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쓴 머리가 너무도 무거웠다. 무릎으로 떨어지는 스커트도 여간 불편하게 아니었다. 데뷔한 지 이제 막 2년 차, 이제 익숙할 만도 한데 여전히 거울 속의 자신은 이질적이었고 다른 사람처럼만 보였다.
"스가와라, 마지막으로 입술만."
사이드로 조명이 들어오는 거울을 들여보다 스가와라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와 휴지를 내밀었다. 입술이 많이 붉었는지 색을 빼낼 모양인듯했다. 익숙하게 그녀가 내미는 휴지를 소리 없이 물자 붉은 립스틱 자국이 찍혀 떨어졌다.
"이상하지 않아요?"
"아니 괜찮아."
그녀가 웃으며 말했지만 그래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스가와라는 다시금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했다. 검은 가발이 한껏 틀어져 올라가 커다란 꽃장식과 함께 고정되어 있었고 선을 드러낸 얼굴은 진한 화장으로 눈가의 점까지 가려 자신이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옷에 감춰진 목이 뻗어져 있었다. 답답해 보였지만 목젖을 가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쭈욱 내려와 둥그스름하게 패드로 된 가슴이 옷 아래로 자리잡고 있었고 보정 속옷을 따라 곡선을 그리며 내려온 스커트는 무릎 위에서 단정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이렇게 몸에 착 달라붙는 의상은 들킬 위험이 커 절대로 싫었지만 "역으로 들키기 어려울걸?" 이라는 사장님의 의견이 더 컸다. 데뷔 후 처음으로 들러붙는 의상을 입은 턱에 평소보다 더 불안함에 거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괜찮아, 진짜야. 아무도 너 남자라고 생각 못할 거야."
안심시키려는 듯이 건네는 스타일리스트의 말도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아 이번엔 문 앞에 서 있던 매니저를 바라보자 그도 "진짜 감쪽같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라고 격려했다. 보통 때면 이 정도 격려로 안심하기 마련인데, 컴백을 앞둔 무대, 거기다 처음 서보는 생방송 무대라 그런지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아 숨이 턱턱 막혀왔다. 누군가 툭 하고 건드리면 눈물이라도 쏟을 거 같아 애꿎은 손톱을 입술로 가져가자 "화장 망가져!!" 라며 스타일리스트가 서둘러 잡아왔다.
"괜찮아, 진짜로 아무도 모를 거야.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거야? 너?"
"아니에요, 사에코상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불안해서 그래요, 멍청한 소리를 내뱉으려는 입은 이내 똑똑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멈추고 말았다. 문을 등지고 서 있던 매니저가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 무뚝뚝하게 "누구세요?" 라고 묻자 "조연출인데요!" 라며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그가 웃으며 '촬영 준비해주세요.' 라며 순서를 일렀다. 마치 그 말이 사형선고라도 되는 듯 심장이 툭 떨어지는 거 같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대기실에 숨어 있을 수도 없었기에 꾹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후,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 구두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방을 나섰다.
잘하고 와, 매니저와 떨어져 복도로 나오자 생방송을 앞둔 여러 출연자가 모여 있었다. 다들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저마다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아는 얼굴이 없어 스가와라는 멀뚱히 입을 다물고 제 발끝만 바라보았다. 그 시선 틈으로 방송의 사회를 담당하는 아나운서와 유명 코미디언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울려대고 있었다.
"많이 긴장되세요?"
얼마나 그렇게 나갈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바로 앞 순서인 여성 아이돌 그룹의 맴버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아뇨, 괜찮아요."
매니저가 절대로 다른 연예인들하고 함부로 대화하지 말라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컴백 축하해요, 사실 저 예전부터 시로상 완전 팬이었거든요. 제 롤모델이랄까.. 너무 예쁘시고 키도 크시고. 노래도 잘하시고..!"
잔뜩 흥분한 얼굴로 그녀가 발그레진 뺨까지 내보이며 마구 떠들어댔지만 갑작스러운 그녀의 어택에 스가와라는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어쩌지? 더 대화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보다 뭐라 대답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달싹거리는 입술을 어쩌지 못하고 도움의 눈빛으로 저 멀리 매니저를 바라보자 그가 바로 캐치했는지 서둘러 다가왔다.
"물이라도 마실래?"
그리곤 자연스럽게 그녀의 대화를 끊어내곤 물병을 내밀었다. 끄덕끄덕, 그다지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스가와라는 서둘러 물병을 받아들었다.
"아, 그리고 원래 오늘 마지막 무대였는데 바뀌었데."
"왜요?"
"캡틴즈, 저기가 가져갔다네."
망할 놈들. 매니저가 짜증 난다는 듯 툴툴대며 앞쪽에 서 있는 남자 무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제복과 비슷해 보이는 의상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잘생긴 사내 여럿이 이제 막 스튜디오로 입장하고 있었다. 그 덕에 자세히 살필 틈은 없었지만, 그들이 나가기 무섭게 밖에서 울리는 커다란 함성에 어느 정도 인기인지 쉽게 가늠이 되었다.
"여기는 컴백이고 저기는 활동 중이면서 엔딩 욕심은."
"..전 상관없어요."
오히려 빨리 끝내고 빨리 뒤쪽으로 빠지는 게 편했다. 무대에 서는 것은 좋았지만 그 외에 부수적인 일들은 자신과 맞지 않았다. 예를 들어, 카메라 앞에 자리를 지켜야 한다거나 혹은 인터뷰를 해야 하는 일들.
"그래도 우린 컴백무대인데-"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이를 악무는 매니저를 뚫고 '시로상, 들어갈게요!'라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도망칠 구멍도 없는데 당장에라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 제 마음을 읽었는지 매니저가 툭 등 뒤를 밀었다. 다녀와, 다정한 그 말에 다문 입술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은 행복했고 많은 사람에게 노래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것은 즐거웠지만 스가와라는 기본적으로 사람과 마주하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처음 데뷔하고, 데뷔 싱글로 활동할 당시에는 대부분 사전 녹화로 이루어지는 음악 방송에만 나갔다. 그것도 꽤 적은 수의. 당시엔 신비주의 컨셉으로 똘똘 무장시켜준 사장님 덕에 여기저기 불려 나가지 않아도, 어울리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2집 싱글을 내놓기 무섭게 여러 곳에서 압박이 들어왔다. 우리 방송에 출연하지 않으면 음반 광고나 음원을 써주지 않겠다는 횡포와 같은 것들이. 노래가 좋다는 이유로 버티기엔 고작 2집 싱글을 낸 어린 가수였고, 더 많은 사람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서 TV라는 무대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생방송에 출연하겠다 결심은 했지만, 역시 너무 성급한 결정인 것 같아 후회가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아냐, 이것도 그냥 무대일 뿐이야. 내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스스로를 그리 다독이며 진정하려 했지만 스태프가 쥐여준 마이크를 든 손은 한계치를 벗어난 것처럼 달달 떨려오기 시작했다.
"시로상, 입장하세요!"
그런 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매정한 스태프가 사인을 던졌다. 그의 말과 동시에 스튜디오 안에서 다음 출연자인 제 이름이 호명되었다. 스가와라는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어기적어기적 끌어 겨우 어두운 커튼을 벗어났다. 환하게 떨어지는 조명 앞으로 나가자 입장 계단을 사이드로 자리 잡은 관객들 사이에서 커다란 환호와 박수 소리가 떨어져 나왔다.
"마지막 출연자는 새 앨범을 가지고 돌아온 시로상 입니다. 시로상은 2014년에 데뷔하여 데뷔 싱글로 일주일 만에 밀리언을 기록, 오늘은 1년 만에 돌아온 새 싱글을 들고 돌아왔는데요,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와 가사들로 큰 인기를-"
아나운서의 유창한 설명과 함께 적당하게 자리를 잡고 서자 근처에 서 있던 다른 가수가 가운데로 가라는 듯 팔을 뻗어 비켜주었다. 아까 매니저가 잔뜩 노려보았던 그 캡틴즈라는 그룹의 맴버였다. 아, 가운데는 싫은데. 절대로 싫은데. 하지만 생방송 중이었고 카메라는 붉은빛을 내며 빙빙 돌아가고 있었기에 스가와라는 하는 수 없이 어색하게 그들을 지나쳐 아나운서의 곁에 섰다.
"어떠세요? 오늘이 첫 생방송이라고 들었는데?"
"...완전 긴장하고 있어요."
"이번 싱글도 너무 반응이 좋아요!"
"감사합니다."
어려서부터 말주변이 없었다. 자라온 환경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좀 더 웃고, 좀 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가와라는 MC의 질문에 겨우 짧은 대답만 내놓을 수 있었다. 다행히 사회를 오래 본 아나운서와 코미디언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로 질문을 돌렸다. 여러 출연자에게 골고루 근황이나 노래에 관한 질문이 돌아간 후 "광고 후 찾아뵙겠습니다!"는 말로 붉은빛이 꺼졌다.
"괜찮아요?"
우르르 한구석에 마련된 자리로 이동하는 길, 긴장한 게 너무도 티가 나는지 똑같은 질문을 또 듣고 말았다. 방금 자리를 비켜주었던 그 사내였다.
"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더 대화를 나누다간 진짜 토라도 할 기세인지라 스가와라는 잘라 말하며 서둘러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의 동료로 보이는 다른 맴버가 지나가며 "소문대로 비싼 척 장난 아니네요." 라고 들으라는 듯이 비꼬았지만, 거기에 변명하고 사과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다.
방송국 내에서 자신의 평판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꼴이 이렇다 보니 남들하고 어울리지 못했고, 사무실에서도 편의를 위해 신비주의니 아티스트 보호라느니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 철저하게 주변과 떨어트려 놓았다. 아마 사무실이 대형 기획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다행히도 스가와라가 소속된 사무실은 알아주는 이름있는 곳이었고 돌아가는 흐름도 이 시장 바닥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대놓고 붙잡고 예의가 없다느니 버릇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단지 '비싸게 군다' 정도의 소리만 근근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고작 데뷔 싱글을 낸 가수가 인사도 하러 다니지 않고 대기실에 처박혀 녹화만 끝내고 사라지기 일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차가운 말도, 시선도 사실 스가와라에겐 그리 상처가 되진 못했다. 남들의 사나운 눈빛을 받아내는 일은 생소하거나 놀라운 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노래만 할 수 있다면 남들이 뭐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방금처럼 자신에게 대놓고 비아냥거려도 스가와라는 상처받지 않았다. 거기다 변명을 할 틈도 없이 다시 카메라의 붉은 빛이 돌아오기도 했고.
다시 시작된 녹화는 순서대로 출연자들의 무대와 인터뷰로 이루어졌다. 50분짜리 음악 방송은 베테랑 사회자와 익숙한 출연자들의 호흡으로 빠르게 그리고 막힘없이 흘렀다. 그 틈에서 이런 자리가 처음인 자신만이 동떨어져 바짝 긴장할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돌아 드디어 자신의 차례. 다시 한 번 광고로 넘어간 틈을 타 가장 앞자리로 이동해 아나운서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로상 오늘 진짜 예쁘네요."
그녀가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칭찬의 말을 건넸지만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껍데기에 대한 감상이었지 순수하게 자신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달갑지 않은 칭찬이라는 티를 낼 수는 없어 어색하게 웃으며 고맙다 대답했다. 다시 카메라 돌아갑니다! 촬영 스태프의 목소리와 함께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던 아나운서는 다시금 정면을 향해 돌아앉았고 스가와라 역시 몸을 틀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번 무대는 드디어 시로상의 무대인데요, 새 싱글 '백야(白夜)'의 첫 무대이기도 하죠? 간단하게 노래에 대한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정확하게 매니저가 준비해준 예상 인터뷰지에서 본 질문이었다.
"먼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래에요. 조금 우울하고 처연하게 들릴 수 있는 노래지만 쌀쌀한 계절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달달 외웠던 모범 답안인지라 막힘 없이 술술 입을 타고 대답이 흘렀다.
"발매 데일리는 물론 위클리까지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고 연이어 기록을 갱신 중인데 기분이 어떠세요?"
"1년이나 공백기를 가지면서 오랜 시간 고민하고 생각해서 낸 싱글인데 사랑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요."
"그러고 보니, 캡틴즈의 사와무라상이 시로상 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 잠깐. 이건 전혀 예상 인터뷰지에 없던 내용이었다. 갑작스레 질문을 넘기는 아나운서의 행동에 놀라 눈만 껌뻑이자 뒤쪽에서 "네, 완전 팬이에요." 라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로상은 어때요? 캡틴즈에서 혹시 이 분은 이상형에 가깝다! 하는 맴버가 있나요?"
짓궃은 질문이었다. 데뷔 전, 여장하고 무대에 서겠다는 제 말에 사장님과 매니저가 어느 정도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여러 번 설명하긴 했지만, 실제로 당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방송 중이기에 매니저에게 S.O.S를 보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대답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어쩌지? 절로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꾹 쥐는 것으로 겨우 진정하며 스가와라는 겨우 뒤를 돌아 캡틴즈를 확인했다. 아니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론 자신과 똑같은 남자들이었는데 이상형을 고르라니. 물론,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어서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너무 당황스러웠다. 예상된 질문만 던진다며 오는 길에 그렇게 매니저가 안심시켰는데 모두 거짓말이었다.
"어... 저분이요."
그래도 일단은 누구를 하나 찍어야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인지라 스가와라는 아까 자신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괜찮으냐 물었던 사내를 손바닥으로 가리켰다. 별 뜻 없이, 그나마 가장 익숙한 얼굴이었으니까.
"저분... 아, 오이카와상이요?"
이름이 오이카와인 모양이었다.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끄덕이며 서둘러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뒤이어 오이카와상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역시 인기 많지 않으냐 하는 음악과 조금도 관련 없는 질문들이 오갔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빨리 노래를 끝내고 무대를 내려가 이 무거운 가발도 답답한 옷도 높은 구두도 다 벗어 던지고 자신으로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럼 시로상, 무대 준비해주세요!"
드디어 이 숨 막히는 자리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신호에 스가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한창 세팅 중인 오케스트라들을 지나쳐 스태프가 표시해 둔 무대 중앙에 섰다. 깜깜하게 내려앉은 조명 아래에서 방금 있었던 당황스러운 일들을 잊기 위해 꾹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모든 소음이, 제 안을 휘몰아치던 불안과 당황스러움이, 닿아있는 시선이 일제히 사라져 느껴지지 않았다. 동시에 등 뒤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머리 위부터 똑 떨어지는 조명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
"흩날리는 하얀 밤, 어두운 빛 속에서 흔들리는 신기루가 마치 그대인 것처럼 내게 손짓해요."
사람들이 말하길 여자치고는 낮은 목소리라 했지만, 스가와라 코우시로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제 목소리를 가감 없이 내보이며 스가와라는 하나하나 가사를 뱉어 불렀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밤을 비추는 그대를 데리고 하얀 밤으로 가고 싶어요."
바람을 가르고, 가시덩굴을 가르고, 새벽을 가르며. 고독한 하얀 밤으로.
인터뷰 때는 사랑 노래라 잘도 떠들었지만, 사실 이 노래는 자신이 그리는 이상향이었다.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오로지 좋아하는 음악만 남은 세상. 모든 소음이 잠든 어둠 속에 유일한 빛. 자신을 괴롭히는 이도, 욕하는 이도, 징그럽다 혹은 이상하다 손가락질하는 이도 없는 세상. 스가와라 코우시로 머물 수 있는 세상.
손에 쥐어지지 않을 그림을 떠올리니 절로 처절해졌다. 처절해진 감정은 목소리를 타고 흘렀다. 음악에 흠뻑 집중하는 이 순간만큼은 꿈꾸는 하얀 밤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랐던 자신의 노래는 끝이 났고, 다시 들어오는 밝은 조명을 받으며 스가와라는 무대를 내려왔다. 바로 다음 무대로 연결되는지 대기하고 있던 캡틴즈가 서둘러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무대에 오르기 무섭게 젊은 여자들의 비명 같은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 어마어마한 열기를 등 뒤로 받으며 내려오자 매니저가 웃으며 반겨왔다.
"괜찮아, 잘했어. 이제 조금만 버티면 끝나."
"...저 인터뷰 잘했어요? 이상한 질문 들어와서..."
"예상 인터뷰지 넘겼는데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진짜..! 괜찮아. 잘 했어. 누구라도 오이카와 토오루를 고르겠지. 게 중에선. 저분이라고 표현한 것도 잘했어. 거리감 느껴지고 괜찮았어."
아, 저분이라고 한 건 실제로 그의 이름을 몰라서 한 표현이었는데 역으로 잘 고른 호칭인 모양이었다. 매니저의 칭찬을 받고 나니 그나마 요란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티라는 그의 응원을 받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한창 진행되는 캡틴즈의 무대를 지켜보았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춤을 추고, 나누어 노래했다. 노래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기 싫은 저와 달리 다들 돌아가며 소절을 나누어 받았다. 그들의 손짓 하나하나에 열광적인 반응이 스튜디오를 뒤흔들었다. 모든 공기를 식게 만든 자신과 달리 그들은 불을 붙였다.
불에 휩싸인 듯한 무대가 끝나고 나자 드디어 엔딩이었다. 모든 출연자가 무대에 올라가 오늘 어땠는지, 묻고 답하는 거로 모든 생방송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로 인사하는 사람들 틈에서 스가와라는 적당하게 허릴 숙이는 거로 대신하며 서둘러 무대를 내려왔다. 긴장이 풀렸는지 멋대로 흐느적거리는 다리로 넘어지지 않게 달려온 매니저의 팔을 꽉 끌어 잡았다.
"괜찮아?"
아뇨. 50분 내내 시로라는 가면을 쓰고 유지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피곤한 일이었기에 스가와라는 솔직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잘 버텼어. 장하다, 우리 스가.. 아니 시로. 첫 생방송 잘했잖아."
제 본명을 부르려다 서둘러 정정하며 매니저가 칭찬했다. 칭찬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위로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는 거 보니 좀 살았나 보네."
그가 따라 웃으며 가볍게 코를 꼬집었다. 그렇게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 긴장을 너무 했던 탓인지 손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찝찝한 손을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아 먼저 매니저를 보냈다. 바로 나갈 거니까 빨리 돌아오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씻어내기 위해 가장 구석에 위치한 화장실로 향했다. 오늘 생방송을 준비하면서 미리 매니저가 찍어두었던 곳이었다.
먼 곳이라 그런지 오가는 이는 누구도 없었지만 그래도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는 건 좀 창피해 슬쩍 주변을 살핀 후 남자 화장실로 들어섰다. 어차피 손만 씻는 정도니까 빨리 끝내면 되겠지. 불이 낮게 깔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 세면대 앞에 섰다. 꼭지를 돌리자 콸콸 시원한 물이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오늘 떠느라 가장 고생한 손을 흐르는 물에 담그자 차디찬 감각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썩 나쁘지 않은 감각이라 스가와라는 작게 웃으며 비치된 비누까지 사용해 깔끔하게 손을 닦았다. 아직 자신은 시로로 남아있었지만, 손을 닦아내는 행위 하나로 다시 스가와라 코우시로 돌아오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시 꼭지를 잠그고 허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거울 너머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이름이-
"여기, 남자 화장실인데요."
오이카와 토오루. 매니저가 언급했던 그의 풀네임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돌아 그와 마주했다. 당황해 굳어버린 몸이 입이 움직이기를 포기했는지 반응이 없었다.
"여자 화장실, 옆에 있는데."
"아...그렇구나."
잘못 보고 들어왔나 봐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거짓말이 티가 나지 않게 더듬더듬 말했다. 그가 뒤쪽에 주르륵 놓여있는 남성용 변기를 바라보았지만 애써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스가와라는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당황한 탓일까. 아니면 여전히 몸이 제 말을 듣길 거부한 탓일까. 삐걱 움직이던 발이 결국 힐의 높이를 이기지 못하고 접히고 말았다. 아!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몸이 그대로 무너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빠른 반사신경으로 붙잡아 준 오이카와 토오루 덕에 타일로 넘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넘어졌다면 정말이지 큰일 날 뻔했지만, 그만큼이나 지금 훅 붙어버린 남자의 몸도 문제였다. 부축하느라 허리에 닿은 그의 팔이 보정 속옷임을 눈치채면 큰일이었으니까.
"괜찮아요?"
그래서 놀라 묻는 그의 다정한 말에 그렇다 대답도 못 하고 서둘러 밀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다급한 움직임에 뚝, 신발 끈이 끊어졌는지 그대로 발에서 구두가 벗어났다. 하지만 그걸 주울 정신도 없었다. 강하게 밀려난 그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지만, 스가와라는 그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화장실을 벗어났다.
급하게 뛰어나오는 길, 한 짝만 남아있던 구두를 벗어들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스가와라는 혹여 오이카와 토오루가 따라 나올까 겁이나 급하게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로상, 복도에서 달리면 안 돼요!"
지나가던 스태프가 경고했지만 그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붉은 불이 앵앵 소릴 내며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들키면, 들키면 더는 노래할 수 없어. 그 사실만이 빙글빙글 맴돌았다. 방금, 기분 좋게 식었던 손에 다시금 열이 피어올랐다. 구두를 쥔 손에서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 흘러나왔다.
빨리,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유일하게 스가와라 코우시로 지낼 수 있는 곳으로. 노래를 멈추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백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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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는 B님이. 썰 풀다가 삘받아서.
가명 지어달라 했더니 B님이 백설기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냥 시로라 했다.. 개이름 같다..
원래는 엔카 가수였는데.. 그래서 <내 사랑 백설기> 같은거 부르게 하고 싶었는데...
오글거리는 가사보다 내 사랑 백설기 가사가 더 힘들 거 같아서 패스....
쓰다가 지쳐서 급 마무리.... zZzZzZ
퇴고는 나중에.. 아 연예인 잘 모름;;;;;;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