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간절한 사람은 누구일까
2015. 10. 11. 22:59



찰랑, 부딪히는 잔 사이로 둥실 올라온 거품이 흔들리며 슬쩍 떨어졌다. "건배도 제대로 못 하냐?" 짜증이 뒤섞인 이와이즈미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오이카와는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생맥주라 그런지 목으로 흐르는 넘김이 기가 막히게 끝내주었다.



"장사 잘되네, 생맥주 주점이라 그런가?"




가볍게 잔을 비운 하나마키가 소란스러운 주점 내를 훌쩍 돌아보며 물었다.


매년 찾아오는 대학의 축제 기간, 이것저것 손님을 이끌기 위해 간판을 내걸지만 대부분 거기서 거기인 주제로 언제나 그 중심에는 '주점'이 들어가 있었다. 술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지만 특별한 아이디어를 위해 머리를 쓸 필요도 없는 데다 안줏거리는 어디 백엔샵에서 파는 3묶음짜리 야끼소바와 때려 넣은 야채로도 커버가 가능했기에 늘 인기 품목이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그 틈에서 더 특별해지기 위해 무리하는 놈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컴공과 녀석들로 보통 대량으로 일본주에 적당하게 음료를 섞거나 싸구려 맥주로 해결보던 대학 축제의 현장에서 올해 처음으로 생맥주를 도입했다. 웨이팅 40분, 그것도 컴공과인 마츠카와의 인맥으로 겨우 자리 잡은 자리. 안주는 고작 과자 몇 가지와 마른오징어가 전부였지만 직접 내리는 맥주라 그런지 확실히 맛은 있었다.



"어때? 괜찮냐?"
"네, 이 호화로움은 모두 우리의 대단한 마츠카와군 덕분입니다!"



조금 더러워진 흰 앞치마를 허리에 두른 마츠카와가 다음 잔을 내려주며 묻자 하나마키가 엄지손가락을 추어올리며 떠들어댔다. 다시금 테이블을 차지하는 맥주잔을 제 앞으로 끌며 오이카와는 예의상 고생한다는 인사라도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보다 먼저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마츠카와의 등 뒤로 보이는 남자. 생맥주 기계 앞에서 비스듬하게 잔 하나 제대로 기울이지 못해 거품만 가득 컵에 담아내고 있는 남자.



"아, 스가와라군 진짜 못하네."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맥주를 따르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건만 잔 가득 채워진 거품을 퍼내고 또 퍼내는 모습에 마츠카와가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테이블에서 떨어졌다. 다시금 요령을 알려주려는지 대신 맥주잔을 든 마츠카와를 진지한 눈으로 보는 남자를 눈에 담으며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렸다.



"병신같긴."



솔직한 감상이었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정말로 '병신'같다고 느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아 온갖 나열되는 코드를 쳐대는 것뿐인 남자.



"야, 그래도 같이 운동하는 부원에게 병신이 뭐냐, 병신이."
"맞잖아. 내가 뭐 틀린 소리 했나."



이와이즈미의 사나운 잔소리를 가볍게 넘기며 오이카와는 새로 받은 잔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제 감상에 하나마키도 동의하는지 별소리 없이 가볍게 웃어댔다.


그러니까, 오이카와 토오루가 스가와라 코우시를 '병신'이라고 느끼게 된 데에는 꽤 많은 일이 있었다. 아주 간단하게 저 흐물흐물한 첫인상만 보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자신이 나쁜 놈은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벌써 3년, 그 시간 동안 배구부에 몸담고 있었고 그 시간만큼 스가와라 코우시와 같은 체육관에 머물렀으나 그는 단 한번도 정식 경기에서 코트에 선 적 없는 선수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코트에 서지 못한 선수. 그래도 작년까지는 연습 시합 정도에는 코트에 섰지만, 그마저도 작년에 입학한 후배들에게 물려주면서 뒷전으로 물러나 버렸다. 그 정도면 퇴부를 하던가 혹은 선배라는 좋은 무기를 사용해 우기던지 화를 내든지 하면 될 터인데도 멍청하게 그는 벤치를 지켰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또 배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지. 오이카와는 술기운으로 나른하게 잠기는 눈을 감으며 입학 초에 마주했던 스가와라 코우시를 떠올렸다.



"같이 연습할래?"



더운 여름이었다. 연습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집에 돌아가 에어컨을 켜고 하드나 물고 싶을 정도의 날씨. 겨우 부활동을 끝내고 돌아가나 했더니 녀석이 자신을 붙잡았다. 막 스포츠백에 물건을 챙겨 넣던 오이카와는 뜻밖의 제안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스가와라를 바라보았다. 사실 같은 배구부 소속에다 같은 포지션이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은 손에 꼽을 정도라 '연습하자'라는 말은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정말 이상한 제안에 가까웠다.



"너처럼 잘하고 싶어서.. 내 연습 좀 봐줬으면 좋겠어."



대답 없이 빤히 들여보는 게 불편했는지 녀석이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중얼댔다. 잘하고 싶다, 나처럼. 그 말은 꽤 듣기 좋은 이유인지라 오이카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들이 언제나 차지해서 제대로 사용도 못 했던 커다란 체육관 코트를 둘이서만 사용했다. 고등학교 때 잠깐 배구를 했다는 녀석은 폼부터 영 별로인지라 하나하나 알려주고 일러주고 고쳐주어야만 했다. 그래도 눈을 반짝이며 따라오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뻘뻘 땀을 흘리고 거칠게 숨을 내쉬어도 "한 번만 더." 라고 요구하는 근성이 나쁘지 않아서 오이카와는 그 이후로도 계속 스가와라 코우시의 가벼운 연습 상대이자 개인 코치가 되어주었다. 가벼운 연습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꽤 혹독하게 굴렸는데도 스가와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여기저기 멍이 들고 손목이 살짝 부어올라도 다시금 눈을 마주하며 "다시." 혹은 "한 번 더."를 외쳐왔다.


처음에는 그 근성이, 끈기가, 반짝이며 따라붙는 시선이 모두 배구에 대한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곧은 시선에 의심을 품게 된 것은. 함께 연습하던 코트 위, 함께 옷을 갈아입던 라커룸 안, 함께 밥을 먹던 식당, 함께 귀가하던 골목. 그 사이에서 오이카와는 스가와라의 시선이 '배구'가 아닌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것을 눈치챘고, 그 시선이 동경이 아니라 좀 더 다른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것도 알아챘다. 따라붙는 시선을, 관심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건 오이카와 토오루가 매번 다른 누군가에게 받아왔던 것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스가와라, 너 혹시 나 좋아해?"



아. 그래. 너무 싫어서, 징그러워서, 소름 끼쳐서, 연습이 다 끝난 코트 위에서 녀석을 불러 세워 대뜸 그렇게 물었었다. 막 2학년으로 올라오고 나서였나? 그즈음에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부담스러워서 함께 연습을 하거나 귀가를 하는 멍청한 짓을 그만두었는데 그럼에도 따라붙는 시선이 지겨워 아마 끝을 내고자 그랬던 것 같았다. 그래서, 녀석이 어쨌더라.



"...뭐?"



되물었지. 붉어진 얼굴로. 하얗던 얼굴이 순식간에 타오르고 늘 잠잠했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걸 보면서 오이카와는 그 당황스러움이 대답이라는 걸 알았다. 나 좋아해? 응 너 좋아해. 아주 간단한 대답. 그리고 그 대답에 대한 자신의 대답 역시도 아주 간단했다.



"징그러운 새끼. 앞으로 나 아는 척 하지 마라."



어디서 호모 새끼가, 아마 그렇게도 덧붙였던 거 같은데. 그 이후로는 뭐 아예 끝이었다. 점차 멀어지던 때에도 스가와라 코우시는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굴었지만, 그 날 이후로는 아예 다가오질 않았다. 부활동 이후에 잡힌 모임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연습에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불성실한 녀석, 선배들 사이에서 그렇게 찍히고 나니 안 그래도 서브였던 녀석의 입지는 아주 바닥까지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그 정도가 되었으면 그냥 그만두거나 나가버리면 그만인데도 이따금 얼굴을 들이밀고 입을 다물고 구석에서 배구공을 안고 있는 그의 꼴이 오이카와는 너무도 싫었다. 제가 코트를 누빌 때마다 달라붙는 그 익숙한 시선에 토기가 쏠리고 역겨웠다. 차라리 사라지길 바라서 더 못되게 굴고 더 밀어냈다. 마치 유령인양 취급하고 그가 설 곳을 치워버렸다. 그런데도 스가와라 코우시는 여전히 시야 속에 버티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더 비스듬하게. 봐, 잘했네."



졸졸졸 입구를 따라 흐르던 노란 액체가 드디어 반을 넘기고 4분의 3을 채웠다. 남은 4분의 1은 하얀 거품이 채웠다. 완벽한 모양새를 띄운 잔을 들어 올리며 스가와라 코우시가 해맑게도 웃었다. 그 꼴을 보니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웃네? 아 물론 웃기는 했지. 아주 예전에. 최근 몇 년 동안은 늘 우중충한 스가와라 코우시만 보았던 터라 그가 웃는 얼굴이 참 생소하게 다가왔다. 물론 거기에는 의도적으로 그를 코트 위에서 밀어낸 자신 탓이기도 했고, 그날 그를 '징그러운 새끼'라며 밀어낸 자신의 탓이 있기는 했지만, 오이카와는 굳이 그것을 떠올리지 않았다.



"사람이 줏대가 있어야지."



우중충하게 지낼 거면 끝까지 불쌍한 척, 우울한 척 굴던가. 누구 앞에서는 저렇게 웃으면 사람의 이중성까지 의심하게 되잖아. 오이카와는 슬쩍 치미는 짜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서둘러 손을 들었다. 맛층, 여기 한 잔 더! 자신의 목소리가 두 사람의 단란한 칭찬 타임을 갈라놓았다.


그 이후로 술은 끊임없이 들어섰다. 목 끝까지 액체로만 가득 찬 기분이 들 정도로. 이와이즈미가 곁에서 "너 토하면 죽여버린다?" 라며 험한 소리를 하는데도 킬킬거리며 계속 들이켰다. 웃으며 떠들며 술과 안주에 집중하는 신경 사이사이로 자꾸만 스가와라 코우시가 끼어들었다. 빌어먹을, 저 얼굴은 도대체 왜 늘 따라다니는 거지. 지겹게도. 자신이 그렇게까지 말하고 그렇게까지 행동했으면 그냥 좀 꺼져주면 좋겠는데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마츠카와군!" 그 사이 또다시 가득 맥주에 거품을 품은 그가 울상인 얼굴로 마츠카와를 찾아 불렀다. "진짜, 재능 없다." 놀리듯 웃는 마츠카와의 말에 창피한지 아니면 호모라 그런지 얼굴을 붉히는 꼴을 보니 기가 다 찼다. 기가 차니 자꾸만 술이 넘어갔다.


축제의 꽃이라는 공연이 시작되었는지 멀지 않은 곳에서 유행가가 쿵쿵 울려댔지만, 오이카와는 차지한 테이블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처럼 억지로 모든 신경을 찰랑이는 잔에만 집중했다. 얼마나 그렇게 더 버티고 있었을까, 동기를 만나러 간다며 떠나버린 하나마키와 공연을 보겠다며 일어선 이와이즈미가 사라진 테이블에 덜렁 홀로 남아있었다. 간간이 마츠카와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대화 상대가 되어주었지만 그마저도 더 활기를 띠는 주점 사정에 의해 사라져버렸다.



"아, 안 되겠다."



정말 이러다가는 거하게 테이블에 오늘 먹고 마신 것들을 쏟아내는 추태를 부릴 것 같아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돼, 안돼. 나름 영문과의 왕자님이라 불리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지. 웃기지도 않은 제 별명을 떠올리며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몸을 세웠다. 하지만 그 의지와는 달리 플라스틱 의자에서 떨어진 몸이 휘청댔다. 몸이 휘청대니 마음도 휘청대는 것 같았다.



"가게?"
"어."



서둘러 다가온 마츠카와의 말에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열어 보이는 대로 쥐여주며 주점을 나섰다. 공연은 한창인지 밤이 찾아온 캠퍼스 내부의 소음은 꺼질 줄을 모르고 더 울려댔다. 아, 죽겠다. 너무 마셨는지 속이 다 울렁댔다. 지내고 있는 자취방까지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그 전에 어디 기둥을 붙잡고 잠들 것만 같아 무거운 다리를 돌려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 근처에 있는 배구부 전용 라커룸에서 좀 눈을 붙일 셈이었다. 축축 처지는 어깨 뒤로 공연을 위해 터지는 불꽃놀이가 솟았다 요란하게 잠들었다.


끼익,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와 먼지들이 반겼다. 웅웅대는 소음과 번쩍이는 빛들이 더러운 창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며 오이카와는 비척비척 창문 아래에 자리 잡은 구멍 난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적당하게 마셔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를 해보아도 이미 녹진하게 절여진 뇌는 두통만 호소할 뿐 나아질 기세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좀 나아질려나 싶어 꾹 닫았더니 이번엔 빌어먹게도 스가와라 코우시가 나타나 신경을 건드려댔다. 멍청하게 잔에 흰 거품만 담아내던 스가와라 코우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스가와라 코우시, 도움을 청하려 여기저기 둘러보던 스가와라 코우시, 그러다 저와 눈이 마주치고 서둘러 눈길을 피하던 스가와라 코우시, 마츠카와 잇세이를 부르던 스가와라 코우시, 마츠카와의 설명에 집중하던 스가와라 코우시, 긴장한 얼굴로 다시 술을 따르던 스가와라 코우시, 성공하고는 해맑게 웃던 스가와라 코우시, 스가와라 코우시.


전에는 그 스가와라 코우시가 제 앞에 있었다. 멍청하게 자신이 늘 하던 점프 서브를 따라 한다고 굴었다 코트로 자빠졌던 스가와라 코우시, 그리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 스가와라 코우시, 웃지 말고 일으켜 달라며 화내던 스가와라 코우시, 그러다 내민 손은 붙잡지 못하고 홀로 일어서던 스가와라 코우시, 오이카와 토오루를 부르던 스가와라 코우시, 오이카와 토오루가 든 배구공에 집중하던 스가와라 코우시, 긴장한 얼굴로 토스를 올리던 스가와라 코우시,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해맑게 웃던 스가와라 코우시. 그랬던 스가와라 코우시.



"...병신 같아."



킥킥대며 터지는 웃음이 자조적이었다. 터지는 갈증에 어디 굴러다니는 물병이라도 찾기 위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푹 꺼졌다 올라오는 감각을 느끼며 막 허릴 세움과 동시에 끼익, 하고 라커룸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



당황하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있었다.



"뭐야?"



멍하니 굳어 서 있는 녀석을 보며 저도모르게 툭 말이 던져졌다.



"나 쫓아 온 거야?"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못된 소리가 튀어 나갔다.



"진짜 지긋지긋하다, 스토커 새끼도 아니고 왜 자꾸 얼쩡거려."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가 더 잘 알면서도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는 말만 튀어 나갔다.




"너, 나로도 모자라 내 친구한테까지 꼬리 치고 접근하더라. 호모새끼들은 원래 다 그래? 사내면 다 좋고?"



입, 입 좀 다물어. 오이카와. 누군가 그렇게 자신에게 외치고 있었지만 제어가 되질 않았다.



"병신같은 새끼, 싫다는데 왜 자꾸 따라다녀. 얼쩡거려. 역겹게."
"아니야.."



덜컹, 스가와라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날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녀석이 중얼대듯 반복해서 떠들어댔다.



"오해하게 해서 미안한데, 아니야. 너 따라서 온 게 아니기숙사 라... 열쇠를 부실에 두고 와서.. 그걸 가지러 온 것뿐이야. 정말로 너 따라서 온 게 아니야.."
"..."
"마츠카와군은 그냥 동기야. 네 친구라서 접근했다거나, 다른 이유로 다가간 게 아니야.."
"..."
"그리고 정말 이제 아니야."



천천히 그가 눈을 감았다 떴다. 지긋하게 따라붙던 시선이 이젠 반짝임이 아니라 체념을 담고 있었다.



"이제 나 너 안 좋아해."
"..."
"정말이야. 이제는 너 안 좋아해. 그러니까, 정말 그런 거 아니야."
"...거짓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안 좋아한다면서 왜 자꾸 내 근처에서 얼쩡거리는데? 왜 배구를 그만두지 않는 건데? 왜 그 코트 밖에서 내 등을 쳐다보는 건데? 왜 서 있지도 못할 장소에서 버티고 있는 건데?



"그딴 소리 하면 내가 아, 그래. 하고 믿어줄 줄 알았어?"
"...뭐?"
"사람 병신 취급도 적당하게 해야지."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넘어가려고 하고 말이야. 어쩐지 차오르는 화를 잡지 못하고 오이카와는 성큼성큼 다가가 스가와라 코우시를 잡아끌었다. 대응도 준비도 못 하고 있던 몸이 억센 힘에 딸려 컴컴한 공간으로 끌려 들어왔다. 쾅, 비어있던 손바닥으로 밀어 문을 닫아버리자 놀란 두 눈이 당황해 이리저리 흔들려댔다.



"오이카-"
"넌 나 좋아해."
"..."
"넌 나 좋아하잖아."



3년 전, 날 처음 본 순간부터 쭈욱 그래 왔잖아. 우습지도 않은 연습으로 꼬셔내 들러붙고 괴롭히고 따라붙고. 그래놓고 이제 와서 안 좋아한다니, 이걸 도대체 누가 믿어? 기가 차서 웃음이 다 나왔다.



"맞다고 말해."



얼른. 멋대로 떠드는 목소리가 어쩐지 간절하다는 생각에 오이카와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자신과 달리 스가와라 코우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입만 다물고 있었다.



"맞잖아."
"...술 깨면 다시 이야기 하자."
"나 좋아하는 거 맞잖아."
"아니라고 했잖아."
"맞잖아."
"아니야."
"맞아."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정말 그게 아니었다. 그 대답이 아니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오이카와 토오루를 좋아한다는 명백한 사실이 있는데 녀석은 자꾸만 거짓말을 뱉어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넌 나 좋아하는 거 맞아."



반복되는 거짓말이 듣기 싫어, 오이카와는 손을 뻗어 스가와라의 입을 막았다. 부들대며 떨리는 손바닥 아래로 마른 그의 입술이 느껴졌다. 더는 움직이기를, 대답하기를 포기한 그 입술을 고스란히 느끼며 오이카와는 어둠 속에서 그의 눈과 마주했다. 여전히 아니라 말하는 그 눈을 들여보며 오이카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나 좋아해."



자신을 담는 그 눈에 더는 반짝임도 간절함도 없었다. 대신 그 감정이 제게 옮겨붙었는지, 그의 거짓말을 정정하는 제 목소리만 떨렸다. 그리고 또 간절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도대체 누가 간절했을까, 누가 거짓말을 했을까. 오이카와는 엉망으로 뒤섞이는 제 머리를 잠재우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가 속이 눈이 울컥댔다. 제 마음도 모르고 밖에서는 불꽃이 터져댔다. 펑펑, 그 소리와 함께 터져 오이카와 토오루는 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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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주제:축제



축제라고 술을 많이 마시면 이렇게 흑역사를 적립합니다...

대지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