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 시골구석은 변한 게 하나도 없냐?"
머리 아래로 떨어지는 햇볕은 여전히 뜨겁다. 포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로로 피어오르는 열기도 뜨겁다. 쿠로오는 슬쩍 셔츠를 걷어 올린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툴툴거렸다. 약 5년 만의 고향 방문이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은 풍경이 반갑다기보다 질리기 직전이었다. 거기다 도쿄에서 사 온 기념품들이 가득 담긴 쇼핑백의 무게가 더 묵직하게 느껴졌다. 더워, 무거워, 짜증 나. 반가운 기색은 전혀 없이 그런 생각만 머릿속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물을 뿌리는 할머니, 가게 앞을 지키는 고양이의 사료를 채우는 아주머니, 생선가게의 스티로폼을 정리하는 아저씨 그리고 과일 위를 떠다니는 파리들을 쫓는 할아버지. 일상적인 풍경들이 잘 닦인 구두의 박자에 맞추어 스쳐 지나갔다. 하나하나 보이지 않는 발자국이 찍힐 때마다 이 거리를 채우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지만, 그리 벅차거나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여기서 교복을 입고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그런데 벌써 정장 차림이라니."
그저 자신의 흘러가는 나이를 실감했을 뿐이었다.
상점들을 스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주택가로 들어와서는 걸음이 빨라졌다. 쇼핑백 끈에 남은 손자국을 아슬아슬하게 견뎌내며 익숙하게 코너를 돌고, 왼쪽으로 꺾고 이번엔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 5년 만에 방문하는 본가의 대문 앞에 섰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까진 딱딱한 문을 바라보며 쿠로오는 슬쩍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고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해 꼬박 5년 만에 눌러보는 본가의 벨이었다. 작은 새소리와 같은 울림과 함께 이내 덜컹, 소리를 울리며 안쪽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탁탁탁 달려 나오는 슬리퍼 소리와 함께 다시금 덜컹, 이번에는 눈앞의 문이 열렸다.
"테츠로!!"
"잘 지내셨어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반갑게 맞아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쿠로오는 웃으며 팔을 벌렸다. 언제부터인가 자신보다 작아진 나이 든 여인이 와락 품으로 안겨오며 "우리 아들!!"하고 외쳤다.
"좀 보자, 살 좀 빠진 거 같다? 키는 좀 자랐나? 응?"
"그냥 그대로죠. 빠지고 자랄게 어딨어요. 이제 스물다섯인데."
"좀 야윈 거 같은데? 일이 힘들어?"
"일이야 늘 힘들죠."
안 힘든 일이 있어도 아마 그 자리에 대한 오퍼는 진즉에 차 제 몫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흐리게 웃으며 쿠로오는 냉큼 들고왔던 기념품을 내밀었다. 유명하다는 바나나 케이크와 명인이 만든 쿠키 따위였다. 암만 봐도 평범하게 생긴 먹을거리였는데 도쿄라는 딱지라던가 인기품목 혹은 베스트 스티커가 붙었다는 이유로 가격이 꽤 나가는 것들이었다. 맛이야 어떻든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물건. 다행히도 "나 이거 먹어보고 싶었어."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힘들게 내려온 애를 현관에만 세워뒀네."
쇼핑백을 뒤적이던 어머니가 그제야 아들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하며 장난스레 웃었다. 얼른 들어가자, 그녀의 팔에 이끌려 태어나고 자라고 20년이나 지냈던 본가로 들어서며 쿠로오도 웃었다. 어머니의 솜씨로 정리된 정원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서자 다르면서도 전과 같은 풍경이 눈으로 차올랐다. 낡은 현관의 신발장은 그대로였고 그 위에 올려진 화분은 기억과 다른 것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위치는 그대로였고 그 자리를 차지한 시계는 기억과 다른 것이었다.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고 같아진 모습을 구경하듯 천천히 둘러보며 쿠로오는 제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 안으로 들어섰다. 5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인데 조금 떨어져 있었다고 기분이 참 이상했다.
"네 방은 그대로 두었어. 어제 청소해놨으니까 쉬어. 식사는 네 아버지 오면 같이 하자. 괜찮지?"
"네."
"너 올 시간이라 물 받아놨는데 식었으면 다시 받고."
"그럴게요, 아 그보다-"
어깨에 매고 있던 커다란 짐가방을 내려놓으며 쿠로오는 살짝 마른 제 입술을 축였다. 5년 만에 담아보는 이름이라는 것은 집 안의 모습만큼이나 그대로이면서도 참 달랐다.
"스가와라는 잘 지내요?"
여전히 사랑스러우면서도 이제는 어색했다. 도쿄를 떠나기 전, 말버릇처럼 입에 담았던 이름을 오랜만에 불러보며 묻자 막 앞치마를 두르던 어머니가 어정쩡하게 웃으며 끄덕인다.
"뭐, 잘 지낼 거야.."
잘 지낼 거야? 말이 조금 이상했다. 쿠로오의 생각을 읽었는지 어머니는 슬쩍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 도쿄 올라가고 얼마 안 지나서, 코우시군네 할머니가 돌아가셨거든."
"네, 그건 직접 전화 받았어요."
"그래? 뭐, 너 대학가고 나서는 딱히 코우시군이 우리 집에 혼자 오거나 하는 일이 없으니까 잘 모르겠네..."
그거야 그렇지, 아들이 떠난 집에 아들 친구가 드나드는 것도 모양새가 참 이상했다.
"나는 네가 도쿄 가면서 코우시군도 끌고 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너희들 그렇게 친했잖아."
"..이야기는 해봤어요. 같이 대학 가자고. 그런데-"
돈이 없었으니까. 그 문제는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열아홉의 쿠로오 테츠로에게 전 재산은 고작 3천엔이 전부였다.
"거기다 할머니 혼자 두고 갈 수 없다고도 했고."
"그래?"
"그 찻집 아직도 있긴 해요?"
슬쩍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어머니는 "아마?" 라며 대충 대화를 끝내곤 주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쩐지 무언가 숨긴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녀를 붙잡고 따지고 들기보다 쿠로오는 입을 다물고 제 방으로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전에도 어머니는 자신이 스가와라에 대한 화제를 꺼내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건 그 녀석이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서라던가, 돈이 없다던가, 낡아빠진 교복을 입는다던가, 무너질 것 같은 찻집의 2층에서 생활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아들이 웃으며 말하는 '친구'라는 관계가 보편적인 '친구'가 아님을 조금 눈치 했기 때문이었다. "쿠로오는 참 코우시군을 좋아하네, 다른 친구들하고도 좀 잘 지내야지." "코우시군말고는 집에 아무도 안 데려와? 옆집 켄마군하고는 요새 안보니?" "왜 더운데 둘이 방에 틀어박혀 있어? 거실에 나와서 공부하도록 해." 등등. 미묘하게 스가와라를 어렵게 대하던 그녀의 행동을 알면서도 쿠로오는 그냥 두었다. 실제로도 스가와라 코우시와 친구는 아니었으니까. 이 세상에 어떤 친구도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몸을 겹치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스가와라 코우시와 함께했던 모든 행위가 쿠로오에게 있어서는 어른을 흉내 내는 가벼운 장난처럼 느껴졌다. 붉어진 얼굴로 마주친 입술이라던가, 우산 아래에서 꼭 잡았던 손 같은 것들이. 순수하면서도 더러웠다. 붉어진 얼굴로 겹치는 입술 만큼은 질척했고, 시선을 피해 꼭 잡았던 손 아래에서 욕정은 들끓었다. 만약 어른이었다면 조금은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흉내를 내는 소년들에게는 생각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냥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늘 붙어 지냈을 뿐이었다.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람처럼 지냈던 주제에 이별은 생각보다 간단했지. 대학은 도쿄로 가기로 했어. 그래? 응, 너도 갈래? 아니, 나는 대학은 무리야. 할머니도 계시고. 그리 말하며 스가와라는 자신의 눈썹을 문질렀다. 그리고 뭐라고 말했더라?
"ㅡ"
조금 붉어진 얼굴로, 부끄럽게 간절하게 애절하게 무어라 말했는데 그 부분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쨌든, 입술을 떼어내는 것보다 이별이 더 쉬웠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자연스레 과거는 과거가 되었다. 도쿄로 올라와 바빠진 생활의 틈에서 과거가 되어버린 스가와라 코우시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 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여자친구도 사귀었고 진짜 어른이 되어 더는 어른 흉내를 내지 않게 되었다. 여자를 안으며 꼭 콘돔을 썼고, 입술을 마주하기 전에 '우리가 키스 정도는 해도 되는 사이인가' 따위를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였더라? 네 번째 사귀었던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었을 때였나? 아니면 그다음 여자의 머리카락을 쥐고 입술을 마주하고 때였나, 어쨌거나 잔뜩 와인을 먹고 취기에 올랐을 때에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전화가 왔었다. 아주 늦은 새벽이었으니 아마 그런 때였을 것이었다. 도쿄로 올라와 처음 받게 된 녀석의 연락은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것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울었는지 아니면 우는 것인지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보드라운 여자의 배 위를 문지르던 쿠로오의 기분도 엉망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무어라 더 대화를 하긴 했는데, 제 허리로 감겨오는 여자의 다리에 제 뺨을 끌어당기는 여자의 손가락에 콧등에 닿는 입술에 신경을 빼앗겨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 그래. 알았어. 내일 다시 전화할게. 그렇게 급히 전화를 끊고 어른의 밤에 집중했다.
그 후 연락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도 않았다. 달콤한 열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아침에 품에 안은 여자와 나눈 시답지 않은 대화 때문인지 쿠로오는 완벽하게 스가와라 코우시의 전화를 잊고 말았다. 뒤늦게서야 맞다, 하고 연락을 취했지만 닿지는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과거에서 졸업하고 혼자 어른이 된 주제에 스가와라 코우시를 떠올리고 그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사랑스럽다고 떠올리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참 치졸하고 약아빠져 보였다. 쿠로오는 픽 웃으며 목에 건 넥타이를 손가락으로 빼어 풀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 동네에서 살면서 떠오르는 기억의 대부분은 모두 스가와라 코우시 뿐이었으니까. 그 말고는 이 거리에 남은 것이 자신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다지 달콤하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쿠로오는 욕실로 향했다. 일단은 씻고 오랜 이동으로 지친 몸을 쉬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오랜만의 아들 방문을 반기기 위해서인지 아버지는 일찍 퇴근하셨다. 오랜만에 가족 모두가 식탁에 모여앉아 어머니 표 나베로 거하게 배를 채웠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것들을 목으로 위로 안으로 채워 넣으며 쿠로오는 즐겁게 웃었다. 도쿄는 어떠냐, 회사는 괜찮으냐, 사귀는 애인은 있느냐, 혼자 사는데 어려운 것은 없느냐, 밥은 잘 해먹느냐- 끊임없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질문에 좋아요, 괜찮아요, 있어요, 없어요, 해먹어요 아주 간단한 대답만 늘어놓았다. 이 정 없는 자식, 넌 좀 철이 들어야 해. 아버지가 끌끌 혀를 찼지만 쿠로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쿠로오는 밤거리로 나왔다. "어디 가니?" 어머니의 질문에 머리를 긁적이며 "오랜만에 동창들이 보자네요."라고 티가 나는 거짓말을 던졌다. 동창이 어딨어. 그래 봤자 이웃집 켄마 뿐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지 슬쩍 인상을 찌푸린 어머니는 푹 한숨을 쉬더니 다시 돌아서며 말없이 고무장갑을 끼셨다. 드문드문 가로등 불만 켜진 거리로 나오자 더웠던 낮과 달리 조금은 쌀쌀했다. 반팔 아래로 튀어나온 팔을 문지르며 쿠로오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이미 다른 사람의 집이 되어버린 켄마네를 지나 걸어온 길도 지나 지나쳐 온 상점가로 향했다. 불이 꺼진 상점가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서자 어지럽게 풀들이 자란 작은 찻집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윈도우 너머로 쏟아지는 빛들이 어둑한 골목의 바닥으로 떨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그림자가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쿠로오는 멀뚱히 그 그림자를 구경하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우리는 친구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다. 그런 사이에 오랜만에 만나 어떠한 인사를 해야 할지 쉬이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안녕, 오랜만이네? 이건 너무 어색하고. 안녕, 잘 지냈어? 이건 너무 염치없어 보이고. 안녕, 나 보고 싶었어? 아, 이건 좀 재수 없네. 타들어 가는 불꽃이 손가락에 닿을 때까지 고민해도 썩 마음에 드는 인사가 떠오르지 않아 초조해졌다. 결국 입에 문 것을 다 태우고 말았다. 가볍게 바닥으로 던져 비벼끄며, 대충하자 뻔뻔하게 나가자 마음먹으며 막 걸음을 떼는 순간, 눈에 담았던 그림자가 변했다. 어느새인가 그림자는 두 개가 되었고 움직임이 격해졌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커다란 그림자가 작은 그림자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거나 거칠게 몸을 밀치는 것들이 바닥 위에서 넘실대었다. 쿠로오는 웃기지도 않은 인시말을 고민할 틈도 없이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창 너머에 스가와라 코우시가 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그의 악의 가득한 눈빛을 받고있는 사내 역시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쿠로오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저런 얼굴을 몰랐다. 화를 내거나, 악의에 찬 얼굴. 거기에 저 멍들과 상처는 다 뭐란 말인가. 불안하게 뛰어대는 심장을 목으로 넘어가는 침으로 가라앉히며 벌컥, 가게 문을 열었다. 쿵쿵 뛰는 심장과 달리 경쾌한 종소리가 찻집 내부를 울려댔다.
"뭐야??"
가장 처음 자신을 발견한 것은 뒤를 돌아선 남자였다. 들어선 자신이 손님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남자는 아래위로 훑어본 후 생각보다 가볍게 찻집을 나섰다. 물론, 나가기 전에 으르렁 거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돈 준비해." 그 짖음은 명백한 명령과 같았다.
"...."
다음으로 자신을 발견한 것은 당연하게도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세로로 얇은 선이 들어간 셔츠나 허리에 둘리진 녀석의 까만 에이프런은 커피라도 끼얹었는지 엉망이었다. 그 자국을 증명하듯 하얀 도자기 컵은 조각이 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깨져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잔해처럼 스가와라 코우시의 얼굴도 조각나 있었다. 자신이 기억했던 얼굴에 살이 좀 빠졌고, 눈가에 멍이 들어 있었으며 입술에는 딱지가 앉아있었다.
"오랜만이다."
한참을 말없이 자신을 들여보던 스가와라 코우시는 생각보다 평온한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응, 오랜만이다. 생각보다 자신의 인사 역시 가볍고 평범하게 튀어나갔다. 그 이후로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스가와라는 제 허리에 둘린 젖은 에이프런을 벗어 거칠게 구석으로 던지고는 조심스레 깨진 컵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숙인 머리 아래로 보드라웠던 머리카락이 내려와 흔들렸다. 달그락 달그락, 손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잔해를 올려 치워낸 녀석이 등을 보였다. 쓰레기통으로 요란하게 쏟아붓고는 다시 등을 돌려 마주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리곤 싸늘하게 물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왔거든... 그보다, 누구야? 방금?"
주름진 얼굴에 낡은 행색을 했던 남자를 떠올리며 쿠로오가 물었다. 스가와라는 슬쩍 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뜻밖의 대답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
"네가 아버지가 어딨어?"
잔인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부모는 없었다. 키워준 할머니가 있을 뿐이었다.
"있었어. 나도 몰랐지만, 있었데."
"...언제 알았는데? 왜 이야기 안 했어?"
"했어."
"언제?"
"저번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
"괜찮아, 기억 못 할 것 같았어. 너 내 통화에 집중 못 하고 있었잖아."
그 정도는 알아. 우리가 함께 지낸 게 몇 년인데. 스가와라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 뒤에인가? 갑자기 찾아왔어. 어릴 때 몇 번 봤던 얼굴이라 기억하고 있었지. 나는 그냥 할머니의 손님인가 했는데, 아들이라잖아. 내 아버지라고. 키우기 싫어서 할머니에게 던져 버리고 간 주제에 갑자기 나타나서 이 찻집을 팔겠다잖아."
피곤한 목소리가 가만히 공간으로 흘렀다.
"이 찻집은 할머니의 전부야. 그건 내 전부이기도 해. 그런데 그걸 어떻게 팔아. 판다고 해도 헐값일 텐데. 그 가격에 전부를 팔 수는 없어서 버텼더니 가끔 찾아와서 저렇게 굴어. 할 줄 아는 거라곤 욕하고 때리고 소리 지르는 것밖에 없는 남자거든. 가엽게도."
"....널 버린 주제에 찾아온다고?"
양심도 없이? 쿠로오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그 질문에 스가와라는 눈동자를 깜빡이며 웃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웃기다. 쿠로오."
"...뭐?"
"너도, 날 버렸잖아."
그 말에는 원망도 탓함도 담기지 않았다. 그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너도 날 버린 주제에 지금 찾아왔잖아. 안 그래?"
뭐? 되묻는 쿠로오에게 친절하게 스가와라는 또박또박 끊어 다시 이야기했다.
너도. 날. 버렸잖아. 쿠로오 테츠로.
"미안, 이제 마감 시간인데 좀 나가줄래. 가게 문 닫아야 해서."
그리고는 팔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뻗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쭉 뻗어 방금 들어온 문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가달라는 그 단호한 말에 쿠로오는 굳어 있던 제 발을 겨우 움직여냈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호흡을 하는 것도 잊은 채로 다시 거리로 나왔다. 빛이 일렁이던 창문은 싸늘하게 내려진 블라인드에 가려 차단되었다. 그 빛을 차단하며 스가와라는 이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사라져버린 그의 모습을 붙잡기 위해 머리로 그리며 어둠만이 남은 골목에서 쿠로오는 제 이마를 짚었다.
-"네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랑 여기 있어 줘."
코끝을 빨갛게 물들이고, 제 교복 자락을 붙잡고 부탁했던 소년의 말이 떠올랐다. 이게 언제더라? 아, 그래. 도쿄의 대학에 가겠다고 했던 그 날. 잘 기억 나지 않았던 그 말. 그 말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장례는 상점 분들 도움으로 어떻게든 잘 치렀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나타났어."
-"찻집을 팔겠다고 하는데 나 이거 없으면 죽을지도 몰라, 쿠로오."
-"쓰레기 같은 사람이야.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있지, 쿠로오. 내 이야기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그런데 듣고만 있었어. 열에 취해, 달콤한 여자의 목소리에 취해, 함께 마셨던 와인에 취해 그냥 듣고만 있었어. 네가 보냈던 그 간절했던 말들을 왜 잊었을까, 왜 잊고 살았을까. 키스하고 싶어, 손잡고 싶어, 안고 싶어. 자신의 그 간절했던 말들에 스가와라 코우시는 언제나 웃어주었는데.
"하하.."
자신을 탓하는 마른 웃음이 길 위로 흘렀다. 쿠로오는 뜯어 버리고 싶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다시 밝혀지지 않는 찻집의 창을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스가와라 코우시는 절대로 다신, 자신에게 빛 따위는 밝혀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버리고 버림받은 쿠로오 테츠로는 무서웠다. 외로웠다. 쓸쓸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슬펐다. 귓가로 아버지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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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어른인 줄 아는 쿠로오 테츠로
하지만 사실은 영락없는 꼬맹이 수준의 못된 쿠로오가 보고 싶었다.
퇴고 나중에. 개님 미용실을 다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