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스가] 흑심
2015. 5. 24. 22:11





오후 12시 54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전자시계의 정확한 숫자를 확인한 오이카와는 서둘러 의자에 걸쳐둔 가디건에 팔을 꿰며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래된 아파트라 이곳저곳 페인트 자국과 굳어버린 먼지로 엉망인 창 너머로 익숙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나타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드로잉북과 연필 몇 가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반 마디의 엄지손가락만큼 남아있는 뭉툭한 지우개까지 챙긴 후 급히 집을 나섰다.
이 자리에 50년은 더 서 있었다던 낡은 아파트는 오이카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김없이 요란한 비명들을 질러댔다. 이제는 익숙한 그 비명소리를 들으며 쾅쾅 철제계단을 밟아 내려가 따사로운 거리로 몸을 던졌다. 멀지 않은 곳에 아까의 사내가 서 있었다. 신호등 앞에 서서 커다란 개의 목줄을 잡은 그는 몸으로 쏟아지는 햇볕에 기분이 좋은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대고 있었다. 이 반짝이는 빛에 한 점의 찌푸림도 없는 얼굴이었다. 오이카와는 티가 나지 않게 슬쩍 그의 뒤에 섰다. 그리곤 신호가 바뀌는 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그의 뒤를 지켰다.
높이 떠 있는 태양 덕분인지 오늘따라 밟게 되는 그의 그림자가 진했다. 그의 보폭을 옆에서 맞춰 걷는 개가 슬쩍 고개를 돌려 오이카와를 흘끔 바라보았다. 의심 가득한 개의 눈빛도 한두 번 받아 보는 게 아니라 오이카와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안녕? 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개에게는 전달되지 않을 테지만.
평일의 오후라 사람이 없는 거리를 어렵지 않게 걸은 눈앞의 사내는 매일같이 들리는 마트 앞에 섰다. 그가 멈춰 섬에 따라 오이카와는 슬쩍 가까웠던 거리를 벌리며 몸을 숨겼다. 



"넌 여기서 기다려."



커다란 개의 목을 긁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내가 입구 근처에 개 줄을 묶어 놓았다. 개는 불안한 눈빛으로 사내를 올려보았지만 가지 말라거나 혼자 두지 말라 짖는 법이 없었다. 매일같이 보는 풍경을 다시금 눈에 담으며 오이카와는 마트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작은 바구니가 달린 카트를 잡아끌며 사내는 간단한 것들을 거침없이 투하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해 직원을 찾았다. 직원들은 단골손님인 그에게 무척이나 친절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언제나 끝에 다가오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할 수 있어요."
확실히 사내는 뭐든지 혼자서 해내는 타입이었다. 그건 자신이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알아낸 사실 중에 하나로 처음에는 꽤 특별하고 놀라웠는데 이제는 익숙한 것이었다. 직원이 떠난 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카트를 몰며 그는 계속해서 장을 보았다. "여기 있는 게 스파게티 소스 맞죠?" 그의 질문에 근처에 있던 아주머니가 웃으며 "맞아요. 왼편이 토마토, 오른편은 크림과 치즈 소스들이네요."라고 일러주었다. 



"로제 소스는요?"
"그건 좀 위에 있는데-"



그녀의 말에 사내가 까치발을 들었다. 아슬하게 닿는 유리병에 아주머니가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빨리 오이카와가 흔들리는 병을 잡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그가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이카와는 매일같이 보는 그의 그림 같은 미소에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떨어졌다.
문제없이 원하던 모든 물건을 담아낸 사내는 계산까지 완벽하게 끝낸 후 마트를 나섰다. 묵직해 보이는 종이봉투를 품에 안은 그가 묶어둔 개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목줄을 풀어냈다. 쉽지 않은 지 한참을 끙끙대는 모습에 오이카와는 서둘러 다가가 대신 그의 끈을 풀어주었다. 이번에도 사내는 웃으며 감사하다 인사했다.
한 손에는 목줄, 다른 한 손에는 종이봉투를 안은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이카와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앞서 걷거나 따라붙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타박타박 얇은 운동화 바닥으로 보도블록을 경쾌하게 밟으며 사내가 향한 곳은 근처의 카페였다. 커다란 문 앞에서 모자란 두 손으로 낑낑거리는 그를 대신해 이번에도 오이카와는 다가가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또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 그는 카운터 앞에서 복숭아 향이 가득한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얼음 가득한 컵을 목줄 쥔 손으로 받아드는 그를 피해 옆 카운터에서 오이카와 역시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그렇게 나란히 스트로우를 물고 다시 걸었다. 자신의 발걸음 소리를 완벽하게 죽인 채로 오이카와는 계속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를 따랐다. 가끔 넘어질 뻔한 그를 붙잡아 주거나 달려드는 차에게서 구해주거나 혹은 그의 앞에 놓인 쓰레기 더미나 돌멩이를 치워주며 따랐다. 그때마다 달라붙는 미소와 감사하다는 인사는 결코 질리는 법이 없었다. 


한참을 걸어 사내는 공원에 도착했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그의 산책의 마지막 목적지였다. 푸르른 냄새가 가득 찬 길을 따라 걸어 공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분수대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항상 애용하는 벤치에 앉아 짐들을 내려놓고 음료 때문에 젖은 손을 쓱쓱 옷에 닦아내며 자리를 잡았다. 개는 나른하게 앞발을 쭈욱 뻗으며 그의 발치 아래에 뜨뜻하게 배를 대었다. 적어도 한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이 공원을 맛보는 그를 알고 있는 오이카와는 서둘러 옆 벤치에 앉아 가지고 온 드로잉북을 펼쳤다. 이미 사용한 페이지에는 사내의 모습이 한가득 그려져 있었다. 군데군데 옷차림이라던가 그날 든 짐들의 양이 다르긴 했지만 대부분은 똑같은 얼굴들이 빼곡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것들을 휙휙 넘겨 새 장을 펼친 오이카와는 주머니에 넣어 왔던 연필을 들고 천천히 선을 긋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분수대의 요란한 물소리에 섞여 심이 그어대는 소리가 울렸다. 틀린 부분은 뭉툭한 지우개로 밀어 지워냈다. 그의 옆 모습, 나른한 개, 스트로우를 문 입술, 햇빛을 받는 얼굴. 빠르고 간결하게 스케치를 하니 금세 사내의 모습이 여러 개 하얀 종이 위를 수놓았다. 다음으로 얼음 컵을 쥔 방울 맺힌 손을 그리려는 찰나, 사내가 움직였다. 멀리 가는 것은 아닌지 움직임을 눈치챈 개는 슬쩍 감고 있던 눈을 뜰 뿐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저기요."



사내가 목소리를 내었다. 오이카와는 누굴 찾는가 싶어 공원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으나 애매한 시간 덕분에 근처에 사람이라곤 그와 자신밖에는 없었다.



"그쪽이요. 방금 이렇게 휘휘 살펴봤죠?"



사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저요? 오이카와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찍어 보였다. 네, 그쪽이요. 감은 눈을 한 그가 천천히 돌아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여러 번 감사했어요."



더듬더듬 넘어지지 않게 벤치 끝을 문지르며 사내가 다가왔다. 오늘도, 그리고 여러 번이라. 이미 자신이 스토커처럼 따라 붙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그는 그렇게 말했다. 뭐 하는 사람이에요? 스토커예요? 기분 나쁘게 왜 사람을 따라다녀요? 그렇게 따질까 오이카와는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그런 모진 소리 대신 털썩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며 웃었다. 



"그쪽이 다가오면 흑심 냄새가 나요."
"..."
"그러니까 그 흑심(黑心)이 아니라, 연필심이요. 연필 흑심 냄새. 그림 그리는 사람이죠? 분명 손은 까맣게 물들어 있을 거야."



사실 그 흑심(黑心)도 맞는데. 오이카와는 속으로 중얼대며 제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방금까지 그를 그리는 터라 엉망으로 물든 손이 펼쳐져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어요."



사내는 중얼대듯 말했다. 



"하나를 잃으니 다른 것들이 예민해져서요. 그래서 제 산책길에 항상 그 흑심이 따라붙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는데, 딱히 나에게 해를 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구나는 걸 알아서요."



예민하다는 말과 함께 그가 자신의 귀와 코를 두드렸다. 청각과 후각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래도 말없이 누군가가 산책길에 끼어든다는 것은 편하진 않네요."



미안해요. 오이카와는 속으로만 사과했다. 



"내일부터는 같이 해요. 매일같이 절 도와주고 제 산책길에 동행해줘요. 그럼 그 대가로 그림을 그리게 해줄 테니까."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는 톡톡 오이카와 손에 들린 스케치북을 두드렸다. 자신이 그를 훔쳐 그린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전 스가와라 코우시라고 해요, 저쪽에 있는 우리 개 이름은 맥스. 그쪽은요?"



스가와라 코우시, 스가와라 코우시. 처음 듣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몇 번이고 불러 뱉으며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버젓하게 존재하는 자신의 이름도 알려주고 싶은데 열린 입술에서는 숨소리만 흐를 뿐 소리가 나타나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오이카와는 그의 작은 손에 제 연필을 쥐여주었다. 그리곤 서둘러 더러운 손을 셔츠 자락으로 대충 문질러 닦은 후 손 위를 덮어 쥐었다. 살짝만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종이 위로 이끌었다. 그리곤 한 자 한 자 함께 적어내렷다. ㅇㅗㅇㅣㅋㅏㅇㅗㅏㅌㅗㅇㅗㄹㅜ. 나열 대는 글자들을 머릿속에 그려 넣는지 진지하게 따라 움직인 그가 움직임을 끝내며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맞아요?"



끄덕, 고개를 움직이자 "오, 맞췄다."라며 그가 아이처럼 웃었다. 



"그럼 내일부터는 우리 함께 산책해요. 오이카와군."



아까는 한 번, 이번에는 여러 번. 오이카와는 그의 다정한 제안에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들이 빛을 받아 그의 이마 근처에서 아롱대었다. 오이카와는 그 그림 같은 풍경에 손을 뻗어 그가 눈부시지 않게 손바닥으로 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내일부터 기대되네요. 작게 웅얼대며 웃는 그의 말에 오이카와도 기쁘게 웃었다.


보이지않는 만큼 예민한 스가와라 코우시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이 산책길이 어느새인가 사랑의 형태를 띄우고 있다는 것을. 따라붙는 시선과 도움에 애정이 서렸다는 것을. 아마도 알아주었기 때문에 못난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게 분명했다. 


그 기쁜 마음을 담아 오이카와는 조심스레 아직 연필을 쥔 그의 손을 다시금 잡아 종이로 내렸다. ㅈㅏㄹㅂㅜㅌㅏㄱㅎㅏㅂㄴㅣㄷㅏ. 서걱서걱 내려가는 글씨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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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안보이는 스가와 말을 못하는 오이카와의 한가로운 스토커질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