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 이 조건에 이만한 집 다른 곳은 없어. 정말이야! 이 동네에서 보증금 한 달 치에 감사비도 없이 이 집세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솔직히 이 가격 받고 세 주기에는 방이 아까울 정도라니까?"
호들갑을 떠는 중개인 아주머니의 말에 스가와라는 그저 꾹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깨끗한 2층 아파트, 로프트는 없었지만 널찍하고 깔끔한 방, 주방기기를 비롯한 세탁기까지 포함된 좋은 옵션, 1층에 놓인 분리수거함은 따로 관리하는 이도 있었고 자전거 주차는 최신식 오토형이였다. 확실히 이 조건에 고작 방세 한 달 치의 보증금과 집주인에게 줘야 할 감사비가 없다는 것은 정말이지 완벽하다 못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끝내주는? 최상의? 세상에 둘도 없는? 뭐 그런 정도의 조건이었다. 다른 때였으면 당장에라도 중개인 아주머니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네, 제가 계약하겠습니다!" 라고 바로 외쳤을 수준의 그런 조건. 하지만 스가와라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거실에 난 커다란 구멍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일부러 크게 뚫어놓은 커다란 구멍. 성인 남성 두 명 정도는 쉽게 넘어다닐 수 있는 커다란 구멍. 그 너머에는 바로 건너편 방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방 비우기 전에 살던 사람이 무슨 예술대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과제 하다가 벽을 이렇게 만들었다지 뭐야, 이거 매우려면 집을 새로 지어야 할 판이라서 어쩔 수 없데. 이 조건이면 저 정도 구멍은 그냥 눈 감고 지낼만 하잖아?"
"..."
"봐, 총각. 커튼 같은 거 달아놓으면 그럴듯하게 인테리어도 되고 신경도 안 쓰이고! 옆집 사는 총각도 계약 당시에 누가 이사와도 괜찮다고 그래서 걱정할 거 없다니까? 여자도 아니고 같은 총각인데 그렇게 불편하지 않을 거야. 커튼이 싫으면 커다란 액자라던가? 그림이라던가? 응? 포인트가 되고 괜찮을 거야."
거실 한가운데에 저 커다란 구멍을 메울만한 액자나 그림이라면 가격도 만만치 않겠지. 언제 다시 이 집에서 가벼운 짐만 빼 나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그런 비싸고 큰 물건을 사들이는 것은 현재로써는 사치에 가까웠다. 역시, 커튼인가. 커튼까진 아니더라도 어디 가서 적당한 패브릭을 떼와 붙여도 나쁘진 않을 거 같았다. 아직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음에도 스가와라는 멋대로 제집의 인테리어를 구상했다. 뭐, 이 정도를 떠올릴 정도라면
"제가 계약할게요."
별수 없지. 계약하는 수 밖에. 드디어 집 주인을 찾았다는 중개인의 환한 미소를 보며 스가와라 역시도 환하게 웃었다.
the black hole
최근 들어서 이사를 5번이나 했다. 최근이라는 말을 제외한다면 더 많았다. 쫓겨난 적도 있었고 자발로 도망치듯 나온 적도 많았다. 문제는 3년 전 헤어진 남자. 대학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상대로 다정하고 성실한 모습에 반해 만났다. 문제는 그게 첫 1년의 기간 한정 모습이었다는 것이었다. 함께하면 할수록 남자는 조금씩 자신의 껍질을 깨 보이기 시작했고 그 얇디얇은 껍질 안에는 추악한 얼굴 밖에는 없었다. 약간의 집착과 폭력성을 발견하기 무섭게 이별을 통보했으나, 곧게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남자는 스토커처럼 굴기 시작했고 그 덕에 이 떠돌이 같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숨어도 금방 찾아내는 덕에 이사를 할 때마다 짐은 간소화되었고 살림도 줄어들었으며 집을 찾는 조건 역시도 점점 형편없어지고 있었다. 어디든 좋으니 장기 계약을 받지 않는 곳, 큰 보증금이 필요하지 않는 곳, 집주인에게 줘야 하는 감사비가 비싸지 않은 곳, 언제든 계약을 끝내고 나가도 문제가 없는 곳. 대부분 그런 조건의 집들은 아주아주 낡았거나, 사건 사고가 났던 방이기 일쑤였는데 이번 집만큼은 달랐다. 시부야 중심가의 현대식 아파트. 단점이라면
"구멍."
눈앞에 보이는 저 커다란 구멍. 그 구멍은 눈을 슬며시 뜨면 먼 우주에 유유히 떠있는 블랙홀과 같이도 보였다. 그래서 그런가 차마 남의 집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괜히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가거나 사라질 것 같이 느껴지디도 해서 살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도 뭐 이 가격에 저 정도 블랙홀 정도면, 나쁘지 않아. 바로 들어올 수도 있는데다 저런 불편을 감수하고 있으니 여차하면 방을 뺄 때도 까다롭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그걸로 충분했다. 가만히 오지 않은 미래의 계획까지 떠올리며 구멍에게서 시선을 돌린 스가와라는 서둘러 이삿짐 상자 속에서 그럴듯한 가림막을 찾기 위해 뒤적였다. 급하게 정리해 들고 온 단출한 짐이라 사용하던 커튼을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신이 없어서 커튼 봉을 떼오는 걸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뭐, 벽에는 봉을 달 수 없으니 상관없나.
"읏차."
걸어놓고 몇 번 걷지도 못 했던 깨끗한 커튼을 들고 구멍 앞에 다가가 섰다. 다행히 멀리서 봤을 때와 달리 구멍은 뻥 뚫려 멀쩡히 건너의 풍경을 내보이고 있었다. 건너의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빠르게 깔끔하고 단정한 내부를 훑었지만, 주인 없는 집을 뚫어지게 구경하는 건 영 예의가 아닌지라 서둘러 발끝과 손가락 끝에 힘을 줘 커튼으로 커다란 구멍을 막았다. 차마 못질까지는 할 수가 없어 적당하게 테이프로 살살 붙여 고정시켰다. 조만간 툭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임시방편으로는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스가와라는 벽에서 두어 걸음 떨어져 섰다. 하얀 벽지 위로 푸른 커튼이 엉성하게 달려 흔들렸다. 저 엉성함이라니. 차라리 커다란 책장으로 가리면 좋을 텐데, 변변치 못한 짐에 책장같은 것이 있을리가 없었다.
"괜찮아."
나쁘지 않아. 그동안 거쳐왔던 집들에 비하면 깨끗하고 위치도 좋으니 구멍쯤이야. 그리 스스로를 달래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상자들을 풀어헤쳤다. 렌트한 차로 한 번 이면 이동 가능한 정도의 아주 작은 짐들이었다. 꼭 필요하고 급히 써야 하는 것들. 예를 들어 칫솔, 수건, 냄비 같은 것. 날이 쌀쌀해 두꺼운 옷은 필수였으나 가지고 온 옷가지에는 부피를 차지할만한 코트는 들어있지 않았다.
"돈이 또 엄청 깨지겠구만."
버리고 새로 사는 것은 익숙했지만, 그때마다 참 지출만큼 마음이 쓰고 아팠다. 저번 집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방에 들어가게 되어서 참 스스로가 불쌍하다 했는데, 그나마 이번에는 옵션이 딸린 집이라 다행이었다. 침대가 없는 것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스가와라는 휑한 방을 들여보며 쭈욱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분주하게 정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구멍 덕에 반 정도는 타인에게 오픈되어 있던 곳이라 그런지 집은 꽤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딱히 손을 댈 곳이 많지 않아 쓸고 닦고 상자를 풀고 쉬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강의 정리를 끝내놓고 부랴부랴 이불을 펴 그 위에 누우니 그제야 좀 제 집 같고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몇 달, 아니 얼마 동안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누군가 들어온 흔적을 발견한다던가, 한밤중에 쾅쾅 울리는 문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테니 그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누군가 당연하게 누리는 그 안정된 삶을 행복으로 정의하며 스가와라는 새 집에서 그나마 유일한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그렇게 눈을 감았을까, 시계의 바늘 소리 하나 울리지 않는 고요한 적막이 낯설었는지 아니면 반대로 편안했는지 그대로 잠에 들고 말았다. 한동안 이것저것 스트레스받느라 잠을 설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꿈의 그림자조차도 덮치지 못할 정도로 깊은 숙면을 하고 눈을 뜨니 어느새 커튼을 빼앗긴 창에는 밤이 들이차 있었다. 으, 춥다. 창에서 피어오르는 한기에 슬쩍 팔뚝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헉...!!!!"
그대로 구멍 너머의 사람과 마주쳤다. 어둠이 찾아온 공간이라 더더욱 우주의 블랙홀과 같은 풍경에 덜컥 놀란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본능적으로 이불을 당기며 몸을 뒤로 빼자 언제부터 아니 얼마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구멍의 틀에 기대 있던 사내가 작은 신음과 함께 쭈욱 스트레칭을 해 보였다. 그리고는
"꿈꾸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라며 이쪽이 하고 싶은 대사를 뱉었다.
"도대체..."
왜 네가 여기 있어? 그리 물으려던 말은 튀어나오지 못하고 안에서 삼켜져 사라졌다. 놀란 가슴을 진정할 틈도 없이 눈앞의 상황을 인식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믿기지가 않아서 입만 벙긋댔다.
그도 그럴게 눈앞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배구부였던 자신의 네트 너머의 적이었던 그 오이카와 토오루가. 경기를 제외하고는 서로 마주한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던 상대지만, 워낙 대단했던 선수라 그의 얼굴이나 이름은 자연스레 뇌리에 박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있었다. 그런 그가, 열아홉 살이었던 그가 자신만큼 성장해서 현재 저 구멍 너머에 있었다.
"집 주인이 옆에 사람 들어왔다길래 인사차 기다렸어. 아 커튼은 내가 안 건드렸다? 알아서 떨어지던데."
"..."
"다시 붙여놓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넘어가는 건 영 예의에 어긋나는 일 같아서."
"..."
"그나저나 놀랍네. 카라스노의 2번군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자신이 그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 역시도 기억하는지 먼 기억 속의 등번호를 뱉어 불렀다. 2번이라, 그런 번호였었지. 너무도 옛 기억이라 3년이나 달고 다녔을 그 번호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이 상황 역시도. 슬쩍 목까지 당겼던 이불을 내리고 슬쩍 몸을 일으키자 그가 구멍 너머로 "차라도 마실래?" 라며 물어왔다. 어디서? 여기서? 이 상태로? 아무리 생각해도 영 이상한 상황에 놀라 눈으로 물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틀더니 이내 주방으로 사라졌다. 말릴 틈도 없이 포트에 물을 올려놓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스가와라도 주섬주섬 일어나 걸음을 떼었다. 갑작스러운 대접에 어울릴 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 서둘러 다 푸르지 못한 상자를 뒤졌다. 급히 이사하느라 이것저것 버린 게 많았지만, 아껴 먹던 쿠키 혹은 과자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있다."
주방용품을 쑤셔 넣은 박스에서 아직 뜯지도 않은 과자를 발견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였지만, 자신이 사놓은 것은 아닌 물건. 저번 집을 멋대로 드나들던 그 과거의 빌어먹을 놈이 사다 놓은 것이었다. 찝찝하니 버렸어야 했는데, 과자에는 죄가 없다며 챙겨 놓았던 모양이었다. 서둘러 박스에서 봉지를 꺼내 벽으로 다가가자 오이카와 역시도 준비가 끝났는지 어디서 두꺼운 백과사전과 같은 책을 꺼내와 테이블을 대신에 구멍 바닥에 깔았다. 아슬아슬 마감도 제대로 되지 않은 콘크리트 벽 위로 그럴듯한 티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자, 녹차."
"고마워."
의자를 빼와 앉는 그와 달리 아직 뜯지 않은 상자를 끌어와 걸터앉았다. 아슬아슬하게 백과사전 위로 앉은 머그를 바라보며 부욱 봉지를 뜯어 과자를 풀어놓자 그가 단박에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댔다.
"녹차에 와사비마메 과자는 좀 아니지 않나."
"뭐 어때서?"
"이건 술 안주지."
그리곤 멋대로 "넣어놔, 나중에 맥주랑 함께 마시자."라며 뜯어 놓은 봉투를 말아 내밀었다. 얼떨결에 잡힌 술 약속에 거부도 못하고 끄덕였다. 참 기묘한 상황. 도망치던 와중에 평생 만날 거라 생각도 못 했던 인물과 마주하고 한가롭게 그리고 여유롭게 벽을 사이에 두고 이 이상한 티타임을 즐기고 있다니, 그것도 해가 떨어진 밤에.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동안 아는 얼굴들과는 모두 연락을 끊고 지냈기에 익숙한 과거의 얼굴과 마주한 것으로 마치 오랜 친우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오래 있고 싶다.
그래서 이번에는 될 수 있으면 이 집에서 오래 지내고 싶었다. 아마 불가능할 테고 자신의 추한 꼴을 눈앞의 사내에게 들킬 바에야 내일이라도 당장 계약을 취소하고 이 집을 떠나는 게 맞는데
"그거 와사비 맛만 말고 여러 가지 섞인 버라이어티 팩도 있어."
오랜만의 그리고 이 이상한 재회에 어떻게 지냈느냐, 잘 지냈느냐와 같은 인사를 건네는 대신 한가롭게 맥주 안주나 떠들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마주하고 있으니 정말로 현실감이 없어서
"응, 그럼 맥주에 그거 사다 먹자."
이 이상한 동거를 쉽게도 받아들이고 말았다. 내일, 기린. 그가 블랙홀 너머로 호록 차를 삼키며 말했다.
블랙홀에 빠져들면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테지. 스가와라 역시 딱 좋게 식어가는 녹차를 가만히 삼키며 대답했다.
"응,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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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놈을 만나 도망치던 스가와라 코우시가 이상한 오이카와 토오루를 만나 이상한 동거를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쩜쩜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