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일상이 무너지는 날을 맛보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속보입니다. 배구, 나고야 에리어 소속 오이카와 토오루 선수가 오늘 새벽 4시 33분경 자택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최근 1년간 우울증 증세로 자주 병원을 방문했으며-"
몇 명이나 되는 걸까.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경찰 관계자는 최근 부진했던 성적과 부상에 따른 악성 댓글, 그리고 부담감으로-"
몇 명이나 되길래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도 일어나는 것일까.
스가와라 코우시는 멍한 얼굴로 습관적으로 틀었던 아침 뉴스를 바라보았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손에 들었던 커피잔이 힘없이 추락했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가 머리와 귀 마지막으로 속 안을 울려댔다.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서 웅크린 채로 눈을 떴다. 6월 7일, 아침 일찍 날아든 엄청난 소식에 날려 먹었던 커피의 흔적이 낸 마른 자국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보았다. 빛을 차단한 커튼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아침 혹은 낮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스가와라에게는 온통 밤과 같았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오랜 친우인 사와무라 다이치가 자신을 그리 달랬을 때,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를 죽음으로 몬 것은 자신인데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허기도 졸음도 잊은 채로 얼마나 그렇게 더 있었을까, 잠그지 않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선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와 커튼부터 젖혔다. 촥, 벌어지는 틈 사이로 쏟아지는 빛에 스가와라는 황급히 팔로 제 눈가를 가렸다.
"언제까지 그 꼴로 있을 거야. 상복같은 그 칙칙한 옷들 벗어. 좀."
날카로운 이와이즈미의 잔소리에 모르는 척 얼굴을 돌려 바닥에 묻었다. 후, 짜증 섞인 사내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스가와라군, 그만해."
"...."
"빌어먹을 그놈이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해서 너까지 같이 죽을 필요는 없잖아."
달래려는지 누그러진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고 밥 먹자. 전화 안 받는다고 사와무라가 걱정하더라. 근처 가게에서 대충 사 왔는데 뭐라도 먹고 청승떨자."
"...이와이즈미군-"
"그래, 왜."
"미안해."
울어도 울어도 왜 눈물은 끝이 나질 않는 걸까. 이미 동 나버렸어야 할 눈물샘이 또 터져 나왔다. 젖어 나오는 목소리에 부스럭거리며 식탁에 들고 온 봉투들을 내려놓던 사내가 한 번 더 크게 속이 탄 숨을 내쉬었다.
"네가 왜 미안해. 사과는 오이카와 토오루에게 받을 거야."
"미안해.. 내가, 내가... 너처럼 토오루를 잡아주지 못해서-"
"스가와라군-"
"내가... 내가 죽인 거야."
중학교 시절, 흔들리던 오이카와를 붙잡아준 이와이즈미의 이야기는 스가와라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고작 열여섯 혹은 열다섯의 소년이 했던 일을 어른이 된 자신은 조금도 할 수가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무마냥 흔들리던 오이카와 토오루를 잡아주기는커녕 화를 내고 비난했다. 끝에 가서는 결국 이별까지 입에 담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을 그렇게 벼랑까지 몰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주 늦어버린 후회를 해도 제 후회를 그리고 사과를 받아줄 이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는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은 사내였다. 배구 선수로서. 그는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했고 누구보다 오래 코트 위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스가와라는 그의 그 열정과 투지를 사랑했다. 비록 그를 무너트리는 장벽이 많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강함을 사랑했다. 자신에게 없었던 것들을 가진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결국 오이카와 토오루도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중학교 시절, 눈앞에 나타난 천재 후배로도 모자라 고등학교 시절에는 현에서 앞을 막는 거대한 라이벌을 만났다. 3년 내내 전국에 발 한번 디뎌보지 못하고 졸업했다. 대학 시절, 스포츠 추천으로 입학했으나 그의 노력과 재능을 시기한 선배들 틈에서 치이느라 그리 오래 코트에 설 수도 없었다. 그 사이 오이카와 토오루가 라이벌이라 여기던 다른 선수들은 모두 앞으로 나아갔다. 이름을 알리고 금세 프로가 되었다. "코우시, 나는 천재가 아니야." 그 시기에 오이카와가 했던 쓸쓸하던 말. "아무리 노력해도 앞서나가는 놈들을 따라잡지는 못할 거야." 아마 그때부터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연인의 등을 쓸어주며 위로 따위를 건넸다. 괜찮아, 라고.
대학 3학년이 되어서야 오이카와는 주전으로 코트에 설 수 있었다. 선배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유지한 폼으로 금방 코트 위를 뒤집어 놓았다. 빨리, 늦은 만큼 더, 속력을 내서- 그 조마조마한 심정과 아슬아슬한 불안감이 그의 무릎을 좀먹어가는 줄도 모르고 오이카와는 코트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1년 뒤, 꿈에 그리던 프로 데뷔를 이루어냈다. 졸업과 함께 대형 구단의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배구를 향한 애정으로 버텨온 가느다란 재능은 프로 세계에는 그리 오래 통하지 않았다. 날고 기는 선수들은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으며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 틈에서 그저 평범한 선수일 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 축에도 끼지 못했다. 대학 시절 무리했던 무릎은 금방 고장이 나 부상으로 시즌을 날려 먹었고 코트 위에 서는 것보다 벤치를 달구는 일이 더 많았다. 괜찮아, 이제 막 프로 선수가 된 거잖아. 걱정하는 스가와라에게 오이카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처음은 누구나 그래. 그리 스스로를 자위했지만, 그도 잠시- 2년 후배였던 카게야마가 프로로 데뷔해 첫 시즌을 완벽하게 보내자 오이카와의 발판도 무너져 내렸다.
카게야마와 난 달라. 걘 천재고 난 아니야. 오이카와는 입버릇처럼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조급해하고 불안해하는 그를 잡아주기 위해 스가와라는 부단히 애를 썼지만 그는 자신에게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오이카와 토오루가 그렇게 모든 것을 쏟으며 갈구하던 배구판의 모든 것이 그를 괴롭히고 곪게 하였다. 결국 2번째 시즌을 끝내고 오이카와는 리그 하위 팀으로 이적했고 그건 그가 버티고 있던 자존심을 무너트리는 사건이 되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팀에서 모두 새로 시작하면 된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변하는 것은 없었다. 과거의 영광으로 팀에서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컸다. 큰 팀에서 비싼 돈을 주고 데려온 선수이니 팬들의 기대 역시도 컸다. 그 관심과 다정한 기대는 오이카와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고 스가와라는 그것을 나누어 들어주지 못했다. 말을 안 듣는 무릎은 또 말썽이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슬럼프를 불렀고, 슬럼프는 이내 부진을 부르며 팬들의 원성과 분노를 샀다. 그럼에도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스가와라는 그저 오이카와의 곁에 있어 주며 그의 괴로움을 함께 삼켰다. 하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함께 삼켜주어도 오이카와는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난 우물 안의 개구리였어. 이제 배구가 싫어. 코트에 서는 순간이 무서워. 공을 잡고 싶지 않아. 토스를 올리고 싶지 않아. 망가진 무릎으로 더 버텨도 또 다치겠지. 이게 현실이야. 나는 아무것도 안 돼. 될 수 없어. 이게 끝이야. 더는 버티고 싶지 않아.
그의 괴로움에 스가와라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화를 내었다.
"그럼 그냥 그만둬. 오이카와 토오루. 그렇게 괴로운데 왜 붙잡고 있는데? 그냥 다 때려치우고 포기해버려. 그럼 편하잖아?"
"배구가 뭐라고 그렇게 붙잡고 있는데? 힘들면 그냥 포기해. 포기하면 다 쉽잖아! 포기가 안 되어서 버티고 있는 거라면 더 단단하게 마음을 먹어! 당당하던 오이카와 토오루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거야?"
"네가 이렇게 우는 소리하는 거, 나 이제 너무 힘들어. 지긋지긋해. 너에게 내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매번 감당해야 하는 게 힘들어."
"그깟 공놀이잖아, 포기해. 힘든데 왜 그걸 그렇게 잡고 있어."
그러다 종국에는-
"너무 지쳐서 못하겠어. 네 곁에 못 있겠어. 네가 이렇게 한심하게 구는 꼴 더는 못 보겠어. 그러니까 토오루, 우리 떨어져 시간 좀 갖자."
점점 어둠으로 가라앉는 그와 그걸 지켜보는 게 괴롭고 더불어 그 모습에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이별을 고했다. 실제로 그와 정말 헤어지고 싶어서 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시간을 주고 여유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거기서 나와, 일어서, 라고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보다 차라리 그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고 여유를 주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마침 시즌도 끝났으니 조금 머리를 식히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 나아질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이 안일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를 홀로 두고 멀어진 지 꼬박 한 달이 되는 날, 오이카와 토오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뒤늦게서야 스가와라는 오이카와에게 있어서 배구라는 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말끔하게 배구와 떨어졌던 것처럼 그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이카와에게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먼저 배구를 시작했고 늘 배구를 했으며 아직까지 배구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배구가 세상을 이루는 전부였다. 그것을 포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온갖 비난을 받아도 버티고 또 버텨온 것이었는데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걸 너무 늦게서야 알고 말았다. 그에게 배구를 포기하라는 말은 결국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는데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걸 너무 늦게서야 알고 말았다. 어리석게도.
"내가 죽인 거야."
울음으로 엉망인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도 동의하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더 울었을까,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길 위에 서 있었다. 노을이 지는 그 풍경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라 스가와라는 서둘러 제 부어오른 눈을 비벼떴다. 오이카와 토오루와 함께 걷던 그 길목이었다. 그의 본가가 있는 거리. 여기서 몇 정거장 더 버스를 타면 자신의 동네가 나왔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분명 이와이즈미 앞에서 추하게 울고, 억지로 식탁에 앉혀져 빈속에 식사를 하고, 그러다 다 받아내지 못해 토해내고 잠이 들었던 것만 같은데 지금 자신은 아무도 없는 길 위에 서 있었다.
퍽이나 오이카와 토오루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를 만날 자격도 없는 주제에 보고 싶어서 정신도 놓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서로 다른 교복을 입고 걸었던 길을 바라보며 스가와라는 주저앉아 울었다. 풀린 다리가 떨려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 짧은 이 길 위에서 반짝이는 사랑을 했다. 손을 잡고 걷다 누군가 다가오면 황급히 떨어졌고, 깜깜한 밤하늘 아래에서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시답지도 않은 하루를 늘어놓으며 뭐가 그리 좋은지 웃어댔고, 나란히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걷기도 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무슨수를 써서라도 오이카와 토오루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텐데.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의 교복 입은 과거를 떠올리며 스가와라는 한참이나 그렇게 주저앉아 울었다. 울고 또 울고 눈이 다 아파 고통스러울 즈음에 머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길 잃어버렸어요?"
아주 작고 어린 목소리, 그럼에도 익숙하게 느껴져 스가와라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아주 작은 아이가 있었다. 붉은 란도셀을 맨 남자아이가 품에 커다란 배구공을 안고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진한 고동색의 눈, 그리고 같은 색의 머리카락. 잊을 수 없는 그 색을 눈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벌어진 입으로 억눌린 소리를 터트렸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갑자기 다시 울음을 터트리는 어른에 당황했는지 아이는 제 란도셀을 벗어 앞으로 끌어오더니 그 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노오란 수건에는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엉성한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밀어 진 친절을 받아낸 스가와라는 서둘러 손수건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삼켰다.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어린 오이카와 토오루가 눈앞에 나타난 현실이 설명되지 않았다.
"같이 경찰서에 갈래요?"
걱정스럽게 묻는 아이의 말에 스가와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여기 이렇게 있으면 큰일 나요. 차가 오면 어떡해요? 아이가 아이다운 목소리로 걱정을 품으며 억지로 스가와라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조그만 손에서 퍼지는 온기에 이끌려 스가와라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세워 일어섰다.
"근처에 놀이터 있는데! 거기로 가요.그만 울고요. 엄마가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우는 거랬는데."
엉망인 얼굴이 좀 추했는지 슬쩍 찌푸린 얼굴로 아이가 떠들었다. 그 손에 이끌려 걸으면서도 스가와라는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이 자그마한 아이를 믿을 수가 없어 벌어진 입으로 무엇하나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어디 아파요?"
놀이터에 도착해 벤치까지 이끌어준 아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때문에 아파 죽을 것 같아. 차오르는 말과 눈물을 삼키며 끄덕였다.
"어디가 아픈데요? 병원에 가야 해요? 저 병원에 혼자 가본 적 없는데.."
덥석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걱정스레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병원에 가서 나을 수 있는 고통이었다면 차라리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어린아이의 다리가 공중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스가와라는 물들어간 제 눈을 꾹 눌러 짜냈다. 닫혀진 눈꺼풀 사이로 끊임없이 물들이 줄줄 세었다. 마치 꼭지가 나간 수도처럼 흘렀다. 또 운다! 외치는 목소리가 다분히 눌림의 목적이라 픽 웃음이 나왔다. 누구 때문에 우는데, 내가 지금.
"아픈 거 아니면? 엄마 잃어버렸어요?"
"아니야."
"그럼요?"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어."
가늘게 남았던 미소를 거두며 눈을 뜨자 아이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엄마보다요? 아빠보다요?" 그 질문에 스가와라는 무릎 위에 올려둔 젖은 손등을 둥그렇게 말아 쥐며 끄덕였다.
"왜 잃어버렸는데요?"
"내가 못된 짓을 했거든."
"그 사람에게요?"
"응 심한 짓을 했어."
"많이요?"
"응."
세상의 모두가 그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욕해도 자신만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남들이 툭툭 던지는 상처와 같은 말들을 자신만은 입에 담지 말았어야 했다. 언제라도 오이카와 토오루의 편이 되어주겠다며 떠들었던 고백들은 이제 입에 발린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여전히 진심이었지만 빛이 바래버렸다.
"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엄마 아빠보다 소중한 사람이 없어서."
"그래?"
"네.. 그래서 형아가 얼마나 슬픈지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막 배구를 못한다고 생각하면 슬퍼요."
아이가 무릎 위에 얹어놓은 배구공을 둥글게 말아 안으며 말했다.
"저는 지금 배구 하는 게 제일 재밌고 소중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느낌이에요?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거? 음... 배구는 사람이 아니지만 비슷해요?"
"응... 아마?"
"그럼 많이 슬프겠다! 전 지금 상상하니 막 코가 아파요!"
아프다면서 아이는 해맑게 웃었다. 가만히 가라앉는 태양 빛에 반짝이는 익숙한 머리카락을 눈에 담으며 스가와라는 천천히 그 위에 제 손을 뻗어 얹었다. 닿으면 사라질 환상과도 같아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행히도 얇디얇은 아이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은 손 아래에 남아주었다.
"많이 슬퍼도, 너는 울지 마."
울지 마, 그리고 포기도 하지 마. 스가와라는 마르게 웃으며 부탁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네가 더 자라면 배구가 더 소중하거나 즐겁지 않은 순간들이 올지도 몰라. 원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거나 눈앞의 승리에서 좌절할지도 모르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아이가 나타나 앞길을 막는 것만 같아 괴롭기도 할 테고, 아무리 따라잡으려 노력해도 붙잡히지 않는 라이벌이 나타날지도 몰라. 그 존재들이 너보다 앞서나가고 추월하고 유일하게 반짝인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마. 지금 소중하게 여기는 그 마음이 네 전부야. 그 마음을 배반할 정도로 괴롭고 아프고 힘든 순간이 오더라도 그걸 잃어버리면 코가 아플 정도로 슬플 테니까 절대로 포기하면 안 돼."
간절한 그 부탁을 아이가 제대로 이해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곧게 올려 뜬 눈이 가만히 자신을 담는 것을 확인하며 스가와라는 슬쩍 입술을 물고는 숨을 참았다. 정확하게는 울음소리를 견뎌냈다. 끅끅 목으로 터져 나오는 것들을 겨우 삼켜내며 네 번째 손가락에 달라붙어 있었던 반지를 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작은 손바닥 위에 과거 혹은 미래의 오이카와에게 받았던 반지가 반짝였다.
"그리고 나를 용서해줘."
눈앞의 작은 오이카와 토오루는 어디로 가는 존재일까. 그가 완전히 자신에게서 떠나기 전에 돌아온 모습이든, 혹은 환영이든 좋으니 스가와라는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저, 오이카와 토오루가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간단한 위로의 말과 묵묵한 지킴이었을 텐데 자신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어리석었던 연인을 용서해주길 바라며 스가와라는 눈을 감았다. 아롱거리며 눈꺼풀 위로 반짝이던 노을과 함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안심되는 그 훌륭한 대답과 함께 어둠이 내려앉았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스가와라는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아, 꿈이었군.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돌아갔는지 집안은 모든 소음이 죽은 듯이 적막만이 감돌았다. 가라앉은 몸에 힘을 넣어 세우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꿈을 꾸어도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보여줄 것이라면 지금의 오이카와 토오루를 보여주지. 직접 그를 안아주고 달래주고 붙잡아주고 그것도 부족하다면 미안하다고 빌고 용서를 구하도록.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아직 어린 오이카와 토오루가 나왔으니 이 후회도 미안함도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이젠 아무렴 좋았다. 어차피 용서를 빈다 하더라도 오이카와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다른 이들과 같이 매정하게 돌아선 연인을 그렇게 쉽게 용서해 줄 리가 없지. 스가와라는 자조적으로 쓰게 웃으며 침대에서 걸어 나와 거실로 나섰다. 일단 씻고 싶었다. 이 진득한 괴로움을 지우기 위해서 샤워가 하고 싶었다. 터덜터덜 걸으며 거뭇거뭇한 제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욕실 앞에 있는 작은 세탁바구니로 던져 넣으려는 순간,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라 스가와라는 막 검은 자켓과 셔츠를 벗어 내리던 손을 멈추고 현관을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가 다녀갔으니 이번에는 분명 사와무라 다이치이리라. 하지만 조금씩 열리는 문틈으로 들어서는 사내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몇 번이고 상상하고 떠올리고 그리고 추억했지만, 절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던 모습.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모습에 스가와라는 쥐고 있던 손의 자켓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거기서 뭐 해?"
나쁜 짓을 한 자신에게 벌이라도 내리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자신을 놀리는 걸까? 귓가를 울리는 그리웠던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가만히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그는 멀쩡해 보였다. 괴롭거나 어디 아파 보이지도 않았다. 멀끔하고 단정한 모양새의 얼굴이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무너지던 그 감정들은 더는 그의 얼굴에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가 혹시 천국일까? 자신이 따라 죽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팀 복 저지를 입은 오이카와 토오루의 차림새가 묘하게 현실적이었다. 선수들에게 지급되는 스포츠백을 내려놓으며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늦게 들어와서 화났어?"
"....어?"
"메시지 남겼는데? 오늘 오후에 인터뷰도 잡혀서 좀 늦어질 테니까 밥 먼저 먹고 있으라고. 못 본거야?"
메시지? 인터뷰? 도대체 오이카와 토오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스가와라는 그저 눈만 뜨고 있었다.
"씻으려고? 아, 오랜만에 같이 씻을까?"
그가 장난스레 웃으며 물어왔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게 훌훌 저지를 벗고 받쳐 입었던 흰 티셔츠를 벗어 내렸다. 어디 하나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은 몸을 바라보다 스가와라는 그의 목에 걸려있는 작은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얇은 체인 줄에 감긴 반지. 방금 꿈에서 아이였던 그에게 주고 왔던 그 반지였다. 첫 프로 계약금으로 오이카와 토오루가 선물 해주었던 그 반지. 그 꿈같았던 날을 떠올리며 제 손을 내려보자 네 번째 손가락에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반지가 사라져 있었다.
"...반지..."
"뭐?"
"그 반지..."
"이거?"
오이카와가 웃으며 목에 걸린 것을 흔들어 보였다.
"줘? 내가 선물했더니 잃어버릴까 무섭다며 대신 맡아달라며. 돌려줄까?"
내가? 언제? 자신은 그런 적이 없었다. 받고 나서 기뻐 바로 손가락에 끼곤 연신 손바닥을 흔들며 자랑을 했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깨달았다. 어긋난 틈과 기억을 부러 짚고 고쳐낼 필요는 없다고. 제 손가락을 떠난 반지, 그리고 그의 목걸이 위로 붉게 남아있는 자국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적어도 쉬이 지워지지 않을 그 낙인 같은 상처를 눈으로 품으며 스가와라는 다시 울었다. 왈칵 터지는 눈물을 어쩌지도 못하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포기하지 않을게. 다시는."
달라붙은 가슴팍으로 그의 심장이 울려댔다. 제 심장 역시 그의 빈 가슴 위로 쿵쿵 울렸다. 살아있어, 여기 이렇게 울리고 있어. 엉망인 목소리로 스가와라는 뱉어 말했다.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악몽이라도 꾼 거야?"
다정하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끄덕이며 그의 마른 어깨에 제 눈을 묻었다. 응, 아주 무섭고 지독한 악몽이었어. 너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어. 중얼대는 목소리에 "그거, 정말 무서운 꿈이네."라며 오이카와가 위로했다. 죽어버린 오이카와, 어린 오이카와, 지금 눈앞의 오이카와. 어느 것이 꿈인지 스가와라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는 변해버린 시간과 돌아온 오이카와 토오루가 있을 뿐이었다. 이제 절대로 놓지 않을 거야. 버리지도 않을 거야.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그가 아파도 괴로워도 또다시 우는 소리를 내고 나약한 보통의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신의 연인이었고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였다. 그리 결심하며 스가와라는 그의 목에 남아있는 붉은 자국을 없애듯 제 팔로 꽉 품어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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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생일 기념으로 무언가 써야겠다 했으나 이걸 생일 기념으로 쓰기엔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이어따.
덧붙이는 설명충의 설명버릇.
스가가 과거에 두고온 반지가 빠세빠세 빠세세해서 미래를 다 바꿔줘따는
신비의 마법반지에 대한 이야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가가 만난 어린 오이카와는 실제했던 과거의 존재가 아닙니당.....
순수해떤 배구빠가 오이카와의 내면...? 그런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