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Bad Habit
2015. 7. 26. 22:05






"저기, 스가와라군! 저... 혹시 오이카와군 메일 주소 알아?"



가끔 스가와라는 자신의 안에 태풍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과 같이 이런 웃기지도 않은 질문들을 받을 때. 그 외에도 다수. 안 그래도 무거운 전공 서적의 무게가 팔 안에서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미안, 나도 잘 몰라."



순 거짓말. 스가와라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생각치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눈앞의 여자가 적지 않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아, 정말?" 믿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녀가 믿거나 말거나 스가와라에게는 상관없는 일과 같았다.



"도서관 반납하러 가야 해서, 가도 될까?"



딱히 유세를 떠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심술도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찾아가 '메일 주소' 하나 묻지 못하는 여자를 돕고 싶은 마음이 없을 뿐이었다. 치사하다고 욕해도 좋았다. 애써 친절한 척 팔 안에 안겨있는 책들을 슬쩍 들어 올리며 스가와라는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빠르게 멀어지는 걸음 뒤로 그녀의 친구들이 "치사하네." "토오루군이랑 좀 친하다고 유세 떨기는."과 같은 감상을 뱉는 것을 무시했다. 대놓고 들으라는 식의 말에 몸 안 가득 휘몰아치는 바람이 웅웅 소리를 냈지만 스가와라는 그마저도 무시했다.


처음부터 자신이 자신의 '라이벌'들에게 치사하게 군 것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부터 마치 스가와라 코우시라는 존재를 오이카와 토오루의 부속품이나 혹은 징검다리나 그 옆의 껌딱지로 본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우체부도 아닌데 메일주소든 전해달라는 편지든 스가와라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발렌타인이나 그의 생일이 다가오면 더 심해졌다. 스스로 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모두 스가와라 코우시를 통해 배달되었다. 웃으며 한 두 번 정도야 쿨하게 오이카와에게 전해주었지만 매일, 매달, 매해 반복되니 슬슬 짜증이 일었다. 몸 안에서 자꾸만 바람 소리가 일었다. 그 바람은 금세 태풍처럼 커져 곧 몰아칠 것만 같았다.


오늘도 그랬다. 아침부터 있던 강의를 같이 듣는 여자 후배 하나가 잘 포장된 리스트 밴드를 건네왔다. 괜찮으면, 토오루 선배에게 전해주세요. 벌겋게 얼굴을 붉히며 내미는 것을 스가와라는 거절하고 또 거절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엉겁결에 받아들고 말았다. 누가 네 토오룬데? 제 안에서는 그렇게 따져 묻고 있었지만 멍청하게도 입을 타고 흐르는 말은 "응, 전해줄게." 정도였다. 내 토오루는 리스트 밴드 같은 거 거추장스러워서 안 하거든? 그렇게 유난을 떨고 싶은 것도 꾹 참았다. 틈이 날 때마다 버리고 싶은 것도 꾹 참았다. 어쨌거나, 자시는 전해주는 입장이었으므로.


오이카와 토오루와 그를 선망하고 꿈꾸는 여자아이들을 생각하니 휘잉 휘잉 몸 안에서 거친 바람 소리가 흘러나왔다. 스가와라는 이제 익숙한 그 소리를 눌러 가라앉히려 평온한 얼굴을 흉내 내며 도서관에 빌린 책들을 반납했다. 팔과 가방을 차지하고 있던 책들을 돌려주고 돌아서는 길,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이 지잉 지잉 진동음을 뱉어냈다. 누군지 뻔했기에 이름조차 확인하지 않고 받았다.



-"어디야?"
"도서관 앞."
-"왜 거기 있어? 나 오늘 연습시합 있다니까."
"알아."



모를 리가 없었다. 아침부터 "오늘 오이카와군 연습 시합 있지?" "보러 갈래?" "보러 갈 거지?"와 같은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걸 생각하니 또 슬금 짜증이 치밀어 스가와라는 슬쩍 제 눈썹을 문질렀다.



-"안 올 거야?"



쌩쌩 찬 바람이 부는 말투를 눈치챘는지 건너편에서 약간 시무룩한 물음이 들려왔다. 어쩌면 살짝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응 가고 싶지 않아. 가면 또 멋대로 네 이름을 부르는 여자애들을 봐야 하잖아. 꺅꺅거리며 네가 땀 흘리는 순간을 찬양하고 너와 눈 마주쳤다느니 이쪽을 봐줬다느니 웃기지도 않은 착각에 빠져 시끄럽게 구는 걸 봐야 하잖아. 그 틈에서 당당하게 저건 내 토오루거든? 이라던가 쟨 내 애인이거든? 하고 티를 낼 수 없는 게 괴로웠다. 자신의 연인을 남들하고 공유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갈게."



그게 싫었지 오이카와 토오루가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스가와라는 하는 수 없이 별로 내키지 않은 대답을 뱉었다. "진짜? 알았어. 기다릴게!" 금세 수화기 너머에서 신이 난 목소리에 몸 안을 울리던 바람 소리가 좀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아 진짜 가기 싫은데. 마음과 달리 전화를 끊고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평소에는 한산하다 못해 텅텅 빈 체육관은 연습 경기가 있는 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북적했다. 대부분 여학생들이 차지한 관람석으로 들어서며 스가와라는 최대한 맨 뒷줄을 차지하고 앉았다. 이미 시작된 시합 속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었다. 푸른 유니폼 등 뒤로 그려진 백넘버와 이니셜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춤추듯 흔들렸다.



"오이카와군 뒷모습이 진짜 멋있는 것 같아."
"저 1번 넘버가 진짜 제대로지."



목소리의 크기를 줄이지 않은 채로 떠드는 근처 여자들의 말에 스가와라는 슬쩍 공감했다. 저게 좀 멋있긴 해. 하지만 이내 치졸한 생각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녀들은 알까, 저 넘버를 손수 달아준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시트지를 깔고 종이를 깔고 다리미로 열심히 밀어 구겨지지 않게 온 정성을 다해 달아준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저 셔츠를 입은 오이카와 토오루를 가장 먼저 본 사람도 자신이라는 건? 뿌듯해 하는 그의 사진이 휴대폰 안에 있다는 건? 호들갑을 떠는 여자들 틈에서 스가와라는 이런 생각을 해대는 자신이 참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아직 오이카와군 사귀는 사람 없지?"
"그렇다더라. 저번 주에 그 음대 미녀가 고백했다가 차였다잖아. 레벨이 도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뭐, 우리야 고맙지. 이렇게 공공재로 남아주는 게~"



음대 미녀는 뭐고 공공재는 뭐야? 신경 쓰기 싫어도 귀로 쏙쏙 박혀오는 말들에 스가와라는 저도 모르게 코트를 보던 시선을 찌푸렸다. 음대 미녀? 고백? 누가 지금 누구에게 고백했다고? 처음 듣는 소식에 또다시 태풍이 몰아쳤다. 거기다 공공재라니, 누가 공공재야? 쟤 내 거거든? 공공재 아니거든? 누굴 멋대로 공용 물품 취급하는 건지.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손가락들이 꿈틀댔다.



"짜증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짓이겨 씹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이렇게라도 표출하지 않으면 스가와라는 제 안의 커다란 구름이 결국 폭파해 모든 것을 떠내려가게 만들 것만 같았다. 이런 일로 하나하나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의식하고 담아두는 것도 좋지 않은데. 이제 좀 그만 익숙해져도 좋을 텐데. 스스로를 매번 달래보아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래오래 겪고 쭈욱 또 겪어도 쉬운 일이 되질 못 했다. 당장에라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가와라 코우시꺼!" 라고 빼액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스가와라는 코트 위로 불리는 휘슬소리를 귀에 담았다. 경기가 끝났다는 의미였다.

끼긱, 흘러내린 땀과 잘 닦인 코트 바닥에서 울리는 배구화 소리가 흩어졌다. 다급하게 다가온 여자 매니저에게 물병을 받아드는 오이카와의 모습을 담기 위한 작은 플래시 소리들도 같이 흩어졌다. 잘생겼어, 멋있어, 귀여워. 앓는 소리 역시 같이 뒤섞였다. 그 먼지 같은 작은 소음들 틈에서 스가와라는 서둘러 제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곧 그에게 다가가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찬양하고 눈을 반짝일 팬클럽을 지켜볼 여유도 관대함도 이제 스가와라에게는 없었다.



"코우시!!"



제 안을 가득 메우는 한계치에 도망치듯 재빨리 벗어나려 몸을 일으켰지만, 그보다 빨리 고요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경기장의 분위기를 오이카와 토오루가 깼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막 나서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스가와라가 뒤를 돌았다. 어깨에 대충 수건을 걸친 그가 아래에서 휘휘 팔을 휘저으며 저를 부르고 있었다. 멍청하고 눈치도 없고.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들에 한 숨을 뱉으며 스가와라는 터벅터벅 걸어 내려가 관람석의 난간 앞에 섰다. 훅, 다가온 오이카와 토오루에게서 기분 나쁘지 않은 땀 냄새가 풍겨왔다.



"기다려, 저녁 먹고 들어가자."
"싫은데."



네 팬클럽이 너와 눈 한 번 더 마주치기 위해, 말 한마디 더 걸기 위해 아등바등 달려드는 것을 보고 지켜보고 기다린 후의 이야기잖아. 스가와라는 차마 그 말을 꺼내지 못하며 뚱하게 뱉었다.



"왜 이렇게 심통이 났어? 아까 전화 받을 때 목소리도 별로던데, 무슨 일 있어?"
"없어."
"거짓말, 너 오늘 내 경기에 하나도 집중 못 하고 있었잖아."


항의하듯 오이카와가 난간을 잡고 살짝 흔들며 투정을 부렸다.

그래, 집중 못 했다. 주변에서 널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 하는 거 주워듣고 혼자 끙끙 앓느라 집중 못 했다. 왜? 어쩔래? 싸우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런 볼멘소리가 나갈 것만 같아 스가와라는 서둘러 꾹 입을 다물었다. 대신 항의의 표시로 가방을 뒤져 아침에 받았던 누군가가 전해달라던 리스트 밴드를 건넸다. 리본으로 아주 예쁘게 묶인, 그러나 스가와라에게는 더러운 오물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뭐야? 내 선물이야?"
"내가 산 거 아니야. 같은 수업 듣는 여자애가 전해 달래."
"아, 그래?"



싱글 웃으며 오이카와가 덥썩 받아갔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오이카와 토오루는 저를 향해 오는 편지도 선물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고백은 거절해주는 것이 아주 고마울 정도였다. 평소에 쓰지도 않는 리스트 밴드를 냉큼 거두어간 그가 보란 듯이 손목에 채우곤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눈치도 없이 "어때? 잘 어울리나?" 하고 물어왔다. 우지끈, 몸 안에서 무언가가 뚝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눈으로 비바람이 들어찰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다리가 꺾일 것만 같았다. 양옆으로 내려앉은 손이 부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제 입술을 슬쩍 물었다. 더는 저 꼴을 봐주고 싶지 않아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벗어나기도 전에 급하게 그의 손이 팔뚝을 잡아왔다.



"하하, 미안해. 삐쳤어?"
"뭐?"
"아니면 화났어?"



꽉, 팔뚝을 강하게 붙잡아 당기며 그가 장난스레 물어왔다. 말투와 달리 손아귀의 힘은 운동선수의 것이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코우시가 화낼 때가 제일 좋더라."
"특히 나 때문에 화내는 거."
"거기에 질투가 섞여 있으면 더 좋고."



그거 알아? 코우시 질투하면 막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곧 울 거 같은 얼굴로 나만 노려봐. 다른 건 안 보고 내가 미워서 그리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이렇게 쳐다본다니까? 지금, 딱 그 얼굴.

오이카와 토오루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실실 웃으며 말해왔다.



"그래서 자꾸만 코우시를 속상하게 만들고 싶어져. 질투에 눈이 멀어서 오이카와 토오루밖에 생각 못 하게 만들고 싶어져."
"너 좋으라고-"



화내는 거 아니거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스가와라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과 마주한 오이카와의 눈동자, 거기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어쩐지 김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스가와라는 제 팔뚝을 붙잡은 오이카와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제야 강하게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더니 자연스레 팔도 놓아주었다. 매번 감정의 소용돌이를 맛보고 오르락내리락 휘몰아치는 기분을 안으면서도 오이카와를 놓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저 눈 때문이었다. 오롯이 저만 담는 눈동자, 자신이 치졸하게 구는 그 마음만큼 오이카와 토오루의 마음도 똑같다는 것을 스가와라는 알고 있었다.



"기다릴 거지?"



몰아치던 태풍이 어느새인가 뚝 끊겼다. 몸 안으로 다시금 한줄기 햇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잠잠해진 자신의 안을 알았는지 오이카와가 웃으며 물어왔다. 스가와라는 억지로 만들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무리 운동하고 바로 나갈게."



아마 절대로 무리겠지만, 믿어주는 수밖에. 리스트 밴드를 다시 풀어 제 손에 얹어준 오이카와 토오루가 끄덕이는 대답에 안심했는지 씩 웃어 보이곤 팀원들에게 돌아섰다. 꾹, 그의 손에 잠시 머물었던 밴드를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넣은 후 스가와라는 이번에야말로 방해 없이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길, 슬쩍 손바닥으로 붉어진 목을 감췄다. 완벽하게 맑은 하늘은 아니었지만, 태풍은 다시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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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떨고 못된 두 사람이 쓰고 싶었는데 요즘에 막 뭔가 욕구는 엄청 많은데

하나도 안써진다......




전력주제 - 태풍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