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보이지 않는 소리
2015. 10. 14. 13:38



서걱, 조각도에 힘을 주어 밀 때마다 그 칼날에 박혀 파지는 나무의 감각이 좋았다. 마치 어린 시절 연필 깎기가 아니라 커터칼로 처음 연필을 깎아냈을 때의 느낌같이, 매끄럽고 간단하게 밀려나는 나뭇결. 누군가에게 받아야 할 도움도, 나누어야 할 대화도 없는 이 작업이 스가와라는 자신에게 완벽하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서걱거리는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외로움을 느낄 필요도 없었고 타인의 존재에 대한 부재 역시도 느끼지 못하였다. 그랬는데-


"미안, 미안. 선약이 있어서 지금부터는 좀 바빠. 진짜 바빠."


낡은 작업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스가와라는 막 집중하던 제 신경을 깨어트렸다. 손끝에 칼끝에 밀어 넣었던 힘을 풀고 굽혀있던 허릴 들자 타이밍 좋게 삐걱, 소리를 내며 나무문이 열렸다. 훅 끼치는 초겨울의 공기, 네이비색 두터운 자켓에 검은 머플러를 두른 사내 하나가 곁에 머물러 있던 시끄러운 벌들을 떼어내며 들어섰다. 눌러쓴 비니 아래로 그의 갈색 머리가 밀려나간 나무 조각들 마냥 마구 뻗쳐 흔들렸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니."



인사 대신 사과를 던지는 그의 말에 무뚝뚝하게 답하며 스가와라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추운데 왜 난로도 안켜고 있어? 살갑게 떠들며 그가 작업실 한 쪽에 언제 태어났는지 모를 낡아빠진 난로에 연료를 부어 넣기 시작했다. 금세 작은 공간에 기름 냄새가 끼쳤다. 그 달갑지 않은 냄새를 들이밀며 남자는 제 머플러를, 외투를 벗어 던지며 시답지 않은 질문들을 쏘아댔다. 밥은 먹었느냐, 수업은 없었느냐, 언제부터 작업실에 있었느냐, 난로는 왜 켜지 않았느냐. 대꾸를 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는 듯이 밀려오는 질문의 파도 속에서 스가와라는 숙였던 허리를 다시금 세우며 한숨을 뱉었다. 대답, 해주고 싶은데 너무 질문이 빨라 무엇부터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피곤해 보일 법한 얼굴로 깜빡 깜빡,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곤 쓰고 있던 안경 너머로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보았다.


"할 거야 말 거야?"


아, 너무 퉁명스러웠나. 날이 선 것 같은 제 말투에 아차 싶었지만, 아마 미안함도 당황스러움도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길 포기한 제 얼굴에 나타나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웃으며 제 가방에서 커다란 노트북을 꺼내 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툭, 무게감 있는 그 소리를 신호로 스가와라는 꽉 쥐고 있던 조각도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에게는 친절해야 해. 그래야 착한 아이란다."


어머니의 교육 방침이었다. 절대로 나쁜 교육은 아니었다, 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단지 자신이 멍청해서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라버린 것뿐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말씀을 이루는 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장난감 양보하기, 친구 괴롭히지 않기, 편식하지 않기,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 고작 몇 가지 정도만 지키면 좋은 아이가 될 수 있었고 착한 코우시군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친절'과 '착함'은 더 구체적으로 변했고 더 가짓수가 많아졌다. 노트 빌려주기, 대신 청소해주기, 프린트물 나누어주기, 대신 숙제해주기, 학급 임원 맡기, 방과 후 남아 화분 정리하기, 교무실 청소하기 등등. 누군가가 부탁하면 '싫어' 라는 대답보다는 '응'이라는 대답이 스가와라에게는 익숙했고, 그 대답이 오가는 사이 자신이 남들에게 내보여주는 친절은 친절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아주 당연한 일. 그 당연한 일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남들은 스가와라에게 실망을 표현했고 배신감을 느껴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같은 반, 나름대로 친구라고 생각한 아이의 부탁으로 그렸던 그림이 그 아이의 이름으로 시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 스가와라는 그제야 '착한 스가와라 코우시' 혹은 '친절한 스가와라 코우시'가 얼마나 우스운 존재였는지 깨달았다.


그 후로는 더는 친절하게 굴지 않았다. 남들의 부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적당히 밀어내고 거절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사람들이 떠나갔다. 모두 나쁜 녀석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왜? 다들 싫으면 거절하잖아, 밀어내기도 하잖아. 자신도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스스로를 챙기기 시작했을 뿐인데 버림받았다. 친구라고 불렀던 존재들은 금방 저들끼리 무리를 지어 떠났고, 매번 쉬는 시간마다 '노트 좀 보여줘' '교무실 가는 길에 대신 선생님께 전해주면 안될까?' 라고 쉴 틈 없이 날아들던 녀석들도 사라졌다. 그렇게 금세 혼자가 되었지만 여럿이 곁에 있던 때보다 마음이 편했다. 남들 신경도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오롯이 제 자신에게 집중하면 되니 나쁘지 않았다. 자라온 과정에서 받은 상처와 스트레스가 커서 외로움을 느낄 틈도 없었다. 누군가 다가오려 하면 밀어냈고, 어차피 쟤도 날 우습게 볼 거라며 선을 긋고 잘라냈다. 질려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에게 미안함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은 초원에 던져진 사슴도 아니었고, 들판을 달리는 사자도 아니었다. 무리에 속할 필요도 끼어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더는 상처받지 않고 배신당하지 않고, 이렇게 홀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작업 과정에서 일어난 재미난 에피소드를 알려달라는데."


반짝이는 노트북 액정에서 시선을 떼어낸 남자가 물어왔다. 저를 바로 마주하는 눈빛에 스가와라는 서둘러 그에게 고정되어 있던 제 시선을 떼어내고 언제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손안에 식은 머그잔만 내려보았다. 얼굴이 붉어졌을까 걱정되어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재밌는 에피소드 있어?"


탁탁, 그가 가볍게 작은 마우스를 두드리며 재촉했다. 아니, 없어. 그런 거. 스가와라는 겨우 입을 열어 조그맣게 중얼댔다. 사실, 대려면 댈 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 질문의 '주인공'을 앞에 두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는 내용인지라 이게 가장 적당한 대답이었다.


"없다고? 안돼. 뭐라도 빨리 꾸며서 만들어내 봐. 네 인터뷰잖아. 좀 더 이야기해 보라고."


그래, 인터뷰. 이 인터뷰가 문제였다. 한 달 전, 교수님의 강압적인 추천으로 학교 대표로 선정되어 결연맺고 있는 네덜란드의 한 예술대학과 작업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좋은 취지라며 설득하는 교수님 덕에 하는 수 없이 그간 작업했던 작품들을 보내고 인터뷰를 받기로 했는데, 문제는 그 인터뷰가 '네덜란드 어'라는 것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못 하는데 네덜란드 어라니. 번역기를 돌려보았지만 당연히 제대로 해석될 리가 없었고, 주변에 당연히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나타난 남자가 바로 눈앞에 앉은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교수님의 부탁으로 작업실로 끌려들어 온 그는 독문학과라 소개하며 어린 시절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지냈으니 인터뷰를 도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곤


"만나서 반가워. 초면이지?"


라고 잘난 얼굴로 잘난 미소를 그리며 인사를 건넸다. 저도모르게 고개를 저을 뻔한 실수를 서둘러 눌러 감추며 스가와라는 그 인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이카와 토오루, 그가 자신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아마 이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저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작업실에 처박혀 캠퍼스를 잘 돌아다니지 않는 자신에게도 그는 유명인사였으니까. 그는 이 학교의 꽃이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많은 벌이 윙윙거리며 맴돌았다. 그의 이야기는 씨가 되어 바람을 파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날렸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가십거리처럼 흘러들었지만, 그와 처음 마주한 순간. 스가와라 역시 벌이 되고 말았다.


"괜찮아?"


작업을 하다가 손을 날렸다. 세게 날린 것은 아니고 그냥 조각도가 스치고 지나갔다. 익숙한 것이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손가락을 대충 티슈로 말아 지혈하며 밴드라도 사 붙이기 위해 캠퍼스 내 편의점으로 달려가던 길이었다. 해야 할 양이 산더미 같은데, 손을 다쳤으니 작업이 더디게 흘러갈 것이 뻔해 짜증과 조바심이 일었다. 그래서 앞을 보고 달릴 정신이 없었다. 쿵, 하고 무언가 부딪히고 나서야 자신이 앞을 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정도였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물은 것은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넘어질 뻔한 자신의 팔뚝을 잡아 붙잡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스가와라는 단박에 그가 오이카와 토오루임을 알았다. 윙윙 벌들이 전하던 수많은 꾸밈말을 가진 남자. 그 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남자. 보지 않아도 그려졌던 미남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응."


아니 안 괜찮아, 왜냐면 내가 지금 너에게 첫눈에 반한 거 같거든? 그러지 않고서야 심장이 이렇게 널뛸 리가 없으니까. 태어나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해본 적은 없었으나 그가 붙잡은 팔뚝에서 피어오르는 열이, 요란하게 흔들리는 심장이 무슨 의미인지는 스가와라도 알 수 있었다. 이거 그거잖아? 드라마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남녀가 동시에 느끼면서 머릿속에 나팔이 울리는 그거. 물론 오이카와 토오루와 자신이 운명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며 남녀도 아니고 동시에 느끼지도 않았을 테지만, 일단 제 머릿속에는 나팔 비슷한 게 울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젠장, 착하게 살걸. 그냥 친절하게 살걸. 그랬더라면 예전처럼 웃으며 "아니야, 난 괜찮아. 넌 어디 다친 데 없니?" 라고 자연스럽게 술술 뱉어냈을 텐데. 하지만 홀로 허허벌판을 길게 걸어왔더니 웃음도 대답도 어디 멀쩡한 곳이 없었다. 딱 잘린 대답, 밀어낸 손, 한 발짝 멀어진 거리. 완벽한 거부와 같은 제 행동에 그가 조금의 당황을 품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스가와라는 멈출 수가 없었다. 깊게 몸에 베여 있는 행동은 뻔뻔하게도 제 의지를 배반하고 멋대로 굴었으니까.


"아 미안."


오이카와 토오루의 당황스러움을 마구 맛보면서 스가와라는 고개만 저었다.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름대로 그의 벌이 되어버린 강렬한 만남이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다시 마주한 그가 '초면'이라는 단어를 쓰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는데, 제 기분이 나쁜 게 얼굴에 드러났는지 아니면 꽤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와 단둘이서 앉아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어 피어난 어색함 때문인지 첫 만남은 정말이지 침묵 속에서 끝나고 말았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교수님에게 받은 인터뷰지를 살펴보며 대화를 끌어내려 애를 썼지만, 그의 옆 모습을 훔쳐보느라 정신없던 자신에게는 질문의 요지는커녕 흐름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


망했어, 절대로 다신 찾아오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 구하라며 사라지겠지. 침묵과 함께 끝나버린 첫 인터뷰, 반 즈음 포기 상태로 그렇게 생각했다. 돕겠다 나선 사람에게 무례하고 또 무례하게 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음날 그리고 또 다음날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작업실에 나타났다. 그의 목소리 그의 얼굴 그의 손짓에 집중하느라 인터뷰는 여전히 잘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꽃이 되어 나타났고 스가와라는 보이지 않는 날갯짓으로 그를 맴돌았다.


그러니까, 작업 과정에 생긴 재밌는 에피소드라면 이건데. 네가 나타나고 내가 벌이 된 일. 하지만 그걸 당사자 앞에서 스스로 떠벌리는 것은 마치 고백과 같은 일이니 뱉을 수는 없었다. 또 이렇게 침묵의 인터뷰구만. 스가와라는 속으로 제 답답한 가슴께를 두드리며 한숨을 뱉었다.


"힘들어? 그만할까?"
"아니.."


아직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흘끔 시계를 보는 그를 보니 이 이후에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있겠지. 인기 남이니까. 아마 작업실을 나서면 건물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여학우가 대략 다섯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보통 만나면 뭘 할까? 밥을 먹을까? 술을 마실까? 아마 자신처럼 이렇게 어색한 인터뷰를 나누고 있지는 않겠지. 게 중에는 여자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있을까? 손도 잡을까? 입도 맞출까? 거기까지 생각하자 얼굴이 펑 터져나갈 것 같았다. 스톱, 스가와라는 스스로 빠르게 움직이는 머릿속을 정지시키며 고개를 들었다. 식은 머그잔에서 고개를 들자, 가만히 턱을 괸 그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워? 얼굴 붉다."
"어..? 아니."
"나 지금 너랑 앉아서 들은 대답이 아니, 아니, 아니. 딱 세 번째야."
"..."
"할 마음 있어?"
"응..."


다행이네, 이번 대답은 '아니'가 아니라서. 그가 가볍게 웃으며 말한 후 턱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몸이 굳었는지 쭈욱 천장으로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자신과 달리 단단하고 길다란 팔이 공중을 갈랐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없으면 만들면 되지."
"...뭐?"
"만들자고. 일어나. 나가자."


뭘? 왜? 어딜? 당황스러워 말도 못하고 눈으로 묻자 멋대로 몸을 일으킨 그가 노트북을 덮고 외투를 챙겨입기 시작했다. 그리곤 옷걸이에 걸려있던 자켓을 들고 와 멋대로 어깨 위에 얹어 놓았다. 작업용 앞치마도 아직 못 풀었는데! 오늘 작업양도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입을 타고 흐르지 못했다. 그가 자신이 두르고 왔던 머플러로 입가를 꾹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나가자."


아, 젠장. 모르겠다. 작업이고 뭐고 지금은 그냥 벌이 되어 꽃에 머물고 싶었다. 그가 어디로 데려는지, 가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만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일어날 모든 일이, 작업 과정 중에 일어난 재미난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아마 제 인생에서 일어난 가장 멋진 에피소드가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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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런 대학 캠퍼스물이 보고싶어서..... ㅇ<-<

인간관계에 상처입고 스스로 아싸가 된 스가와 아싸 그게 뭔가요? 인기남 오이카와가 썸타는 거시 보고시퍼 시작했으나 썸 타기 전에 끝나고 말아따..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