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저만 훅 티 나는 다른 교복에 어쩐지 "저질렀다."라는 말이 절로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괜시레 죄 없는 자신의 가쿠란을 당겨도 보고 털어도 보고 의식하지 않으려 억지로 발끝만을 바라보았다. 역시, 충동적으로 구는 게 아니었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벌써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지 못한지 2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이카와가 졸업을 앞두고 추천으로 입학을 확정한 대학의 배구팀에 빠르게 합류하면서 바빠진 탓이었다. 평일에는 학교가 끝나면 대부분 후배와 체육관에 붙어있었고 주말이 되면 먼 거리를 달려 다닐 대학교를 방문하곤 했다. 그 일이 결정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적어도 평일에 3번 그리고 주말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는데.. 고스란히 제 몫을 배구에게 빼앗긴 것 같아 티는 내지 않았지만 조금, 아주 조금 서운하고 속상했다. 하지만 일부러 그것을 티 내고 심통을 부릴 정도로 자신은 속이 좁은 남자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그런 남자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정말 이번엔 어쩔 수 없었는걸. 2주 전에 스쳐 가듯 역에서 개찰구를 벗어나지도 못한 그와 잠깐 얼굴을 보고 "졸업식에는 꼭 갈게." 약속을 받은 후, 메일도 전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제 막 사귄 지 100일이 지나가는 커플의 한 사람으로서 홀로 남겨진 시간은 너무도 외롭고 고독한 것이었다. 매일 붙어있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매일 손을 잡고 있어도 부족한데.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해 보았다. 언제나 먼저 만나러 오고, 먼저 연락하는 오이카와를 대신해서 스가와라는 자신이 먼저 그를 만나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그 결심까지는 너무 간단하며 또 간단했지만, 막상 다른 학교 앞에 덜렁 외부인이 되어 서 있으려니 여간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런 짓을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동안 어떻게 했던 거지? 새삼 그의 행동력에 반할 것 같았다.
"별거 아닌데 진짜 긴장된다."
쏠리는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2주 만에 만나는 오이카와 토오루에 대한 기대감인지, 그것도 아니면 늘 정해져 있던 연애의 패턴에서 벗어난 자신의 돌발 행동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손에 슬쩍 땀이 찼다. 메고 있던 낡은 가방의 끈을 괜히 고쳐보며 얼마나 초조하게 애꿎은 발바닥만 비벼댔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여자아이들의 흥분 가득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참 당연한 그림처럼 그 가운데에는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었다.
"오이카와상, 오늘도 연습하고 가시는 거에요?"
"이거 제가 만든 쿠키인데 있다가 쉬는 시간에 드세요."
"비타민 넣은 음료인데 시원할 때 꼭 드세요!"
어마어마한 공세. 오이카와 토오루 곁에 여자아이들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저렇게 둘러싸일 정도로 본 것은 처음이라 조금 충격이었다. 그래서일까, 애써 기다려놓고 스가와라는 자신도 모르게 교문 기둥에 훅 몸을 숨기고 말았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그냥 당황해서 그러고 말았다. 그래도 눈을 뗄 수는 없어 슬쩍 고개만 내밀어 웃고 있는 잘난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 고마워."
퍽이나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선물들을 받아내는 폼 역시도 익숙해 보였다. 경기장에서 들리는 환호 소리로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기둥을 쥔 손에 꾹 힘을 넣었다. 물론, 그가 인기 있다는 사실은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끔 데이트라며 중간에서 만나 걷거나 뭘 먹을 때도 그의 주변엔 언제나 소란이 있었으니까. 선물이에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 사인 해주세요, 같은 일들이 번번하게 일어났고 그때마다 스가와라는 웃으며 대신 여자아이의 카메라 셔터를 눌러주기도 했다. 그래도 한두 명의 여자아이들의 어택을 보는 것과 그의 주변에서 요란하게 흔들리는 교복 스커트 자락들을 지켜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뭐랄까, 한두 명 상대로는 '그래도 뭐 내가 낫지.' 같은 치졸한 생각이 가능했는데 온갖 좋은 향기를 내며 몰려있는 여자아이들 상대로는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후, 터져 나오는 한숨을 꾹꾹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며 스가와라는 제 칙칙한 가쿠란을 내려보았다. 어딜 가나 여자아이들 교복은 다들 개성 있고 팔랑거리는 게 참 예쁘고 귀여운데, 가쿠란이란 언제나 모양이 거기서 거기였다. 차라리 오이카와같은 블레이저 차림이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애꿎은 제 교복을 쭉쭉 당기다 결국 스가와라는 발걸음을 돌렸다. 계획은 숨어있다 그의 등을 두드리고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의욕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털레털레 걸음을 옮겨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가방 속에 고기만두가 떠올랐다. 먹고 연습 열심히 하라고 일부러 오는 길에 우카이 코치의 가게에서 사 온 것이었다. 세상에, 고기만두라니. 누구는 스커트 휘날리며 손수 만든 쿠키와 비타민 음료를 만들어 내미는 판국에 고기만두라니, 창피함에 화끈해진 볼을 손등으로 꾹 눌러 감추며 서둘러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대부분 아오바죠사이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제 까만 교복을 감추듯 가방으로 가리며 겨우 난 빈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검은 허벅지 위로 노을의 빛이 흔들흔들 떨어졌다. 어쩐지 그 빛이 처량해 보여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감정이란 언제나 들쑥날쑥하기 마련이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 강도가 더 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천국에 올라갔다가도 순식간에 지옥으로 떨어졌고 지옥의 바닥에 있더라도 한순간에 하늘을 날았다. 저답지 않은 모습이 싫어 애써 가라앉히려 차창 너머로 시선을 던지면서도 어쩐지, 정말 어쩐지 괴로워서 서둘러 휴대폰을 들었다. [시미즈, 네 교복 빌려줄래?] 웃기지도 않은 메일을 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힘들면 언제든 힘들다고 말해. 스가와라군.] 이라는 다정한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냐, 힘든 게 아니야.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서운할 뿐이야. 자신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제가 부르기도 전에 여자아이들에게 불리는 오이카와 토오루라던가, 자신이 이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여자아이들에게 웃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라던가. 그런 잘난 오이카와 토오루라던가가.
하지만 굳이 그 서운함을 티 내지 않은 채로 또다시 2주가 흘렀다. 그 사이 밥은 잘 먹고 지내느냐, 보고 싶다, 뭐하느냐 하는 변함없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메일이 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제 얼굴을 보지 못한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달라. 방에 걸린 달력 속 동그라미 표시를 보며 스가와라는 교복 단추를 목까지 꽉 채웠다. 아침부터 부산스러운 어머니의 움직임을 들으며 오늘로 마지막이 될 제 가방을 챙겨 어깨에 둘렀다. 졸업식, 졸업식에는 꼭 오겠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오늘이면 드디어 그와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아마 아오바죠사이의 수업이 끝나고 나서가 될 테니까, 만나려면 아직도 몇 시간이나 더 남아있었지만 벌써부터 긴장되고 심장이 뛰놀았다. 어린 왕자의 여우가 이런 기분이구나!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여우의 입장을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제 방을 나섰다.
"이리 와봐."
습관처럼 막 현관으로 나서자 부리나케 주방에서 어머니가 달려 나왔다. 이미 다 정리했는데도 하나하나 주름을 펴주고 깃을 세우고 먼지를 털어냈다. "이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네." 쓸쓸한 말에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이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또 입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나중엔 어차피 작아서 입지도 못할 텐데."
아, 그런가. 훌쩍 크고 어깨가 넓어지고 어른이 되는 자신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아 스가와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가만히 어머니의 손길을 받았다. 별로 정리할 것도 없는 교복을 손수 만진 후에야 그녀는 자신에게서 가볍게 떨어졌다.
"그나저나 정말 오늘 안가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다이치네도 아사히네도 부모님 안 오신대요."
순 거짓말이었지만, 졸업식 이후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 그럼 애들에게 부탁해서 사진이나 잔뜩 찍어다 줘." 의심하나 없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운동화를 신었다. 차 조심하고! 매일 아침 들었던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서둘려 현관을 나섰다. 끼익, 문을 열고 나오자 아직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바람이 훅 끼쳤다. 벚꽃이 피기에는 아직 추운 날씨를 온몸으로 마주하며 스가와라는 한 발, 내리쬐는 햇살 아래로 발을 뻗었다. 등 뒤로 육중하게 쿵, 하고 문이 닫혔다. 벚꽃은 피지 않았지만 이르게 핀 목련잎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짓이겨지고 물든 그 갈색 잎들 사이에서 스가와라는 저를 바라보고 있는 오이카와 토오루 덕분에 뻗은 한 발, 그이후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꿈꾸는 것 같아서."
로맨틱한 감상이 아니었다. 정말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거기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나서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바람과 함께 훅 끼쳐오는 익숙한 오이카와 토오루의 로션 냄새에 스가와라는 그제야 서둘러 발을 뻗어 그에게 다가갔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머플러 아래에 감춰진 그의 볼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안 추워?"
그런 주제에 저에게 춥우냐 묻는데 좀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갑작스러운 웃음에 묻는 오이카와 대답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그가 급히 제 머플러를 풀어냈다. 그리고 차게 식은 머플러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목에 둘러졌다. 스가와라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의 배려를 밀어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오후에 올 줄 알았어. 너희 학굔 아직 수업 있잖아."
"아, 그러려고 했는데-"
그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우물쭈물하며 죄 없는 제 머리만 벅벅 문질렀다. 무슨 소릴 하려나 싶어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이번엔 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다시 죄 없는 제 발바닥만 바닥에 문질러냈다.
"그..."
그..?"
"그.. 그 뭐야.."
"뭐?"
"단추."
"단추?"
"응, 두 번째 단추."
우물쭈물 겨우 뱉어진 그 말에 스가와라는 그제야 오이카와 토오루가, 이 아침부터 저를 기다린 이유를 알아챘다. 그러니까-
"내 교복 단추 받으려고 여기 서 있었다고?"
짝사랑에 허우적대는 순정만화 여주인공도 아니고. 너무도 소녀스러운 대답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후두둑 터져 나왔다. 추위가 아니라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물든 오이카와가 "웃지 마!" 라며 슬쩍 화를 냈지만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면 웃음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울었을지도 몰랐다.
"우리 진짜 닮았다."
"뭐가?"
"바보 같은 점."
겨우 석 달, 겨우 숫자가 세 자리가 되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설레는 시기였다.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잡는 것뿐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것들이 마구마구 넘쳐흐르는 시기였다. 2주 전, 차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우스운 질투를 하며 돌아섰던 자신이나, 이 아침부터 지각을 무르2쓰고 저를 기다린 오이카와 토오루나 똑같다고 느끼며 스가와라는 가볍게 제 가쿠란의 두 번째 단추, 가장 심장에서 가까운 단추를 당겨 떼었다. 그리고 이 흘러넘치는 감정의 원인인 제 연인에게 내밀었다.
"자."
"잘 받겠습니다."
"오후에 와서 받아도 되는 건데.."
"안돼, 누가 가져가면 억울해 죽을 거야."
"죽을 필요까지 있나..?"
"있지. 가쿠란 입는 애인을 뒀는데 당연히 단추정도는 사수해야지!"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듯이 강하게 말하는 말에 그저 웃었다.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그리고 내미는 손을 거부하지 않고 붙잡았다. 3월의 찬 바람이 꽁꽁 얼린 손이, 손가락이 마구 얽히자 금세 온기로 물들었다. 그 온기를 꽉 붙잡으며 스가와라는 슬쩍 제 발가락 끝에 힘을 세웠다. 그리곤 오이카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가쿠란 입기 잘한 거 같아."
분명 오이카와 토오루때문에 이 옷이 싫었는데
지금은 오이카와 토오루때문에 이 옷이 너무너무 좋았다.
웃으며 속삭이는 그 말에 여전히 열을 빼지 못한 오이카와 토오루가 귓가를 가리며 "잘했어." 라며 칭찬했다. 오늘로 마지막이었지만 정말로 입길 잘했어. 응, 스가와라는 힘차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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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란은 참 좋은 거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