 숨을 멎는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스포츠 브랜드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스가는 회의실로 불려가 자신의 상사가 소개시키는 사내를 보며 생각했다. 눈앞에 웃고 있는 상대는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2년 전, 자신이 이별연습까지 해가며 헤어졌던 너무도 사랑하는 과거의 연인, 토오루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모습보다 살짝 더 키가 크고, 살짝 더 머리가 짧아지고, 살짝 더 몸이 다부져진 모습이었지만 틀림없는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꿈에서도 잊어 본 적 없었던 과거의 연인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나타나자 스가와라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꿈과 현실 그 가운데에 서 있는 기분을 누군가가 묻는다면 지금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르고 있는 넥타이가 꽉, 자신의 목을 죄는 기분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홍보 마케팅 담당인 스-..스가와라 코우시 입니다."
조금 버벅거리긴 했으나 당황한 티를 최대한 눌러 숨기려 노력하며 스가는 인사를 건넸다. 이런 자신과 달리 오이카와는 변함없이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마치 완전히 스가와라 코우시를 잊은 사람 마냥. 모르는 사람처럼.
"만나서 반가워요.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내밀어 진 손을 잡으며 스가는 귓가로 울리는 시계바늘의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순간을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통성명을 하는 두 사람을 사이에 둔 스가의 상사가 웃으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귓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눈 속에 웃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얼굴을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금 전 손에 쥐었던 익숙한 감각을 떠올리느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정신을 팔고 있었을까, 들리지 않는 대화가 끝나고 나가도 괜찮다는 말에 현실로 돌아온 스가는 서둘러 인사만 남긴 채 회의실을 나와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스가를 보며 세면대의 다른 직원의 의아하다는 얼굴로 들여 보았지만 거기에 변명할 틈도 없이 빈칸으로 들어가 서둘러 문을 잠궜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틀어막고 덜덜 떨리는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벽에 기대앉았다. 엉덩이로 찬 타일의 한기가 뻗쳐 올라왔다. 서둘러 구둣발로 타일을 밀어내며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만나고 싶지 않아, 아니 사실은 너무도 만나고 싶었어. 모순적인 마음이 스가를 지배했다. 아직 제대로 마음 정리도 못 한 채로 2년을 버틴 스가에게 실물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인간은 너무도 독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만나, 5년을 사귀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긴 그 시간동안 스가는 오이카와가 좋아하는 음식, 색, 자주 가는 카페, 몸에 난 점의 숫자까지 알게 되었다. 아침잠이 많아 깨우지 않으면 홀로 잘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과, 경기를 앞두고는 스트레스가 심해 푹 잠들지 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외에도 잠에 취한 그를 욕조 기둥에 앉혀 감긴 눈에 입을 맞추고 이를 닦아 주는 순간들을 좋아했다. 침대에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의 곁에서 책을 읽는 순간들을 좋아했다. 함께 가진 것들이, 공유한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 헤어지는 순간은 슬픔에 억눌려 그렇게 죽는게 아닌가 스가는 생각했었다.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 내가 납득 할 수 있게 설명해.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지 날 이해시켜."
헤어지자는 말에 오이카와는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그렇게 명령했다. 한낮의 카페에 사람이 많아서 스가는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우스운 이별을 타인들에게 들키고 말았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의 대화와, 자신들의 커피에 집중하느라 이 이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른 사람 생겼어."
순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 오이카와를 납득 시킬 변명을 스가는 찾아내지 못했다. 쾅, 오이카와의 주먹이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쳤다. 옆 테이블에 아가씨 둘이 이쪽을 놀라 힐끔거렸으나 스가는 사과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무섭게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시선에 묶여 그의 분노를 담담히 받아 내야만 했다.
"그걸 믿으라고? 코우시, 지금 장난하는 거지?"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좋겠다. 농담이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고개를 저었다.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그렇게 묻는 오이카와의 눈을 피해 스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다른 사람 생겼어."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나 다른 사람이 생-"
"웃기지도 않은 소리 집어치우고 나 봐. 스가와라 코우시. 날 보라고."
"다른 사람 생겼어. 진짜야. 그 사람이 더 좋아. 그러니까 우리-"
"그만!"
날카롭게 외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스가는 눈을 떴다. 놀라거나 무서워서 뜬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외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서, 애절해서 놀라 떴다. 하하, 쓴웃음을 흘리며 오이카와는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금 전만 해도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던 그 손이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내 앞에서 다른 새끼 좋아졌다는 소리 그만 해."
"..."
"거짓말이라도 기분 뭐 같으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
"좋아, 믿어줄게. 난 항상 코우시를 믿으니까."
거기까지 말 한 오이카와는 식어버린 커피로 입을 축이더니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말 없이 일어서 테이블에 올려진 계산서를 챙겨 들었다. 그가 마지막 커피를 계산하고 카페를 나서는 순간까지 스가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릎 위에 놓여진 손을 꽉 쥐고 버텼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직원의 의무적인 인사가 들려 온 후에서야 스가는 천천히 눈물을 쏟아냈다. 참아 온 감정이 눈물이 되어 손 등과 옷을 적셨지만 차마 닦아낼 기운조차 없었다. 창가로 스며드는 햇빛이 스가의 작은 등을 비추었다. 스가의 기분과는 너무도 다른 따스함이 위로는커녕 스가를 더 괴롭게만 만드는 듯했다. 좋아해, 좋아해. 더는 들어주는 이 없는 고백을 스가는 속으로만 몇 번이고 외치고 또 외쳤다.
이별의 이유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점이 컸다. 대학 시절에야 아마추어 선수라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프로가 되자 스가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배구 실력도 실력이지만 잘생긴 얼굴로 인기가 많은 오이카와에게는 항상 팬들과 파파라치가 붙어있었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함께 외식하는 것도,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보는 눈이 많아지자 스가는 모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오이카와를 망칠까, 발목을 잡을까 겁이 났다. 어른이 되자 철이 들고 현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와서 철이 들다니. 우스운 소리였다. 웃으며 두 사람의 감정만으로 함께하기에는 장애물이 너무도 많았고 벽은 너무도 높았다. 오이카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으나 스가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 품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스가는 결심했다. 이런 오이카와 토오루를 내가 지켜주겠다고. 그렇게 택했던 이별 후,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모른척했다. 몇 번이고 걸려오는 전화를, 지우지도 못한 번호를 바라보며 스가는 한참을 울었었다. 그리고 받지 못하는 전화도 어느새인가 걸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버텼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재회 할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스가는 한참을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다 핸드폰에서 울리는 팀원의 전화에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식은땀으로 젖어버린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사무실로 돌아온 스가를 반기는 팀원은 도대체 어디 갔었냐며 살짝 짜증을 내 비추었다. 그리고는 "오이카와가 저희 브랜드 모델 된다면서요? 팀장님은 그걸 왜 혼자만 알고 계셨데요?" 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게, 왜 혼자만 알아서 막상 마케팅 담당자인 자신은 대비도 못 하고 이런 거대한 폭탄을 맞게 한 것일까. 실물은 어때요? 잘생겼어요? 키도 크죠?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까지 따라오는 질문들에 스가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보시는 그대로 잘생겼어요. 키도 크죠. 그래서 주제도 모르게 심장이 뛰고 아프네요. 입이 썼다. 결국, 퇴근 시간까지 회사의 소란은 잠재워지지 않았다.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왔다는 사실로도 여직원들은 설레 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만 쏟아내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오이카와군, 회사로 또 올까?"
"지면 화보 촬영 때 나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근데 지금 오이카와군 무슨 여배우랑 사귀지 않아?"
"어? 그 전에 사귀던 그 모델이랑은 헤어졌데? 쉴 틈이 없이 연애를 하네."
"뭐 그런 남자는 쉴 틈 없이 연애를 해야지. 해야 헤어지고 내 차례도 오지 않겠어?"
여직원들의 웃음 넘치는 목소리에 스가는 머리가 바스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똑딱똑딱 움직이는 벽에 걸린 시곗바늘만 바라보며 서둘러 오이카와 토오루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기적인 이야기지만 자신이 모르는 오이카와 토오루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저녁 6시, 바늘이 일렬로 줄을 서기가 무섭게 스가는 코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즐거운 주말 보내라는 직원들에게 대충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로비의 익숙한 경비원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스가는 서둘러 목도리로 칭칭 코와 입을 추위와 차단시켰다. 얼른 집에 가서 따뜻한 물을 받아 씻고, 푹 자고, 그리고 오늘을 잊을 것이다. 오이카와 토오루에 대한 담당자는 다른 직원에게 넘길 수 있는 문제였고 분명 좋다고 받아 줄 사람이 많을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될거야. 그러면 다시 내가 만든 토오루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 스가는 그렇게 착각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안돼."
"왜요?"
"오이카와 선수 측에서 직접 널 지목했어. 마케팅 담당자로."
팀장은 아침 신문을 뒤적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스가에게 있어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와 같았다. 다른 경우였다면 분명 칭찬에 가까웠을 소식이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좋은 기회잖아, 잡아야지" 팀장의 말에 스가는 찡-하게 머리가 울리는 것을 느끼며 멍하니 발끝만 내려 보았다. 좋은 기회, 어떤 식으로 좋은 기회일까.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기회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필요 없었다. 당장 오늘 오후에 스폰서 계약을 하기 위해 올 그를 떠올리니 스가는 당장에라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습게도- 자신이 마음 정리만 잘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이 상황을 이토록 괴롭게 만든 것은 결국 스가 본인이었다. 정리하지 못한 이 감정과 미련이 자신의 숨통을 조여가고 있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넘기려던 계획이 건너가고 터덜터덜 팀장실에서 나와 자신의 데스크에 앉은 스가는 서랍을 열어 편두통약을 찾아 물도 없이 씹어 삼켰다. 으득으득 약을 씹는 스가를 보며 건너편의 동료가 "안 써?"라고 놀라 물었지만 쓴맛을 느낄 틈도 없었다. 약을 씹어 삼켜도 두통은 가라 앉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두통뿐만 아니라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지면 질 수록 스가의 심장까지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러다 터지는게 아닐까, 심장이 터질 리가 없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가는 자신이 정말 멍청이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에 맞춰 예의 그 회의실로 향하는 길, 팀장의 등을 따라 걸으며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스가는 주문처럼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국은 조금도 도망치지 못한 채로 회의실 앞에 서야만 했다. 이미 회의실 근처에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기 위한 사내 직원들 몇몇이 자리를 잡고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그들의 틈을 헤치고 겨우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기자들과 함께 회사 대표 이사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대표 이사와 대화를 나누며 서류에 유려하게 서명을 할 때까지 스가는 팀장과 함께 가장 끝에 붙어 조용히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 문제 없이 조용히 이 순간이 끝나기를 빌며 스가는 파일을 쥐고 있는 손가락만 꼼실거렸다. 회의실에는 기자들의 셔터음과 오이카와의 웃음소리만이 울려 퍼졌고, 다른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다른 소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이 오이카와에게만 집중하고 있어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 스가군 이리오게. 오이카와 선수가 우리와 계약을 하는 동안 계속 담당해 줄 직원입니다. 인사는-"
"저번에 했어요. 그렇죠?"
그냥 넘어가길 바랐건만, 그런 운은 스가를 택하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대표이사에게 불려가 그 곁에 나란히 선 스가를 보며 오이카와는 다정하게 물어왔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남들에게는 다정한 목소리만큼이나 매너 좋게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스가는 알 수 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지금 웃는 게 아니었다.
"지면 캠페인 스케쥴을 비롯해 그 뒤로 있을 신제품 프로모션이라던가 협찬으로 제공되는 것들 모두 스가군이 알려 줄 겁니다. 그 외에 궁금한 점도 스가군에게 물어보고."
자세한 내용은 두 사람이 서로 나누라며 자릴 비켜주겠다는 대표 이사의 말에 스가는 서둘러 팀장을 바라보았다. 팀장님, 저 두고 가지 마세요. 단둘이 남기지 말라는 의미로 간절하게 눈빛을 보냈으나 알 리 없는 팀장님은 주먹을 꽉 쥐며 입 모양으로 화이팅까지 외쳐 보인 후 기자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섰다. 탁, 닫히는 문이 밖의 소음을 차단시켰다. 커다란 회의실에 졸지에 단 둘이 남게 된 셈이었다. 스가는 품에 안고 있던 파일을 더 끌어 안았다. 기묘한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에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오이카와였다.
"스가와라상."
"..."
"이쪽 좀 보시죠. 계약 사항은 이사님과 말 끝냈고, 이 이후 스케쥴 알려 주셔야죠."
나긋하게 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스가는 천천히 돌아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테이블을 두드리는 오이카와의 손가락을. 차마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서둘러 테이블로 파일을 내려놓으며 스가는 셔츠 포켓에 늘 넣고 다니는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여기 확인해 주시면 됩니다. 조용히 뱉은 스가의 허리 뒤로 오이카와의 몸이 닿았다. 기다란 팔이 스가를 테이블 사이로 가두려는 듯 조용히 내려앉았다.
"만년필, 참 예쁘네요."
손에 끼워진 만년필을 거두어가며 오이카와가 귓가에 중얼거렸다. 그제야 스가는 그 만년필이 자신의 취업 선물로 오이카와가 선물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늘 지니고 있어 습관적으로 꺼내 놓았던 물건이 자신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움츠러든 스가를 몸으로 가두고 누른 오이카와는 서류를 대충 훑더니 가장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서걱서걱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 잉크가 이름을 다 그려낸 후에야 묵직하게 닿았던 무게가 등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킨 스가의 셔츠 포켓으로 오이카와가 만년필을 친절하게도 꽂아 넣어주었다. 더이상 자신을 가둔 팔도, 내려앉은 무게도 없었음에도 스가는 무언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숨은 제대로 쉬고는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오이카와는 어느새인가 웃음을 싹 지우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스가를 불렀다.
"스가와라상."
"..."
"저 좀 봐요."
차가운 목소리에 스가는 애써 웃으며 서둘러 입을 열었다. 이 분위기를 끊어내고 도망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그- 스케쥴은 에..에이전시 팩스로 다시 정리해서 보내, 보내드리겠습니다. 변..변동 사항이 있으면-"
"스가와라상, 왜 그렇게 떨어요?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요?"
"있으면... 제가 다시 .. 연,연락을-"
"사람하고 대화 할 때는 얼굴 보고 하는 거라고 안 배웠어요? 나 보고 말해요."
"다시.. 연락..."
"나, 보고 말하라고 했어요."
엄격하게, 그리고 억눌린 목소리로 뱉은 오이카와의 명령 아닌 명령에 스가는 겨우 테이블을 짚은 손에 힘을 주고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후- 크게 숨을 뱉은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이카와를 마주했다. 그제야 살짝 웃은 사내는 "잘했어요."라고 어린아이에게 하듯 스가를 칭찬했다. 진심으로 웃는 얼굴에 스가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뻗어 온 손이 사락사락 스가의 얇은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운 손길에 다정함이, 소중함이 넘쳐 흐르는 것 같아 스가는 무너지지 않게 자신의 발에 온 힘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많이 생각했어요. 믿어준다고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건 믿을 수가 없잖아. 무슨 이유가 있겠지, 나에게 말 못 할 이유가 있겠지 하고 참았어요. 처음엔 그랬어요."
"...."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자 불안하고 초조해졌어요. 전화해도 받질 않고, 찾아가도 만나주지를 않으니 미치는 것 같았어요. 잠이 오질 않아서 술을 마시고 잠들면 꿈에 나타나고, 그래서 또 깨는 반복적인 지독함이 따라 붙더라고요. 도저히 버티질 못 하겠어서 약까지 받아 먹었다니까? 내가? 그리고 차츰 진정이 되니까 알았어요. 받지 않는 연락, 보여주지 않는 얼굴에 그제야 진짜 우리가 헤어진 거구나, 이 사람이 날 버렸구나 하고."
"..."
"연습도 빼먹고 몸 관리도 엉망이니 구단에서 난리가 났어요. 감독님에게 불려가서 엄청 혼도 나고. 근데 웃긴게 뭔 줄 알아요? 그럼에도 아무래도 좋은 거에요. 내 곁에 스가와라 코우시가 없는데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지? 차라리 내가 망가지면 나타나 줄까? 내 다리가 병신이 되면, 어깨가 나가면 불쌍해서라도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죠."
스가의 머리카락을 휘감던 손가락이 천천히 뒤로 뻗어 가더니 뒤를 전체적으로 감싸듯 쥐어왔다. 스가는 오이카와의 고통을 받아내며 입술을 꽉 물었다. 이 물고 있는 입술을 놓는 순간, 그대로 그에게 솔직하게 우는 소리를 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랬다가는 날 다시는, 정말로 다시는 안 봐줄 거 같아서 마음을 고쳐먹었죠. 어때요? 칭찬해 줄 마음이 들어요?"
"... 나는-"
"당신 이야기는 필요 없어요. 당신의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거든, 나는."
"..."
"나에게서 완벽한 이별을 요구하려면 그에 맞게 방어를 해야죠. 내가 다가온다고, 말을 건다고 그렇게 도망치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눈을 피하면 착각하잖아요. 날 아직 좋아한다고. 그러니 당신이 무슨 대답을 하고 변명을 해도 나는 그냥 착각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방어를 하고 벽을 세워봐. 코우시."
머리를 쥔 손이 확 힘을 줘 당기자 두 사람의 거리가 급하게 좁혀졌다. 익숙한 체향에 스가는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멈추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날 버리고 무엇을 택한 건지는 몰라도, 다시 날 택하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마치 키스라도 할 것 처럼 입 근처에서 움직이던 오이카와의 숨은, 말은 금세 조용히 떨어졌다. 대신 고개를 세워 살짝 스가의 머리카락에 입술이 내려졌다. 스가는 오랜만에 자신에게 닿는 익숙한 체온을 느끼며 젖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봐요. 오이카와가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스가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오이카와 토오루를 버리고 무엇을 택했냐고? 오이카와 토오루를 택했다. 오이카와 토오루의 미래를 택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오이카와 토오루말고는 없었다. 스가는 젖은 손바닥으로 눈을 꽉 누르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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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날, 그 후
오이카와 토오루x스가와라 코우시
오이카와와 함께 일하는 것은 최악이었다. 부딪히는 손끝에도 심장이 떨어졌고, 눈이 마주치는 것으로도 숨이 막혔다. 카메라 앞에 서서 몇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캠페인 촬영에 임하는 오이카와를 먼 곳에서 지켜보며 스가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고 또 피곤했다. 같이 일하는 것이 오늘로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디자인팀과 미팅으로 만났다. 호텔 로비에서 커피잔들을 가운데 두고 조용히 흘러가던 미팅은 테이블 밑에서 자신의 손을 꽉 잡는 오이카와 덕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스가가 웃으며 풀어내려고 해도 단단한 사내는 손가락은 더욱더 강하게 얽혀 올 뿐이었다. 점점 일그러지는 스가를 보면서 "어디 안 좋아요?"라고 모른 척 묻는 그 얼굴이 너무도 미웠다. 결국 스가가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도망치듯 숨었을 때, 오이카와는 평온한 얼굴로 입구 앞에서 버티고 있었다.
"어디 안 좋아요?" 그 못된 질문에 "몰라서 물어?"라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흔들리는 꼴이 되는 것 같아서 참았다.
두번째로 만났을 때에는 캠페인과 광고 촬영을 앞두고 피팅이 있었다. 꼭 그 자리에 스가가 갈 필요는 없었음에도 모르는 사람들이랑 있는게 불편하다며 "그래도 얼굴을 아는 스가와라상이 와 주면 좋겠어요."라고 요구한 덕에 끌려가듯이 그 자리에 가야 했다. 옷을 입을 때마다 자신을 보면서 "이거 어때요?" "잘 어울려요?"라고 확인하는 그의 행동 때문에 어디론가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두 분 사이가 좋네요."라며 디자인팀 직원이 웃으며 말했지만 스가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이 세 번째. 지면과 매장으로 걸릴 캠페인 화보를 찍기 위해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이런 촬영이 처음은 아닐 오이카와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얼어있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녹여갔다. 사진작가의 몇 번의 오케이 사인이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스가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을 하고 지냈더니 몸이 다 아파오는것 같았다. 결국 오래 서 있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놓여진 의자를 빼 앉아 버텨야 했다. 그 전과 달리 오이카와는 오늘은 스가를 힘들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쪽으로 시선을 두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편이 고마워서 스가는 피곤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밀어보았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수고하셨습니다." 밝게 말하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울렸다. 대기실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스가는 온몸에 안고 있던 긴장을 놓았다.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저기, 스가와라상! 이거요."
다 끝났으니 자신은 자리를 떠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는 스가에게 여자 스텝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시계였다. 그것도 스가의 눈에 익숙한.
"오이카와상이 촬영 때 풀어놨는데 두고 가셨어요. 아무래도 대기실에 여자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니, 상관 없는데... 스가는 그렇게 말을 흐렸지만 멋대로 자신의 손에 들려지는 시계를 어쩌지는 못했다. 기스가 난 오래된 가죽 시계는 스가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오이카와에게 주었던 첫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낡아가는 그 시계를 보며 취업하면 근사하게 새로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이뤄지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얼른 줘버리고 모른척하자고 결심해 대기실로 향했지만 문 앞에 서니 막상 또 전해주기가 싫었다. 억대 연봉을 받는 지금, 이 초라한 시계가 뭐라고 차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손목에 채워지는 것이 시계가 아닌 자신의 미련인 것 같아서 싫었다. 가만히 손가락으로 낡은 시계를 문질러 본 스가는 결국 결심한 듯 몸을 돌려 복도 끝에 놓인 간이 휴지통으로 향했다. 오이카와가 잘라내지 못한다면, 버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없애버리면 그만인 것을. 남의 물건을 함부로 대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가는 저도 모르게 휴지통으로 시계를 버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러려고 했다. 뒤에서 나타난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분명 버렸을 것이다.
"그러지 마."
등 뒤로 닿은 목소리에 스가는 꽉 빈손에 주먹을 쥐었다.
"멋대로 내게서 널 뺏어가지 마."
그렇게 말한 오이카와는 손목을 쥔 손을 부드럽게 놔주곤 벽에 기대섰다.
"채워 줘."
스가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얼른. 재촉하며 자신의 손을 흔들어 보였다.
"더 좋은거 사."
"싫어."
"가죽이 다 낡아 떨어졌어."
골동품 수준이었다. 얼마나 차고 다녔는지 낡아서 곧 끈도 떨어질 기세였다. 타이르듯 스가가 말했지만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사준다고 했잖아."
"..."
"나중에 더 근사한거 사준다며. 잊어버렸어?"
아니, 스가는 대답할 수 없어서 입만 꾹 다물었다. 강하게 버티는 오이카와에게 결국 두 손을 든 스가는 천천히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었다. 저릿한 손끝으로 아슬아슬한 기분에 눌려가며 스가는 겨우겨우 채워냈다. 그리고 오이카와에게서 떨어지려는 찰나, 하늘을 향하고 있던 오이카와의 손바닥이 돌아 떠나려는 스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부드럽게 올라와 스가의 팔꿈치를 감싸 잡으며 자신에게 당겼다. 훅,하고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가까워진 시선, 거리- 스가는 자신의 안에서 울리는 심장소리가 오이카와에게 닿는게 아닐까 무서워졌다. 그렇게 자신을 당겨놓고서는 말없이 가만히 스가를 바라만 보던 오이카와는 "오늘, 수고했어요."라고 중얼거리며 순순히 팔을 놓아주었다. 힘 없이 내려앉는 자신의 팔을 느끼며 스가는 술이 고파졌다. 자신만큼이나 아파하는 저 눈동자를 모른 척 잊으려면 술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스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과음을 했더니 속이 말이 아니었다. 울렁거리는 배를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잠재우기 위해 협탁 근처에 놓인 편두통약을 집었다.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향하면서 스가는 눈앞에 보이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저 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찾던 오이카와 토오루가 생각났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바꾼 적도 없었다. 오이카와 역시 알고 있는 번호였음에도 그는 단한번도 멋대로 번호를 누르고 억지로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저 자신이 열어주기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스가는 그 안타까움을 애써 무시했었다. 알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스가는 다시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정수기에서 찬물을 따라 그대로 약과 함께 시원하게 삼켰다. 그나마 물이 들어가니 속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컨디션은 엉망이다 못해 최악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그렇게 재회한 후 스가의 하루들은 엉망이었다. 오이카와가 없는 곳에서도 정신이 어디론가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신입도 하지 않은 실수를 해서 후배들 앞에서 팀장에게 까이지를 않나, 광고 촬영 때문에 잡아 뒀던 스케쥴을 제작팀에게 잘못 넘겨줘서 꼬이게 만들지를 않나, 서류를 옮기던 여직원을 못보고 부딪혀 커피까지 끼얹은 적도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서류가 이면지들이라 다행이었지 중요한 보고서나 결재 서류였으면 끔찍했을 것이었다. 스가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덜렁 쇼파만 놓여 있는 거실로 와 앉았다. 어제 입었던 옷 안에서 삐죽 튀어나온 핸드폰을 집었다. 요즘 시대에 모두가 스마트폰을 쓴다던데 스가는 여전히 2G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기종이 나왔을 때 오이카와와 맞춰 산 기종이었다. 달칵 폴더를 열고 버튼을 눌러 메세지 함으로 들어갔다.
[광고 촬영 일자가 잡혔습니다. 자세한 일정표는 에이전시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어제 그렇게 집으로 돌아서며 보낸 상투적인 문자에 오이카와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2년만에 보낸 자신의 메세지는 그렇게 무시당했다. 답변을 기대하거나 기다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의 오이카와를 떠올리면 뭐라도 보낼 거라 생각했는데 약간 허무했다. 고개를 저으며 허튼 생각을 지운 스가는 똑똑 버튼을 눌러 임시 메세지함으로 넘어갔다. 그 안에는 스가가 그동안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보내려다 실패했던 수십 개의 메세지가 주인을 찾지 못한 채로 남겨져 있었다. 대부분은 사과의 말과 보고 싶다는 말들이었다. 울다가 지쳐서, 너무나 보고 싶어서 겨우겨우 적어 내려갔던 자신의 마음을 차마 전송하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것들이었다.
이별을 말한 것은 자기 자신인데, 이 얼마나 치졸하고 약았는지. 스가는 멍하니 길 잃은 자신의 메세지들을 읽다가 허탈하게 웃으며 폴더를 닫았다.
오이카와가 다시 침범해 엉망이었던 날들은 어느새인가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협찬과 지원으로 나가는 의류나 상품들은 모두 인턴들을 시켜 택배로 보내게 했다. 본래에도 직접 선수들이나 모델을 만나 건네는 경우는 그다지 없었으니 피하거나 도망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스가는 멍하니 휴게실에 와 빈 자판기 커피 컵을 입에 물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오늘 오전에 일정 문제로 보냈던 메세지 역시 답변이 없었다.
"짜증 나."
이러는 자신이 짜증 났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이카와가 던진 미끼에 그대로 낚여서 펄떡이는 자신이 너무도 우습고 짜증이 났다. 머리의 안쪽부터 싹 긁어서 모든 걸 잊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스가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종이컵을 내려 손에서 구겨 휴지통을 던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핸드폰이 손 에서 진동했다.
[확인했습니다.]
간단한 대답, 그럼에도 2년 만에 받아보는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발신인이 찍힌 메세지는 스가를 뒤흔들기에는 충분했다. 멍하니 화면을 쓸어도 보고 눈에 가까이 대보기도 했다. 고작 이런 대답에 이렇게 기뻐하는 주제에 헤어져 있던 시간을 어떻게 버텨왔던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기분은 나아졌다. 어쨌거나, 그랬다.
하지만 그 기분도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여직원들이 흔드는 주간지 속의 사진이 스가의 기분을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오이카와 선수 또 여자친구 바뀌었나 봐요. 이번에는 가수래요. 뭐 아시는거 없어요?"
아는게 있을 리가 없었다. 스가는 여직원들 틈에 서서 가만히 사진을 들여보았다. 마스크를 쓰고 차 앞에 서 있는 오이카와와, 그 차에 오르는 요새 인기 있는 여자 가수의 파파라치였다.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파파라치가 알아보았듯 스가 역시도 오이카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런 사진에 하나하나 질투하고 흔들릴 자격도 없는 주제에 심장이 쿡쿡 아파왔다.
"그러고 보니, 인사팀에 저랑 입사 동기인 친구가 오이카와 선수 팬인데요. 예전에는 사생활에 대해서 완전 입 다물고 지냈데요. 애인도 없다고 알려져서 인기 엄청 많았다던데."
"아아, 저도 들은거 같아요. 그 얼굴로 애인 없는게 말이 되냐고 제 남자친구가 그랬었는데!"
"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이렇게 스캔들 난 여자가 10명은 족히 넘는다더라구요. 너무 많아서 세다가 포기했다던데."
여직원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이러다 우리들도 기회가 오는게 아니냐며 익숙한 호들갑을 떨었다. 그 안에서 스가만이 웃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스가는 백화점을 지나다 자신도 모르게 시계 코너로 향했다. 선물하시게요? 하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델들을 구경했다. 대학 시절, 그 낡은 가죽 시계를 살 때에는 손이 떨렸는데 지금은 기분이 어쩐지 멍했다. 이게 잘 어울리겠다, 이걸 차면 괜찮겠다. 직원이 추천하는 모델을 보면서 스가는 오이카와의 손목을 떠올렸다. 하지만 결국 사지는 못하고 백화점을 나왔다. 산다고 하더라도 전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거기다... 새 여자 친구도 생긴 모양이니, 자신의 몫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쩐지 쓸쓸한 마음으로 집 근처에 도착한 스가는 텅 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근처 술집에 들렀다. 간단하게 안주와 술을 주문하고 목으로 넘기던 스가는 틀어진 TV에서 나오는 오이카와의 스캔들 소식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술을 쏟아 넣었다. 잔을 입으로 털어 넣을 때마다 속이 쓰리고 마음이 쓰렸다. 이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아프고 또 아팠다. 그러면서 은근히 화도 났다. 이럴 거면서 왜 다시 나타났어?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어? 아 모르겠다. 모든게 엉망이었다. 못난 자신도 싫었고 잘난 오이카와도 싫었다.
그렇게 허해지는 속을 술로만 채우다 보니 어쩐지 화가 나서, 슬퍼서, 짜증 나서, 너무 아파서 스가는 테이블에 쿵쿵 머리를 박았다. 주변에서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무시하며 그렇게 추태를 부렸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어질거리는 시야를 눈을 부릅떠 고정시키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울리던 연결음이 끊어졌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왜 말 안 해."
초조하게 스가는 그렇게 물었다.
"왜, 말 안 해? 나랑은 말 안 할거야?"
-"... 술 마셨어?"
몇 마디 했다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걸까. 진짜 무섭게. 스가는 쓰게 웃으며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조금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어디야?"
"네가 모르는 곳."
-"장난치지 말고."
"토오루가, 없는 곳."
-"코우시."
"왜 나타나서 날 괴롭혀?"
저도 모르게 우는 소리를 내며 스가는 물었다.
"네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너 같은거 잊어버리고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데 왜 나타나서 또 날 이렇게 아프게 해? 왜?"
스가는 터져나오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급히 눌러 막으며 짜증을 냈다.
"내가 ... 어떻게 버텼는데. 내가 어떻게 견뎠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나를 무너트리는 거야."
헤어지고 나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아팠는데, 얼마나 괴로웠는데. 그걸 너를 위해서 버티고 참았는데 왜 날 이렇게 못된 사람으로 만들어. 왜 날 이렇게 추하게 만들어. 왜 날 이렇게- 바보로 만들어. 왜. 터져 나오는 울음 소리는 결국 감춰지지 않은 채 입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야, 어딘지 말해. 울지 말고, 어딘지만 말해."
"토오루-"
-"그래, 나 여기 있어."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정말로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너 없이 내가 이 2년을 어떻게 참았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네가 너무 좋아서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하지만 스가는 끝내 오이카와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몇 번이고 다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우느라 스가는 진동소리를 듣지 못했다.
**
술을 먹고 잔뜩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이 스가를 또 괴롭게 했다. 그나마 당분간은 마주칠 일이 없어서 괜찮았지만, 잡혀있는 광고 촬영날짜가 다가오니마음이 절로 심란해졌다. 시간을 붙잡고 싶은 스가와는 달리 착실하게 흘러간 시간은 결국 광고 촬영 당일로 흘렀다.
끽끽 울리는 코트의 배구화 울림소리를 들으며 스가는 천천히 들고 있던 커피로 목을 축였다. 조명이 내려앉은 코트 위에는 수많은 촬영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인 오이카와 토오루가 서 있었다. 광고 촬영으로 특별히 제작된 브랜드 로고가 들어간 배구 유니폼이 꽤 잘 어울렸다. 자신을 보면 뭐라 할까? 술 먹고 왜 전화했냐고, 왜 울었냐고 추궁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이카와는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며 "잘 지냈어요?"라고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그 이후로는 촬영이 빡빡하게 흘러가 대화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스가는 코트 밖, 비어있는 관중석에 앉아 그저 그 현장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을까, 홀로 앉아있던 스가의 옆으로 끼익 울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에요, 스가군. 2년 만인가?"
"아, 안녕하세요."
스가는 서둘러 커피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투피스 정장 차림의 여성은 오이카와의 에이전시 담당자였다. 대학리그에서 아직 아마추어였던 오이카와를 현재의 팀, 그리고 현재의 위치에 서 있을 수 있게 모든 것을 지원하고 담당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오이카와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스가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시선을 코트 안으로 돌렸다.
"잘 지냈어요?"
"네."
"얼굴 보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녀가 조용히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스가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을 회피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었지만 딱히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공통점이 아니면 공유했던 것이 아무것도 없던 사이라 인사 외에는 전혀 나눌 대화가 없었다. 스가는 왜 그녀가 이 많은 좌석에서 자신의 옆자리를 찾아 것인지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절대적으로 현재로써는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주제의 대화는 모두 피하고 싶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으니까.
"처음엔."
하지만 그녀는 스가를 배려 할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무릎에 팔꿈치를 눌러 고정하며 턱을 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경 너머로의 눈은 스가와 마찬가지로 오이카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엔,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했어요. 스가군이 너무도 깔끔하게 오이카와를 버려줘서 내가 다 고마울 정도였으니까. 저 맹랑한 놈이 처음 우리랑 계약할 때 <제 사생활에 간섭하지 마세요>라는 조건을 들이밀길래 얼마나 문란하게 놀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의외로 완전 순정파라서 놀랐죠. 상대가 남자이긴 해도 뭐 걸리지만 않으면 선수 생명에 문제없고 우리도 문제없으니까. 거기다 뭐 얼마나 가겠어?라는 가벼운 생각도 있었거든, 솔직히 나는 그랬어요. 스포츠라는 세계는 항상 평등을 외치고 차별을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특히 남자들이 우글우글한 종목은 더 그렇지. 뭐 스포츠 브랜드에서 스폰 지원하고 홍보 마케팅 하는 스가군이면 잘 알죠?"
그녀의 말에 스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성적 취향이 문제가 아니라 선수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파급력은 커서, 조금의 실수 조금의 사고가 선수 생활을 좌지우지했고 선수의 컨디션이 나쁘거나 슬럼프가 찾아오면 정말로 가치는 뚝뚝 떨어져 나갔다. 스가의 회사에서도 몇 번이나 그런 선수들의 지원을 끊었고 모델 계약을 중도 파기했던 일이 있었다. 스가는 그 잔혹한 일면을 보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쟨 여기서 멈추기엔 아깝잖아요. 저렇게 잘하는데. 해외에서도 얼마나 우리 에이전시로 접근을 해오는데요. 아주 앞이 찬란하다 못해 번쩍번쩍한 가능성을 가진 선수인데 사랑에 눈이 멀어서 멍청하게 구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거에요. 그리고 말 그대로 저 녀석이 멍청하게 굴기 시작했죠. 스가군은 전혀 모르겠지만 둘이 사귀던 당시에 터키에서 이적 요청을 해왔어요. 국내 리그에서도 눈도장은 다 찍어 놨으니 해외로 가기 좋은 찬스였죠. 근데 저 멍청이가 그걸 차버리잖아."
그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와 달리 스가는 무언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적 요청이라든지 그런 소리, 전혀 들은 적 없었다.
"하하, 스가군 놀랐네. 놀랐겠죠. 스가군에게 알려버리면 가만 안 두겠다고 저게 얼마나 협박을 해왔는데. 그래서 내가 데리고 가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막 취업 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기는 싫다잖아. 그럼 두고 혼자라도 가라 화냈더니 그건 또 죽어도 싫다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물 건너갔지. 그래서 스가군이 쟤 버려줬을 때 내가 진짜 고마웠다니까? 사무실 식수들하고 회식도 했어요. 우리. 미안하지만 진짜 기뻤거든요. 그런데 내가 진짜 크게 착각한 거지. 누구나 살면서 이별은 하잖아요. 조금 슬펐다가 다시 다들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오이카와 토오루는. 연습도 안 나가고 폼은 폼대로 떨어지지 팬들까지 돌아서고 엉망도 아니었어요. 진짜 선수 생활 저렇게 끝내 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싶었지. 그런데 그렇게 몇 달을 등신같이 굴던 놈이 갑자기 돌아오더라고. 그리고는 나에게 뭘 내밀었는데 스포츠 잡지에 실린 엄청 작은 기사였어요. 무슨 축구 선수가 유명 브랜드 계약을 했다면서 얼마를 지원받는다는 둥, 광고를 찍는다는 둥 뭐 그런 기사. 그래서 이게 뭐 어쨌다고? 라면서 봤는데- 와 그 작은 사진 속에 스가군이 찍혀 있 는거야. 그걸 또 어떻게 발견했는지, 참. 신입사원 티를 싹 지운 스가군이 거기서 관계자라며 찍혀 있는데 오이카와가 묻더라고. 이 회사랑 브랜드 계약 하려면 자신이 여기서 얼마나 더 크면 되냐고."
"...."
"전화를 해도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으니까 걔는 다른 방법을 찾은 거에요. 대형 브랜드이니 니가 지금보다 더 최고가 되면 불러주지 않겠냐 했더니 그 다음날 부터 얼마나 성실하게 굴던지. 지옥 같던 몇 달이 그렇게 끝났어요. 진짜 황당했다니까요? 그래서 다음에 스가군을 만나면, 무릎이라도 꿇고 저 녀석 다시 받아달라고 빌어야지 결심했는데."
"..."
"어때요? 받아 줄래요? 무릎이라도 꿇어줘요?"
그녀의 농담에 스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이 이야기를 듣고 기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화가 났다. 자신과 함께 있었으면서도 어느 것도 의논하지 않고 상의하지 않고 멋대로 결정했던 그에게 화가 났다. 봐, 결국 나 때문에 큰 기회를 버렸잖아. 내가 발목 잡는거 맞잖아. 그걸 왜 이런 식으로 알게만들어. 왜. 스가는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의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서둘러 가렸다.
"아직, 오이카와 좋아해요?"
그녀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스가는 입술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촬영장이 소란스러워 진 것은. 스가가 서둘러 손으로 가리고 있던 얼굴을 들어 시선을 돌리자 촬영팀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오이카와와 스캔들이 났던 그 여자 가수였다. 웃으며 오이카와에게 다가가는 그녀를 보며 스가는 저도 모르게 숨을 급히 들이켰다.
"솔직한 스가군에게 고마우니까 내가 상을 줄게요."
옆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쟤, 가짜에요."
"...네?"
"오이카와가 그동안 만난 여자들 다 가짜라구요. 연애는 개뿔, 서로 윈윈 전략으로 짜고 치는 게임이에요. 비지니스~비지니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오이카와가 게이라는 걸 우리는 스캔들로 감추는 거고 여자들은 오이카와 이름에 올라타서 인기 좀 보는 거고. 뭐 그러다 진짜 오이카와에게 진심이 된 불쌍한 애들이 몇 명 있긴 했었는데-"
그녀가 씩 웃으며 스가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능성이 요만큼이라도 있어야 뭘 해보지."
그러면서 그녀는 손가락으로 오이카와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에서 여가수가 웃으며 오이카와에게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무어라 밀을 걸고 있었지만 오이카와는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빼내고 있었다. 그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사실은 별로 이상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으나 뒤이어 오이카와가 촬영 감독에게 향하면서 하는 행동, 여자가 만졌던 자신의 팔에 뭐라도 묻은 사람 마냥 털어내며 긁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옆에 앉은 그녀가 "어휴, 저 결벽증 같은 행동 좀 봐요. 재수 없어." 라며 툴툴거렸지만 스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화해하게 되면, 해외이적 까버린 것 혼 좀 내줘요. 아, 그리고 쟤 스가군이 다시 받아주면 은퇴할 생각도 하는 것 같으니까 그것도 진짜 말려주면 고맙겠고."
"네?!"
놀란 스가를 보며 그녀가 기가 차다는 듯 하소연을 쏟아냈다.
"스가군 말이라면 들을 테니까, 진짜 반 죽여 줘요. 내 말은 안 들어서 미치겠으니까. 아니 지가 노장선수도 아니고 무슨 은퇴야, 은퇴는. 참나."
그 말에 스가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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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라니. 아직 서른도 안된 선수가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니. 주차장으로 향하며 스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자신 때문에라는 사실이 더 화가 났다. 주차된 자신의 차로 향하는 등 뒤로 "코우시!"이라고 부르는 오이카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스가는 모조리 무시하며 차 문에 키를 꼽았다.
"왜 벌써 가? 촬영 남았는데?"
키를 돌리려는 스가의 손을 낚아챈 오이카와가 억지로 돌려세우며 물어왔다. 촬영하다 자신이 떠나는 걸 보고 바로 따라왔는지 유니폼 복장 그대로였다.
"지금 촬영 중 아니에요?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잠깐 휴식 시간이고, 허락받고 나왔어. 그보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어디 가냐고."
"퇴근합니다."
"기다려. 나랑 같이 가."
"싫어."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오이카와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며 스가가 매몰차게 말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화를 억누르지 못해 그대로 들고 있던 가방으로 오이카와의 가슴을 내려쳤다. 퍽퍽 요란한 타격음이 주차장을 울렸다. 당황한 오이카와가 "무슨 일이야?" 라고 놀라 물었지만 스가는 터져 나오는 울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오이카와에게 화를 풀어냈다. 가방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주먹으로, 그리고 옷을 쥐고 흔들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로 오이카와는 덤덤히 그 폭력을 받아냈다.
"해외로 가는 이적 차버렸다는 거 무슨 소리야?"
"뭐? 누가 그래?"
"담당자님 만났어. 방금전에 들은 거야. 나랑 사귈 때, 해외이적 차버린거 무슨 소리인지 설명해."
물기 어린 눈으로 스가가 오이카와를 노려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지난 일이야."
"지난 일이라고? 지난 일이니까 나는 알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거야?"
"코우시-"
"은퇴 이야기는 또 뭐야? 너 그런 생각 하고 있어?"
아차싶어 하는 얼굴에 스가는 꽉 주먹을 쥐었다. 이대로 저 얼굴을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차마 실천에는 옮기지 못한 채 몸을 돌려 다시 키를 쥐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뒤에서 끌어안아 오는 오이카와덕에 무산되고 말았다.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스가의 몸부림에도 오이카와는 꿈쩍하지 않은 채 말없이 스가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버텼다. 스가의 화가, 울음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내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랑 헤어졌는데!!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티고 참아왔는데!! 내가 지킨 것들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버려?"
"코우시-"
"너 발목 잡기 싫어서, 나 때문에 네 배구 인생이 잘못 될 까봐 정말 힘들게 널 버렸는데, 내가 그렇게 지킨 걸 왜 니가 그렇게 버리려는거야?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내가 얼마나 아팠는데!! 내가...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렇게 버티면서 지킨 건데...!!"
터진 울음은 좀처럼 멈춰지지가 않았다. 차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지는 몸을 어쩌지 못한 채 스가는 엉엉 울었다. 오이카와가 그런 선택을 하길 바래서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선택을 하길 바래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는 스가를 가만히 내려보던 오이카와가 무릎을 굽혀 앉아 천천히 손을 뻗었다. 따뜻한 손이 스가의 눈물을 거두고 또 거두었다.
"니가 희생하는거 싫어."
"..."
"내 선수 인생은 아주 잠깐이야. 이게 전부는 아니라고. 근데 넌 아니야. 넌 네 인생에서 잠깐이 아니잖아, 코우시. 그러니까 이건 자연스러운 거야. 내가 널 택하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거라고."
"난 싫어..."
"간단하게 생각해. 니가 그렇게 날 위해서 살아 주는 것처럼, 나도 그런 거야. 그저 그런 거라고."
오이카와가 웃으며 스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드러난 얼굴이 너무도 엉망일 것 같아 스가가 서둘러 손바닥으로 눈물들을 훔쳐냈다. 이 상황에서도 못난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만하자. 빙빙 도는거, 아픈거 우리 그만하자."
스가는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며 와락 오이카와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가득 스가를 품으로 꽉 마주안았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오이카와는 스가의 등을, 머리를 조용히 토닥이며 진정 되기를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스가는 한참을 울었다. 자신의 눈물로 주차장이 다 차버리는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
"오이카와선수, 우선 우승 축하드려요. 완벽한 컨디션에서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셨는데요- 우승한 기분이 어떠세요?"
"끝내주죠."
"최근에 공식적으로 연인이 있다고 밝히셨잖아요? 지금까지 많은 스캔들에는 입을 다무셨다가 처음으로 열애를 인정하셨는데 이유를 물어도 괜찮을까요?"
"이유요? 아 그런거 없는데. 그냥 놓치기 싫어서요. 공개적으로 말하면 도망 못 갈 테니까?"
오이카와가 농담조로 웃으며 대충 대답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조금 자랑 좀 해주세요. 처음으로 인정하는 공개 열애라 팬들의 관심이 뜨거운데요."
"기자님, 여자친구 있으세요?"
"네? 있죠."
"여자친구분 사랑하시죠?"
"그럼요!"
마이크를 쥐고 있는 기자가 당황한 얼굴로 고갤 열정적으로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친구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음, 별로일 것 같은데요."
"저도 그래요. 저도 다른 사람들이 제 연인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게 싫어요."
오이카와는 씩 웃으며 그렇게 인터뷰를 끝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가는 기가 차는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런 사람치고는 너무 조심성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스스럼없이 손을 잡거나 입을 맞춰왔다. 그럴 때 마다 스가는 자신이 가발이라도 뒤집어쓰고 다녀야 하는게 아닌가 심각한 고민을 할 정도였다. 그런 스가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스가에게 다가온 오이카와가 웃으며 "우승했어." 라고 말을 뱉었다.
"알아, 봤으니까."
"뭐 상 없어? 나 우승했는데?"
그렇게 묻는 오이카와의 팔을 어두운 복도로 끌어당긴 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살짝 입을 맞췄다. 시끄러운 관중의 소리도, 기자들이 셔터 소리도,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아득하게만 들려오는 순간이었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스가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네가 저 경기장에서 제일 멋있었어."
그래서 내 사람이라고 막 자랑하고 싶었어. 스가는 그렇게 속삭이며 품에서 작은 쇼핑백을 꺼냈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손바닥 위에 쇼핑백에서 꺼낸 작은 상자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자 척 봐도 값이 나가 보이는 시계가 고급스럽게 놓여 있었다. 스가는 조금 쑥스러운 기분으로 말했다.
"그 시계 진짜 버리자. 우리."
"이거 나에게 채우면 너 도망 못 가."
"네가 못가 는거겠지. 이게 얼마짜린데."
툴툴거리는 스가의 말에 오이카와가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안가. 절대 안 가."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팔을 뻗어 스가를 끌어안았다. 땀에 젖은 몸을 가만히 안아주며 스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언젠가 또 싸우고, 또 이별하고, 또 헤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일단은 이 품에서 다시는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스가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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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 올렸던거 정리중. 공개적으로 다른 곳에 올렸었던 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