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18 (열여덟)
2015. 11. 29. 13:50



연령조작 AU / 11월 28일 오이스가 교류회 배포본












스가와라는 기본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표를 빼곡 메우는 교과목 중에서 당연하게도 체육이 가장 싫었다. 운동장을 뛰며 흘려야 하는 땀도 싫었고, 흙모래로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도 싫었다. 덜 성장한 몸으로 수영장에 들어가 팔을 휘젓는 것도 싫었고, 달리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도 싫었다. 라켓을 들고 팔을 휘두르는 것도 배트를 꽉 쥐여야 하는 것도 싫었다. 땡볕에 나가 몸을 움직이는 것도 싫었고 그 아래 서 있는 것도 싫었다. 그래, 그렇게나 싫었다. 하지만 체육 시간만큼은 좋았다. 체육 시간만큼은.


"반장! 체육 선생님이 불러."


기나긴 수업 사이에 조금의 쉬는 시간, 아침부터 내리는 비로 교실은 어둑했고 조금 전 끝난 문학 수업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머리를 뉘이고 눈을 감으려고 했더니 앞문이 열리고 방해꾼이 들어섰다. 불리는 자신의 직책에 '귀찮다'라고 떠올렸고 그 뒤에 달라붙는 '체육 선생님'이라는 말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디 계셔? 라는 말에 여학생은 교무실이라 일러주었다.

세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희끗한 실내화를 질질 끌며 교무실로 향하자 그 앞에는 여러 여학생이 까치발을 들고 안을 들여보고 있었다. 보드라운 뺨을 붉게 물들이고 달싹이는 발끝과 함께 스커트 자락들을 휘날리며. 스가와라는 삐딱하게 서 그 풍경을 눈에 담다 이내 그녀들 사이를 가르고 교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를 치고 갔다며 툴툴대는 여학생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익숙하게 체육 선생의 자리를 찾아 걸었다.

넓은 교무실, 수업을 준비하는 여러 교사. 그 사이에서 체육 선생은 언제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비가 와서인지 늘 입는 검은 운동복 대신 하얀 셔츠 차림을 한 그의 너른 등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아주 천천히 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왕이면 이 그림 같은 풍경을 오래오래 눈에 담고 싶었다.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자신이 닿기도 전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서 와, 스가와라군."


고개가 돌아감에 따라 흔들리는 갈색 머리가 눈이 부셨다. 저 멀리 교무실 문 앞에서 여전히 모여있을 여학생들이 작은 탄성과 비명이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아니면 제 마음 속의 비명이라든지. 하지만 스가와라는 무뚝뚝한 얼굴로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


"찾으셨어요?"

"아, 응. 있다가 5교시에 있을 체육 수업 말인데-"


그가 창밖을 턱짓하며 오후에 있을 수업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는 아마 오후가 되어도 그치지 않을 모양새였다.


"강당 열쇠 줄 테니까-"

"그냥 교실 수업 하면 안 돼요?"


비가 오는 체육 시간의 레퍼토리는 비슷했다. 교실, 아니면 강당. 교실인 경우 자습이었고 강당인 경우는 보통 배구나 농구와 같은 실내 운동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벽에 붙어 앉아 수다를 떨었고 남자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공을 튕겼다. 수업 진도가 아닌 그야말로 자유 시간에 가까운 형태였고 그 틈에서 스가와라 코우시가 속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꾹 주먹을 쥐며 묻자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왜? 스가와라군은 그냥 자습하고 싶어?"

"네."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롭지는 않았으나, 자유롭게 무리를 만들어야 할 순간이 생기면 조금 외로웠다. 슬쩍 실내화로 교무실 바닥을 문지르며 시선을 내리깔자 그가 고개를 숙이며 눈을 맞추려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퍼뜩 다시 고개를 들자 그가 아이처럼 웃었다.


"이렇게 애교를 부리니 방법이 없네."


제가 언제요? 목구멍까지 그 질문이 차올랐으나 그가 다시 입을 여는 게 빨랐다.


"그래 그럼, 아이들에게 그냥 교실에 있으라고 해."


다정한 말에 슬쩍 굳어있던 입술 끝이 흐물하게 풀렸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살짝 손목을 잡아왔다. 별로 강하게 잡은 것도 아니고, 셔츠 자락 위를 살짝 붙잡았을 뿐인데 순간적으로 얼굴이 타올랐다. 잡힌 부분이 화상 입은 것처럼 화끈대었다.


"손."


이런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잡은 손목을 흔들며 손을 펼 것을 종용했다. 조용히 그리고 조심스레 손바닥을 펴자 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올려놓았다. 딸기 맛 사탕이었다.


"수업 열심히 해."


그 말에 고개를 제대로 끄덕였는지, 아니면 대답을 했는지 스가와라는 알 수가 없었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윙윙 돌아가던 뇌가 뚝 멈춰버린 것 같았으니까. 그의 다정함에 겨우 평온을 유지하던 숨이 멈췄으니까. 하지만 그런 자신을 들킬까 겁이나 서둘러 꾹 손바닥으로 사탕을 감추고 교무실을 나왔다. 아마, 이 사탕은 절대로 먹지 못하고 제 방 서랍에 갇혀 소중하게 대해지다 녹아내릴 것이었다. 교무실에서 멀어지는 발걸음 사이로 다음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지만 스가와라는 달리거나 빠르게 걷지 않았다. 그에게서 최대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멀어지고 싶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28살의 체육교사. 그가 이 학교에 온 것은 올해 봄으로, 2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둔 체육교사를 대신해서였다. 나이가 좀 있던 선생으로 1학년 때에도 스가와라는 그에게 수업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교실에서 이루어진 이론 수업으로 체육이라 말할 수 없는 수업을 하는 선생이었다. 조만간 잘리거나 그만두겠구나 싶었더니, 정말로 사라지고 말았다. 남학생들은 빈 체육 교사의 자리를 두고 "축구나 시켜주는 선생이면 좋겠다." 혹은 "수업시간에 야구나 했으면." 하고 바랐고, 여학생들은 "옆 여고처럼 잘생긴 선생님이 왔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체육 교사가 부임했다.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의 소개와 함께 그가 나타난 순간, 스가와라는 제 옆에 선 여학생이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들었다. 단정한 니트를 입고 그 아래에 면바지를 갖춰 입은 젊은 남자 교사. 늘 늘어나고 칙칙한 운동복을 입고 배트를 들고 다니던 체육 교사만 보던 스가와라에게 그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교사 아니라 무슨 배우 같아, 뒤쪽에 앉은 남학생이 중얼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인사, 하지만 그가 뱉음으로써 달랐다. 그 목소리는 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그리곤 고요하고 숨죽여 있던 강당의 분위기를 조용히 흔들어 놓았다. 남자아이들의 웅성댐과 여자아이들의 흥분 속에서 스가와라 역시 그 분위기에 동요되었다. 허릴 숙이며 인사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스가와라는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를 쳤다. 쿵쿵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를 가리기 위해서 열심히, 또 열심히 쳤다.


그렇게 갑작스레 등장한 체육 교사는 단숨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남학생들까지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떠드느라 소란이었다. "여자친구 없데, 3반 애가 물어봤데!" "3학년 선배가 벌써 고백도 했데!"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얼굴만 봐도 배가 불러!" 는 보통 여학생들의 입을 타고 터져 나왔고 "대학교 때까지 배구 했데." "수영도 잘하고 축구도 잘한데." "5반 남자애들이랑 점심시간에 같이 농구 했다더라."는 남학생들의 입을 타고 흘렀다. 스가와라는 그 어느 무리하고도 친하지 못해 그 틈에서 눈을 반짝일 수는 없었지만, 귀만큼은 쫑긋 세우고 그를 담았다. 눈은 언제나 그를 따라 헤매었다.


사실 두근거림보다 먼저 스가와라를 찾은 것은 혼돈이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들을 눈앞에 두고 남교사의 뒷모습이나 쫓는 자신이 두렵고 무섭고 괴로웠다. 감정에 대한 자각도 없었고 정의도 내리지 못했다. 왜 그의 앞에 서면 심장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대는지 이유를 찾는 일은, 아직 첫사랑도 해보지 못한 열여덟의 소년에게는 아주 어려운 시험 문제와 같았으니까. 하지만 스가와라는 뒤흔들리는 제 감정에 피하지 않았다. 덮거나 무시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혼돈을 잠재우니 알 수 없는 이상한 제 마음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이 남자, 그것도 선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를 향한 마음들은 그냥 눈을 떠 맞이하는 아침과도 같은 평범한 일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좋아한다, 라는 감정을 깨끗하게 확정 내리더라도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나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은 반 여자아이처럼 편지를 쓸 수 없었고 3학년의 모 선배처럼 대뜸 고백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자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스가와라는 믿었다. 다가가고, 가까워지는 일. 비록 남자아이라 손수 케이크나 쿠키를 구워 그에게 내밀 수는 없었으나 그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교무실에서 화분에 물주기. 덤으로 훔쳐보기. 교사들이 사용한 커피잔 닦기. 덤으로 그의 잔을 더 깨끗하게 닦기.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한 팔 만큼 벌어진 거리를 한 발자국, 한 뼘으로 좁히기 위해서는 더 다가가야만 했다. 그래서 스가와라는 체육 성적이 나빠 고민이라며 치졸한 거짓말을 내뱉었다. 다행히 그런 핑계를 대기에 자신의 위치는 최적이었다. 반장, 전교 1등, 모범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으니까. 반칙과 가까운 거짓을 고하며 처음 떨리는 마음을 안고 그에게 교과서를 내밀었을 때, 그는 조금 놀란 눈으로 웃으며 물었다.


"아직 시험 기간도 아닌데 다들 교과서를 들고 오네. 스가와라군도 벌써 준비하는 거야?"


슬쩍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며 그가 이름을 불러주었다. 끄덕, 대답 대신 고개만 움직이자 그가 다행히도 제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두드렸다. 앉아도 좋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스가와라는 여학생들이 차지하던 그의 옆자리를 야금야금 차지해 나갔다. 얼마 후부터는 아예 방과 후 그의 시간은 모두 스가와라의 것이 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대화가 '테니스의 룰은-'로 시작하고 끝났지만 상관없었다. 교과서로 시선을 고정한 그의 뺨을, 눈가를, 그리고 얼굴을 훔쳐볼 수 있다면 테니스의 룰이든 야구의 룰이든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짧든 길든 스가와라에게는 상관없었다.


지루한 수업 시간과 별다르지 않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자 체육 시간을 앞두고 여자아이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자리를 바꿔 앞에 앉으려 난리였고 심지어 거울을 꺼내놓고 얼굴에 이것저것 바르기까지 했다. 스가와라는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며 제 얼굴에 분을 칠하는 상상을 했다. 마스카라를 바르고 입술을 붉게 물들이는 상상을 했다. 자신도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오이카와 토오루 눈에 들 수 있을까? 아니, 아닐 거야. 분명 징그러워 보일테지. 자신은 소녀가 아니었으니까.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자 수업 종소리와 함께 교실 문이 열렸다. 아까 교무실에서 본 차림 위에 얇은 자켓을 걸친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반장, 인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댔다. 형식적인 시선과 부름이라도 이렇게 난리를 떨었다. 차렷, 경례. 일어서서 하루에도 몇 번을 외치는 인사를 겨우 뱉어 말하며 착석하자 그가 "오늘은 비가 오니까 자습하자." 라며 밝게 말했다.


"그럼 그냥 자도 될까요?"


남학생 하나가 번쩍 손을 듣고 장난스레 물었다.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 웃으며 "그래, 원하는 사람은 자도록 해. 쉬어가는 시간도 있어야지." 하며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와아, 그의 배려에 아이들이 환호를 터트리며 너도나도 체육복을 말아 제 책상에 얼굴을 묻기 시작했다. 여학생 대부분은 잠자기를 포기했지만 남학생은 스가와라를 제외하고 모두 점심시간에 끌어다 쓴 무의미한 체력을 보충하려는지 눈을 감았다.


"선생님, 선생님~"


간드러진 여학생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왜? 그가 그녀에게로 발걸음을 옮기는 소리에 신경도 세웠다. 옹기종기 모인 여학생들이 자주 애용하는 잡지를 보여주며 어떤 옷이 예쁘냐, 뭐가 잘 어울릴 것 같으냐 하는 아주 쓸모없는 화제로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는 짜증하나 내지 않으며 이게 어울릴 것 같다, 이게 색이 예쁘다며 말을 맞춰주고 있었다.


다정한 선생님, 스가와라는 꾹 샤프를 쥐며 입술을 물었다. 애가 탔다. 그의 앞에서 반짝이는 청춘은, 흐르는 별은, 흔들리는 꽃잎은 자신이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자신은 그저 반장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일 뿐이었다. 은근슬쩍 그의 팔을 붙잡고, 장난스레 팔짱을 끼고,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며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파.."


그녀들에 대한 부러움에서 고통이 흘러나왔다. 배가 아파져 오는 거 같았다. 중얼대며 책상으로 뺨을 묻자 막 눈을 감던 뒷자리 녀석이 "괜찮아?" 라며 물어왔다. 도리도리 고개를 젓자 녀석이 "선생님, 스가와라가 어디 아픈가 봐요." 라며 창피하게 큰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도 그 덕에 여학생들 사이에 묻혀 있던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잔뜩 걱정을 품은 그가 다가와 무릎을 굽히더니 책상에 파묻힌 자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서늘하고 기다란 손가락이 뻗어와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커다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많이 아파?"


아, 정말요? 아마 질투로 제 안이 다 꼬여버렸나 봐요. 하얗게 질렸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 제 것도 아닌 남자에게 독점욕을 보이고 질투를 품고, 정말 치졸하고 어이가 없고 창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스가와라는 꾹 입술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겠다, 자습들 하고 있어. 스가와라군 양호실에 데려다주고 올게."


그가 딱딱하게 말하며 배를 감싸 안은 팔을 떼어냈다. 그리곤 그 팔을 붙잡아 제 목을 두르게 하였다. 훅 가까워진 그의 몸과 거기서부터 피어오르는 체향에 스가와라는 꾹 눈을 감았다. 불편해도 참아, 그가 귓가로 떠들어 댔지만 불편하긴커녕 심장이 쿵쾅거려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거기다 번쩍, 의자에 닿아있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받혀 안아 든 그 때문에 비명까지 지를 뻔했다. 아파서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진짜 아파도 괜찮은데.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며 스가와라는 꽉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픈척 그의 어깨와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한 품에 안겨 양호실로 가는 길, 한창 수업 중인 복도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울리는 것은 자신의 숨소리와 그가 신은 구두 소리뿐이었다. 어쩌지, 너무 조용해. 이러다 심장이 쾅쾅 울리겠어. 스가와라는 제 마음이 들키기라도 할까 숨을 꾹 참았다.


"숨 쉬고, 힘 빼. 안 무거우니까."

"...그...그게 아니라."

"여자애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가벼워, 스가와라군. 잘 먹고 있는 거야?"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그를 올려보자 그가 웃으며 눈을 마주해왔다. 대답은? 종용하는 물음에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잘 먹는데 왜 이렇게 가벼워?"

"으아, 내...내려주세요!"


장난스레 그가 받쳐 안고 있던 몸을 흔들어 댔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놀라 파득거리자 그가 웃으며 '미안, 미안' 이라며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사과만 해왔을 뿐, 내려주지는 않았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잘 챙겨 먹어."

"네.."

"아프지도 말고."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묻었다. 싫어요, 아플래요. 또 아프면 선생님이 이렇게 안아줄 테니까. 그 대답을 숨으로 뱉어 쉬면서.




***




학교가 소란스러웠다. 복도와 교실을 둥둥 떠다니는 소문 때문이었다. 형체도 없이 악의도 없이 입과 입을 통해 불어나고 넘쳐나고 흘러다니는 이야기에 스가와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너무너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짜야, 오늘 아침에도 오이카와 선생님 차 타고 출근했데. 1학년 남자애가 주차장에서 만나 인사도 했다고 그랬어."

"와, 음악 선생 그렇게 안 봤는데! 선생님은 내껀데에!!!"

"그래도 둘이 잘 어울리기는 해. 음악 선생님 예쁘잖아."

"예쁘면 뭐해. 우리 오이카와 선생님이 백만 배는 더 아까운걸."

"맞아, 난 이 연애 반대야. 절대로 반대야!"


소란스러운 여자아이들의 질투와 분노와 시기를 들으며 스가와라는 멍하니 책상 위에 펼쳐진 수학 노트를 보았다. 온갖 기호와 공식이, 자신이 그려놓은 도형들이 꾸물꾸물 기어 나와 이리저리 뒤섞이고 있었다. 눈을 깜빡여도 그 괴물 같은 형체는 더 불어나기만 할 뿐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게 제 안에 도사린 마음의 형태라 스가와라는 외면하지 못했다. 그저 망가지는 제 노트를 지켜보는 수밖에는 없었다.


음악 선생이라, 스가와라는 머릿속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언제나 단정한 투피스 차림에 긴 생머리를 가지런하게 넘긴 여자. 수수한 립스틱을 발랐고 신발은 언제나 플랫 슈즈였다. 늘 품에는 지휘봉과 음악 교과서를 안고 있었으며 웃는 얼굴이 살짝 청순해 남학생들의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가슴은 다른 이가 울렸지만.

그녀를 그리고 뒤이어 자신을 울린 남자를 그려댔다. 퍽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래서 더 속상했다. 이 부유하는 소문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두 사람이 연인처럼 묶이고 보인다는 사실이 싫었다. 속상했다. 미웠다. 괴로웠다. 그래서 그날, 스가와라는 방과 후 처음으로 오이카와 토오루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끔 여자아이들이 장난스레 '이상형'을 물을 때 오이카와 토오루는 곤란한 얼굴로 "마음씨가 고운 사람" 이라 뻔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이 시기와 질투로 범벅된 자신은 아주 간단한 그 커트라인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속상했다. 차라리 "청순한 여자가 좋아." 라던가 "음악 선생 같은 사람이 좋아." 라고 말해요. 그럼 제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져 흔적도 없이 타오르겠지만, 적어도 깨끗하게 포기할 수는 있을 거 같으니까.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마음을 끌고 집으로 돌아와 공부하려 책상 앞에 앉았으나 떠오르는 것은 자신이 그린 음악 선생과 오이카와 토오루 뿐이었다.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고 마주 웃고 입을 맞추는 상상들이 줄지어 춤을 추며 머릿속을 괴롭혔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서 학생도 제자도 아닌 당당한 한 사람으로서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스가와라 코우시가 되고 싶었다. 그와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고 마주 웃고 입을 맞추는 사람이 자신이 되고 싶었다. 자신이기만을 바랐다. 아 괴로워, 스가와라는 더운 숨을 토해내며 딱딱한 책상으로 얼굴을 묻었다. 그의 생각으로 붉게 달아오는 얼굴은 차디찬 책상의 온도에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싫다, 밉다, 그렇게 생각해도 사실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지켜보고 아파하고 죽어가는 수밖에. 차라리 실체가 되어 눈앞에 나타나면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지만 이렇게 속앓이를 하는 것보다야 나을 거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마치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음날 체육 시간. 체육복을 입은 여학생이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음악 선생님하고 사귄다는 게 진짜예요?!"


장난스레 던진 농담과 같은 말이었지만, 그녀의 그 질문에 막 스트레칭을 하며 흙바닥에 운동화를 털어내던 여러 아이들이 귀를 세웠다. 그 틈에 스가와라도 있었다.


막 축구 시합을 위해 남학생들의 팀을 나눠주던 그가 웃으며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라고 가볍게도 물었다. 그래서, 사귀는 거야? 아닌 거야? 조마조마한 마음에 다리가 절로 달달 떨렸다. 애들이 다 그 이야기해요! 그녀의 말에 오이카와 토오루는 "나쁜 소문이네." 라며 넘겼다.


나쁜 소문, 말 그대로 소문이라는 소리에 스가와라의 기분은 순식간에 땅 아래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입술을 타고 나오는 '소문'이라는 단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그가 건넨 망사 조끼를 입고 운동장을 누볐다. 동글한 축구공이 저에게 닿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A팀의 수비수로서 최선을 다해 뛰어다녔다. 이마를 뺨을 그리고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이 이토록 기분 나쁘지 않다니, 처음이었다. 그렇게 50분의 수업을 끝내고 나자 제 안을 괴롭히던 감정은 꾹꾹 밟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그와의 수업을 끝내며 던지는 인사도 깔끔하고 힘차게 흘러나왔다.


"수업 수고했고, 반장은 잠깐 나 좀 보고 가."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자신을 부르는 말에 스가와라는 심장이 콩콩 뛰었다. 삼삼오오 모여 교실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내고 빠른 걸음으로 가 그의 앞에 섰다.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괜찮아 보이네?"

"네?"

"아니, 어제 수업 끝나고 교무실에 안 왔길래."


아, 걱정 섞인 그의 말에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게요, 선생님에 대한 나쁜 소문을 들어서요. 그 소문을 듣고 너무 아프고 괴롭고 슬픈 데다 덧붙여 선생님이 밉고 싫고 또 밉고 싫어서 그랬어요. 목을 맴도는 투정의 말을 뱉지 못하고 스가와라는 슬쩍 뺨만 긁었다.


"어디 아픈가 했더니, 아까 축구하는 거 보니 괜찮아 보이고."


그리 말하며 그가 손을 뻗어왔다. 시야로 쑥 들어오는 커다란 손에 스가와라는 꾹 눈을 감았다. 그의 이름에 들어간 강이라는 한자만큼이나 시원한 체온이 뺨에 닿았다.


"무리는 하지 마, 얼굴이 다 붉다. 너무 뛴 거 아니야?"

"아...아닌데-"


슬쩍 눈을 떠 그를 올려보자 그가 웃으며 손바닥을 떼어냈다. 안돼,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닿아주세요. 스가와라는 제 양옆에 나란히 내려앉은 손을 꼼실댔다. 그대로 뻗어 떨어지는 그의 온기를 붙잡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 수업 수고했고 방과 후에 보자."


네! 크게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며 돌아가라는 그의 말에 꾸벅 인사를 건네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쉬는 시간이 다 사라져 버렸지만 상관없었다. 뺨에 닿은 그의 온기만으로도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 내 선생님. 사랑하는 내 선생님. 학교 건물로 뛰어들어가며 스가와라는 아직 남아있을 그를 한 번 더 눈에 담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시야의 끝에 온전하게 반짝이는 그와 "오이카와 선생님!" 이라며 반갑게 그를 부르는 음악 선생이 걸렸을 때, 다시금 기분은 뚝 떨어져 바닥으로 처박혔다. 방금까지 정말 즐거웠는데, 행복했는데. 둥실둥실 떠다니던 기분은 순식간에 조각이 나 사라져 버렸다. 이런 저를 모르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스가와라는 놓치지 않고 눈으로 좇았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뭐가 그렇게 우스워요? 뭐가 그렇게 행복해요? 당장에라도 달려가 아득아득 묻고 싶어 애가 탔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애꿎은 손바닥에만 깊게 손톱을 눌러댔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모습이 이내 눈에서 사라지자 스가와라는 무너져 내렸다. 엉엉 쏟아지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이대로 흐르고 흘러 자신의 발목을 적시고 학교를 잠그고 세상을 가라앉혀 모든 걸 끝내고 싶은 기분만이 들었다. 나쁜 소문이 실체화되어 물들고 또 물들었다. 언제나 그로 인해 물들고 싶다 생각했지만, 이렇게 물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또 어디 아파?"


얼마나 그렇게 울었을까, 머리 위로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뒷자리 녀석이었다. 아직 교실로 돌아가지 않았는지 체육복 차림의 녀석이 시야에 번져 흔들거렸다. 아냐, 안 아파. 씩씩하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입을 여니 울컥 울음소리만 터져 나왔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지 조금도 알 수 없었지만, 억지로 일으키는 녀석의 손은 밀어낼 수가 없었다. 덜렁덜렁 대충 잡은 손에 이끌려 복도를 걸었다. 꼭지가 덜 잠긴 눈은 계속해서 물을 줄줄 쏟아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우는지, 물어볼 법도 한데 녀석은 침묵을 지켜준 채로 양호실까지 데려다주었다.


"선생님, 얘 아프데요."


아프다는 거짓말을 대신 대준 덕분에 스가와라는 빈 양호실 침대를 홀로 차지하고 누웠다. 푹 쉬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녀석을 보내고 하얀 이불을 뒤집어썼다. 수업 종이 여러 번 울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체육복도 갈아입어야 하고,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 머릿속을 지배한 두 사람의 모습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훌쩍, 서러워서 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팔을 뻗어 근처의 티슈를 뽑아 크게 코를 풀었다. "많이 아프니?" 양호선생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꺽꺽 소리를 내며 울까 대답은 할 수 없었다.


마치 전등이 나간 것처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정신도 깜빡였다. 지쳐 잠이 들었다 깨어나 울었고 지쳐 꿈을 꾸다 깨어나 현실에 아파했다. 얼마나 그렇게 스위치를 내리고 올렸을까, 이마를 스치는 찬 손길에 쓰리기까지 한 눈을 올려 뜨자 아직 꿈을 꾸는지 아니면 스위치가 여전히 나갔는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눈에 들어왔다. 무너지고 울던 자신을 두고 돌아선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아 꿈이구나.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가지고 싶어서, 곁에 두고 싶어서 엉엉 울었더니 꿈에 찾아와주신 모양이었다. 다정한 선생님. 스가와라는 슬며시 이마에 닿아있는 손 위로 제 손을 꾹 덮었다. 환상이 녹아내려 사라질까, 꿈이 조각나 사라질까 겁이나 꾹 덮었다. 이마로 퍼지는 시원한 체온이 조금은 들쑥날쑥했던 기분을 가라앉게 해 주었다.


"수업이 끝나도 안보이길래 교실에 갔더니 물건은 그대로 두고 사라졌더라."


네, 오늘 계속 여기 있었어요.


"애들에게 물어보니 체육 시간 이후로 아프다며 수업 안 들어왔다며. 요즘 왜 이렇게 아파?"


모르겠어요. 그냥 막 아파요. 선생님만 보면 너무너무 아파요.


"왜?"


모르겠어요.


"왜 나만 보면 아픈데?"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 아파요. 답을 알면 나을 수 있을까요.


아니, 안 나아도 괜찮아요. 스가와라는 잡고 있던 손바닥을 내려 아까 닿았던 것처럼 뺨에 대었다. 묻었다. 눈물 자국으로 엉망인 얼굴을 감추듯 그의 손에 제 추한 꼴을 감추었다. 지독한 열병이라도 좋았다. 낫고 싶지 않았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병이라면 콜록콜록 기침하고 끙끙 앓아도 낫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선생님 손은 약손이네요."


닿아있는 이 커다란 손 하나로 이렇게 기분이 나아졌다. 눈물도 쏙 들어갔다. 마음이 넘실넘실 흘렀다. 소중한 것을 품듯 꽉 그의 손을 다시금 쥐며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이 단꿈에서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




눈을 떴더니 양호실 밖은 어둠으로 컴컴하게 뒤덮여 있었다. 얼마나 잔 거지? 띵하니 울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허리를 세우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양호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열을 쟀다.


"열은 없는데, 아직 많이 아파? 부모님에게 연락 드릴까?"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꾀병에 가까웠기에 스가와라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많이 울고 많이 잤으니 기분이 나아져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했다. 꿈속에서 손을 내어주고 소곤소곤 자장가를 불러주던 이가 사라지니 다시 서글퍼졌다. 당연한 건데, 선생님이 곁에 있을 리가 없는데, 있어 줄 리가 없는데. 간절한 바람은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헛된 기대는 사람을 불쌍하게 만들었다.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양호선생의 권유를 거절하고 복도로 나오자 모두가 떠난 후 남겨진 어둠만이 짙게 내려앉았다. 드문드문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퍼석한 숨을 내쉬어 보았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내일이 오는데 도대체 얼마만큼의 밤이 물들고 아침이 피어나야 그와 자신의 거리가 좁아지는 걸까. 얼마만큼의 내일이 떠오르고 오늘이 드리워져야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어린 시절, 아빠의 넥타이를 두르고 엄마의 구두를 신는 것으로 어른이 된 기분을 맛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허튼 생각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어둑한 어둠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돌아선 복도에서 놀랍게도


"멍하니 서서 무슨 생각을 해?"


오이카와 토오루를 마주했다. 제 교복, 그리고 가방을 들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어둠속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그를 만난 순간 스가와라는 시간이, 영원이 뚝 멈추는 기분을 맛보았다. 지금 이 순간만이 피어나고 존재하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방금처럼 깨어나는 꿈이 될 것 같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스쳐 가는 바람이 될 것 같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을 대신해 그가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용한 복도로 울리는 구두 소리를 귀로 꾹꾹 담아내며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눈 부었다."


많이 아팠어? 따라붙는 다정한 말에 스가와라는 대답대신 서둘러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세상에, 창피해. 이런 우스운 꼴을 내보이다니.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고 숨고 싶었다. 왜 그래? 그가 웃음기 가득한 물음을 던졌지만 "창피해서요." 라는 대답은 정말로 창피해서 손바닥 아래에서 웅얼거림으로 울려 사라졌다.


"뭐가 창피한데?"

"눈 부운거요.."

"별로 안 부었어. 괜찮아."

"방금 부었다고 그러셨잖아요.."

"살짝, 아주 살짝."


살짝 일리가 없었다. 그렇게 울었는데 살짝 일리가 없었다. 아마 개구리처럼 왕방울 같은 눈이 되어 있겠지. 그런 꼴로 그의 앞에 서다니, 잘 보여도 모자랄 판에 너무도 못난 모습에 속이 다 상했다. 하지만 그 가벼운 저항도 잠시, 뻗어온 커다란 손이 멋대로 스가와라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였다. 버티려고 힘을 넣어 보았지만 어른에게는 당할 수가 없었다. 슬며시 떨어진 손바닥 사이로 그가 어둑한 빛을 받고 서 있었다.


"봐, 괜찮아."

"거짓말..."

"난 거짓말 안 해."

"그것도 거짓말이에요."


나쁜 소문이라면서요, 그런데 그렇게 다정한 모습은 뭐였어요? 낮에 보았던 두 사람을 떠올리니 또 울컥해서 목소리가 다 흔들렸다.


"짐 챙겨왔어. 집까지 데려다줄게."


한 팔, 한 발자국, 한 뼘.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던 그 거리만큼 이렇게 가까워졌는데, 연분홍빛 마음은 물들어 이제 붉게 질척이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이 거리가 멀게만 느껴질까. 스가와라는 제게 뻗어진 오이카와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다 서러워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그 마음과는 별개로 자신에게는 그를 거절할 용기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멍청하게도 기쁘기까지 했다. 공중에서 흔들리는 그의 손이 거두어질까 두려워 간절하게 붙잡으며 스가와라는 굳어있던 다리에 힘을 실었다. 앞서 걷기 시작하는 그를 따라 조용히, 아주 조용히 걸었다.


깜깜히 내린 밤거리로 나오자 모두가 빠져나간 운동장에 그의 차만이 덜렁 서 있었다. 듬성듬성 켜진 가로등 아래에 놓인 그의 차는 새것도 그렇다고 멋진 것도 아니었지만 왕자님이 타고 다니는 차라 그런지 스가와라 눈에는 백마처럼 보였다.


"타시죠."


문을 열어주는 친절에 스가와라는 홧홧해진 뒷목을 슬쩍 쓸며 후다닥 앞자리에 올라탔다. 이 자리에 아침마다 누가 타는지 혹은 누구의 전용인지는 이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벨트."


운전석으로 돌아 타는 그의 말에 서둘러 옆에 놓인 벨트를 집어 쭈욱 당겼다. 찔러 넣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긴장한 탓인지 손이 자꾸만 엇나갔다. 그 우스운 꼴을 놓치지 않은 그가 다정하게도 대신 달칵, 하고 잠가 주었다. 스치듯 포개졌던 손이 뜨거웠다.


"집 어디야? 학교에서 멀어?"

"네. 아, 아뇨!"

"하하, 어느 쪽이야?"


멀어? 가까워? 차를 출발시키며 그가 물었다. 멀지 않아요, 아쉬운 소리를 내며 스가와라는 집 주소를 뱉어 불렀다. 멀었으면 좋을 텐데. 이 순간이 길게 늘어지고 이어지도록. 저도 모르게 뱉었던 '네'라는 대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제 마음과는 달리 집은 늘 그곳에 있었고 가까웠다. 어디론가 떠나보낼 수도 그렇다고 옮길 수도 없었다.


찬찬히 구르기 시작하는 차체를 느끼며 스가와라는 조금 긴장된 몸을 시트에 푹 눌러 앉혔다. 너무 조용한가?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대며 라디오로 손을 뻗었다. 조용한 게 더 좋은데. 그의 숨, 호흡소리를 가늠하고 세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애매한 틈으로 음악이 흐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지직지직 대충 맞춘 라디오 속에서 조용조용한 DJ가 누군가의 짝사랑 사연을 소개했다. 사랑하는 이로 인해 외롭다가도 외롭지 않다는 여자의 사연에 DJ는 "원래 사랑이 다 그런 거죠. 손에 있지만 가끔은 없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은 충만하게 차 있는 기분이 들잖아요. 모두가 다 그래요." 라며 떠들었다. 그 조용한 말을 들으며 스가와라는 흩어지는 빛 아래로 춤추는 제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텅하고 빈손에는 무언가 깃들었던 흔적이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가질 수 있다면, 외로움도 행복할 텐데. 두렵지 않을 텐데. 백지와 같은 손바닥 아래로 Silenced By The Night라는 노래가 나왔다. 스가와라는 모르는 노래였지만, 곁에 앉은 그는 아는 노래였는지 흥얼대는 부드러운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허밍에 가까운 노랫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너무 운 탓인지 감기는 것이 뻑뻑해 아프기까지 했다. 자? 그가 물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달린 차는 생각보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 앞에 도착했다. 흔들어 깨우는 그의 목소리에 무거운 눈을 천천히 뜨자 익숙한 동네 풍경이 보였다.


"들어가서 푹 쉬고, 잘 자고."


그의 말에 달칵, 벨트를 풀어내며 스가와라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내리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스가와라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채 잡지도 못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핸들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에 머릴 기댄 그가 물끄러미 저를 보고 있었다. 왜요? 왜 불렀느냐 물어야 하는데 그의 눈빛이 어쩐지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달싹이는 입술처럼 심장이 요란하게 떨려댔다. 침묵에 가라앉은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아 꾹 문고리를 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다가왔다. 빠르게, 하지만 천천히. 슥, 제 쪽으로 몸을 뻗는 그를 두 눈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리곤 그의 입술이 시야로 들어오는 순간, 꾹 눈을 감았다.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키스를 한 적은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이 그 순간이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닿을 거라 생각했던 입술은 기다려도 마주해 오지 않았다.


"스가와라군."


대신 아주 가까이서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울렸다.


"안돼, 눈을 감으면."


그의 말에 슬며시 눈을 떴다. 한 뼘을 훌쩍 넘은 아주 가까운 곳, 바로 앞에서 그의 두 눈동자와 마주했다. 멍청한 얼굴을 한 자신이 담긴 그 눈동자에 얽혀 스가와라는 가만히 그의 움직이는 입술만 바라보았다.


"이럴 땐, 눈을 감는 게 아니라 '싫어요.'라고 해야지. 나쁜 어른이 접근하면."


부모님에게 안 배웠어? 그가 가볍게 말하며 훅 거리를 벌렸다. 떨어지는 그를 아쉬워하며 스가와라는 "선생님은 나쁜 어른이 아니잖아요."라고 칭얼거리듯 중얼댔다.


"죄책감이 드는 대답이네."

"..."

"얼른 들어가, 부모님 걱정하신다."


한 번 더 가까이 몸을 붙인 그는 입술 대신 손을 내려 문고리를 잡은 손등을 덮어왔다. 그리곤 친절하게도 힘을 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자신이 바란 친절은 이게 아니었지만, 그에게 입맞춤을 조를 수는 없었기에 스가와라는 애써 다리를 뻗어 밤공기로 몸을 던졌다.


"잘 자고, 내일 보자."

"네, 선생님도요."


탁, 차 문을 닫으며 인사를 건넸다. 차창 너머로 그가 밝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곤 떠나갔다. 조용한 거리에서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스가와라는 애써 넣었던 힘을 풀었다. 풀썩,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선생님은 나쁜 어른이 아니라 대답했지만, 제게 입 맞추지 않은 그는 조금 나쁜 어른이었다. 두근대는 심장으로 머리가, 몸이, 마음이 엉망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둥글게 굽혀진 무릎을 꾹 쥐며 스가와라는 겨우 조심스레 숨을 뱉었다.


"선생님."


그리고 절대로 뱉을 수 없는


"좋아해요."


고백을 홀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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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청춘 스가와라 코우시를 쓰고 싶었으나 장렬하게 망함.

원래는 별 생각 없다가 최애컵 교류회인데 뭐라도 내야겠다 싶어서 급하게 작업했는데..

역시 밤 지새우며 몰아 써서 넘 구리고요^_ㅠ

다들 제목을 욕처럼 읽으실까 걱정했는데 R18로 읽으시는 것을 보시고...! 괜한 기대감을 드려 뎨송합니다.

그럼에도 집어가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흑흑 2회때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