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스가] nightmare 2
2015. 8. 10. 12:05





"쿠로오 테츠로군? 작가야. 미술. 이번에 회사 빌딩 로비 벽에 그림을 부탁할까 하고."



식사를 하며 슬쩍 그에 대한 질문에 아버지는 기분 좋은 듯이 대답했다. 스가와라는 정갈하게 놓인 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어 옮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야. 직접 벽화를 해주겠다고 나서줘서 고맙지 뭐야."
"그래요?"
"그래, 한동안 계속 회사에서 돌아다닐 것 같으니까 보면 인사도 좀 해두고. 그런 작가랑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지. 예술적 견해를 넓히는 것도 중요- 그러고 보니, 네 방에 걸린 그림 말이다."



막 간장 종지에 올려진 와사비를 덜어내며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그 그림, 쿠로오 테츠로의 작품하고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아."



그림? 스가와라는 오물오물 참치 뱃살을 입에 넣고 씹으며 아버지가 언급한 그림을 떠올렸다. 푸른 하늘로 된 벽지가 도배되어 있고, 기차 모양의 침대에 비행기 모양 러그가 깔려 있던 방은 잃어버린 20년 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있었다. 자주 쓰지 않았는지 목재로 된 책상 위에는 군데군데 먼지가 자욱했고 커다란 침대에 누워보니 어쩐지 불편하고 이상했다. 그 틈에서 스가와라가 유일하게 편하게 느낀 것이 바로 벽에 걸린 그림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자신이 그려진 초상화. 누가 그렸냐 물었을 때 어머니는 '네가 누군가에게서 받아왔다.'고만 말해 출처를 모르는 것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 심지어 간 기억도 없는데 배경은 바다였다. 터치감이 강렬하고 투박한 그 그림과는 달리 그려진 스가와라 코우시도 그 뒤의 바다도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그림이 쿠로오 테츠로의 그림과 비슷하다라,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의 악몽의 주인이라면 이건 과연 우연일까. 스가와라는 부드러운 회가 꽉꽉 목을 메워가는 기분이 들었다.


거기까지 의심이 피어올랐다고 해서 당장 그를 찾아가 당신이 내 악몽의 원인이냐, 이유냐, 주인이냐 물을 수는 없었다. 가진 것은 오로지 의심 뿐이었고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는 무엇도 없었다. 그저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의 안에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는 그 감각을 제외하곤. 하지만 그 역시도 꺼내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가와라가 입을 다물어 버린 사이, 아버지의 제안으로 쿠로오 테츠로라는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로비에서 사내용 카페테리아로 가는 복도 벽면 한가득 그의 그림이 그려질 예정이었다. 빨간 작업복에 페인트와 온갖 물감을 들고 돌아다니는 그는 금세 사내의 화젯거리가 되어 떠돌았다. 여직원들은 그의 몸매와 얼굴에 감탄했고 남자 직원들은 그 소문에 헛것들을 덧붙여댔다. 듣고 싶지 않아도 그의 이름은 회사를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잘생겼네, 멋있네 라고 여자들이 떠들면 남자들은 여자 많게 생겼네, 누구랑 같이 나가는 걸 봤네 라는 말들을 굳이 붙여 떠들었다. 오늘도 여전히.



"아침에 인사팀의 신입 애가 테츠로군에게 커피 사다 주더라? 봤어?"
"대박,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세상에! 나도 아직 자판기 커피 한 잔 못 사줘 봤는데!"
"근데 커피 안 마신다고 거절했다더라고. 카페테리아에서 홍차나 아이스티로 사갈까 봐."



점심시간, 식사를 위해 사내 식당 혹은 외부로 빠져나가는 여자들 틈에서 스가와라는 어렵지 않게 그의 이름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근처 가게에서 샌드위치나 사다 먹을 생각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만 그 이름을 들으니 식욕이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스티 주면서 그림 하나만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초상화 같은 거?"
"에이, 그건 아니죠. 그 사람 그림이 요즘 얼마나 비싼데."



아마도 빈말일 말을 주워들은 다른 남자직원 하나가 여자들 틈으로 끼어들며 딴지를 걸어왔다.



"우리 월급으로는 동공 하나 값이려나?"
"전시도 잘 안 하고 작품도 대리인 통해서만 공개하고 모습도 잘 안 비춘다고 들었는데 돈이 좋기는 하네요, 이렇게 회사 건물에 벽화를 다 그려주고."
"거기다 그 작가 사람 안 그리기로 유명해요."



다른 남자들처럼 쿠로오 테츠로에 대한 헛소문이나 좋지 않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제가 좀 예술을 아는데, 라는 말투로 떠들던 남자의 영양가 없는 말 속에서 스가와라는 그나마 괜찮은 것을 주워들었다. 사람을 그리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 가지고 있었던 의심이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쿠로오 테츠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스가와라는 서 있었다. 그들과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어쩐지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나마 자신과 연결되어 있던 고리 두 개 중 하나가 끊겨 나갔고, 남은 것은 또다시 악몽뿐이었다. 스가와라는 피곤함을 애써 지우지 않은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놈의 초상화 때문인지, 오늘은 그의 앞에서 누드모델을 하는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괜한 꿈이었잖아. 귓가가 화끈거렸다.


다음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으로 내려가자 카페테리아 벽 앞에서 어렵지 않게 쿠로오 테츠로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회의실 앞에서 그렇게 스쳐 지나갔을 때에 아팠던 심장은 매일 아침, 저녁 퇴근길에 마주해서 그런지 좀 가라앉아 있었다. 여전히 평소보다는 날뛰기는 했지만. 이제 막 시작된 벽화의 초기 단계를 흘끔 지켜보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림도 중요하지만 밥이라도 먹고 하지. 직원이 아니라 사내 식당 이용 못 하나? 근처에 편의점이라도 가던지, 아 보기 흉해서 그런가. 그럼 카페에서 빵이라도, 케이크라도. 자신도 아직 점심 전이면서도 그의 끼니가 이상하게 걱정되었다.


그러고 보면 꿈에서 그와 마주앉아 참 많은 것들을 먹었었다. 엊그제는 함께 해산물을 먹었다. 스가와라는 구워진 조개며 게며 가리지 않고 먹은 반면 반대편에 집게를 들고 앉은 그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안 먹어? 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장난스레 묻기도 했다.



"나 해산물 못 먹잖아."



그는 턱을 괸 채로 그리 말했다. 한두 번 말한 대답이 아닌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꿈속의 자신은 볼 가득 조갯살을 씹고 있었다. 그의 그런 배려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 이상한 꿈을 떠올리니 절로 눈가가 피곤해졌다. 잊고 싶은 기억이 잊히지 않듯이 지독한 꿈 역시도 지독하게 잊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켜켜이 쌓여가는 악몽은 스가와라 코우시 안에서 깊게 또아리를 틀고 자리 잡았다. 누군가가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묻는다면 줄줄이 일일히 답할 수 있을 만큼. 다들 눈을 뜨면 잘만 잊는 게 꿈이던데, 왜 그는 잊히질 않는 것일까, 왜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조개며 게며 누드모델이며, 그냥 다 좀 사라지고 잊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대답을 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악몽이 괴로웠다. 연결 고리는 이것밖에 없으면서.


하지만 그 괴로움과는 달리 회사 근처의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스가와라는 두 개의 샌드위치를 구매했다. 흰 벽 앞에 서 있는 그의 등이 자꾸만 떠올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전해주지도 못할 거면서 그러고 말았다. 누가 줬는데 먹을래요, 오다가 주었는데 드실래요, 서비스로 받은 건데 가질래요 회사로 향하면서 어떻게 이상하지 않게 그에게 말을 붙이고 샌드위치를 건넬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다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저쪽은 아예 자신을 모를지도 몰랐고, 아니면... 자신을 모르는 척 무시하는 걸지도 모르니 어떤 말을 해도 이상하게만 받아들일 것 같았다. 전자라면 그래도 괜찮아, 후자일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섭섭해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걸까. 모르는 것투성이로 머리가 아파져 왔다.



"애초에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는 거지."



만약 후자라 하더라도 상대가 무시하면 자신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샌드위치가 다 무슨 소용이람. 스가와라는 괜스레 쥔 봉투를 화풀이하듯 흔들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결국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꿈에 나오는걸. 악몽이 되고 싶다더니 진짜 악몽이 되어버렸는걸. 그걸 어떻게 신경 안 써.



"기술이 발전되었으면 기억을 백업하는 장치 정도는 머리에 심어 줘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스가와라는 다시 회사 안으로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먼 시간이라 그런지 건물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우선은 사 왔으니 주긴 해야겠다 싶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쿠로오 테츠로는 벽 앞에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리에 있던 사람은 식사라도 하러 갔는지 도구와 재료들만 놓인 채로 그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어쩌지.."



그냥 두고 갈까. 그것도 좀 이상한데. 몰래 두고 가는 것은 어쩐지 그에게 커피를 사줬다 거절당했다는 여직원이 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쪽지라도 남겨 둬야 하나. 남긴다고 해서 알고 알아차릴 관계도 아닌데. 고작 600엔짜리 샌드위치를 건네는 일인데 너무도 어려웠다.



"다섯 살에서 갑자기 20년이나 자라서 그래."



애꿎은 자신을 탓하며 스가와라는 커다란 벽 앞에 섰다. 이제 막 시작 단계라 아무것도 안 보인다 생각했던 벽 위로 선만 잡아놓은 커다란 호랑이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호랑이라, 스가와라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동물과 같은 것을 기억해내며 천천히 그 선 위로 손을 뻗었다.



"뭐하는 겁니까?"



그 틈을 가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벽에 닿았을 것이었다. 날카롭게 던져진 질문에 스가와라는 서둘러 공중에 뜬 제 손을 거두고 한 발짝 벽에서 떨어졌다. 편의점 봉투를 든 쿠로오 테츠로가 삐딱하게 서서 저를 들여보고 있었다.



"만지지 마시오, 라고 적힌 거 안 보입니까?"



그가 툭툭 운동화 바닥으로 발치에 붙어있는 종이를 두드렸다.



"바닥을 보고 걷는 게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날 선 질문이라 날 서게 대답했더니 그가 픽 웃으며 편의점 봉투를 대충 근처에 던졌다. 가벼운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컵라면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기본이잖아요. 전시회 가서는 그림을 만지지 않는다, 아직 전시 단계는 아니지만 일단은 그림이니까."



아니면 회장님 아드님은 그냥 사서 즐기는 타입이라 신경 안 쓰시나? 따라붙는 빈정거리는 말에 스가와라는 인상을 구겼다.



"아직 안 만졌어요."
"내가 말 안 걸었으면 분명 닿았을 텐데."
"어때요? 어차피 내 그림이 될 텐데?"
"그쪽 아버지의 그림이 되겠죠."
"아버지건 곧 제거나 마찬가지죠."



어차피 내가 다 물려받을 텐데. 그리 중얼대며 날카롭게 말하자 이번엔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구겨진 그의 미간은 조금 느낌이 달랐다. 자신이 내는 짜증과는 다른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었다. 곤란함? 슬픔? 괴로움? 이상한 감정이 그의 얼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느냐고 따지려 했지만 스가와라는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저 얼굴을 들여보고 있으니 조금 돌아왔다 믿었던 심장이 너무도 아파져 왔기 때문이었다. 괴로워 보이는 그를 따라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해..."



왜 이러는 거야 진짜. 스가와라는 서둘러 쿠로오 테츠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맞게 중얼댔다. 살짝 입술도 물었다 놓았다. 진짜 이상하게도 울음소리가 날 것 같아 물어야만 했다. 손에 쥔 봉투에 든 샌드위치가 무슨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컵라면을 사 온 모양이니 이런 건 필요 없겠지만, 그래도 이왕 그를 생각해서 사 왔으니 주자 싶어 스가와라는 겨우 제 마음을 달래며 봉투를 내밀었다.



"먹으면서 해요."



그가 받지 않아 안겨주듯 밀어주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악몽을 위해 제일 맛있는 씨푸드를 포기하고 에그 햄 샌드위치로 골랐는데. 현실의 그도 해산물을 싫어할까. 스가와라는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람을 그리지 않는 걸까? 그 역시도 묻고 싶었다. 덧붙여 누군가를 그려 본 적이 없느냐고, 그리고 그게 나 아니냐고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를 배회하는 궁금증이 둥둥 머리를 떠다녔다. 알고 싶은 것도 묻고 싶은 것도 확인하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아마 무엇도 입에 담을 수 없겠지. 그리고 스가와라는 직감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질문에 어느 것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악몽과 달랐다. 자신에게 다정하지도 않았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봐 주지도 않았다. 어쩐지 이상하게도 갑자기 악몽이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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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못하고 냅둔 애들이 많은데 또 그런 애를 하나 늘린 기분.... 심지어 원고도 안했잖아여~~

서브로 누군가를 넣어 괴롭혀주고 시픈 마음이 자꾸 드는데 일단은 아직 시작도 못한 얘네 둘을 이어주고 싶다.

미래의 나 화이팅...^_ㅠ...


퇴..퇴..퇴고.. 나중에...흑흑흐그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