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안개의 나라
2015. 11. 5. 11:21





12월, 이곳의 겨울은 혹독했다. 뜨거운 히터로 온기가 가득 찬 차와 달리 밖 온도는 영하를 쉽게도 넘나들며 끝없는 추위를 뿜어내고 있었다. 반대의 온도가 가져오는 차창의 서린 김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오이카와는 지루함으로 가라앉은 눈에 겨울을 담았다. 이 동네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 지루하고 시끄럽기 짝이 없지. 머릿속에선 건조한 감상만이 떠올랐다. 



"바로 집으로 몰까요?"



미러로 슬쩍 눈치를 보며 묻는 기사의 말에 오이카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호텔을 잡고 싶었다. 영원히 혼자만의 시간을 영위하고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8년 만에 돌아오는 아들이 집이 아닌 호텔 방으로 직행한다면 눈물 바람으로 전화를 돌릴 어머니를 떠올리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 중에 자신은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며 가장 최상품의 자랑거리였다. 정말 귀찮고 싫었지만 오늘은 그녀를 위해 자랑스레 사람들 앞에서 8년간 영국에서 무엇을 공부했고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는지 떠들어야 했다. 덤으로 아버지의 턱 끝을 더 올려드리고.



"지루한데 라디오라도 켜주시겠어요?"



오이카와는 매끄럽게 그리 주문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따뜻한 히터 말고 상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들을 감춰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기사는 서둘러 지직거리는 채널들을 돌려가며 그나마 듣기 편한 방송에 맞춰댔다. 하하, 회장님이나 사모님은 라디오를 잘 듣지 않으셔서요. 지직거리며 돌아가는 채널에 대해 그가 변명했다. 



"어렵게 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그리 딱딱하지 않아요."



긴장으로 가득 찬 그의 변명에 오이카와는 너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마구잡이로 돌아가던 채널이 한 재즈 음악 방송에 멈추었다. 조용조용한 아나운서가 자신과 다른 시간을 살았던 음악가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 아래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면서 들어본 적 없던 어느 음악가의 이름을 홀로 되뇌듯 씹으며 오이카와는 톡톡 팔걸이를 손으로 두드렸다. 정확하게 박자에 맞춰가며. 매끄러운 음악과 함께 굴러가는 차는 조금의 진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편안함을 당연하다는 듯 품으며 오이카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곤 천천히 올려 떴다. 닦아낸 차창에 다시 하얀 김이 서리기 시작했다. 



"기사님, 잠시만요."



점점 뿌옇게 변해가는 시야 속으로 오이카와의 시선에 무언가가 걸렸다. 평온하기 그지없던 목소리에 당황함이 퍼지자 기사는 놀라 급히 차를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놀라 묻는 그에게 이유를 설명할 틈도 없이 오이카와는 차 문을 열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날씨로 구둣발을 뻗으며 열어진 코트 깃을 감출 새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고정된 시선으로는 건너편 길목에 서있는 3명의 경찰과 그 사이에 끼어있는 사내의 얼굴만이 박혀 있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했어! 내가 훔치지 않았다고!!!"

"그럼 이건 다 뭔데?"

"몰라! 모른단 말이야! 내가 훔치지 않았어! 나 아니야!!!"



사내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하고 있었다. 악이 찬 그 말은 조금도 경찰들에게 통하지 않는 듯 보였다. 경찰 하나가 거칠게 그의 품에서 마트 로고가 찍힌 종이봉투를 빼냈다. 그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듯이 버둥거리던 사내의 몸을 다른 경찰이 거칠게 밀어냈다. 그 힘에 금세 몸싸움으로 번졌다. 이 겨울에 어울리지 않게 얇은 점퍼를 걸치고 있는 사내에게 건장한 3명의 사내가 달려드는 것을 보며 오이카와는 최근에 자신이 내었던 목소리 중에서 가장 큰 소리를 골라내었다.



"그거 놔요!!!"



자신의 외침이 이 추위에 얼려 들리지 않는지 경찰들은 무자비로 사내를 바닥으로 밀어트리고 위로 올라타 곧 부러질 것 같은 얇은 팔을 잡아 틀었다. 악, 사내의 짜증 섞인 비명에 오이카와의 걸음이 급히 달리기로 변했다.



"빌어먹을, 당장 그거 놓으라고!!"



바로 앞까지 달려와 외치자 그제서야 경찰들이 놀라 그에게서 떨어졌다.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경찰들을 밀치고 오이카와는 서둘러 바닥에 짓눌린 사내를 일으켜 제 등으로 감추듯 가렸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길래 이런..."

"저희는 신고받고 출동한 겁니다. 그 녀석이 마트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경찰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빼앗은 마트 봉투를 뒤집어 물건들을 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러 가지 통조림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훔쳤다는 증거 있어?! 있냐고!"



뒤로 숨긴 사내가 거칠게 화를 냈다. 



"그럼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했잖아. 스가와라, 네 전적이 이번 한 번이야? 저번 주에도 약국에서 진통제를-"

"영수증은 버렸어. 버리라고 계산대 옆에 아예 박스까지 설치했던데? 그럼 다 같이 가서 그 상자를 뒤지던가. 왜 나에게 지랄-"



자신의 어깨 뒤에서 쏟아지는 거친 언사에 오이카와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를 보자 착하게도 입을 다물었다. 



"변상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하겠습니다. 연락처를 드릴 테니-"



오이카와는 코트 안에서 제 지갑을 꺼냈다. 자신의 이름이 박힌 명함과 함께 지폐 몇 장을 같이 건넸다. 이번 일은 그냥 없던 것으로 넘어가 달라는 부탁과 그렇게 할 그들에게 보이는 감사의 성의였다. 3명의 경찰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다음부턴 조심해."라며 어깨너머의 사내에게 경고하며 그것을 급히 받아 감추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서 길가에 세워둔 경찰차로 사라졌다. 부웅, 연기를 뿜어내며 차가 사라지기 무섭게 뒤에 서 있던 사내가 튀어나와 바닥에 쏟아진 물건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경찰 놈들, 사람 말을 조금도 안 듣지? 돈 없으면 다 도둑으로 몰아가고, 개 같아. 고운 얼굴과는 달리 아주 불량스러운 말투였다. 오이카와는 가만히 서서 무릎 꿇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그의 야윈 발목만 바라보았다. 이 날씨에 양말도 신지 않은 채였다. 운동화는 곧 밑창이 떨어질 것만 같아 보였다. 



"...아, 고맙습니다."



너덜해진 종이봉투에 물건들을 다 담아낸 그는 그제야 고갤 돌려 인사를 건넸다. 그리곤 씩 웃었다. 그 미소는 찰나의 순간 반짝였다 이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와 함께 사라졌다. 



"스가와라 코우시."



오이카와는 그 사라지는 미소를 지켜보며 아주 그립고 익숙하며 제 기억에 쭈욱 남아있던 이름을 뱉어 불렀다. 탁탁 낡은 청바지의 무릎을 털어내며 그가 다시 웃었다.



"저 알아요? 그거 제 이름인데."

"...기억 못 하겠어?"

"못하겠는데.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그쪽처럼 잘나신 분이 없어서..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짝의 빈정거림을 담아 입술이 움직였다. 누구신데요? 그런 호기심을 질문을 가질 법도 한데 그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완벽하게 저를 무시하는 행동에 오이카와는 손을 뻗었다. 가라앉아 있던 눈에서 무언가가 일렁거린 것도 같았다. 마르고 차고 야위고 더러운 그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스가와라 코우시를 처음 만난 것은 미국에 와서 아주 무료하고 심심한 적응 생활을 끝낼 때 즈음이었다. 조금은 따뜻해진 날씨에 산책 가기 위해 가디건을 걸치며 2층에서 내려오던 길, 1층의 로비의 누구도 앉지 않는 그저 장식되어있던 소파 위에 아주 작은 소년이 앉아있었다. 달빛과 같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소년은 푹 고개를 숙이고 꼼지락 꼼지락 제 손가락의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에 온 수영장 청소부의 아들이랍니다." 가디건 위에 자켓까지 걸쳐주며 집사가 말했다. 수영장 청소부라. 오이카와는 어렵지 않게 그녀를 떠올렸다. 이 저택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노란색의 나시티에 요란한 청바지를 입고 수영장에 떨어진 낙엽 따위를 걸러내던 여성. 거칠어 보이는 머리는 높게 하나로 묶고 입에는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며 그 꼴을 본 어머니는 교양이 없다며 혀를 작게 찼다. "자르면 되잖아요?" 솔직한 오이카와의 물음에 어머니는 웃으며 "고작 수영장 청소니까."라며 넘어갔었다. 그 고작 수영장 청소를 하는 여인의 아들이라는 소년은 막 1층 대리석 바닥에 발을 딛는 자신의 구두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아마 어머니와 떨어져 알지도 못하는 곳에 홀로 남겨진 두려움이었을 것이었다. 얼룩이 묻어있는 반팔 셔츠 아래로 야윈 팔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봄이 오고 있다고 해도 그 차림은 너무도 추운 것이었다. 



"빌, 미안한데 제 방에 가서 가디건 하나만 더 가져다주세요."



오이카와는 소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정중하게 집사에게 부탁했다. 백발의 집사는 조금의 궁금증도 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빠르게 그러나 급하지 않게 다시 2층으로 사라졌다. 그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오이카와는 천천히 다가가 소년 앞에 섰다. 



"안녕?"



그리고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의 사업 확장으로 미국에 온 지 이제 막 반년 차, 이 동네에서 자신과 같은 동양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설레는 목소리가 볼품없이 튀어나왔다. 영어가 아닌 반듯한 일본어에 소년은 크게 눈을 뜨더니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안..아..안녕."



긴장했는지 더듬거리는 우스운 인사였다. 그래도 그 인사가, 돌아온 대답이 나쁘지 않아 오이카와는 웃었다. 앉아도 괜찮아? 그의 빈 옆자리를 턱짓하며 묻자 소년이 서둘러 엉덩이를 옆으로 밀어주며 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오이카와는 털썩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여기서 뭐 해?"

"어..어머니가 일을 끝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야. 너는..? 여기 살아?"

"응."

"어머니가.. 여기 사는 분들하곤..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했는데..."



불안한 눈으로 저를 담아내는 소년의 말에 오이카와는 웃으며 괜찮다 말했다. 나는 괜찮아. 



"어머니가 끝날 때까진 아직 더 시간이 걸릴 텐데.. 그동안 나랑 산책할래?"

"산책..?"

"응. 우리 집의 정원을 구경시켜줄게."



그 제안이 달콤하면서도 무척이나 어려운지 소년은 놀라움과 기대감, 그리고 불안함을 동시에 얼굴에 띄우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사이 집사인 빌이 내려와 가디건을 내밀었다. 오이카와는 그것을 받아 스스럼없이 소년의 어깨 위로 둘러주었다. 



"그냥 혼자 산책하기 심심하니까 네가 내 말동무가 되어줘."

"..말동무?"

"친구 같은 거야. 난 여기 친구가 없거든."



친구라는 말에 소년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응, 그리고 정말이지 기쁘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이 스가와라 코우시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이후로도 가끔가끔 그의 어머니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으면 스가와라를 데리고 저택을 드나들었다. 그 행동에 저택 모두가 뻔뻔하다고 흉을 보고 속삭였지만 오이카와만이 그녀가 제 아들을 데리고 오는 날들을 손꼽아 기다렸다. 저택에서 뛰시면 안 됩니다. 몇 번이고 들었던 잔소리를 늘 잊어먹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긴장으로 가끔 말을 더듬고 씹었던 스가와라 코우시의 이상한 버릇은 오이카와 앞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긴장으로 범벅되었던 얼굴도 금방 해사하게 풀려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보여냈다. 오이카와는 그 소중한 시간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그의 모든 것을 알아가게 되었다. 이주해 온 오이카와와 달리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친아버지는 오래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 지금은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것, 어머니는 수영장 청소를 제외하고도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는 곳은 이 저택에서 꽤 떨어진 곳의 아주 작고 볼품없는 작은 주택이라는 것. 그 동네에 동양인은 저와 자신의 어머니뿐이라 쓸쓸하다는 것과 친구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처음이라는 사실도. 그가 뱉는 처음이라는 단어가 오이카와는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린 자신에게 사탕과 초콜릿보다도 더 달콤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가 일을 그만 두었을 때는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다시금 스가와라 코우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오이카와를 무척이나 슬프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린 자신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아이와 친구라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란다." 그를 보고 싶다는 자신의 투정에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리 달랬었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그를 찾아갈 수도 만나러 갈 수도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흘러, 자신이 자신의 의지대로 땅을 밟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이미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가 말했던 볼품없는 작은 주택에서 이사한 지 오래였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아는 이가 적었다. 타지의 가진 것이 없는 동양인 모자는 너무도 간단하고 쉽게 잊히고 지워져 버렸다. 그래서 오이카와 역시도 시간의 흐름에 배반하지 않고 간단하고 쉽게 그를 포기했다. 첫 친구라는 달콤한 어감은 어느새인가 빛이 바래고 녹아 사라졌다. 어머니가 좋아할 만한 친구들이 생겼고, 만족할 만한 사교에 어울리니 야위고 작았던 소년은 아주 아득하고 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간간이 그리고 가끔 꿈에서 그를 만나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를 만날 생각도, 찾아갈 생각도 오이카와는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를 찾고 싶었던 열망은 불꽃처럼 피어 타올랐다 재가 되어 싸늘하게 식었다. 

그랬는데.


오이카와는 뜻밖의 재회에 기분이 아직도 이상했다. 일단은 그를 붙잡아 억지로 제 차에 태우고 그가 살고있는 곳을 뱉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이 만남이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의 꿈속의 연장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안 열리네."



스가와라가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집 앞에서 짤랑대는 키링을 흔들어댔다. 집이 좀 오래돼서 열쇠 구멍이 맛이 갔어요.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그리 말하더니 이내 결국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 괜찮으니 먼저 기사를 돌려보내고 오늘 자신만을 기다렸을 가족들을 잊은 채 오이카와는 천천히 그의 집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리에 스가와라 코우시의 집은 그리 눈에 띄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같은 모양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니까. 좁고 짧은 복도로 들어서자 오른편에 작은 키친이 나타났다. 고정된 카운터에 그가 거칠게 마트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고선 거실로 향했다. 보풀이 일어난 패브릭으로 덮어 놓은 낡은 소파에 그가 점퍼를 대충 벗어 던졌다. 그 안에서 헐렁한 티셔츠만 덜렁 갖춰 입은 몸에 오이카와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팔뚝 안에 남겨진 주삿바늘은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옷을 벗어 던진 스가와라 코우시는 성큼 오이카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가볍게 자신의 코트 깃을 쥐나 싶더니 이내 당겨 내렸다. 그가 무엇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던 오이카와는 그 손길에 끌리듯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얹혔다. 달라붙었다. 물컹하고 닿은 찬 온기가 가볍게 입술을 가르고 혀를 미끄러트렸다. 입술과 달리 뜨거운 덩어리가 익숙하게 달려들어 제 혀를 얽혔다. 당황한 오이카와가 서둘러 떨어지려 했지만 스가와라는 멀어지는 틈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가깝게 몸을 붙이며 뺨을 붙잡아왔다. 머리가 핑 돌아버릴 정도로 질척이는 키스였다. 으응, 코로 소릴 뱉으며 입천장을 간질이며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였다. 자신의 과거 속, 그리고 꿈속 스가와라 코우시라면 절대 할 수 없는 그런 야한 키스였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스가와라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열기가 쩍, 하고 달라 붙었다. 맞붙어있는 입술 사이로 그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리고 그의 손이 뺨에서 목으로 그리고 가슴을 지나쳐 바지로 내려오는 순간 오이카와는 강하게 그를 떼어냈다.



"왜? 좋았는데..?"

"...무슨 짓이야?"

"뭐가?"



그가 번들거리는 입술로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다.



"지금, 이거."

"...이거라니.. 이러려고 나 도와준 거 아니었어?"



뭐? 당당하게 뱉는 스가와라의 말에 오이카와는 머리가 하얗게 질려가는 기분을 맛보았다. 아니 폭죽이 터진 건가? 폭죽보다는 폭발에 가깝겠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그가 손등으로 제 입술을 닦아냈다. 



"손님이라 생각했는데.."

"뭐?"

"내 기억으론 당신 같은 사람 모르거든. 고급 코트에 구두까지 신었으니 언제 받았던 손님인가 싶었지. 아니야? 나랑 안 잤어?"

"뭐?!"



아니면 말고. 당황한 자신만을 덩그러니 내버려 둔 채로 그가 가볍게도 말했다. 그 가벼운 말만큼이나 가볍게 돌아선 스가와라는 주방으로 다가가 봉투에서 찌그러진 캔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그것을 꺼내서는 찬장에 발을 들어 숨기듯 정리했다. 살짝 보이는 찬장 안은 방금 채워 넣은 것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럼 당신 누구야?"



달그락, 마지막 캔을 찬장 안으로 집어넣으며 그가 물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는 제 이름을 대답했다. 



"그러니까, 오이카와 토오루가 누군데... 그걸 설명해야지. 당신 바보야?"



설명,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오이카와는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 그가 정신을 쏙 빼놓은 키스를 던져서 그리 만들었고 이 좁고 어둑하고 엉망인 집의 풍경도 그렇게 만들었다. 말을 찾지 못하는 오이카와를 기다리지 않은 채로 이번에는 허리를 숙여 아래 수납장에서 와인병을 꺼낸 그가 잔도 없이 그 꼭지를 물었다. 꿀꺽꿀꺽 목울대가 넘어가는 액체와 함께 흔들렸다. 



"한 잔 줘? 아, 당신 복장을 보니 이런 싸구려 와인은 취급도 안 할 것 같네. 실례."

"그보다.. 손님이라니 뭐야?"



오이카와는 엉망인 제 머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의미가 맞는 걸까? 그게 맞는다면 이 상황이 오이카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자신이 기억하는 스가와라 코우시는



"뭐긴 뭐야. 돈 떨어지면 나가서 만나는 남자들 이야기하는 거지. 그렇게 순진해? 당신?"



어땠더라. 작고 말랐고 또 순수했고 겁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눈앞에서 씩 입꼬리를 올려 웃는 사내는 자신이 아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아닌 것만 같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사람이 변하는 게 당연하면서도 오이카와는 그 당연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마치 첫사랑을 그 당시 감정으로만 안고 가려는 어리석은 남자와도 같았다. 굳어버린 오이카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스가와라 코우시가 자연스럽게 키친 창틀에서 라이터를 집어 들더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창도 열지 않은 채로 집 안에 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곤 오이카와 앞에 팔짱을 반만 낀 채로 천천히 다가와 섰다. 



"그럼 당신은 누굴까."



누군데 빌어먹게도 나를 그렇게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짜증이 잔뜩 그 섞인 질문이 담배 연기와 함께 오이카와를 감쌌다. 아주 맵고 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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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전에 썼던 유물같은 파일을 발견해따.

아마 도련님x양애취에 심취해서 살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