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남자는 휩쓸린다.
2015. 11. 16. 12:20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들 "진짜요?" 라고 신기함을 담아 놀라거나 혹은 "에이, 드라마 너무 보셨다." 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운명적인 사랑은 31세, 스가와라 코우시의 유일한 신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랬는데-



"싫다고 했잖아요."

-"싫은 게 어딨어. 만나보고 싫으면 싫은 거지. 만나지도 않고 싫은 게 어디 있어?!"

"저 이런 자리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어머니."

-"그럼 언제까지 독수공방할 셈인데? 네 흐르는 청춘이 아깝지도 않니?"



제 청춘은 죽을 때까지일 거예요. 그런 감성적인 감상을 뱉으려다 스가와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침부터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이 들 때는 역시 받지 않는 게 맞는 거였는데.. 이미 늦어버린 제 선택을 후회하며 스가와라는 피곤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네가 직업이 없어? 어디 문제가 있어? 사지 멀쩡한 남자애가 연애 한 번 안 하고 집 구석에서 식물이나 기르면서 지내는 게 부모 입장에선 얼마나 속 터지는 일인 줄 아니?"

"직업이 플로리스트잖아요. 식물 기르는 건 제 일의 연장선이자 취미에요. 그리고 저 연애해 봤다니까요."

-"누구? 어디 사는 누구? 단 한 번도 소개한 적도 없으면서 거짓말 하지 마!"



소개할 만한 그런 만남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스가와라는 스피커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어머니의 잔소리에 살짝 귀를 떼었다 다시 대었다. 



"알았어요. 만나는 볼게요. 하지만 그냥 만나만 보는 거에요. 다신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엄하게 그리고 화난 듯 목소리를 내어 부탁했지만 아마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뚝,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며 스가와라는 두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비볐다. 오늘은 오늘 나름의 일정이 있었는데. 느지막이 일어나 적당하게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아침을 해결하고 베란다에 놓인 선인장들과 허브들의 상태를 확인한 후, 오후에 마들렌을 구워 먹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들렌과 함께 사온 새 티백으로 홍차를 우려 얼마 전에 사놓고 읽지 못한 소설책을 읽고 그 후에는 TV에서 해주는 영화로 주말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만남 주선이라니, 그것도 결혼 정보 회사의 매칭 프로그램으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마구잡이로 입을 타고 흐르는 한숨을 숨기지 않으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물론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다. 특히 30살이 되던 해부터 끈질긴 "결혼은 언제 할 예정이니?" "만나는 사람은 있니?" "여자친구 있으면 소개 좀 해봐."라는 어머니의 질문을 시작으로 집으로 배달되는 온갖 아가씨들의 사진들이 이 상황을 예고하고 있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아들 동의도 없이 멋대로 결혼 정보 회사에 프로필을 등록시키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본인 의지도 아닌데 프로필을 등록시킨 회사 자체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회사가 매칭시키는 인연이라면 보지 않아도 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저리도 어머니가 걱정하는데 안 나갈 수는 없었다. 속는 셈, 그냥 잠깐 커피 마시는 셈 치고 다녀와야지.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또다시 잔소리 섞인 어머니의 전화로 아침을 맞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스가와라는 깔끔하게 잘 닦인 유리 너머에서 칫솔을 문지르며 다시금 거품과 함께 한숨을 뱉어냈다. 

양치를 끝낸 후, 토스트와 반숙 달걀 프라이 그리고 적당한 소금과 후추를 곁들여 아침 식사를 끝냈다. 옷장을 뒤적여 단정해 보이는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마지막으로 양말까지 꿰어 신고 거울 앞에 서니 나쁘지 않은 자신이 피곤한 얼굴로 저를 들여보았다. 



"이 정도면 나쁘진 않은데.."



나쁘긴커녕 좋은 편 아닌가. 나름대로 전문직이었고 자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번화가에 큰 가게를 담당하고 있었다. 자취한 기간이 길어 청소나 요리도 자신 있었고, 어려서부터 손재주도 좋았다. 거기다 외모도 이 정도면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정도라고 스스로는 생각했다. 실제로 가게에 오가는 손님들에게 여러 번 번호도 받아보았고, 제 나이보다 3, 4살은 모두 어리게 봐주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번번이 연애는 실패였다. 몇 번 다가온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만남을 가져봤지만 다들 "스가와라군은 나보다 더 여성스러운 것 같아." 라던가 "스가와라군과 있으면 스스로를 시험하는 기분이야." 라던가 "스가와라군하고 있으면 자꾸 나 자신과 비교하게 돼!" 라며 퇴짜를 놓는 것이었다. 그냥 같이 쇼핑 가서 옷을 골라주고, 내 것을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든 머플러를 선물하거나 작은 악세사리를 선물하고 초대해 요리를 대접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요즘에 이런 남자 흔치 않아!" 라고 했으면서 다들 금세 이상하다는 둥, 정상이 아니라는 둥 하며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만남은 언제나 일회용 수준이었다. 애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모님에게 소개할 만한 만남은 전혀 없었다. 


그런 만남이 계속되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우습다는 걸 알면서도 <운명적인 만남>을 바랬다. 이런 자신이라도 괜찮다고 해줄 사람. 이런 남자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좋아해 줄 사람 같은 상대를 바랬다. 남이 만든 자리에서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에 미팅이나 선자리는 질렸다. 실제로 그런 자리에선 가면을 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스가와라 코우시를 연기해야 애프터를 따낼 수 있었기에 더더욱. 그러니 다 싫었다. 귀찮고 또 귀찮았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뿅! 하고 영화처럼 그냥 모든 게 일어나길 바랐다. 뭐, 여기서부터도 누가 말했듯 너무 소녀적인 감성이긴 했지만.


뭐 사실 지금은 혼자 지내도 찾아오는 외로움에는 익숙해졌고 불편한 것도 없어서 '이대로 혼자 늙어 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수준에 이르렀지만, 그런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꺼냈다가는 도쿄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끌려가 그날 그대로 얼굴도 모르는 상대와 식을 올리게 될 것만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그냥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고 생각하자."



가볍게 나가 인사를 하고, 적당한 대화를 하다가 나오면 그만이었다. 애프터 신청은 보통 남자의 몫이었으니 조금 나쁘게 들릴지 몰라도 그리 부담 갖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렇게 가볍게 마음먹고 집을 나서는 길, 어머니로부터 약속 장소가 메시지로 도착했다. 호텔 스카이라운지라니, 이번에야말로 장가를 보내겠다는 그녀의 확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장소였다. 이렇게 되면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와인 한 잔이 될 것 같은데. 술은 전혀 하지 않았기에 억지로 포도주에 대해 대화하며 떠들 생각을 하니 절로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과는 달리 발걸음은 착실하게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일단은 첫 만남이니 너무 나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매장에 들러 작은 꽃다발을 부탁했다. "데이트는 아니고, 또 선 보러 가요?" 라며 주말 알바생이 익숙하게 참견해왔다. 색색의 국화와 연한 색상의 작은 장미들이 적당하게 들어간 꽃다발을 받아들며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거 선물해서 매너 좋은 척, 괜찮은 남자인 척 굴어도 결국 또 퇴짜 놓으실 거잖아요."

"어차피 마음에 들어 애프터 신청해도 한 두 세 번 만나면 상대가 퇴짜 놓을걸."

"우리 점장님, 얼른 장가가야 하는데. 확 휘어잡아주는 멋진 사람에게."



알바생의 귀여운 참견에 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스가와라는 매장을 나섰다. 뭐 장가든 멋진 사람이든 이제 아무래도 좋다니까. 그냥 집으로 배달되는 귀한 아가씨들 사진이나 어머니의 전화만 사라져도 좋을 것 같았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 사이로 손에 쥔 국화 꽃들의 향기를 맡으며 메시지에 적힌 호텔에 도착했다. 주말 낮이라 그런지 익숙하게 데이트를 나온 연인이나 비지니스로 오가는 수트 차림의 사람들을 지나치며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위로 향하는 버튼을 살짝 누르고 물러서기 위해 한 발 뒤로 빼는데-


"아!"


툭, 하고 등과 무언가가 부딪혔다. 동시에 촤라락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요란하게 바닥으로 흩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돌아보니 장신의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저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었을 아이스 커피 컵은 반질반질 잘 닦인 대리석 바닥에 쏟아져 있었는데 아마도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분명해 보였다.



"세상에, 죄송해요."



커피도 커피였지만 그의 하얀 셔츠에 물들어가는 갈색 자국이 더 문제였다. 스가와라는 서둘러 제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몇 년 전에 취미로 했던 프랑스 자수로 하나하나 스스로 이름과 꽃을 수놓은 아끼는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물들어가는 사내의 셔츠가 문제였지.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절대로 비싸 보이는 셔츠였다. 사내의 잘생긴 얼굴과 장신과 벌어진 어깨에서 풍겨오는 분위기가 그 셔츠를 그리 보이게 만드는지도 몰랐으나 어쨌거나 스가와라의 눈에는 물들어가는 셔츠는 비싸 보이는 것이었다. 어쩌죠?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보니 그가 웃으며 손수건을 채갔다. 



"괜찮아요, 그보다 손수건이 물들어서 어쩌죠."

"네? 아뇨. 뭐 다시 만들면 되니까요, 괜찮아요."



손수건 따위야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 셔츠라니까. 호텔에 온 걸 보면 중요한 약속이나 일이 있는 사람일 텐데. 초조해져 차게 식은 손으로 스가와라는 서둘러 지갑을 꺼내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세탁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이거라도-"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어차피 쏟아 버릴까 어쩔까 생각하던 와중이었거든요."

"네?"

"이 정도면 첫인상 최악이겠죠? 간장처럼 보이나요? 먹다 쏟은 것처럼 보이면 좋을 거 같은데."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물어왔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몰라 스가와라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보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간장처럼 보이긴 하니까. 끝까지 돈을 받지 않는 그를 포기하고 스가와라는 먼저 그를 엘리베이터에 올려보냈다.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싱글싱글 웃으며 "감사합니다." 라는 뜻 모를 인사까지 건네왔다. 



"그러니까.. 뭐가."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태어나서 누구 옷을 버리게 하고 감사 인사를 들을 줄은 몰랐기에 어안이 다 벙벙했다. 하지만 곧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언제까지고 멍 때릴 수는 없었기에 바닥을 청소하는 호텔 직원들을 도운 후 서둘러 다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호텔 스카이라운지가 있는 최상층을 누르고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다행히 커피가 쏟아지며 바짓단에 튀기는 했으나 썩 티가 나지는 않았다. 단지 남자의 수습을 도와주며 팔과 허리 사이에 끼워 넣었던 꽃이 눌려 좀 모양새가 나빠졌을 뿐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망가진 꽃다발 정도야. 어차피 진지하게 무언가 이루려 하는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가벼운 생각과 함께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스카이라운지 내 레스토랑 입구로 향하자 지배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명단을 확인했다. 어색하게 제 이름을 또박또박 뱉어 말하자 그가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커다란 창 너머로 진한 가을 하늘이 보기 좋게 펼쳐졌다. 확실히, 집에서 식물들과 보내기엔 아까운 날씨였다. 



"여기입니다. 스가와라 코우시상 도착하셨습니다."



지배인이 안내한 자리, 그 앞에 서자 분홍색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인을 마주했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어? 스.. 스가와라 코우시상?" 이라며 물어왔다. 



"네, 제가 스가와라 코우시인데요."



끄덕이며 가볍게 말하자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어라,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인데요?" 라며 가방에서 서둘러 파일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까만 파일에 적힌 [행복 결혼 정보회사] 라는 글자를 보니 그녀는 오늘 상대가 아니라 매칭 담당자인 것 같았다. 그러면, 자신의 상대는-



"어라, 또 만나네요."



스가와라는 굳은 목을 돌려 애초에 담당자라 생각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방금 아래층에서 만난 그 사내가 잔뜩 엉망인 셔츠차림으로 웃고 있었다. 무척 여유 있어 보이는 그와 달리 담당자는 잠깐 실례하겠다며 서둘러 휴대폰을 챙겨 자리를 빠져나갔다. 



"..."



어쩌라는 거지.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빈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은 이 자리가 제자리는 맞는 모양이니 차지하고 앉았지만, 여자가 앉아있을 거로 생각했던 자리에 번듯한 사내가 차지하고 있으니 여간 어색한 게 아니라 침이 자꾸만 넘어갔다. 그런 자신과는 달리 그는 "물 드세요." 라며 컵에 물까지 채워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곤 식사하셨어요? 뭐 좋아하세요? 라며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져왔다. 



"..."



이 사람은 왜 당황하지 않는 거지. 스가와라는 말없이 그가 건넨 메뉴판을 받았다. 그리고 서둘러 식사가 아닌 커피를 시키기 위해 마구 뒷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무언가 시켜야 한다면 가장 빨리 마시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커피, 아이스 커피. 



"...세상에. 죄송해요. 회사 시스템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성별을 반대로 프로그램을 돌린 모양이에요. 이걸 어쩌죠?!"



막 드링크 메뉴를 펼쳤을 때, 구두 소리를 내며 달려온 그녀가 정말로 미안하다는 얼굴로 말하며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차피 이 자리에 뜻 없었으니까 상관없어요."



스가와라를 대신해 남자가 대답했다. 어쩐지 자신이 하려던 대답과 꼭 맞아 스가와라는 입을 다물었다.


 

"두 분이 입력한 프로필과, 원하는 상대 정보가 너무 잘 맞아서요! 그래서 이런 일이 생겼네요. 하하. 그럼, 어쩌죠?"

"뭐 이렇게 된 거 차라도 마시고 일어나겠습니다. 저희는."



이번에도 스가와라보다 남자의 말이 더 빨랐다. 뭐, 이대로 헤어지는 것도 이상하죠? 그녀도 동의하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의 가방만 챙겨 일어났다.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하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매칭해 연락 드리겠다, 이어지는 사과를 던지고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별 일이 다 있네요. 그렇죠?"

"그러게요..."



만지작, 메뉴판의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스가와라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나저나 저는 뭐 상관없는데.. 그.. 스가와라상은 괜찮습니까? 오늘 신경 써서 나온 거 같은데."



남자가 테이블에 놓인 꽃다발을 눈짓하며 물었다.



"아뇨, 멋대로 부모님이 등록한 거라서요. 저도 그냥 커피 한 잔 마시러 나온 거라 괜찮습니다. 저기요, 아이스 커피 한 잔 부탁할게요."



드디어 타이밍인가 싶어 서둘러 지나가는 웨이터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그 역시도 "같은 거로 하나 더요." 라며 적당하게 주문해왔다. 



"그래도 상대방을 매칭시키다니, 도대체 상대방 정보를 뭐라 적으셨길래-"



그가 웃으며 담당자가 두고 간 프로필 서류를 멋대로 뒤적였다. 글쎄요, 부모님이 적으셔서. 답답해져 슬쩍 셔츠 단추 하나를 풀며 대충 대답했다. 



"이왕이면 전문직, 아니더라도 상관없음. 결혼 후에도 직업은 필수로 가질 것. 맞벌이에 거부감 없는 여성. 연봉은 최소 240만엔 이상. 자가, 자차는 없어도 됨. 나이는 동갑 혹은 연상, 체력이 좋으면 금상첨화, 살집이 없는 것 보다는 있는 편이 좋고 잔병이 없었으면 좋... 음, 혹시 무슨 누님 구하는 거에요?"

"아..아뇨! 어머니가 적은 거에요. 전 정말 저런 건 상관없거든요..."



줄줄이 그가 뱉는 조건에 귀까지 벌겋게 달아 올랐다. 뭐가 즐거운지 남자는 웃음을 터트리며 "동갑이네요, 체력 좋고 이 정도면 살 집 있는 편인가? 잔병은 당연 없고. 뭐 연봉이나 직업은 걱정 안 해도 되고. 그래서 프로그램이 날 매칭시켰나?" 라며 멋대로 자신과 매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그쪽은요?"

"아, 저도 별로 상관없어요. 적당하게 적어 냈거든요. 저도 부모님 쪽이 얼른 집에 사람 데려오라고 성화라.."



가볍게 말하며 내민 그의 서류를 스가와라는 찜찜한 기분으로 받아들었다. 



[전문직을 가진 여성. 가사 일에 능통할 것, 취미가 요리이거나 청소인 사람. 꽃을 다루거나 베이킹 같은 취미면 더 좋음. 자가 자차가 있을 것. 옷차림 단정할 것. 부모님이 두 분 다 직업이 있을 것. 나이는 동갑 혹은 연하. 키는 보기 좋게 10cm 차이. 얼굴 많이 봄. 마르면 좋음. 안 말라도 상관은 없음. 안으면 한 품에 들어오는 체격. 손목 얇은 게 취향. 섹시한 계열보다는 청순한 계열이 좋음.]



"...미묘하네요."

"우리 어머니가 좋아하는 취향이거든요. 일단은 '여자'를 만나는 자리니까 어머니가 원하는 상에 맞춰 드렸죠. 아 물론, 얼굴 많이 본다는 부분부터는 제 취향."

"일단은 '여자'요?"

"아, 저 게이거든요."



풉, 간단하게도 터져 나온 그의 말에 막 목을 축이려 입에 물던 물을 그대로 뿜었다. 와, 괜찮아요? 그가 뭐가 웃긴지 크게 웃으며 물었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아니 게이가 왜 결혼 정보 회사에 프로필을 등록하는데? 놀라 깜빡이며 눈으로 묻자 "잘 키운 아들이 게이라는 걸 믿을 수 없는 부모님의 횡포죠." 라며 으쓱했다. 아니, 잘 키운 이라는 부분에서 으스댄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래서 끌려 나왔구나. 자신처럼. 뭐 사정은 달랐지만 어쨌거나 원하지 않는 자리에 끌려 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그가 아래층에서 셔츠를 버리고도 여유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첫인상 운운하던 것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상대방 여자에게 저 꼴로 나타나 변변치 못한 남자라는 것을 어필 하려던 것이겠지. 뭐, 그러기엔 셔츠보단 얼굴부터 눈에 들어온다는 게 문제처럼 느껴졌지만. 스가와라는 완벽하게 갈색으로 얼룩져 망가진 셔츠를 슬쩍 쳐다본 후 빈 물잔에 다시 물을 채웠다.  



"어쨌든, 놀랍네요."

"뭐가요."

"우리 부모님이 원하는 상과 제가 원하는 이상형인 남자가 이렇게 나타나다니."



아, 잠깐. 이야기가 잠깐 이상한 데로 흐르는 것 같아 스가와라는 스탑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웨이터가 가져온 아이스 커피가 빨랐다. 유리잔이 내려앉는 통에 말을 자를 타이밍을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거기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나 봐요. 그쵸?"



라고 이어진 그의 말이 솔직히 조금, 아주 조금 스트라이크 존에 와 박혔다. 안돼, 스가와라 코우시. 이런 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하지 않아. 그냥 포장하는 거라고.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에 웅웅 울리고 있었지만 이내 "커피 마시고 뭐 할래요? 여기 스테이크 괜찮던데. 식사라도 할래요?" 라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 망했다. 와인까지 마시고 돌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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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와라 코우시 31세는 아직 상대방 이름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퇴고는 나중에. 아, 결혼정보회사 같은 거 잘 모름 주의;;;;;;;;;; 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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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님 감사드립니다...... 

240엔.. 소박이 아니라 넘나 상그지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