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고 말랐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코트 안 주머니에서 동전 지갑을 꺼내 커피값을 지불했다. 차고 마른 겨울에는 따뜻한 커피가 없으면 거리를 걷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사고 후유증으로 제대로 굽혀지거나 펴지지 않는 손가락을 삐걱삐걱 움직여 잔돈을 챙겨 넣은 후 조심스럽게 컵을 챙겨 거리로 나왔다. 두꺼운 머플러에 반 즈음 얼굴을 파묻고, 이 추위를 피해 움츠린 사람들을 동시에 피하며 스가와라는 걸음을 서둘렀다. 아침의 출근길은 언제나 지옥 같았지만, 오늘은 유독 더 그러했다.
"왔어요?"
벌겋게 뺨이 얼고 손이 하얗게 일어나기 시작할 즈음에야 스가와라는 뜨뜻한 히터가 틀어진 사무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아직 군데군데 비워진 틈에서 인사를 건네는 동료에게 고개로만 대답하며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제야 조금 언 몸이 슬슬 녹아가는 듯 했다.
"올겨울은 유독 춥네요?"
"그래요?"
"네. 작년까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눈을 많이 보겠어요."
근처의 여직원이 웃으며 시답지 않은 날씨 이야기를 해오는 것을 들으며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작년의 날씨는 어땠는지 스가와라는 알 수 없었다. 그전의 해도 그전의 전의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해의 여름이 더웠는지 겨울이 추웠는지 모두가 대충이나마 기억하고 남기는 인상도 스가와라에게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아, 스가와라군 사고로 전의 기억이 없다고 했죠?"
드라마에서나 등장한다는 그 기억상실을 앓고 있었으니까.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가볍게도 던지는 그녀의 질문에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여전히 무엇도 어느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억들이.
어느 날 눈을 떴더니 울고 있는 어머니가 있었고, 자신은 다섯 살의 소년에서 스물 다섯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20년이라는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의 스가와라 코우시는 사라진 채로 텅 빈 자신만이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 텅 빈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사랑했는지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비어버린 스가와라의 머릿속에서는 그저 장난감 로봇과 이미 늙어 눈을 감았다던 애완견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작년의 겨울이 어땠는지, 추웠는지 눈이 많이 내렸는지는 자신이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때요? 기억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은?"
찬 바람으로 식어버린 커피를 홀짝이며 막 컴퓨터의 전원을 켜던 스가와라에게 그녀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오늘따라 그녀는 말이 많았다. 직무 태만 수준이라고 생각하며 스가와라는 입을 열었다.
"개 같죠."
그걸 몰라서 묻나? 별걸 다 묻는다 싶어 차갑게 대답했다. 그제야 스가와라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챘는지 그녀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대단한 관심을 거두어주었다.
이 웃기지도 않은 병의 원인은 교통사고라고 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이대로 눈을 못 뜰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큰 사고였다고 했다. 다행히 자신은 반짝이는 병원 천장을 시작으로 인생을 재시작하긴 했지만 세이브 하지 못했던 데이터들은 날아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업도 못 한 자신을 앞에 둔 어머니는 웃으며 "이렇게 된 거 새 인생이라 생각하고 다시 시작해보자." 혹은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라며 응원하고 기뻐했으나 그러기엔 잃어버린 데이터의 양이 너무도 많았다. 무려 20년이었다. 그걸 그대로 없는 기억이라 치기에는 스가와라는 조금 분했다. 거기다, 꿈. 밤마다 찾아오는 꿈이 그 새 인생의 재출발을 막아섰다. 그래, 그 꿈이 문제였다. 다시 눈을 뜬 이후로 스가와라는 꿈을 꾸지 않는 날이 없었다. 차라리 평범하고 그럴듯한 꿈이라면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찾아오는 꿈은 스가와라에게는 악몽에 가까웠다.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꿈은 악몽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오늘도 그 빌어먹을 꿈을 꾼 덕인지 눅눅하게 가라앉은 기분은 영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딱히 꿈 때문이라기보다 잃은 게 많은 사람의 예민함 혹은 자기방어일 수도 있었지만 오늘도 여전히 스가와라는 자신의 가라앉은 기분을 꿈의 탓으로 돌렸다. 이 찬 겨울도, 마른 바람도, 여전히 고장 난 제 머리와 손도 아닌 그 악몽의 탓이라고.
날씨가 춥든 혹은 누군가의 기억이 사라졌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 속에서 스가와라 코우시는 바빴다. 사고 이후 한 달 이상을 집에서만 보내다 갑작스럽게 던져진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줄지어진 회의들과 해결되지 않는 의견들은 마치 전쟁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틈에서 자신을 구제해준 것은 아버지의 호출이었다.
"저, 스가와라군. 회장실 호출이에요."
요란하게 울리는 내선 전화를 받은 오전의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전해왔다. 슬쩍 시간을 보니 곧 있으면 점심때였다. 식사나 같이하자며 부른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스가와라는 아무도 일어서지 않은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짐을 챙겨 나섰다. 등 뒤로 수군거림이 달라붙었지만, 입사하고 나서 한 두 번 받아보는 관심이 아니었기에 쉬이 무시할 수 있었다. 팔에 코트와 머플러를 모두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로 오르며 스가와라는 서둘러 반질하게 잘 닦인 벽으로 제 모습을 체크했다. 사고 이후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기에 조금이라도 아파 보이거나 피곤해 보이는 것은 사양이었다. 한 달 동안 집에서 어머니에게 들들 볶이며 시달린 것으로 그 관심은 충분했다. 빈 채로 당장 세상으로 나가는 게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보다 하루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보고받아야 하는 어머니의 성격에 맞추는 것이 더 힘들어 되는대로 급하게 아버지의 회사에 낙하산을 타고 들어왔다. 20년을 몽땅 잃어버린 아들이 걱정되는 것은 이해하나 그 지대한 관심은 스가와라에게 매일 찾아오는 악몽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었다.
"피곤해."
점점 위로 솟아오르는 상자 안에서 스가와라는 눈가의 거뭇한 자국을 밀어 지우며 중얼댔다. 이렇게 문지른다고 사라질 자국도 아니지만 혹시나 싶어 문질러 보았다. 여전히 지워지진 않았다.
"이게 다 그 꿈 때문이야."
매일 매일 다른 상황, 다른 장소, 다른 곳이었지만 동일한 것은 꿈속에 나오는 사람이었다. 스가와라의 아주 짧은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 속에 누군가인가 싶어 어머니에게 슬쩍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녀도 모르는 눈치라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 사람은 아주 건장한 사내로 스가와라가 기억하는 짧은 인생 중에서 아마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꿈속의 그는 가끔은 가만히 마주 앉아 저를 보고만 있다 사라지기도 했고 혹은 아주 다정하게 웃거나 손을 잡는 가벼운 스킨쉽을 해왔다. 그 감각이 너무도 생생해서 처음에는 자신이 귀신에 씐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꿈은 현실과 달리 심각해지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자신은 그가 아주 익숙하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가 웃으면 따라 웃었고 그가 손을 내밀면 자연스럽게 그 위로 손바닥을 얹어놓았다. 마치 다른 인격인 것처럼 행동하는 자신을 보면서 스가와라는 스스로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 행복한 건 좋은데, 문제는 그 꿈에서 깨고 나면 여전히 자신은 그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거기다 심지어 오늘 아침은 그 모르는 사내와 입까지 맞추었다. 전신을 휘감는 온기에 억지로 깨보려 노력도 해보았지만 꿈속의 자신은 그를 놓지 않기 위해 애쓰다 못해 필사적이었다.
"나 잘한다고 칭찬해 줘."
"빈말로도 하기 힘들지 않을까."
처음 보는 방에서 자신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고 그 뒤에는 사내가 서 있었다. 연주라고 하기에 뭣한 그저 띵띵 거리는 건반 누름에 지나지 않는 음악이 공간을 울려대고 있었다.
"착한 사람에게만 들리는 연주야. ㅡ는 나쁘니까 안 들리나 보지."
놀리듯 웃으며 또 다른 자신이 멋대로 떠들었다. 그리곤 슬쩍 사내의 반응을 보기 위해 고개를 트는 순간 그의 입술이 가볍게 가르고 제 안으로 침투했다.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향긋한 것이었다. 지금의 자신과 달리 흔들리지 않는 손가락은 사내의 가벼운 혀 놀림에 흠칫 떨려왔다. 그리곤 이내 깊게 각도를 틀어 마주하는 그의 입술에 손바닥으로 건반들을 짓눌렀다. 빈말로도 절대로 연주라 표현할 수 없는 음들이 공중을 울려댔다. 소음 속에서 그에게 매달리는 자신이 있었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혀를 얽매고 섞이는 타액을 모조리 삼켜내며 달라붙는 자신이 있었다. 떨어져야 해, 나는 이 남자가 누군지 몰라. 이건 또 그 악몽이라고. 벗어날 수 없는 키스 속에서 스가와라는 현실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열렬하게 흥분하는 자신과 싸워댔다. 그리고 그 끝나지 않을 입맞춤이 떨어지고 사내가 말했다.
"나는 너에게 그냥 꿈이 되길 보다는 악몽이 되고 싶을 정도야. 그래야 잊히지 않을 테니까."
아주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확실히 그의 바람대로 그는 스가와라에게 악몽이었다. 심지어 오늘의 악몽은 속옷까지 적셨다. 일어나서 사내를 상대로 스물다섯의 같은 사내가 몽정이라니. 아마 처음은 아니겠지만 제 기억으로는 처음과 다름없는 그 몽정은 악몽이라는 단어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급하게 빨아 세탁 바구니에 던져놓은 속옷을 생각하며 스가와라는 낮게 그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뱉는 만큼 꿈이 깎여 나가 사라지면 좋을 텐데. 허튼 생각과 동시에 띵, 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빠르게 도착한 가장 끝 층에서 가볍게 내리자 아버지 대신 대기하고 있던 여비서가 반갑게 반겨왔다.
"아버지는요?"
"안에 손님과 대화하고 계세요."
기다릴게요. 곧 끝날 약속이거니 싶어 스가와라는 적당하게 대기용으로 마련되어있는 로비의 소파에 몸을 앉혔다. 잠깐 비빌 생각이었는데 친절하게도 여비서가 따뜻한 차를 잔에 담아 내주었다. 더는 녹일 필요가 없는 몸을 차로 데우며 얼마나 시계만 바라보았을까, 달칵하며 돌아가는 문고리 소리와 함께 회장실의 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빠져나오는 길쭉한 다리를 지켜보며 스가와라는 찻잔을 내려놓고 옷들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막 문을 완전히 나서는 아버지의 손님과 마주했다.
"..."
마주하는 순간, 스가와라는 세상의 언어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입 밖으로 혹은 머릿속으로 어쩜 하나의 단어조차도 떠오르지 않을까. 하얗게 질린 머릿속은 생각하기를 거부했고, 언제나 말썽인 손가락은 제멋대로 잘게 꿈틀댔다.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발작하는 자신을 내려보는 사내는 아주 가만히 눈에 제 얼굴을 담았다 떼어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겨울바람과 같이 시리게 지나치는 사내를 어쩌지 못하고 스가와라는 겨우 숨만 뱉어 쉬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꿈속의 남자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그 악몽 속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생각보다 꿈과 현실의 구분 점은 간단했다. 이건 현실이었다. 꿈이었다면 자신은 아마 조금 전 그에게 환하게 웃으며 안겼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꿈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저렇게 싸늘한 눈으로 내려보지 않을 테니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을 찾고 싶었지만 정지한 몸과 마음과 머리는 쉽게 작동을 하려 들지 않았다. 등 뒤에서 퍼지는 사내의 사라짐 소리에 스가와라는 놓치듯 팔에 걸치고 있던 코트와 머플러를 요란하게 쏟아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여비서가 놀라 작은 비명을 지르며 다가와 함께 무너지는 몸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어디 안 좋으세요?"
"아뇨, 괜찮아요. 괜찮은데..."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왜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고 왜 갑자기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지 모르겠어요. 어쩐지 꿈속의 자신과 현실에서 뒤섞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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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이렇게 쿠로스가를 생각하면 겨울 냄새가 떠오르는지 모르게ㄸㅏ. 킁킁. 쿠로오가 냉미남 같이 생겨서 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