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Game set
2014. 12. 6. 22:48




"그래서, 2번군은 나와 뭘 하고 싶은 거야?"


오이카와의 질문에 스가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는 기대조차 없었기에 그에 맞는 답변도 준비하지 못했다.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오이카와의 손바닥 위에서 초콜릿이 굴렀다. 예쁘게 포장된 발렌타인 초콜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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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 찍한 꿈이었다. 소파에서 천천히 눈을 뜬 스가는 찬 공기에 얼어붙은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새벽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오이카와 토오루의 귀가는 여전히 아직이었다. 말라버린 입술을 살짝 훑으며 욕실로 향한 스가는 찬물을 틀어 세차게 얼굴로 끼얹었다. 요즘 들어 지겹게도 과거의 꿈이 자신을 괴롭혔다. 



 2번군은 나와 뭘 하고 싶은 거야? 그 질문에 스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대답을 내놓았었다.


"연애."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19살, 오이카와 토오루에 눈이 멀어 허튼 감정을 품고 있던 자신이 죽도록 밉고 아팠다. 당장에라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였다. 여자아이들 틈에서 발렌타인 초콜릿을 전해주면서, 그의 손에 들린 수많은 선물 쇼핑백을 보면서, 연애라고 대답하면서 이 이상의 관계라던가 좋은 대답은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솔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이카와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하자. 연애."


제로라는 밑바닥의 감정으로 고백했던 스가에게 그 말은 너무도 놀라울 정도라 당시에 꿈을 꾸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착각을 알아차릴 틈도 없이 그저 좋았다. 눈이 멀어서, 그저 좋았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찬 물로 정신을 차린 스가가 대충 얼굴을 닦고 욕실에서 나오자 도어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방안을 조용히 울렸다. 쾅, 문이 열리며 오이카와의 귀가를 알렸다. 얼마나 마셨는지, 현관에서부터 엄청난 알콜내가 스가의 코끝을 찔러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신발장 앞에서 기절하듯 쓰러진 오이카와를 보며 스가는 천천히 자신의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저나왔다. 그리곤 천천히 발을 옮겨 술에 취해 잔뜩 떡이 된 오이카와의 곁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술 냄새와 함께 여자의 향수가 독하게 올라왔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립스틱 자국이 셔츠 깃에 묻어 있었다. 스가는 천천히 흘러내리는 오이카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지쳤다. 이제 너무도 지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곁에 있기에는 하루하루가 지옥같고 너무도 아팠다. 왜 연애 하자고 했어? 왜 내 초콜릿을 받아 줬어? 왜 내 감정을 받아줬어? 연인으로 포장된 2년의 시간 동안 스가는 몇 번이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도 여전히 그 물음은 입안으로 감춘 채로 스가는 천천히 자신의 무릎을 안으며 얼굴을 묻어 감췄다.





"심심해서."


1년 전, "스가와라 코우시와 왜 사귀냐?"라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었던 이와이즈미에 질문에 대한 오이카와의 대답이었다. 대학 교수님 세미나로 지방에 내려갔다가 생각보다 일정이 당겨서 서둘러 올라왔던 어느 날의 저녁이었다. 


"심심해서. 따분했거든, 여자애들이랑 노는거. 남자랑 사귀면 좀 다를까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더라. 그냥 뭐 연예 경력에 하나 추가하는 셈이지."


아 직 제대로 방어의 준비도, 대비도 하지 못한 스가에게 확인 사살을 하듯이 오이카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스가는 현관의 어둠 속에 가만히 몸을 숨기고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텅 빈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덜덜 떨리는 손을 꽉 붙잡아 안으며 조용히 집을 나섰다. 그날 밤, 스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거리를 방황했다. 걷다 울기도 했고, 바보처럼 웃기도 했다. 웃음기가 가득했던 오이카와의 그 말이 귓가를 찌르고 심장을 찔러댔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이카와 토오루를 버릴 수가 없었다. 누가 들으면 미련하다며 화를 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도 아직도 좋아서, 감정이 멈춰지지 않아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웃었다. 더 다정하게 굴었다. 부르면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달려갔고, 원하면 거리낌 없이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면 자신을 제대로 봐 줄 거라고, 좋아해 줄 거라고 스가는 정말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믿음도 점점 사라져 갔다. 밖에서 끌고 들어오는 여자의 향수 냄새라던가, 옷에 묻어있는 긴 머리카락이라던가, 구석에 처박힌 모르는 선물 꾸러미라던가, 잠겨져 있는 핸드폰이라던가 하나하나가 스가에게 확실한 대답을 해주었다. "상쾌군, 좋잖아. 애칭 같고."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그의 곁에서 점점 지쳐갔다. 견딜 수가 없이 외로워졌다.







"일어났어?"


부 스스 머리를 긁적이며 방에서 나오는 오이카와를 보며 스가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한 그는 식탁에 앉아 "미안, 어제 동아리 회식이 있었어."라며 변명을 늘어늘았다.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사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이 상황이 익숙해서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스가는 미리 타두었던 꿀물을 앞에 내려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토오루."
"응?"
"우리 헤어지자."


툭 -하고 떨어진 이별의 말에 머그잔을 쥐려던 오이카와가 고개를 들고 스가를 올려보았다. 눈동자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스가는 참 우스웠다. 언젠가 우리에게 이별이라는게 찾아온다면 버림받는 것은 항상 자신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오이카와의 감정을 알고도 버티며 더 사귀었던 1년 동안은 버림 받을까 두렵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먼저 이별의 말을 꺼낸 자신이,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는 오이카와가, 이 상황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웃음을 빙자한 울음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게 튀어나올 것 같아 안쪽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 그대로. 헤어지자고."
"갑자기 왜?"


갑자기, 이건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초콜릿을 건네주던 그 날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애초에 끝이 정해져있던 게임과 같은 것이었다. 스가는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토오루, 내가 좋아하는 음식 알아?"
"...뭐?"
" 난 알아, 크림이 들어간 빵 좋아하잖아. 그럼 토오루 내가 좋아하는 색은 알아? 내가 좋아하는 책은? 내 취미는?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건 알아? 모를 거야. 우리 같이 영화관에 간 적도 없잖아. 내가 다니는 학교 이름은 알아?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지는 알아? 내 친구가 누구인지는 알아? 내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는 알아?"
"자..잠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상쾌군? 갑자기 이러는 의미를 모르겠어."
"내 이름은 알아?"


스가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물었다.


"너에게 나는 언제나 2번군이고 상쾌군이야. 그건 니가 부르는 우스운 별명이지 내 애칭도 아니고 이름도 아니야. 난 스가와라 코우시고, 내가 한 질문들을 너에 대한 주제로 바꾼다면-"


스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대답했다.


"난 다 알아."


난 다 알아. 네가 좋아하는 색, 네가 즐겨 입는 옷, 네가 아끼는 책, 네 주량, 네 술버릇, 네가 좋아하는 장소, 카페에 가면 항상 마시는 음료 메뉴,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네가 자주 만나는 친구들, 심지어 여자들도. 항상 네 이야기를 들었고 너에게 관심을 가졌고 너만 바라봤으니까 다 알아. 


"난 다 안다고. 오이카와 토오루."
"난 너와 연애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넌 아니었잖아. 그때 내가 준 초콜릿을 이제 와서 뱉어달라고 하지는 않을게."


마음 같아서는 토해내게 만들고 싶었지만 2년도 지난 자신의 순수했던 진심들을 돌려받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늦었다.


"그러니까, 헤어지자."


이 우스운 놀이를 끝내자. 더는 스쳐 가는 사람들 속에서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그의 카운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심심풀이 트로피나 장난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빌어먹게도 그리고 또 지독하게도 여전히 오이카와 토오루를 사랑했지만 그와 비례하는 감정으로 그가 미웠다. 이 이상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끝내야만 했다. 스가는 스스로 그렇게 끝을 내었다. Game set, 정확하게는 Game ov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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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칼릿이라는 달달한 주제로 이런거나 쓰다니..... 

쓰면서도 어? 이건 아니지 않나? 이건 아닌거 같은데.. 하다가 시간이 오버^^?

결국 꾸역꾸역 연결해서 업로드^^;

귀차니즘 그리고 반성하믑니다.....


그리고 뒤늦게 추가.

이 연성을 쓰면서 들었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