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카나] 그날의 스캔들
2019. 6. 10. 19:42

불쑥, 불청객처럼 그런 날이 찾아오곤 한다. 뭘 해도 안 되는 날. 달력에 X를 그려 넣고 싶은 날. 츠키모토 리에는 오늘이 그런 날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거울을 깨 먹고 눈앞에서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지각 확정, 하필 버스가 시간을 지키지 않았고 겨우 출근했더니 엘리베이터는 고장, 달려 사무실에 도착하니 늘 늦던 과장의 얼굴까지. 거기까지면 좋았을 텐데 일하다 보니 눈에 들어온 찢어진 스타킹에 멀쩡하던 커피머신까지 고장. 되는 일이 없으니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은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생전 안 하던 지각으로 운 없이 과장에게 찍힌 게 안타까웠는지 옆자리 사수가 슬쩍 내민 초콜릿 바가 그나마 행운이랄까. 하지만 이미 지친 기분엔 당분도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우걱우걱, 초콜릿을 씹어 삼키며 이대로 무탈하게 시간이 흘러 오늘이 빨리 끝나버리길, 츠키모토는 쌓인 업무 리스트 속에서 빌었다.




[지금 트위터 봤어?]






하지만 불운은 계속 이어질 모양이었다. 휴대폰이 반짝이며 날아온 라인 메시지에 츠키모토는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발신인은 히가시 유코, 4년 동안 함께 아이돌 '언데드'를 응원하고 있는 동지였다. 한창 일하느라 바쁠 시간, 트위터를 봤냐는 그녀의 다급한 메시지는 오늘 일어난 어떠한 일보다 더 절망스러울 것만 같아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빠르게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난리 났어. 카오루 홈마들 레스트 걸고 개판이야.]




홈마, 홈 마스터의 줄임말로 연예인들의 고화질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여 홈페이지에 올려주는 사람들로 팬덤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좋아하는 스타들을 뒤쫓으며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리고 자주 닿아있는 그들은 멋진 사진 실력으로 빠르고 아름다운 작품을 올려주며 팬들의 목마름을 채워주곤 했다. 그런 그들이 레스트, 휴식이라는 표현으로 홈페이지를 닫는다는 건 아주 중요한 사고가 터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야? 왜?]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츠키모토는 휴대폰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온몸을 뒤흔들었다. 꼴깍, 침을 삼키며 빠르게 화장실로 걸었다. 아무도 없는 내부를 확인한 후, 가장 끝 칸에 들어가 앉았다. 오전에 버려놓은 스타킹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몰라, 어제 새벽부터 다들 의미심장한 말 남기더니 갑자기 난리났어.]




유코에게 더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서둘러 트위터에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트위터 속 세상은 아비규환이었다. 대충 훑기만 했는데 모두가 갑작스러운 휴식 선언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자신에게 연락해온 유코의 계정도 있었다. 그리고 츠키모토가 가장 좋아하는 홈마의 계정인 '너의 민들레'의 메시지 역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너의 민들레(@yellow_tampopo) : 널 위해 끊임없이 달려왔어. 오직 너만 보고, 네 빛나는 무대를 위해서. 나는 그 달리기가 함께인 줄 알았는데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두고 달리는 건 우리뿐이었어.]
[너의 민들레(@yellow_tampopo) : 4년, 우리는 이 시간을 겨우 혹은 이제라고 부르는데 넌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하다. 작년 3주년 콘에서 10년, 20년 함께 하자고 했던 네 말, 진심이긴 했니?]
[너의 민들레(@yellow_tampopo) : 아니, 아니라는 거 알았어. 알았는데 그래도 믿고 싶어서 참았어. 재계약 1년 앞두고 이러는 거 진짜 너무하다.]
[너의 민들레(@yellow_tampopo) : 미래를 그리는 건 우리뿐이었어? 다른 언데드 맴버들은 생각도 안 하지?]




쏟아지는 원망의 말들은 정확한 형태가 없어서 파악이 어려웠다. 도대체 다들 왜 이러는지, 어제 잠들기 전가지만 해도 곧 있을 새 앨범 발매에 다들 들떠 있었는데.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쓸어 넘기며 쭉쭉 피트를 아래로 내렸다.




[ㅇ루ㅏ알;을ㄴ;ㅏㄹ]




그리고 화면 위로 유코의 메시지 창이 떴다. 엉망인 메시지와 함께 링크 하나가 달려있었다. 제발, 제발. 뭘 비는지도 모르면서 츠키모토는 서둘러 링크를 눌렀다.




[언데드 하카제 카오루, 유성대 신카이 카나타와 밀애]




인터넷 기사의 굵은 타이틀을 읽어내리며 츠키모토는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짧은 순간, 스캔들이며 음주운전 혹은 폭행 시비 안 좋은 일을 다 떠올렸다. 게 중에서 그나마 나을 거 같았던 첫 번째 예상이 들어맞았지만, 상대가 너무 뜻밖이라 말도 안 나왔다. 누구? 누구라고? 유성대 신카이 카나타? 유성 블루인지 뭔지, 걔?! 비명이 터져 나올 거 같은 입을 틀어막고 츠키모토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모자에 선글라스 마스크를 쓴 사내와 그 사내를 잡아 이끄는 익숙한 얼굴이 화면에 가득했다. 목 뒤로 기른 머리는 가볍게 묶고, 한 손에는 익숙한 지갑에 자주 입는 발렌시아가 티셔츠. 블랙진을 감싼 워커는 얼마 전, 어떤 팬이 그에게 선물했다고 올렸던 입생로랑의 것이었다. 사진을 더 보지도 못하고 츠키모토는 서둘러 주소록을 열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봤어?!"




흥분이 가득 담긴 유코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봤어. 이게 뭐야? 스캔들이라고? 유성 블루 걔랑?"

-"어. 유성대 팬덤은 어제부터 난리였데. 소속사에서 막으려고 하는걸 유성대 팬덤이 먼저 터트렸나 봐. 거기도 지금 난리도 아니야."
"아 잠깐. 유코 나 토할 거 같아. 이게 도대체..."
-"미친 거 아니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얼굴 다 내놓고 다니는 거야? 저날 유성대 1위 하고 회식하던 날이라 더 난리야. 그런데 회식에 안 나가고 저러고 있었다고 다 뒤집어졌어."
"그게 뭐가 중요해!!"




츠키모토는 저도모르게 바락 소릴 질렀다.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유성대가 1위를 하든 말든 그건 자신과 상관 없는 일이었다. 신카이 카나타인지 뭔지가 회식이 나가든 말든 그것도 아무래도 좋았다. 그 팬덤이 박살이 났든 뒤집어 졌든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 하카제 카오루가 저 사진 속에 있는지, 왜 이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건지 그게 가장 중요했다.




-"내가 하카제 카오루 차 뽑을 때부터 알아봤다. 아니, 갑자기 자작곡이니 뭐니 하면서 사랑 타령 할 때부터 알아봤어."
"....바다 같은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할 때, 이름 우미(바다)로 바꾸겠다고 지랄했던 내가 미친년 같아."




데뷔 초기에는 팬들이 이상형이라는 립서비스를 하다가 그 뒤론 그때그때 미인인 여배우, 그 후에는 해외 여배우였다. 하카제 카오루의 이상형은 늘 그랬기에 불안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언제였지, 작년인가. 바다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심장이 철렁했다. 노선이 달라져서 혹시나 싶었다. 유코와 함께 술을 마시며 시적이네 어쩌네 웃으며 괜한 불안감을 털어내며 이름을 바꾸겠다고 농을 쳤다. 하카제 카오루와 연애를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으나, 자신의 별이었으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게 우리이길 그리고 무대이고 언데드이길 바랐다. 그런데 앨범과 재계약을 앞두고 스캔들이라니, 심지어 동성 스캔들. 모든 게 배신처럼 느껴졌다.
동성 스캔들이 국내에서 처음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시부야를 시작으로 일본 곳곳에서 동성 커플 인정제가 실시되면서 한 중년 배우가 성향을 밝히기도 했고 실제로 여배우 커플도 나와 한동안 쇼 프로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었다. 직장 내에도 몇 명 밝힌 사람이 있어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 일이 되니 마음이 달라졌다. 거기다 2년 전, 이런 식으로 스캔들이 난 아이돌이 있었다. 이상한 소문만 무성히 돌다 결국 은퇴하고 사라졌다. 그걸 지켜본 입장으로서 아무리 좋은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가능할 거 같지 않았다.




-"아 소속사 입장 떴어."
"...뭐래?"
-"아니래, 절친한 친구 사이라 일어난 해프닝 같다고... 같이 술먹고 운전 하기가 그래서 잠깐 호텔에서 쉬고 나온 거라는데...."




유코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뒷 말을 알 거 같았다. 그래서 이걸 믿어야 해, 말아야 해. 하지만 믿고 싶었다. 소속사가 아니라고 하면, 하카제 카오루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였다. 그래야만 했다.




"아니라잖아. 그럼 됐어."
-"..."
"된 거야. 난 카오루 믿어."




그의 이름, 나이, 키, 몸무게, 허리둘레, 발 사이즈, 손가락 사이즈, 별자리,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 존경하는 뮤지션, 타고 다니는 차, 사는 동네 등등. 모든 것이라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건너편 데스크 사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를 믿는 거 외에는 츠키모토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까지 그거 말고는 해 본 적이 없어서 뭘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반듯하게 고정했던 머리카락이 어느새 눈가에서 나풀댔다. 쏟아지는 한숨을 애써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며 통화를 종료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다행히 점심시간으로 자리들이 비어있었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츠키모토는 출구 대신 제자리에 앉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오후에는 어떻게 업무를 진행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몸을 움직였다. 모든 신경은 휴대폰에 쏠려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곤 평소보다 더 바쁘게 굴었다. 하지 않아도 될 휴지통까지 비워내며 오로지 일이라는 행위에만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잊고 지내다 퇴근 즈음 확인하면 모든 게 정리되어 있을 거라고 믿으며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그 바람과는 달리, 회사 건물을 나서기 무섭게 확인한 트위터는 더 난장판이었다. 각 팬덤에서 쉬쉬하고 있던 일화들이나 목격담,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엉망진창이었다. 유코에게서 온 메시지는 100개를 넘어서 있었다. 츠키모토는 가만히, 평화로운 퇴근을 맞이하는 사람들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나란히 공원에서 찍힌 사진, 라디오 스케줄을 끝낸 신카이 카나타를 마중나온 하카제 카오루의 차, 유성대 소속사 근처에서 봤다는 목격담, 개인 작업실 겸 독립을 위해 매매했다고 한 하카제 카오루의 맨션을 밥 먹듯이 드나들었다는 신카이 카나타, 작년 여름 화보 촬영으로 갔던 하와이의 일정이 신카이 카나타의 개인 여행 일정과 비슷하다는 거나, 데뷔 전부터 끼고 다니던 반지가 실은 신카이 카나타의 목걸이에 걸린 것과 동일하다는 증거 등등이 쏟아져 나왔다. 친구라서 둘이 절친해서라는 이유로 웃으며 넘겼던 것들이 실은 친구가 아닌 연인 사이의 뜻이었고 메시지였다는 거에 웃음이 나왔다. 그래, 더 친하게 지냈다는 사쿠마 레이랑도 안 가는 수족관을 질리도록 카오루와 뻔질나게 드나들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지. 피드를 내리고 내려도 그리고 새로 고침을 해도 쏟아지는 새로운 이야기들에 더는 버틸 수가 없어 츠키모토는 근처 벤치를 차지하고 앉았다. 심지어 다시 당겨 내린 피드에는 하카제 카오루의 비공개 계정까지 해킹되어 올라왔다. 언데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SNS를 하지 않았던 거치곤 꽤 정성 있는 피드에 대상은 오로지 한 사람뿐이라 몇 시간 전 발표한 입장 발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미친.."




있지, 카오루. 이게 다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보다 빛나길 바랐던 너의 미래가 무너지는 걸 보면서도 널 응원해줘야 할까.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널 그냥 지켜보며 버텨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이대로 끊어내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쉽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으면 벌써 그랬을 텐데, 그걸 못해서 4년을 넘게 그와 함께 달렸다. 아 모르겠어. 츠키모토는 가늘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바라는 건 언제나 하카제 카오루의 행복인데, 그가 그렸던 행복과 자신이 그린 행복이 달라 슬펐다. 같은 곳을 보며 함께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이제 남아버린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 츠키모토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당장은 이 마음도, 하카제 카오루도 버릴 수 없다는 사실.




[와, 진짜 충격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자 아이돌하고 그렇게 스캔들이 나더니 뒤에서는 남자 만나고 다녔네, 징그러워ㅋㅋㅋㅋ]




쏟아지는 기사의 댓글을 읽어 내려가며 늘 그렇듯, 답글 버튼을 눌렀다. 아직은 하카제 카오루와 함께 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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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런.. 시리즈가 쓰고 싶어따...

츠키모토는 [거울이나 봐라. 니 얼굴이 더 징그러움ㅇㅇ] 이라고 댓글을 답니다.