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눈을 뜨기가 무섭게 입을 타고 흐르는 것은 욕설뿐이었다. 크라피카는 허리부터 울려오는 끔찍한 고통에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는지 툭툭 유리창을 두드리는 물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호텔의 룸에는 그 빗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차의 엔진음 외에는 모든 것이 암전되어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크라피카는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쓸어 올린 후 자신의 곁에 잠들어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평온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나왔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사내를 내려보며 크라피카는 슬쩍 제 손을 뻗었다. 저 목을 졸라 당장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님을 느끼며 허공에 멈춘 제 손을 조용히 거두었다. 더는 이 사내와 같은 침대 안에 머물고 싶지 않아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크라피카는 무거운 몸에 힘을 넣고 겨우 욕실로 향했다. 물을 틀자 찬물이 시원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며 올라올 것 같은 구역질을 가까스로 참아내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거울에 비치는 몸에는 원하지 않았던 흔적들이 지독하게도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 날 봐, 신음 참지 마, 목소리 내, 내 이름 불러- 사내의 명령에 반항하면 가차 없이 날라오는 폭력에 얼굴도 엉망이었다. 찢어진 입가를 당겨 웃으며 크라피카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클로로 루실후르와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크라피카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우연이기도 했다. 그의 움직임, 여단의 상황을 잊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암흑대륙으로 가 카킹왕자에게서 붉은 눈을 되찾겠다는 목표에만 집중하다 보니 소홀했다. 정확하게는 신경 쓸 틈이 없었다는 게 맞았다. 그래서 호텔 로비에서 그에게 팔이 붙잡혀 복도로 밀려졌을 때에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에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강하게 입을 덮어내린 남자가 웃으며 물었다. "왕자를 만나러 왔어?"라고. 갑작스러운 원수와의 재회에 공격 태세에 들어갔던 크라피카는 그 손바닥 아래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도대체 이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목적을 알고 있는지, 이곳에 있는 건지 몰라 크라피카는 머릿속이 흔들렸다. 혼돈이 찾아온 붉은 눈을 내려보며 클로로는 여유 있게도 말했다. "내가 그를 잘 알아. 널 도울 수 있어."
당연히 잘 알겠지. 자신의 가족을, 친우를, 동포를 죽여 팔아 넘긴 게 바로 환영 여단이었다. 카킹왕자의 레벨 정도 되는 인간이라면 아마 직접 만나 처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반항하는 크라피카의 목을 조르며 클로로는 웃어 보였다.
"카킹왕자를 우습게 보지 마. 그는 너 같은 애들을 산 채로 벗겨 먹고 전시하는 걸 좋아하는 변태거든."
"충고 고맙게 새겨 듣지."
"난 그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고, 네가 찾는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 이 정도면 내 이용가치가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목숨까지 걸고 날 찾아와서 지껄이는 이유가 뭔지 말해."
크라피카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손이 느슨해지는 것을 틈 타 강하게 쳐냈다.
"내가 너에게 정보를 팔지."
사이좋게 거래를 할 만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크라피카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정보'를 들이미는 사내의 행동은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상종해서는 안 된다고 머릿속이 경고해도 멋대로 입이 움직었다.
"얼마에?"
"돈으로는 의미 없어."
"그럼 뭘 원하지?"
"너."
클로로의 말에 크라피카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한동안 근처에서 머물 예정이니 언제든 내키면 연락하라는 사내의 가벼운 말 역시 한 귀로 흘려 넘긴 채로 무시했다. 끔찍한 소릴 떠들어 대는 사내를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었지만 중요한 것은 카킹왕자였고 자신은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혼자가 아닌 둘, 자신의 곁에 미자이스톰이 있는 이상 함부로 여단의 머리를 건드릴 수도 없었다. 동료가 또다시 위험에 빠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현재로써 크라피카가 아는 정보라고는 카킹왕자가 이 도시에 있다는 사실, 곧 암흑대륙의 배에 오르게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정보들을 얻는 데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왕자는 무척이나 조용히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마치 뱀과 같았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만 그의 움직임이 전해졌고 크라피카는 어떻게든 그 조용한 흐름을 따라잡으려 노력했으나 늘 허탕이었다.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는 아무런 준비 없이 텅텅 빈손으로 그를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어차피 승산없는 게임인데 적까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마주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미자이스톰은 어둠의 사이트들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지만 그것도 그다지 큰 소득은 없었다. 뜬구름 잡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엉망인 머릿속을 어쩌지 못하며 크라피카는 자신이 지내는 호텔의 룸 테라스로 나왔다. 항구가 멀지 않아 바람에서 바다의 소금기가 느껴졌다. 거칠어진 손으로 세수를 하며 숨을 들이켰다. 뿌옇게 쌓인 안개만큼이나 앞이 캄캄하게 느껴져 왔다. 곧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손에 잡히질 않았다. 이것만, 이번 일만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그 끝이 쉽지가 않았다. 입을 타고 긴 숨을 뱉으며 크라피카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킹왕자에게서 눈을 찾아와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것은 어떻게서든 손에 넣어야 했다.
클로로를 다시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킹왕자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 비하면 여단의 위치 파악은 식은 죽 먹기에 가까웠다. 헌터 사이트와 미자이스톰이 사용하는 어둠의 사이트들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그가 머무는 곳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크라피카가 지내는 호텔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여단과 지내고 있었다. 지도 위에서 깜빡이는 붉은 점을 보며 크라피카는 몇 번이고 다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이 내놓는 답은 언제나 같았다. 지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 안에 자신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동포의 눈을 찾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이미 오래였다. 목숨도 내놓고 사는 데에 익숙했다. 이제 와서 꺼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심은 섰어?"
크라피카가 클로로 루시후르를 찾았을 때, 그는 고고하게 자신이 지내는 호텔 근처 노천카페에 있었다. 멋대로 의자를 빼 앉는 크라피카에게 큰 제지 없이 시선은 손에 쥔 책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팔랑, 페이지를 넘기며 묻는 말에 크라피카는 꽉 주먹을 쥐었다 편 후 입을 열었다.
"네가 원하는걸 줄 테니, 너도 내가 원하는 걸 내놔."
"그럼 교섭 성공이군."
탁, 사내의 손에 들린 책이 닫혔다. 따라오라는 클로로의 말에 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그가 지내는 호텔이었다. 자신을 원한다는 의미가 그다지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 즈음은 크라피카도 이미 눈치를 챈 상태였지만 갑작스럽게 입술부터 부딪혀 오는 사내의 행동에는 조금 놀랐다. 발이 꼬이며 침대로 쓰러졌고 당장에라도 사내를 죽이기 위해 넨능력을 열었지만 "날 죽이면 네가 원하는 건 못 찾을 거야."라는 웃음기 어린 말에 거두어야 했다.
그날, 클로로는 지독하게도 크라피카를 안아댔다. 유희조차 없이 자신의 안을 밀고 들어오는 사내의 행동에 크라피카는 역겨움과 괴로움으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붉게 물들어진 눈동자와 터져 나오는 비명에 클로로는 무척이나 즐거운 듯이 크라피카를 내려보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 시선이 너무도 역겨워 구역질이 다 나올 지경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크라피카는 그런 추함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클로로는 크라피카가 안기는 순간마다 약속대로 카킹왕자의 정보를 건네 주었다. 현재 그의 동향이라던지 그가 하고 있는 일이라던지 그의 주변의 인물들에 관한. 크라피카 홀로는 전혀 알아낼 수 없었던 정보들이 침대에서 보내는 지옥과 같은 시간 이후에 쉽게도 던져졌다. 어느새인가 크라피카는 옷을 갈아입거나 미자이스톰과의 미팅을 위한 외출을 제외하면 항상 클로로의 방 안에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심하게 굴어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게 맞았다. 그가 자신의 안을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자신을 보지 않는다고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지옥과 같았지만 크라피카를 버티게 하는 것은 오로지 이 모든 게 끝나고 저 사내의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미련 없이 죽일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날이 오면 자신이 당했던 이 모든 일 만큼이나 잔인하고 지독하게 죽여버리겠다는 결심 하나로 크라피카는 모든 것을 견뎌내고 있었다.
"욕실에서 자살이라도 했나 싶었어. 하도 안 나오길래."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며 나오는 크라피카에게 클로로가 농담 비슷한 것을 던졌으나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실제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에 가까운 매일이었으니까. 탈탈 머리를 털어 내고 침대에 걸터앉아 바닥에 던져진 옷을 주워 입으려 하자 등 뒤로 사내가 팔을 뻗어 안아왔다. 바짝 서기 시작하는 소름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크라피카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벌써 가려고?"
"오늘부터 이곳에 친구가 와. 인사를 하러 가야 해."
"친구라- 너에게도 친구가 있었지."
싸늘하게 웃으며 중얼댔다.
"그 친구들이 네 이런 꼴을 알면 충격이겠어."
"그 이상 한마디만 더 해."
죽여 버릴 거니까. 서늘하게 터져 나오는 크라피카의 목소리에 클로로는 어깨를 잡아 다시 침대로 누른 후 분노에 뒤덮인 얼굴을 내려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빙긋이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을 보며 크라피카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제 제대로 맞은 탓인지 아슬하게 흔들리던 치아에서 고통이 치밀었다. 입가의 근육을 경련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크라피카를 본 클로로가 억지로 턱을 잡아 입을 열게 했다.
"찢어졌어? 그건 아니고-"
멋대로 입안을 헤집는 사내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싶었으나 턱을 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 이가 흔들리네. 맞아서 나갔나? 그렇게 심하게 때리진 않았는데."
클로로는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마냥 즐거운 얼굴로 크라피카의 이를 잡았다. 그만! 이라고 외치기도 전에 두둑 하는 느낌과 함께 사내가 입안에서 하얀 치아를 빼내 눈가로 들이밀었다. 입안으로 쏟아진 피가 비린내를 풍겨댔다.
"미친놈."
퉤, 크라피카가 입안에 모인 피와 침을 옆으로 뱉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얼굴에 뱉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제 얼굴에 떨어질 것이었다. 위에서 힘을 빼며 비켜주는 클로로를 확 밀친 후 다시 몸을 일으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 사이 클로로는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진 크라피카의 작은 치아를 가만히 들여다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을 이루고 있던 무언가가 클로로의 손안에 있다는 것조차 싫어 손을 뻗어 그것을 채려 했으나 사내가 빠르게 그것을 뒤로 빼냈다.
"나 줘."
"미쳤어? 남의 치아로 뭘 하려고?"
"아무것도 안 해."
"웃기지마. 당신 말 못 믿어."
"진심이야, 아무것도 안 해. 그저-"
"...."
"넌 내게 아무것도 주지도 남기지도 않을 테니, 이 정도는 내게 줘."
조심스럽게 던져지는 사내에 말에 크라피카는 입을 다물었다. 농담인지 아닌지 모를 그 말이 크라피카에게 있어서는 마치 고백과도 같게 들렸다. 역겨워, 토할 것 같아. 그 소름 끼치는 생각에 크라피카는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왔다. 입안으로 여전히 흐르는 피비린내가 지독했다. 빠져나간 이가 남긴 공간이 너무도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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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아보다 이빨이 더 뭔가 짐승돋아서 좋다.
1년 전에 썼던 애, 창피해서 비공개로 데리고 있다가 새로 업로드.
단크라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가도 처절했으면 좋겠고 막 그래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